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데미지’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 다음이 더 심각하다. 왕은 이제 그녀의 사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목숨도 사라진 그녀 곁에서 왕은 시간을 잊은 채 머문다. 이런 상황을 의아해하던 사제는 소녀의 사체, 미라 주변을 샅샅이 훑어본다. 그리고 소녀의 혀 밑에 놓여 있던 반지를 발견한다. 이를 수상히 여긴 사제는 반지를 꺼내 가져가버린다. 그런데 이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왕은 돌연 마음을 바꿔 소녀의 사체를 허겁지겁 매장한다.
반지를 사랑한 왕
그날 이후부터 왕은 소녀가 아닌 반지를 지닌 사제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당황한 사제는 이 모든 마력이 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여기고 주머니 속 반지를 꺼내 콘스탄스 호수에 던져버린다. 자, 그럼 이제 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왕은 그날 이후부터 호수를 바라보며 매일매일을 흘려보낸다. 늙어 죽을 때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왕은 호수만을 바라본다. 이제 그는 호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반지를 사랑한 왕’으로 알려진 이 전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불분명하고 야릇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누군가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절세미인을 사랑의 조건으로 내세우던 사람이 추녀에 가까운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조건만을 따지던 남자가 순전히 외양에만 이끌려 사랑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의 덫은 알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어 아무리 낮은 포복으로 기어도 언젠가는 한 번 엉뚱하게 사로잡히곤 한다. 아니, 지나간 사랑은 다 이렇게 엉뚱해 보인다. 그런데 ‘반지를 사랑한 왕’에는 조금 더 불온하고 내밀한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것은 왕이 매료된 사랑이 세상이 허락하는 온당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왕은 어린 소녀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이후에는 동성인 사제와, 마지막에는 사물인 호수와 사랑에 빠진다.
어떤 점에서 이 이야기는 평범한 또래의 여인이 아닌 ‘별난 사랑’에 빠진 사람을 위한 전설일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 곁에 완벽한 이성을 지닌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허덕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마법의 반지일 때문일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세상이 허락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훌륭한 알리바이가 되어준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랑에는 신화가 따라 붙는다. 여기, 이 남자들도 그녀들의 ‘혓바닥’ 밑에 감춰진 반지 때문에 불온하고 도착적인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세상이 불허하는 사랑, 아니, 비난하고 질타하는 사랑. 훌륭한 왕이었던 남자를 광인으로 그리고 추방자로 만드는, 남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사랑. 그 사랑의 속내에는 이해할 수 없는 ‘반지’의 매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