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남긴 1600편가량의 한시는 당송(唐宋)의 문장가와 견줄 만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후대의 선비들은 김인후의 학문과 문장뿐 아니라 절의(節義)와 도덕 또한 흠모했다.
현종은 어필(御筆)로 직접 현판을 써, 김인후를 제향하던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소재) 편액(扁額)을 내렸다. 김인후의 됨됨이를 가장 높이 평가한 이는 정조였다. 김인후를 문묘(文廟)에 배향해 ‘동국 18현’의 한 사람이 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의 문집인 하서집(河西集)을 증보 편찬하기 위해 내탕금(內帑金, 조선시대에 내탕고에 넣어두고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을 하사했다.
김인후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 조선의 성리학계를 이끌었다는 게 당대의 평가다.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된 천명도(天命圖)에 관해서도 탁견을 제시했다. 천인(天人) 관계를 도해한 천명도는 정지운(鄭之雲)이 그린 것인데, 김인후가 이를 대폭 보완 수정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쳤다. 이황도 그 논의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의 심오한 토론은 뒷날 사칠논변(四七論辯,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
그 스승에 그 제자들
김인후는 지조가 높기로도 유명했다. 문과에 합격해 중종의 조정에 나아가기 무섭게, 그는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의 복권을 발의했다. 당시엔 그런 논의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그러나 김인후는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사림의 무죄를 주장해 한 시대의 도덕과 정론을 바로 세웠다.김인후의 절조는 인종과의 관계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젊은 시절 그는 동궁(훗날의 인종)의 사부로 임명돼 신망이 두터웠다. 동궁은 그의 학문과 충성심에 감동해 주자(朱子)의 ‘성리대전’을 하사했고, 친히 대나무 그림까지 그려줬다.
동궁은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곧 승하했다. 복잡한 궁중 사정이 젊은 왕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런 연유로 김인후는 벼슬에서 물러났고, 그후 인종을 추모하며 그의 신하로서 의리를 다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해마다 인종의 기일(忌日)이 되면 고향의 조용한 숲 속에 들어가 온종일 목 놓아 통곡했다. 명종은 여러 차례 벼슬을 주며 그를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는 인종의 충신이었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수업한 김천일과 고경명 등은 나라를 위해 떨쳐 일어섰다. 이른바 호남 의병의 대다수는 김인후가 초야에서 기른 선비들이었다. 세상은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라며 그들을 칭송했다.
“비참하기 그지없어라…”
사람들은 이렇듯 강직한 김인후가 집에서도 엄격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을 것이라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누구보다 인정 많고 관대한 아버지였다. 이따금 아내와 술잔을 건네며 시를 교환하는 다정다감한 남편이기도 했다.김인후는 윤씨부인에게서 3남4녀를 얻었다. 아들로는 장남 김종룡과 차남 김종호(찰방), 그리고 요절한 셋째아들이 있었다. 네 딸 중에서 셋은 장성해 각기 조희문(부사), 양자징(현감), 유경렴(찰방)과 결혼했다. 한데 막내딸은 1545년 7월, 열세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막내딸이 요절하자 김인후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만사 하릴없다, 관 뚜껑 덮고 누워 괴로워했네. 병의 뿌리 깊었던가, 여러 해 동안 약을 구하기 어려웠네. 거센 바람 궂은비, 처음 염하던 그날, 처진 나물 찬 과일로 넋 보내는 상 차렸다네. 훨훨 타는 매운 불꽃, 집에 뻗쳐 놀랐다오. 이후로 이내 몸엔 온갖 병 더하기만.”
막내딸이 세상 떠나던 날은 날씨도 궂었다. 어린 딸을 잃고 한없는 슬픔에 젖은 그는 딸의 무덤 앞에서 오열을 참지 못했다.
내 딸이여 내 딸이여, 마음과 몸 맑았도다.
심기조차 아름다웠어, 단아하고 성실했지.
갓 자란 난초, 티 없는 구슬
빈산에 널 묻다니,
봄이 와도 모르겠네.
죄 없는 너 보내놓고 (난) 이 지경이 되었구나.
백 년이 가도 원통치
내 억장이 무너지네.
어허라! 세 번 노래하니
노래도 구슬프네.
하늘 보고 목 놓아 우노마는
하늘은 묵묵부답이시네.
-하서집 1권 566~567쪽
막내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유독 깊었다. 딸과 영결한 지 2~3년이 지난 뒤에도 슬픔은 줄지 않았다. 김인후는 탄식했다. “내 딸 세상 뜬 지 어느덧 삼 년, 해 넘겨 다시 오니 비참하기 그지없어라. 무덤가의 가벼운 바람, 얼굴을 스치네. 내 딸의 넋, 정녕코 바람 속에 엉겨 있으리.”(하서집 2권 26~27쪽)
눈물 마를 날 없어
그 일이 있기 전, 김인후는 막내아들도 병으로 잃었다. 그때도 여간 슬퍼하지 않았다.석 자 키에 두어 치 관 두께라니. 북망산 바라보니 눈이 늘 젖도다. 가련할 손 사람의 일, 슬퍼한들 무엇하랴. 야속한 하늘의 뜻, 믿기조차 어렵네. ‘동야의 울음소리’(당나라 시인 맹교가 세 아이를 연달아 잃은 일) 목메어 차마 못 듣겠네. ‘퇴지의 제상 차림’(시인 한유는 딸을 잃었음) 헛되고 처량해라. 책상머리 저 서책은 평일의 흔적일래, (내 아들아) 그림자라도 부질없는 꿈길에 나타나주렴.
