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6-07-21 11:2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돈 주고 쌀을 쟁여놓는 것과 스스로 농사지어 쌀을 쟁여놓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쌀은 한 해가 지나면 묵은쌀이 된다. 쌀은 묵히지 않아야 한다. 생명 그 자체로 해마다 ‘새롭게’ 일궈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산골 다랑논. 조상의 숨결이 배어 있기에 아름다운 게 아닐까.

    나는 농사를 좋아한다. 농사 가운데 벼농사에 대해서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다. 논에 물을 가두고 못자리를 하고 나면 거의 날마다 논을 둘러본다. 그렇다고 논농사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기껏 500평 남짓 규모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로 시공을 넘나드는 세상에, 나는 여전히 손으로 모를 심고 낫으로 벼를 벤다.

    벼농사를 짓다 보면 문득 ‘내 몸 안의 유전자’를 느끼곤 한다. 우리 몸은 지난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몸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 자체라는 말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벼농사는 내 안의 유전자로 각인된 것 같다. 벼를 키우고 돌보다 보면 어느 순간 벼와 내가 한몸이 되는 걸 종종 느낀다.

    城主의 논두렁 사열식

    벼농사는 물이 기본이다. 산골 다랑논은 물 빠짐이 심하다. 논두렁이 높은데다가 돌이 많으니 물이 아래로 곧잘 빠져나간다. 이런 논에 물을 가두기 위해서는 로터리를 쳐 논흙을 곤죽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럼 물이 땅 속으로 덜 샌다. 그 다음엔 논두렁 바르기를 한다. 논물이 가장 많이 새는 부분이 논두렁이다. 두더지나 땅강아지 구멍은 물론, 사람 눈에 안 보이는 조그만 구멍이 논두렁에 많은데 이를 곤죽이 된 흙으로 다시 바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논에 물을 가두고 나면 내가 ‘성주(城主)’가 된 것 같다. 물을 가둔 논에는 온갖 생명이 자란다. 하루하루 커가는 올망졸망 올챙이. 물위에서 뱅뱅 맴도는 물매암이. 숨을 쉬기 위해 물위로 꽁무니를 내밀고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물방개. 물위를 사뿐사뿐 뛰어다니는 소금쟁이. 자세히 보면 이것말고도 많다. 동작은 느리지만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물장군. 이놈은 정말 ‘물의 장군’이라고 할 만큼 힘이 세다. 게다가 날카로운 앞다리에 뾰족한 주둥이를 갖고 있어 당할 자가 없다. 그밖에 사람이 싫어하는 거머리, 벼를 갉아먹는 물바구미. 이런저런 생명이 논에서 고물고물 움직인다.



    내가 이들을 모두 다스릴 만한 힘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내 논에서 자라니 내가 주인이다. 논에 물을 가두지 않으면 모두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신세들이다. 그러니 적어도 내 논에서만은 내가 ‘대장’인 게 분명하다. 더구나 우리 동네는 산골이라 논두렁이 높다. 어떤 논은 논바닥 폭이랑 논두렁 폭이 거의 같을 정도다. 그러니 이 논두렁에 서 있다 보면 성루(城壘)에 올라 있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나는 성주가 된다.

    모를 심은 뒤에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논을 둘러본다. 이 일이 내게는 하나의 의식이다. 이름하여 ‘논두렁 사열식’. 논두렁에 들어서면 벼가 가지런히 서 있다. 앞을 보고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 돌려 벼를 보면 누군가 구령을 붙이는 것 같다. “우로 봐!” 벼가 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논을 사열하며 벼가 잘 자라는지, 논두렁에 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살핀다.

    우리 논의 벼는 사람 손으로 심었기에 자로 잰 듯 반듯하진 않다. 그래도 그 나름으로 보는 맛이 있다. 모를 심은 사람마다 그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할까. 모내기를 함께 한 이웃과 식구 얼굴이 벼와 겹쳐 떠오른다.

