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글밭 일구는 호미’ 소설가 박상우

“글 구속 벗어나니 창작 리듬이 배어나오더군요”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8-08-01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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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의 작가 박상우가 오랜만에 문단으로 돌아왔다. 한결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지는 그에게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낯익은 여행과 10년 동안의 침묵을 통해 한층 원숙해진 문학세계를 들었다.
    ‘글밭 일구는 호미’ 소설가 박상우
    요즘 서점가에 작가들의 여행과 관련된 탁월한 산문집이 눈에 띈다. 우선 김연수의 ‘여행을 할 권리’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나온 김인숙의 ‘제국의 뒷길을 걷다’가 눈에 밟혔다. 박상우를 만나게 된 것도 서점에서 그의 산문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머물다가 떠난다. 그리고 머문다. 작가들은 떠돌다가 머물러 쓴다. 그들은 어디를 어떻게 떠돌았을까. 오랜만에 소설가 박상우(朴相禹·50)를 만나게 된 것도 그가 오랫동안 떠돌다가 이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쓰는 순간 그 정체성이 환해진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이 문장은 박상우가 맘먹고 낸 산문집 제목이다. ‘맘먹고’라는 표현을 한 이유가 있다. 그간 그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향수’의 작가 쥐스킨트는 대인기피증 환자처럼 사람들에게서 멀리 있고자 했다. 그러한 마음이 그의 작품 ‘좀머 씨 이야기’의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어쩌면 소설을 쓰기 위해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상우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기간에 작품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럼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않고 뭘 하고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산문집은 그동안 침묵의 기간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지요.”

    박상우는 이어서 말했다. 1999년에 그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다. 등단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등단 후 10년간 그는 많은 작품을 썼다.



    “1988년에 등단한 후 1999년 문학상을 수상할 때까지는 소설을 쓰면서 소설에 시달린 시절이었어요. 뭔가 끊임없이 써대는 바람에 바닥을 하도 긁어 흙탕물이 나오는 우물처럼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공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밑천이 떨어진 장사꾼처럼 정신적인 위기감을 맞은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쓰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10년 정도 공부에 집중해야겠다는 각성을 한 것이다.

    여행과 카메라

    하지만 그 역시 힘든 시절이었다. 그것을 견디게 해준 것이 여행과 카메라였다. 그의 여행은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었다. 어떤 곳은 조금 과장해서 수백번을 다녀왔다. 즉 자신의 마음자리가 머문 곳을 찾아다니면서 그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풍경을 담았다.

    “이 기간에 문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작품을 열심히 쓰던 시절은 문학에 대한 광신도적인 시절이었지요. 누구들처럼 평범하게 문학청년 시절도 거치고 등단하고 그렇게 살았던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학에 대한 신념이 강했는데, 왜 쓰는 일이 고통스러운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겁니다.”

    문학과 자신의 관계가 마치 주종관계처럼 수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한다. 주인을 섬기는 우직한 종처럼 과도한 열정과 신념, 그것이 오히려 구속이었고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는 길 위에서 대답을 얻었다.

    “문학이 내 인생에 1%밖에 안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것은 의사에게는 청진기이고, 축구선수에게는 축구공일 따름입니다. 나는 글쟁이니까 글이라는 호미 하나 가지고 글밭에 나가 밭을 일구는 일입니다.”

    한때 거룩한 주인님이었던 문학이 이제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호미 한 자루라는 사실이 마음을 가볍게 한다. 그러나 그 호미를 다루는 일 역시 만만치 않으리라. 글밭에 나가 하루 종일 호미질을 해도 감자 한 알 캐지 못하는 날도 있으니까.

    “그간 나는 나를 너무 드러내려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드러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결국 혼자인 거지요.”

    소설가 박상우는 등단 20년, 세속 나이 50세에 혼자가 된 것이다. ‘혼자’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혼자를 견디지 못해 온갖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우주의 조화는 혼자가 혼자일 때 아름답다. 그 개별성이 아름답다.