-하서집 2권 659쪽
아들과 딸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누가 알 것인가. 그 슬픔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자식 잃은 사람, 그 슬픔 어이 견디리. 내 일찍 겪은 일 있어 아노라. 눈물이 손수건을 적시네.”(하서집 1권 70쪽) 뒷날 김인후는 친구가 자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전근대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았다. 몽테뉴(1533~1592)도 두세 명의 자녀를 잃었다고 한다. 그때는 산모의 치사율도 높았다. 16~17세기 프랑스에선 산모 1000명 가운데 40명쯤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할 정도였다. 김인후에게도 이런 액운이 닥쳤다. 그의 둘째딸이 첫아이를 낳고 탈이 생겼다.
“의원은 용렬하고 무당은 요망하여”(하서집 3권 111쪽), 그는 딸도 외손자도 모두 잃었다며 탄식했다. 조선시대엔 약을 써도 효과가 없으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들 무당의 단골이었다.
김인후는 둘째딸의 때이른 죽음을 서러워하며 “태어나자마자 (네가) 이미 착한 줄 알았고, 또 곧은 성품”임을 알았다며 슬퍼했다. 잃어버린 외손자에 대해서도 “(네) 울음소리 우렁차서 문밖까지 들렸는데…”(하서집 3권 111쪽)라며 한숨을 쉬었다.
근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엔 연령과 성별의 구분 없이 어디에나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그리하여 김인후와 같이 자애로운 가장의 눈가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딸들 교육에도 열성
김인후의 딸 사랑은 사위에 대한 무한 사랑으로 번져간 것일까. 그는 둘째사위 양자징을 유난히 아꼈다. 양자징의 부친인 소쇄옹 양언진은 김인후의 막역한 벗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세교(世交, 대대로 맺은 교분)’가 있는 집안이었다. 그 시절엔 자녀의 결혼에서 그런 집안을 선호했다. 김인후는 셋째딸도 지기(知己)인 미암 유희춘의 며느리로 보냈다.인생엔 예기치 못한 풍파가 있는 법이고,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김인후의 둘째딸이 첫아이를 낳고 곧 세상을 떠난 뒤 셋째딸에게도 액운이 닥쳐 시아버지 유희춘의 귀양살이가 10년 넘게 이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김인후는 사랑하는 셋째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내 친구(유희춘) 북방에 갇혀 있구나. 네 지아비(유경렴)는 만리 길 멀다 않고 따라갔다 하니. 가을바람 으슬으슬 끝없는 (내) 걱정, 들국화 술잔에 어리어 비치누나.”(하서집 1권 729쪽)
유희춘은 을사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종성에 유배됐다. 그 아들로 김인후의 사위 유경렴은 부친을 시봉하러 그곳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시가에 남아 홀로 애를 태우고 있을 셋째딸을 걱정하며 아버지는 눈물지었다.
김인후의 딸들은 한시를 짓고 한문 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내 윤씨 역시 한문에 밝았다. 안사돈 송덕봉은 명사(名士)이기도 했다. 그들 집안의 교육열은 여성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 시대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양반 가문에선 딸에겐 한글을 가르쳐 정성이 담긴 안부 편지를 쓸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만족하는 게 보통이었다.
또 하나, 우리가 잘 모르는 관행이 있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신혼인 딸과 사위가 친정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 부계 위주의 종법이 뿌리를 내려 아들과 며느리가 부모를 받들며 사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16세기 인물 김인후의 경우도 그러했다. 신혼이던 둘째딸과 그 배우자 양자징이 한동안 김인후 내외를 시봉했다. “(둘째딸) 내외는 병든 나를 참으로 정성껏 보살폈소”(하서집 1권 727쪽)라고 말할 정도였다.
1548년부터 1550년까지 김인후 내외는 순창에 머물렀다. 그들은 큰아들 김종룡 내외에게 본가인 장성의 대맥동을 지키게 했다. 그러고는 싹싹한 둘째딸 내외를 데리고 갔다. 둘째아들 김종호는 당시 미혼이었다. 나중에 김인후 내외가 장성 본가로 돌아온 뒤 김종호는 순창 적성면으로 장가들었다. 김종호도 상당 기간 처가에서 지냈다. “부디 가서 실가(곧 아내) 잘 돌봐주고, 배움에 힘써 무지를 다스리게.”(하서집 1권 405쪽) 김인후는 처가로 가는 둘째아들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했다.