    한곳에서 마감하는 일생

    논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또 어떤가. 해가 떠오를 때 논두렁을 걷다 보면 어떨 때는 무지개를 볼 수 있다. 해가 뜨면서 물안개가 논 위로 피어나고 그 물안개가 햇살과 만나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밭농사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논에서 보는 일몰도 바다에서 보는 일몰과는 다른 느낌이다. 고맙게도 이 해는 논두렁 사열 내내 나를 따라온다. 나를 경호하는 것 같다. 바람이라도 불면 찰랑찰랑 물결 따라 해가 일렁일렁 춤을 춘다. 내 몸도 출렁이는 것 같다. 가끔은 내가 논두렁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조차 깜박 잊는다.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논두렁을 바르고 논물을 가두는 것으로 한 해 농사가 시작된다.

    모내기가 끝나면 모는 이제 벼라고 부른다. 이 벼는 보름 정도면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린다. 활착(活着)이다. 노르스름 빛깔이 사라지고 푸르른 빛으로 싱그럽게 바뀐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이를 ‘벼가 깨어난다’고 한다. 옮겨 심은 벼가 뿌리를 제대로 땅에 내리면 이제 새로운 가지가 뻗는다. 분얼(分蘖)하는 것이다. 벼는 온도나 생육 상태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일주일에 하나씩 새로운 가지가 나온다.

    우리는 ‘뿌리내린다’는 말을 자주 쓴다. 직장에, 마을에, 지역에 뿌리내린다. 그만큼 식물의 뿌리가 갖는 의미가 깊다는 뜻이리라. 벼는 한번 심겨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다. 그곳에서 자신의 한해살이를 마감한다. 벌레가 와도 도망갈 수 없으니 자기 방식으로 버텨낸다. 병이나 벌레를 겪으며 벼 스스로 강인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가뭄이 들라치면 벼는 뿌리를 더 깊이 뻗는다. 그래서 논물 관리가 쉬운 곳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분얼이 한창 진행될 무렵 일부러 논물을 떼어 논바닥을 말려준다. 이를 간단관개(間斷灌漑)라 한다. 자연 상태의 벼가 갖는 야생성을 북돋워주는 것이다.

    벼가 무럭무럭 자라자 한 번은 그 뿌리가 궁금했다. 벼 한 포기 살며시 뽑으니 쉽게 뽑히지 않는다. 뽑히지 않으려고 반발하는 것 같다. 아하, 뿌리내리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구나. 조금 더 힘을 주니 뽑힌다. 오랜 뿌리는 흙빛에 가깝고 이제 막 새로 내린 뿌리는 하얗다. 그 싱그러움이 내 모습을 부끄럽게 만든다. 어디 멀리 가야만 새로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선 자리에서도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가 부럽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벼를 본다. ‘답답하지 않니? 너희는 어디론가 가고 싶지 않니?’ 떠나고 싶을 때 뿌리내리는 게 뭔지를 돌아본다.

    벼가 왕성하게 자라면 논에서 일출과 일몰을 보기 어렵다. 논 전체가 푸르러 벼 잎이 논물을 가리기 때문이다. 이제는 바람이 좋다. 바람결에 벼 잎이 살랑살랑 거리면 벼에게서 인사를 받는 기분이다. 저절로 내 입에서도 인사가 나온다. ‘잘 잤니? 잘 자라는 구나.’ 학창시절이나 군대 시절은 피사열자로서 솔직히 사열식이 내키지 않았다. 지금은 사열대 주인공이 되어 실컷 인사를 받아본다.

    논두렁은 내 몸의 허리

    그렇지만 성주라고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뭄이 든다거나 태풍이 오면 마음을 졸인다. 가뭄으로 논에 물이 마르기 시작하면 올챙이들은 물이 많은 곳으로 올망졸망 모여든다. 논바닥이 조금 낮거나 사람이 디딘 발자국에는 물이 제법 깊다. 이곳에는 올챙이가 그득히 모인다. 낮에는 왜가리, 밤에는 너구리라는 놈이 올챙이를 잡아먹기 위해 논을 마구 밟아 놓는다. 왜가리나 너구리에게 벼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면 성주라고 자부하던 나의 오만함도 무참히 짓밟힌다.

