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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 2014

‘공교육 정상화’ 취지 살리려면 고교엔 시행 유예해야

선행교육 규제법

  • 이범 │교육평론가 yibohm@daum.net

‘공교육 정상화’ 취지 살리려면 고교엔 시행 유예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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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학생 선발 규제할 법률적 근거 마련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대입 자율화’의 흐름 곳곳에 브레이크를 건다. 최근 수개월 동안 교육부는 새 대입제도의 골격과 보완정책을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대학의 선발 자율권을 직접 제약하는 요인이 적지 않다. 우선 지나치게 복잡한 대입 전형이 수능 위주 전형, 논술 위주 전형, 학생부 교과 전형(내신성적 위주 선발), 학생부 종합 전형(입학사정관제), 실기 위주 전형(특기자 전형 포함)의 5가지로 단순해진다. 또한 학교 밖에서 얻은 스펙(상장이나 성적표)을 제출하는 게 금지되며, 심지어 자기소개서에 이러한 내용을 기재하면 0점 처리된다. 여기에 더해 선행교육 규제법을 통해 대학별 고사(논술, 구술면접 등)에도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물론 대입 선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그동안에도 계속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3불 정책’(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금지)을 유지했고, 이명박 정부는 ‘대입 자율화’의 이면에서 본고사를 막고 입학사정관제를 확대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대학에 관여했다. 이러한 간섭은 모두 법률적 근거 없이 행정력과 정치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반면 선행교육 규제법은 정부가 대학의 학생 선발을 직접 규제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확고히 했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입정책이 이전 정부와 달라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선행교육 규제법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이 법이 ‘현행 교육과정 자체는 합리적’이라는 가정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국가 수준 교육과정과 이에 근거한 학교 교육과정은 과연 합리적인가? 예를 들어 ‘한글 읽기’는 초등학교 1학년 교육과정에 편성돼 있긴 하지만, 불과 4주 만에 끝내게 돼 있다. 만일 한글 읽기를 전혀 선행학습하지 않은 학생이라면, 과연 4주 동안 한글 읽기를 제대로 익히는 게 가능할까?

한편 영어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할 때 그 수준이 급속히 올라간다는 지적이 많다. 이 역시 ‘선행학습을 해야겠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다. 현행 교육과정에 이런 문제점이 적지 않게 엿보인다.



선행교육 규제법이 시행되면 고등학교가 혼란에 빠질 우려도 있다. 현재 공식 고교 교육과정은 수능을 고려하지 않고 3학년 말까지 진도를 나가는 걸 가정해 마련돼 있다. 많은 사람이 ‘입시 교육’ 때문에 한국 교육이 황폐해진다고 주장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작 공식 교육과정을 만들 때 ‘입시(수능)’를 고려하지 않고 그 분량과 속도를 정하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입시(SAT나 ACT) 준비를 해주지 않는 미국의 고교 교육과정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수능 대비 문제풀이를 학교에서 해주지 않으면 큰 혼란이 벌어지고 사교육비가 급증할 것이다.

특목고·자사고, 수능 준비 합법적 ‘과속’ 우려

따라서 고교에서 공식적인 교육과정과 실질적인 교육과정에 괴리가 나타나는 건 불가피하다. 수학을 기준으로 보면, 3년 과정의 수학 진도를 후딱후딱 나가서 3학년 1학기 중엔 마쳐야 한다. 그래야 11월에 치르는 수능에 대비해 문제풀이 훈련을 할 시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행교육 규제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라고 지시하면, 고교에선 학생들의 수능 준비에 제대로 도움을 주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하지만 일부 고교는 이런 난관을 합법적으로 피해갈 수 있다. 특목고·자사고 등은 초중등교육법상 ‘자율학교’로 지정돼 있어 교육과정 편성에 상당한 자율성을 지닌다. 이런 자율성을 활용해 국·영·수의 수업시수(時數)를 크게 늘려놓은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일반고에서 1학년 1년 동안 배우는 수학 진도를 1학년 1학기에 끝내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분명한 과속이요 선행교육이지만, 빠른 진도에 상응하는 충분한 시수를 확보해 만들어놓은 ‘공식 학교교육과정’을 따른 것이므로 전혀 불법이 아니다. 선행교육 규제법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뜻밖의 결론에 도달한다. 선행교육 규제법을 엄격히 적용할 경우, 일반고는 수능 준비에 심각한 곤란을 겪게 되고, 특목고·자사고는 합법적인 ‘과속’ 진도를 통해 수능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참으로 황당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선행교육 규제법은 현재 우리나라 공교육이 가진 고질적인 난점을 극명히 보여준다.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입시 준비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돼야 하는가. 고교에서 ‘정상적인 공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중요한 물음에 대해 교육당국은 제대로 된 답변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고교의 경우 선행교육 규제법 적용을 일단 유예하고,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기 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초등학교·중학교 교육과정도 이번 기회에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합리적으로 재조정해야 할 것이다.

신동아 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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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 │교육평론가 yiboh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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