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평선 너머’라는 시집 서문에 그려진 함석헌(咸錫憲·1901~ 1989)의 자화상이다. “지사여 유인(幽人)이여 원망하거나 한탄하지 말라 / 예부터 대재(大才)는 쓸 곳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柏行)’의 마지막 절에서 함석헌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가슴에 화살 맞은 사람’으로 함석헌의 내면적 풍경을 짚어내면서 “모순! 모순덩어리, 그게 바로 함석헌의 앉은 방석!”이라고 했다. 과연 함석헌의 삶은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아서 금강산의 만물상 같다. 에머슨은 “위대한 것은 오해받게 마련”이라고 했지만, 인간 함석헌이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함석헌 자신은 스스로의 인생을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 다녔다는 한마디 시적 표현으로 압축했다. 실제로 함석헌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는 20세기가 막 시작하던 190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1919년 3·1운동에 뛰어들어 학교를 자퇴했다. 그때의 심경을 함석헌은 “먹은 대동강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했다”고 표현했다.
김교신·우치무라와의 만남

1924년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김교신(金敎臣)의 소개로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게 된다. 우치무라는 교회 를 지배하는 형식과 거짓에 저항, 무교회 신앙을 내세웠다. 이 신앙은 어떤 형식이나 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모여서 예배를 보았으며,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