    논두렁의 두더지 구멍도 골치다. 두더지는 지렁이를 먹기 위해 곧잘 논두렁을 뒤집는다. 유기농이라는 이름으로 농사를 지으면 논두렁에 두더지가 더 극성이다. 밭에 있는 두더지 굴은 흙을 부드럽게 하는 구실을 한다지만 논두렁의 두더지 구멍은 아주 성가시다. 이 구멍을 며칠만 내버려두면 그 구멍으로 논두렁 흙이 물에 쓸려가 구멍이 점점 커진다. 급기야 논두렁이 터진다. 마치 거대한 연못이 작은 구멍 틈새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장마 때, 밤새 내리는 비와 두더지 구멍이 두렵다. 논두렁이 터지면 논주인 한 사람만 힘겨운 게 아니다. 아랫논 또한 고스란히 피해를 본다. 윗논이 터지면 논물과 흙이 한꺼번에 아랫논으로 휩쓸린다. 아랫논도 이를 견디지 못하고 덩달아 논두렁이 터진다. 이는 위아래 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산골 다랑논 전체에 연쇄적으로 퍼진다. 그러면 비상이 걸린다.

    논두렁이 터지면 그 여파는 곧장 내 몸에도 미친다. 논두렁이 터지던 해, 멀쩡하던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몇 달이나 그 아픔이 이어졌다. 가을걷이 끝나고 논두렁을 고치고 나서야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 논과 내 몸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강렬하게 이미지화하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무너진 논두렁을 다시 쌓으며 수천년 농사를 이어온 조상의 숨결을 느낀다. 논은 물을 가둬야 하니 수평이 기본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산허리를 깎아 논을 만들었으니 그 공력이 대단했지 싶다. 지금처럼 장비가 좋은 것도 아니고 대부분 사람 힘으로 논을 만들었을 것이다. 경사진 곳을 수평으로 만들자면 계단식으로 논두렁을 쌓아야 한다.

    흙으로만 쌓으면 쉽게 무너지기에 큰 돌과 잔돌, 그리고 흙을 적당히 채워가며 쌓아야 한다. 그러고는 물이 새지 않게 돌 사이를 흙으로 잘 채워야 한다. 그 다음 물 수평을 잡기 위해 논에 물을 조금만 가두고 높낮이를 맞춰 나가야 한다. 이와 동시에 논바닥에 밟히는 돌멩이를 다 주워내야 하는 것이다. 논두렁을 무너뜨리기는 쉽지만 다시 쌓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줄기가 짱짱한 모와 배리배리 모. ‘뿌리내리기’를 돌아보게 한다.

    벼꽃 결혼식

    그 과정에서 문득 수렵채집을 떠올려봤다. 만일 내가 원시 수렵 시절에 태어났다면? 삶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 같다. 나는 몸이 건장하지도 날쌔지도 못하다. 무리를 이끌 만큼 지혜롭지도 못하다. 그러니 많은 두려움과 배고픔을 겪었을 것 같다. 지금처럼 건강하게 수명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수렵에 비하면 논두렁이 터진 아픔이나 가뭄은 그래도 견딜 만한 것 같다. 피해가 있지만 생존 자체가 위협적이지는 않으니까. 무엇보다 다행인 건 또 다른 한 해가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게 희망이다.

    가뭄과 장마를 이겨내며 벼가 나날이 자란다. 논두렁 사열식은 벼꽃이 피면 절정에 다다른다. 사람이 결혼하듯 벼도 ‘결혼’ 한다. 암꽃과 수꽃이 만나 30분에서 한 시간쯤 식을 올린다. 벼는 7월말쯤 꽃이 피기 시작하는 올벼와 8월 하순 무렵에 꽃이 피는 늦벼가 있다. 한여름 해가 뜨거운 한낮, 사람은 지치기 쉽지만 논은 정반대다. 벼 잎은 뜨거운 태양을 향해 죽죽 뻗고, 벼꽃은 피어난다. 벼도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농사를 짓고 나서야 알았다. 벼꽃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날, 그때의 감동이란!

    한여름 뜨거운 볕

    이 논 저 논에

    푸르른 잎 사이

    연둣빛 이삭 패고

    벼꽃이 피어난다.