    우리 동네 화단에 있는 백일홍이 생각났다. 요즘 아침마다 백일홍을 보는데, 어느 날 그 화단 주인인 할머니가 꽃에 물을 주는 모습을 보았다. 등이 굽은 작은 할머니였는데, 저 할머니의 손길이 화단을 저리도 예쁘게 가꾸는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섰다. 그때 할머니는 내가 물끄러미 백일홍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시더니, “백일홍이 참 이쁘지요. 백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인데, 참 오래 피지요”라면서 말을 건네셨다. “그렇군요” 하면서 나는 할머니를 역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혼자서 물을 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외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박상우가 ‘혼자’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문학이란 저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할머니는 혼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완전히 혼자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박상우가 떠돌아다닌 곳은 바로 할머니의 화단과 같은 곳이다. 그곳엔 박상우의 백일홍이 피어 있다.

    글밭을 일구는 호미

    책을 보니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잠시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때 10년간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요. 전 사진 작업을 그림 그리듯이 합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와서 컴퓨터로 ‘후 보정작업’을 한 다음에 파일로 저장하지요. 그래서 전 제 사진을 ‘그린 사진’이라고 합니다.”

    박상우는 다른 잡기를 전혀 할 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잡기가 없는 무료함의 상태를 디카를 발견함으로써 메울 수 있었다. 산과 들에서 찍은 박상우의 사진에는 그의 심성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전문 사진작가가 아닌 자유로움이다. 그 사진 속에는 역시 혼자인 그가 있다. 그럼 그 혼자인 상태에서 그는 무엇을 했을까. 과연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각성을 한 것인가. 혹시 허송세월을 한 것은 아닌가.

    ‘글밭 일구는 호미’ 소설가 박상우
    위험한 질문들

    “우선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교양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과학으로 관심이 쏠리더군요. 뭔가 눈이 뜨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요. 소설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과 인생인데, 그것에 대한 막연한 질문과 대답을 쓰기만 했을 때 느끼는 공허감 같은 게 사라집디다. 종교,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티베트 불교에까지 눈길이 갔지만, 궁금한 것들이 속 시원히 풀리지는 않았지요. 물론 공부가 짧아서 그럴 겁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인간을 분석하는 에세이들은 질문과 대답이 선명했어요.”

    그러면서 세계적인 석학들의 에세이를 모은 책인 ‘위험한 질문들’을 이야기했다. 이 책은 인지 과학자인 스티븐 핑거의 질문 하나로 시작된 석학들의 ‘인간과 세계의 진실’에 대한 생각들을 엮은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 대니얼 골먼 등 스타급 과학저술가 110명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위험한 생각을 서술한다. 인간에 대한 과학자들의 입장을 매우 솔직하게 쓴 것이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박상우는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즉 변태 성욕, 아동성폭행과 같은 범죄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무조건 격리시키고 제거해야 하는 대상인가.

    “예를 들어 자동차가 생산되어 소비자에게 갈 때 부품이 잘못돼 리콜 대상이 되기도 하잖아요. 그런 식이지요. 그 범죄자에게는 그 범죄의 유전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는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자의 유전자를 벌하라는 말을 하지요.”

    박상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이론에 빠져들면 과연 소설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소설 쓰기 힘든 게 아닐까. 소설, 즉 문학은 인문과는 또 다른 영역이다. 그 영역을 글밭이라고 친다면 그 글밭을 일구는 호미는 교양이나 지식의 날로는 부족, 아니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은 의사가 청진기를 대고 환자라는 대우주를 마주하는 것처럼, 인간 세상에 대한 탐구입니다. 의사가 직관으로 환자를 대하지 않고 과학이라는 공부를 통해서 진찰하지만, 인간에 대한 영적인 따뜻함을 겸비한다면 명의라는 소리를 듣지요. 그래서 과학과 종교가 만나고, 과학과 문학이 만나야 하는 거지요. 21세기는 좀더 폭넓게 관심 영역을 넓혀야 할 겁니다. 그저 열심히 쓴다는 것이 미덕이 아닌 거지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저는, 열심히 쓰면 되는 줄 알았어요. 즉 ‘쓰다’라는 동사에 집착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생각을 해보니 글이 과연 쓰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 떠오르더군요. ‘쓰다’는 ‘나’라는 주어에 예속되어 있어, 불완전한 나의 욕망을 철저하게 반영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글은 ‘짓기’가 아닐까.”

    ‘쓰다’와 ‘짓다’

    ‘쓰다’와 ‘짓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진정성이 결여된다면 이 말은 자칫 말장난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쓰건 짓건 작품만 좋으면 그만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상우는 여기에 방점을 꾹 찍었다.

