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문화계진단

‘라이어, 너마저…’, 대학로가 떨고 있다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 김정은 동아일보 기자 | kimje@donga.com

    입력2017-09-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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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홍기유 이어 올해 최진 대표 잇따라 자살
    • 대학로 최고 킬러 콘텐츠 ‘라이어’ 판권도 팔려
    • ‘돌려 막기’ 유혹 끊으려면 눈높이 낮추되 길게 봐야
    대학로가 잇따른 비보에 잔뜩 웅크리고 있다. 8월 21일 서울 성동구 한 아파트 단지에 주차된 차 안에서 ‘김수로 프로젝트’로 유명한 공연기획제작자 최진(48) 아시아브릿지컨텐츠 대표가 숨진 채 발견됐다. 차 안에 불에 탄 번개탄이 발견됐고 직원들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낸 게 확인됐다. 8월 초 아시아브릿지컨텐츠의 90억 원 부채를 청산하기 위한 회생절차를 서울회생법원에 신청한 사실도 알려졌다. 자금난에 쫓겨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좌였다.

    이 사건은 공연계에 기시감(데자뷔)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5월 31일 원효대교 남단에서  투신자살한 홍기유(당시 45세) 극단 적도 대표 사례와 오버래핑됐기 때문이다. ‘연극열전’ 시리즈의 기획자로 유명했던 홍 대표 역시 경영난에 시달리다 결국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밝혀졌다.

    내로라하는 공연제작자의 파산과 연이은 죽음으로 대학로에선 ‘파산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는 거 아니냐 하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파동, 2015년 메르스 파동, 2016년 이후 블랙리스트 파문 및 촛불시위처럼 관객의 공연장행 발길을 막는 대형 악재가 3년 연속 누적되면서 그런 충격을 흡수할 대학로의 기초체력이 한계상황에 이르렀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실제 이 삼각파도에 시달리던 30대 제작자 한 명이 최근 “급전이 필요하다”며 선배 제작자에게 ‘S.O.S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만약의 사태를 막자’는 절박감에 중견 제작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수천만 원을 모아 ‘급한 불’을 껐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국민연극까지 팔렸다

    이 와중에 2000년대 대학로 최고의 킬러 콘텐츠로 불리던 연극 ‘라이어’의 판권이 팔렸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1998년부터 공연된 ‘라이어’의 국내 판권을 지닌 파파프로덕션(대표 이현규)이 그 판권을 뮤지컬 제작사인 EMK(대표 엄홍현)에 넘기기로 구두 합의한 상태라는 게 엄홍현 대표의 주장이다. 엄 대표는 “7, 8개월 전 이현규 대표로부터 제안을 받고 논의를 진행해 현재 구두 합의한 상태다. 9월 말 최종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라며 “판권료는 20억 원대”라고 밝혔다. 엄 대표는 “이 대표가 라이어 공연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비롯해 3~4가지 조건을 내걸었다”며 “현재 1만~1만5000원대인 라이어 티켓 값도 정상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 극작가 레이 쿠니 원작의 코믹 상황극인 ‘라이어’는 한때 시리즈 1~3편이 5개 전용공연장에서 공연되며 누적 관객 200만을 돌파해 ‘국민연극’이란 소리를 듣던 작품. 올해 국내 공연 20년을 맞아 ‘스페셜 라이어’라는 제목으로 대학로는 물론 전국순회공연까지 펼치고 있었다.

    이런 작품의 판권을 팔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판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 두고 대학로 제작자 및 공연관계자들 사이에선 ‘충격 반, 부러움 반’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집단적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진 대학로의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충격이고 그나마 빚을 탕감할 수 있게 팔아치울 콘텐츠를 갖고 있다는 점이 부러움의 대상이다.

    파파프로덕션은 한때 대학로의 ‘현금인출기’로 불릴 만큼 탄탄한 현금 회전력을 자랑해왔다. 하지만 라이어 시리즈를 대신할 후속작 발굴에 계속 실패한 데다 2010년을 전후해 ‘보잉보잉’이나 ‘옥탑방고양이’ 같은 흥행작에 예약판매 순위 1위의 아성을 내주면서 수익구조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사업다각화를 모색한다며 의료사업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비전문 분야에 투자했다가 입은 손실이 점점 커지면서 만만치 않은 빚을 진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 추산하는 파파프로덕션의 부채 규모는 30억~40억 원대. 따라서 라이어 판권을 판다면 이를 한꺼번에 청산할 수준은 될 거란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EMK 측이 밝힌 액수는 그에 한참 못 미치는 20억 원대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연제작자는 “스페셜 라이어 공연이 현재 지방 8곳을 돌고 있는데 한 곳당 매출이 1억 원 정도로 잡히고 있다 한다”며 “판권 판매 수익에 일괄적으로 이뤄진 지방 공연 매출 수익을 합쳐서 부채를 일거에 털어내려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공연기획자는 “파파 측이 시리즈 1~3편을 모두 묶어 30, 40억 원 정도에 팔려 한 것 같은데 물밑 협상 과정에서 1편 판권만 20억 원대에 팔린 것 같다”며 “파파 측에서 당분간 2,3편 제작은 계속 맡을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눈높이를 낮추되 길게 보자

    그래도 대학로 제작자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게 있지 않겠느냐 물었다. “외형 키우는 데 주력하다가 내실을 놓친 게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스타 마케팅 도입이 출연료 급등을 낳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손실의 대부분을 제작자가 짊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더 커졌다는 설명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가져간다’는 말이 있지만 스타 마케팅을 도입하게 되면 ‘재주 부리는 곰은 돈만 챙기고 손실이 발생하면 왕서방만 독박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긴 호흡으로 작품을 계발하기보다는 이미 검증이 끝난 작품이나 해외 유명 작품에 의존하게 됐다. 그만큼 더 많이 들어가는 제작비는 외부 투자금으로 충당하게 됐다. 결국 둑방을 높이 쌓긴 했지만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범람 위기에 노출됐다는 설명이다.

    이 문제를 놓고 8월 말 문체부와 공연프로듀서협회 간에 긴급 간담회가 펼쳐졌다. 공연프로듀서협회 회장인 공연기획사 ‘아이엠컬처’의 정인석 대표는 “워낙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 프로듀서들 간 내부 논의를 거쳐 9월 말경 자구책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가장 많이 언급된 문제 중 하나는 ‘돌려 막기 관행 근절’이었다. 돌려 막기란 이전 작품에서 발생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적자가 예상됨에도 투자금을 유치해 새로운 공연을 제작하는 관행을 말한다.

    조행덕 대표는 “돌려 막기가 발생하는 것은 제작자들이 쫓기는 마음에 무리수를 두기 때문”이라며 “눈높이를 낮추는 대신 안목을 길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검증이 끝난 배우 작가 연출가를 기용해 큰돈을 한꺼번에 벌려하기보다는 신인을 발굴하고 기용하는 인큐베이팅 과정을 거쳐가며 최소한 적자는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긴 안목에서 작품을 계발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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