    보일 듯 말 듯 여린 빛

    아주 작은 꽃

    꽃 한 송이 쌀 한 톨

    꽃 한 다발 밥 한 공기

    벼꽃이 피어난다.

    이 시를 쓰고 나서부터는 벼꽃을 좀더 자세히 보았다. 벼꽃은 언뜻 보기에는 볼품이 없다. 꽃잎도 없고 그나마 오래 피어 있지도 않다. 연노란빛으로 밋밋하다. 그렇지만 ‘제 눈에 안경’이라고 했던가. 우리 밥이 되고, 생명이 되는 ‘목숨 꽃’이 아닌가.

    틈틈이 벼농사 관련 책을 보며 공부했다. 벼꽃은 하루 가운데 오전 9시쯤 피기 시작해, 11시쯤에 가장 왕성하게 피고, 오후 1시쯤이면 대부분 수정이 끝난다고 한다. 사람들이 결혼식 시간을 대부분 이때쯤으로 잡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벼꽃이 피는 시간이 달라진다.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가 찔끔찔끔 핀다고 한다. 날씨가 좋다면 벼꽃은 맑은 날 한낮에 대부분 핀다.

    책으로 배운 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농사일을 하기에는 너무 무더운 시간. 하늘에는 태양이, 땅에서는 복사열이 후끈후끈. 그래도 벼꽃이 피고 지는 걸 보려고 한낮에 논두렁으로 갔다. 벼꽃이 피었다가 지는 과정은 아주 느리게 이뤄진다. 좀 제대로 보자고 이삭 하나에 초점을 모았다. 바람이 분다. 벼 이삭이 흔들린다. 이삭 가운데 다시 벼 낟알 하나에 눈이 간다.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가뭄에 올망졸망 올챙이들이 숨을 할딱할딱하면 농사꾼들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짱짱한 수술, 보송보송 암술

    벼꽃은 피기 전에 껍질 두 개가 서로 붙어 있다. 전문 용어로 큰 껍질(외영)과 작은 껍질(내영)이다. 두 껍질이 서로 앙 다물어, 펴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그 껍질이 벌어진다. 그 사이로 수술이 먼저 보인다. 풀빛 껍질을 벌리고, 연노란빛 수술이 밀고 나온다. 점점 껍질이 벌어진다. 수술이 여섯 개다. 짱짱하게 수술이 선다. 신랑 입장!

    껍질이 제법 벌어지자 그 속에 뭔가 언뜻 보인다. 아, 저게 암술이로구나. 꽃가루를 잘 받을 수 있게 아주 작은 털이 보송보송하다. 벌어진 껍질 속을 자세히 보니 암술머리는 Y자 모양이다. 우리 주변에 피는 꽃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양이다. 마치 여성 자궁의 나팔관을 닮았다고나 할까.

    껍질이 벌어지는 순간, 꽃밥이 터져 꽃가루가 날린다고 한다. 하지만 맨눈으로 이를 보기는 어렵다. 너무 은밀한 것을 다 보려고 하면 안 되리라. 뜨거운 햇살, 산들바람이 수정을 도와주겠지. 나는 하객으로서 만족해야 한다. 눈을 감고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앉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러기를 10여 분. 수술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수꽃 자루가 점점 길어지며 아래로 축 처진다. 수술은 점점 힘없이 처지고, 벌어졌던 껍질은 서서히 닫힌다. 수정이 끝났나 보다. 암술은 보이지 않고 수술은 축 처져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드디어 큰 껍질과 작은 껍질이 다 닫혔다. 껍질이 벌어질 때보다 닫힐 때 더 느린 것 같다. 고요히 시작하고, 고요히 만나고, 고요히 끝나는 벼꽃 결혼식. 그러면서도 극적이다.

    논에선 거짓말이 안 통한다

    이제 껍질 속에서 쌀알이 여물어간다. 낟알은 날마다 조금씩 통통해진다. 얼마나 영글었나 만져보면 물렁하다. 아직은 쌀알이 아니라 즙에 가깝다. 이럴 때 노린재라는 놈이 나타나 즙을 빨아먹는다. 노린재는 모양이 징그럽고 냄새가 고약해 사람이 처치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약을 칠 수도 없고. 어서 나락이 영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이삭이 영글어가면서 벌레들이 꼬이기 시작한다. 벼 잎을 갉아먹는 메뚜기도 있고, 벼줄기 속을 갉아먹어 벼이삭을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이화명나방 애벌레도 나타난다. 그나마 이런 벌레는 드문드문 있어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이 위안이 될 뿐이다.