    “글이 술술 나오는 것도 위험한 거지요. 제가 ‘짓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 몸에 창작에 대한 리듬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배어나오는 경지를 말하는 거지요. 그 리듬이 나와 맞아떨어졌을 때 나오는 게 창작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쓰던 버릇을 버리려고 했지요. 지금은 조금씩 짓는 행위가 자연스러워집니다.”

    박상우는 ‘인형의 마을’이란 제목으로 민음사에 창작집 원고를 넘긴 상태다. 인간 군상이 디지털화, 아바타화 되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출간 예정인 창작집에 역시 마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박상우는 그간 창작집 ‘샤걀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를 냈다. 올가을 출간될 ‘인형의 마을’은 박상우 창작집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시리즈는 소설가 박상우의 문학적인 성감대다.

    “마을 시리즈의 마지막은 결국 ‘나의 마을을 찾아서’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첫 출발지가 마지막 종착지가 되듯 말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떠돌든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에 낼 창작집은 마을 시리즈로 제가 중·단편에서 보여줄 수 있는 소설의 미학을 추구한 거지요. 이제부터 10년간은 장편 위주로 작업할 생각입니다. 그동안 푹 쉬었으니 또 피곤에 지칠 때까지 글밭에 나가 땀을 흘려야 할 겁니다.”

    문득, 일산에 작업실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는 작가들이 대부분 일산의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있기에 그냥 흘러나온 질문이었다.

    “그냥 집에서 씁니다. 아이가 다 커서 이젠 집에서 써도 돼요. 그것도 그래요. 옛 시절에는 ‘섬’이나 ‘절’에 가서 쓰곤 했는데, 이젠 그런 속박에서 벗어났어요. 새벽에 일어나 일찍 글을 쓰고 오후에 책을 봅니다. 이런 일상이 이젠 몸에 배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쓰는 일이 끝나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

    안주하지 못하는 의식의 소유자

    박상우와 만나서 인터뷰를 한 자리는 은희경, 김연수 등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자리다. 커피를 마시면서 고향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고향이라는 말이 나오자 허허 웃었다.

    “출생지는 경기도 광주인데요.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어서 제겐 고향이라는 뿌리가 없어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거주지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이든 잠시 머물다가 떠난 기억만 남아 있어요. 그래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무서웠어요. 정들어버리면 이별이 바로 상처잖아요.”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전역을 하고 나서 강원도에 정착했다. 춘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으니 박상우는 고향의식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안주하지 못하는 의식의 소유자’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초와 같은 삶 속에서도 항상 책이 곁에 있었다고 한다. 글씨를 깨우치고 나서부터는 뭐든지 읽으려는 버릇이 생겼다.

    이런 책읽기는 떠돌아다니는 삶에 대한 결핍감에서 연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제가 어릴 때는 문고판이나 전집이 책의 전부였어요. 더 어릴 때는 변소간에서 화장지 용도로 쓰곤 했던 ‘새농민’이라는 잡지가 있었지요. 읽을 게 없어 쪼가리 난 그 잡지를 읽곤 했어요. 허허.”

    사진 이야기를 할 때 어려서 10년 정도 그림을 그렸다는 말을 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미술반으로 활동했는데, 대표로 나가 상을 많이 받아 학교를 빛낸 어린이였다고 한다. 그림이 좋아 열심히 그렸지만, 고등학교 때 왠지 그림이 답답해졌다.

    “가슴에선 뭔가 터지고 깨지고 하는데 그걸 직접적으로 그릴 수가 없었어요. 아마 고흐가 아니어서 그런 거지요. 그래서 시를 썼어요. 그래서 문창과에 가서 시를 공부하는데 1980년대를 거치면서 시도 답답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소설을 쓸 생각을 했어요.”

    처음으로 소설을 쓴 장소가 군대였단다. 군대에서 근무 서고 돌아와 끙끙대고 쓴 60매가량의 소설이 첫 작품이 되었다.

