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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 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 1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고난의 민중역사’ 풀무질해 동서양 사상 융합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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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 사상’으로 잘 알려진 함석헌은 독자적 사관(史觀)으로 체계적 통사를 쓴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바로 그 책. 해석의 특이함과 독창성으로 당대에는 인정조차 받지 못했지만 6·25, 4·19, 5·16, 그리고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민중사관의 토대를 만든 역사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너무나 다재다능했던 그는 신학자이자 언론인이기 전에 탁월한 역사학자였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려다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 못하고, 나가선 국민노릇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수평선 너머’라는 시집 서문에 그려진 함석헌(咸錫憲·1901~ 1989)의 자화상이다. “지사여 유인(幽人)이여 원망하거나 한탄하지 말라 / 예부터 대재(大才)는 쓸 곳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柏行)’의 마지막 절에서 함석헌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가슴에 화살 맞은 사람’으로 함석헌의 내면적 풍경을 짚어내면서 “모순! 모순덩어리, 그게 바로 함석헌의 앉은 방석!”이라고 했다. 과연 함석헌의 삶은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아서 금강산의 만물상 같다. 에머슨은 “위대한 것은 오해받게 마련”이라고 했지만, 인간 함석헌이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함석헌 자신은 스스로의 인생을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 다녔다는 한마디 시적 표현으로 압축했다. 실제로 함석헌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는 20세기가 막 시작하던 190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1919년 3·1운동에 뛰어들어 학교를 자퇴했다. 그때의 심경을 함석헌은 “먹은 대동강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했다”고 표현했다.

김교신·우치무라와의 만남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3·1운동은 함석헌의 인생을 180도로 바꿔놓았다. 평양고보에서 연락책임을 맡은 그는 시말서를 쓰고 복학하는 여느 학생들의 선택을 박차고 오산학교에 가게 됐다. 거기서 그는 평생의 스승 유영모(柳永模)와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을 만났다. ‘생각하는 사람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 함석헌은 로맹 롤랑, 베르그송, 입센, 블레이크 등을 읽었고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접하는 동시에 웰스의 ‘세계문화사대계’에 심취했다. 이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역사에 눈떴고, 세계국가주의와 과학주의 사상을 접하게 됐다.



1924년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김교신(金敎臣)의 소개로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게 된다. 우치무라는 교회 를 지배하는 형식과 거짓에 저항, 무교회 신앙을 내세웠다. 이 신앙은 어떤 형식이나 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모여서 예배를 보았으며,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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