    논에 벌레가 많아지면 덩달아 거미도 많아진다. 긴호랑거미를 비롯 온갖 거미가 나타난다. 이른 아침에는 벼 잎 여기저기에 지어놓은 거미집에 이슬이 맺혀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거미는 밤낮으로 논을 지키는 훌륭한 보초다.

    거름이 충분해야 벼가 잘 자랄 것 같은데 거름이 너무 많은 곳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예전에 못자리만은 거름이 많아야 좋을 듯해서 조금 넉넉히 준 적이 있다. 그곳 벼는 갈수록 잎이 다른 벼보다 무성했다. 그러더니 벼가 익을 무렵, 벼 잎이 연필처럼 돌돌 말렸다. 잎을 펴보니 혹명나방 애벌레라는 놈이 그 안에 있다. 벼 잎을 돌돌 말아 그 속에 숨어서 잎 살만 먹는다. 벼 잎이 무성하니까 벌레가 먹기는 좋고, 벼끼리는 서로 경쟁이 심하니 병이나 벌레에 대한 적응력은 떨어진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벼가 광합성을 제대로 못하니 이삭이 충실하게 영글 수 없다. 날이 갈수록 벌레 먹은 부분이 또렷해진다. 멀리서 봐도 하얗다. 거름이 많은 곳이라는 걸 자로 잰 듯 한눈에 볼 수 있다. 논에서는 거짓말이 안 통한다.

    속이 상한 나머지 한두 번 애벌레를 잡기도 했지만 그 많은 벌레를 손으로 잡는 건 불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비바람이 거세게 불면 벌레 먹은 벼가 먼저 쓰러진다는 것이다.

    이삭이 부실한 벼가 먼저 쓰러지는 이유가 궁금했다. 쓰러진 벼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자세히 보니 이삭이 충실하게 영근 것은 빗물이 이삭에 묻어도 곧장 물기가 땅으로 떨어진다. 벼도 건강해야 다시 일어서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벌레가 먹거나 쭉정이가 많은 이삭은 낟알껍질 속까지 빗물이 고스란히 스며 이삭 줄기가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거름이 지나치게 많은 곳은 벌레만이 아니라 병에도 약하다. 논마다 거름을 고르게 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벼꽃이 필 무렵, 거름을 지나치게 준 곳에는 도열병이 나타난다. 붉은 점이 점점 번지는 병이다. 부랴부랴 목초액이랑 현미식초로 자연 방제를 하지만 별반 효과가 없다. 상태가 심해진다 싶으면 아예 낫으로 베어 태우거나 멀리 버린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논에서도 고스란히 들어맞는다.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벼꽃이 지기가 무섭게 노린재가 나타나 낟알의 즙을 빤다. 하얗게 보이는 게 수정을 끝낸 벼꽃의 수술.

    밥 한 공기의 밥알 수

    이렇게 농사짓다 보니 우리가 먹는 밥도 다시 보게 된다. 밥 한 그릇에 들어 있는 밥알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인가 ‘밥 한 그릇에 밥알이 몇 개나 들어 있나’가 궁금했다. 우선 밥 한 술을 떠 밥알을 헤아려보았다. 막상 해보니 밥알이 뭉쳐 쉽지가 않다. 하나씩 떼어내다가 포기했다.