    ‘한때 나도 유배의 인생을 살았던 적이 있다. 20대 후반에 소설을 쓰겠다고 광산촌으로 자원 발령을 받아 교사생활을 하던 무렵이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5일 만에 발령을 받고 청량리역에서 밤 8시40분 기차에 몸을 실었다. 10월 4일이었고 나의 목적지는 황지역이었다. 지금의 태백역 명칭이 당시에는 황지역이었다. 새벽 2시40분 기차가 역에 당도했을 때 어이없게도 그곳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해발 700m 가까운 고지대라서인가 그런 기상이변에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역전으로 나서자 새벽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맞은편 산의 저탄더미가 단박 시야를 가로막았다. 내가 정말 여기서 3년 만에 나갈 수 있을까,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 산문집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중에서

    샤갈과 사탄이 공존했던 곳

    자신이 머물렀던 곳 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곳, 샤갈과 사탄이 공존했던 곳이 바로 이 광산촌이었다.

    “이런 곳에서 소설을 쓸 수 있겠니라고 자문했어요. 전 아직도 그때의 경험을 한 줄도 소설로 쓴 적이 없어요. 광산촌에서 교사로 근무한 경험은 인생의 막장이 어떠한 곳인지, 비참함이랄지, 참담함이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초임교사 시절 교실에 아이들의 빈자리가 열매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드문드문했다. 한 학급에서 13명 정도가 퇴학을 당하는데, 교사로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선배 교사에게 물었다. 그때 그 교사가 씩 웃으면서 “이 학교는 1년에 200명이 퇴학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박상우는 할 말이 없었다.

    퇴학 사유는 주로 가출이었다. 아이들이 집에서 돈 훔쳐서 서울로 올라간다. 가발공장이나 봉제공장 같은 곳에 취직한다. 한 달에 2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는데, 야근에 철야가 이어지는 지독한 노동환경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한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역시 가출해 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내가 문학을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이겠어요. 낭만적으로 광산촌에 가서 소설을 쓰려 했지만, 한 줄도 못 쓰고 학교 밑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매일 술만 먹었어요.”

    ‘글밭 일구는 호미’ 소설가 박상우
    인생의 트레이닝 코스

    그런 세월을 4년이나 보내자, 몸과 마음이 마치 퇴락한 광산촌처럼 황폐해지고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다가 내가 죽지라는 생각에 휴직계를 내고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건 마지막 주사위를 던지는 심경이었다. 그때 집어든 소설이 바로 군대에서 쓴 60매가량의 소설이었다. 그 밑그림 소설을 토대로 600매가량의 작품을 만들었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때는 허허벌판 갈대 투성이였던 ‘백마’의 한 농가주택에서 쓴 소설이었다. 소설의 제목은 ‘스러지지 않는 빛’이었다.

    “그 소설을 문예중앙 신인상에 응모했지요. 그런데 때가 되어도 당선 연락이 안 오는 거예요. 이젠 죽었구나 싶었지요. 도대체 삶에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질 않았고, 세상이 너무 무서워서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갈팡질팡하면서 우두커니 운동장을 바라보는데 빨간 오토바이 하나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사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리고 교무실 문이 열리더니, 학교 급사가 당선 통지서를 전해주었다. 인생 막장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던져진 격이었다. 박상우에게 광산촌에서의 생활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너무 무서운 시공간이어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할 수 없는 두려움이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삶의 희망과 용기를 찾는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살면서 진짜 힘들 때마다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럼 내 힘든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각성을 하고 돌아오지요. 그 시절이 내 인생의 트레이닝 코스 같았습니다. 내밀하게 스며드는 아픈 시간이 많았지요. 이러한 고통에 대한 내구력이 생겨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라

    필자는 간혹 강원도 화천에 있는 한 마을을 찾아간다. 봉오리라는 동네다. 그 동네는 문득 지나치다 동네 이름이 예뻐서 그냥 한번 들러본 곳이었다. 군부대와 작은 마을이 어우러진 그 공간은 퇴락한 저녁 석양이 하루 종일 스며들어 있는 곳이다.

    폐가의 담장에 금이 가듯, 간혹 우울한 날이면 차를 몰고 그 마을을 찾아간다. 곧 쓰러질 것 같은 구멍가게에서 깡통 커피를 마시면서 그래도 한때 이 마을이 번성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구멍가게 할머니는 지금은 장성하여 도시로 나간 아들이 네 살 때 벌어진, 동네 군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술집 아가씨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 아들이 귀여우니까 아가씨들이 과자도 주고 장난도 치고 했었지, 그런데 한번은 우리 아들이 귀찮아서 그랬는지 그 아가씨에게 ‘술집 기집애’라는 말을 했어. 어린아이가 뭘 알겠어. 그저 어른들 잘못이지. 그때 그 아가씨가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아주 혼났어. 하루 종일 우는 걸 내가 달래주었지. 그 아가씨의 슬픈 표정이 아직도 생각나.”