큰사위 위해 청탁 편지


이것은 스승이신 하서 김 부자(부자는 큰스승, 곧 김인후)께서 소자에게 주신 것이다, 평생 그 은혜에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사모하는 마음 가눌 길 없어 (이 벼루를) 보배처럼 간직해왔노라. 어느 날, 일재 (이항) 선생이 벼루를 보시고 부러움에 젖어 말씀하셨다, ‘이 벼루는 벼루가 아니라, 바로 발우(불가의 공양그릇,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거니, 그대는 명심하시게.
김인후가 양자징에게 선물로 준 벼루는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양자징도 잘 알았다. “이 벼룻돌은 (중국) 단주 영양의 명품이라, 부드럽되 먹이 흐르지 않는다, 매끄러워 먹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하서집 3권 700쪽) 장인이자 스승으로부터 그 벼루를 물려받은 양자징은 평생 학문에 힘써 마침내 필암서원에 배향됐다(1786년).
김인후가 둘째사위를 아꼈다고 해서 큰사위 조희문을 박대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큰딸 내외도 끔찍이 사랑했다. “산 늙은이(곧 김인후) 잠깨어 일어나네. 창포 앞에 세수한다네. 동상(사위 조희문)의 웃음소리 기쁘게 들려오네. 잠깐 사이에 내 번뇌와 병, 한꺼번에 물러간다오.”(하서집 2권 187쪽) 조희문에 대한 사랑 또한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조희문은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의 벼슬길을 열기 위해 김인후는 고관이 된 옛 친구에게 청탁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때 김인후는 인종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조정의 거듭된 기용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도양양한 사위 조희문을 위해선 어려운 부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늘 위 그대(김인후의 벗) 살고, 나는 만산 가운데 누워있다네. (…) 시골 살림은 마을마다 해마다 곤궁하기 그지없다오. (…) 평생 두고 먹을 약을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조자(사위 조희문)로 말미암아 그게 될는지요.
-하서집, 2권 312쪽
이 편지에서 김인후는 산림에 묻힌 자신의 한가로움과 이미 고관 지위에 오른 서울 친구의 풍족함을 비교했다. 그는 시골 살림살이가 보잘 것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위 조희문에게 벼슬을 줄 수 있다면 자신의 말년이 평안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슬며시 암시했다.
“선비의 길로 정진하라”
물론 김인후도 잘 알고 있었다. 가문의 전통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과 손자를 통해 이어져야 할 것이었다. 이런 유교적 통념을 무시할 리 없었다. 그는 애지중지 키운 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짧고 분명한 가르침을 줬다.
뿌리와 가지는 기운이 서로 통한다네. 얼마나 근고하여 이 가풍을 세웠던고. 그대들은 공부하고 몸을 닦아 이어가야 하나니! 백공(온갖 기술자)도 대대로 기궁한다(부자가 이어나감)더라.
-하서집 2권 130쪽
먼저 그는 조상과 자손은 기맥이 통한다는 유교적 교훈을 명시하고, 선비 가문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고백했다. 그러고는 간절한 마음으로 두 아들에게 부탁했다. 부디 대를 이어 학문에 힘쓰라, 곧 선비의 길로 일로매진하라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실천에 힘쓴 도학과 절의의 길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말라며 간곡히 당부했다.
훗날 송시열은 김인후의 학문과 실천적 삶에 관해 이렇게 언명했다. “이 나라의 여러 큰 선비들은 도학, 절의, 문장에 저마다 등급의 차이가 있었다. 이 셋을 다 지니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아끼시어 하서 김 선생(김인후)을 내셨도다. 그분만이 이 셋을 모두 갖추셨다.”(하서집 3권 202쪽)
오직 선비의 길로 정진하라는 김인후의 훈계는 거듭됐다. 때로 그는 지극히 실천적인 계명을 줬다. “늘 말조심하고, 술조심하고, 성적 방탕에 빠지지 말라”(하서집 2권 142쪽)는 것이었다. 오직 주자와 정자의 가르침에 따라 성리학에 매진하라는 이념적 지향을 제시하면서도 일상의 사소한 언행에 방점을 찍었다.
이러한 훈계는 상당한 효과를 봤다. 김인후의 자손들(울산 김씨)은 선비 사회에서 차츰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고봉 기대승(행주 기씨), 제봉 고경명(장흥 고씨) 및 고산 윤선도(해남 윤씨)의 자손들과 더불어 호남 최고의 선비 가문이 됐다. 전통은 근대까지 쭉 이어졌다. 대쪽 같은 성품으로 삼권분립을 위해 노력한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언론·교육 및 경제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 수당 김연수 형제도 그 후손이다.
자녀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했던 아버지 김인후. 그가 세운 가문의 전통은 시대의 격랑을 뚫고 실로 오랫동안 유지됐다.
백 승 종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