    그렇다고 한번 생긴 호기심을 거둘 수는 없었다. 다시 틈을 보다가 한 가지 꾀가 났다. 거꾸로 해보는 것이다. 밥을 하기 전에 쌀알을 헤아리는 것이다. 쌀 한 공기면 밥 두 공기가 조금 더 된다. 쌀알 또한 한 그릇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내 머리는 쉴 사이 없이 굴러간다. 한 공기에 든 쌀알이 몇 숟가락인지를 헤아리면 되리라.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쌀알을 계산하니 밥 한 공기는 대략 2400알이다. 학교 다닐 때 산수 공부를 이렇게 했다면 참 재미있었을 텐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밥알을 계산하고 있다니. 나만 그런가 하고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나처럼 궁금해하는 사람이 뜻밖에 많았다. 어떤 사람은 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은 다음 물에 헹구어 헤아리면 쉽다는 정보를 올려놨다. 그 탐구심에 견주면 나는 아마추어다. 그런데 밥 한 그릇을 얼마나 많이 펐느냐에 따라 그 답은 천차만별이었다. 2000알에서 9000알에 이르기까지. 나만의 은밀한 취미(?)를 인터넷에서도 확인하니 이제 이를 당당히 밝히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밥 한 그릇이 되자면 어린 모를 몇 개 심어야 하는가? 벼는 품종과 날씨, 그리고 땅의 조건에 따라 분얼에 차이가 많다. 벼는 무더운 날씨를 좋아한다. 우리 산골은 5월초까지 서리가 내릴 정도다. 내 경험으로 우리 논에 벼는 분얼이 평균 7개 남짓이다.

    벼 이삭 하나에는 낟알이 100여 개 달린다. 그러니까 모 하나를 심으면 이삭이 일곱이 되고 총 낟알 수는 700알 정도. 모를 심을 때 한 번에 서너 개를 심는다. 모가 약하다면 4∼5개를 심기도 한다. 그리고 벼꽃이 핀다고 모두 다 충실하게 쌀알이 영그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걸 평균해보면 우리가 심는 벼 한 포기에는 낟알이 2000∼3000알 달린다. 벼 한 포기 땅에 꽂을 때마다 밥 한 그릇을 심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벼농사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곧잘 흥분하곤 한다. 아내는 내가 ‘벼농사, 벼농사’ 하며 노래 부르듯 이야기할 때마다 웬 호들갑이냐는 눈초리를 보낸다. 사실 내가 한 해 생산하는 쌀은 우리 식구 먹고 조금 나눌 수 있을 정도다. 이걸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되겠나. 돈 생각하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하지만 내게 벼농사는 아주 소중하다.

    우리 식구 먹을 양식을 내 손으로 장만하지 않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게 의식주다. 그 가운데서도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기본이 먹을거리다. 그리고 이는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가장 근본을 내 손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가을에 쌀을 쌀광에 그득 쟁여놓고 나면 얼마나 든든한지.

    손수 차리는 생일상

    돈 주고 쌀을 사서 쟁여놓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쌀은 한 해가 지나면 묵은쌀이 된다. 쌀은 묵히지 않아야 한다. 생명 그 자체로 해마다 ‘새롭게’ 일구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살아 있음’을 하루하루 순간순간 느낀다.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金光和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한양대 경제학과 졸업

    1996년 서울을 떠나 1998년부터 전북 무주에서 자급자족 농사

    정농회 회원

    저서 : ‘아이들은 자연이다’


    나는 도시에서 한동안 하는 일 없이 ‘잉여인간’으로 살았다. 나를 찾아주고,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해준 게 바로 벼농사였다. 벼농사는 내게 자기 존중감을 되찾아주었다. 자기 존중감이란 자신에 대한 믿음이며, 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견주어서도 안 되는 근본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존중감은 점차 커지는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동심원의 핵’이라고 할까. 한 점에서 시작된 작은 원이 점차 물결처럼 넓게 퍼져가듯 자기 존중감도 넓게 퍼지는 것 같다. 자신을 믿는 만큼 남을 믿을 수 있고, 자신을 존중하는 만큼 남을 존중할 수 있다.

    자기 존중감이란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일이 특별하고 생일상을 따로 차리며 삶을 축복해준다. 그렇다면 내 생일, 남이 나를 축복하기 전에 나 스스로 먼저 축복해야겠다. 아내가 한 상 차려주길 기대하기보다 내가 손수 밥상을 차리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아내와 아이들을 생일상에 초대하고 싶다. 내 요리 실력이 늘어나면 이웃과도 생일상을 나누고 싶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