    그 아가씨가 울었을 술집 자리들은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스러지고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그 자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학은 ‘고통의 축제’다.

    소설가로 등단한 박상우는 이틀 만에 그 고통의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그 선택은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제 갓 등단한 작가여서 원고청탁도 독자와 문단의 특별한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등단시킨 문예중앙을 찾아갔다.

    첫 원고청탁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 뒤로 이러저런 문예지에 원고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문학사상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던 구효서를 만났고, 그의 소개로 이순원을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마치 한 둥지에 있는 모양으로 연상되는 작가다. 이들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의기투합하여 서로 말을 트기로 하고 친구가 된다. 그리고 등단하던 해 12월 결혼을 하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 지난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 서로 신기해 한다는 말도 한다.

    “우리가 어떻게 20년을 특별한 직업 없이 먹고살아왔는지 신기하다. 하지만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라.”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라’는 말 속에는 그간 작품을 위해 안정적인 생활비를 보장해주는 달콤한 유혹을 거절한 일들이 녹아 있다. 소처럼 꾸준히 한 길을 걸어가는 게 그냥 살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망상자아, 영상자아

    그간 ‘코뮤니티 컬리지’에서 강의했는데 그 일이 보람차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공부를 해야 하기에 지난 10년간 그 강의는 자신을 위한 공부의 시간이이기도 했다. 이러한 삶의 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관리가 무척 중요하다. 작가는 스트레스가 많고 외로운 직업이다. 그래서 술독에 빠지기 쉽다. 선후배들 중에서 술독에 빠져 몸을 상하거나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그걸 잘 아는 박상우는 매일 아침 일산의 명소인 호수공원을 산책하면서 운동을 한다. 그는 하루 단위로 인생을 산다고 했다. 먼 계획은 사상누각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오늘 하루 주어진 시간을 잘 살면 되는 것이다.

    “하루라도 충실하게 온전하게 살아라. 하루를 잘 사는 게 인생을 잘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충실하게 글을 쓰고 나서, 그는 카메라를 메고 자신이 자주 찾는 장소를 다시 찾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우리 인간들이 보통 ‘나’라고 여기고 있는 생각, 의식은 말이지요. 곰곰이 잘 들여다보면 ‘나’라고 믿고 있는 가짜 ‘나’일 경우가 많이 있어요. 여행지에 가서든, 일산의 호수공원이든 거기에 있는 나는 나가 아닌 거지요.”

    무슨 말인가 싶다. 내가 ‘내’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곱씹어 생각하면 이 말의 진의를 금방 알 수 있다. 그걸 깨우치고 살아가기가 힘든 일이지, 지성적으로 인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나는 ‘망상자아’다. 즉 나의 열등감, 내적인 상처를 보상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갑옷과 투구를 걸친 나다. 진짜 나의 부드러운 속살은 만질 수 없다.

    “저의 경우에는 그 진짜 나를 여행을 통해서 찾으려고 하지요. 진짜 나, 근본 자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몸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럼 어느 순간부터 망상자아가 사라지고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내용은 뇌 과학 분야에서도 꾸준히 연구 중이다. 생각과 마음을 ‘영상자아’라고 하는 과학 용어로 설명한다. 가령 홍길동을 내가 만났다. 오늘은 아주 좋은 만남이었다. 그런데 내일 아침 홍길동이 안 좋은 얘기를 하면 ‘망상자아’가 스크린 활동을 한다. 그 망상자아의 안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서 내 스크린에 비춘다. 홍길동이 미워진다. 죽이고 싶다. 하지만 참 나인 근본자아는 그 스크린 뒤에 텅 비어 있다.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이러한 원리를 알고 있다면 타인에 대한 증오와 질투심이 들 때 스크린의 스위치를 꺼버린다. 이건 말이 쉽지 보통 일이 아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의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꾸준히 그러한 망상자아를 줄이는 연습을 해야 분노와 화와 같은 스크린을 꺼버릴 수 있다. 일을 하거나 쉴 때도 그러한 연습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한 상태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망상자아는 어디로 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산에 가면 산으로 따라오고, 들에 가도 따라오는 그림자와 같다.

    “유리창에 한번 비유해보지요. 여기 깨끗하게 닦은 유리창과 먼지가 낀 지저분한 유리창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나의 유리창일까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같은 유리창인데 하나는 맑은 하늘이 보이고 하나는 더러운 하늘이 보입니다. 같은 하늘인데 말이지요. 그런 거지요. 우리는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영상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실연한 사람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연인 때문에 고통스럽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세상을 원망하기 쉽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바로 내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미워하고 질투하는 나를 잘 보면 됩니다. 그걸 알면 시달릴 필요가 없지요.”

    하루에 세 번 반성

    정리하자면 아침마다 일어나 어제의 여진이 남아 있는 자신의 유리창을 닦고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나는 가능하면 하루에 세 번 반성한다는 우리 선비들의 삶의 태도를 권하고 싶다. 하루 한 번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반성의 시간이 깊어야 한다. 굳이 길 필요도 없다. 진짜 내가 가고 싶은 길의 방향을 정하고, 그 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반성하는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을 먹듯, 일일삼성(一日三省)을 한다면 크게 시달려 몸을 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꾸준히 살아온 선배로 많은 분이 있지만, 박상우는 이청준 선생을 말했다.

    “멀리서 본 이청준 선생을 저는 존경합니다. 보기 드물게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장인의 격조와 품위가 느껴지는 대선배님이지요. 제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겁니다.”

    ‘글밭 일구는 호미’ 소설가 박상우
    ‘마음의 상태에 따라 매번 전나무 숲길을 걷는 방식이 달라진다. 어느 때는 전나무 숲길만 몇 차례 왕복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나무 숲길을 걸어 월정사 천왕문으로 들어가 경내를 둘러보고는 상원사와 적멸보궁까지 내처 오르기도 한다. 상원사 서쪽 비로봉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곳에 위치한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가 묻혀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 중 으뜸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그곳에서 한숨 돌리며 산세를 둘러보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면 마지막에 다시 한번 전나무 숲길을 걷게 된다. 그때 쯤 이르면 몸과 마음이 한없이 정화되어 전나무 숲길을 메운 기운과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걸어 들어갈 때와 완연히 다른 기분으로 그곳을 걸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산문집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중에서

    이번 산문집에 첫 번째 여행지인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쓴 글이다. 이 길을 그는 맨발로 걷기도 한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달라지는 길이니 바로 수도의 길이고, 깨우침의 길이다. 그 길을 박상우는 걸어가고 있다.

    말무리 반도

    그는 산문마다 자신의 소설을 비교적 길게 인용해놓았다. 그 소설이 씌어진 배경을 설명하면서 자상하게 독자를 소설의 숲속으로 인도한다.

    그중에 말무리 반도가 있다. 작가가 1995년 늦여름에 발견한 말무리 반도, 고성군 간성면 해상리의 작은 별장에 머물 때 발견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북쪽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마음속으로 말 달리듯 휘몰아쳐온 말무리 반도.

    말무리 반도는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의 외금강 능선이 바다로 흘러내려 해금강 말무리 반도까지 뻗어가고 있다. 말무리 반도를 발견한 이후 그는 말무리 반도와 함께 살았고 소설을 썼다. 소설가는 발견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말무리 반도를 발견했고, 그 동네를 소설로 써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소설을 조금 인용한다.

    아름답고 오묘한 산세를 등지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장엄한 풍화와 침식의 세월이 나의 배경이 되고, 남북으로 뻗은 대단층선의 기복이 수직과 수평을 잠재우는 곳으로 지상의 모든 태양광선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삶의 기복을 암시하듯 천태만상의 기복을 드러내던 기봉과 암주와 암대와 단아가 해양으로 잦아들자 비로소 변화무쌍하고 조밀하던 풍화와 침식의 세월이 고단했던 세상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 같았다.

    (중략)

    “눈을 떠!”

    눈을 뜨고 있으라고, 엄청난 말발굽의 굉음을 들으며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말은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수평이 기우는 듯한 극심한 현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엄청난 가속력에 온몸이 실려 한순간이라도 중심을 잃으면 그대로 말발굽에 짓이겨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고, 이제는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난 가속력 때문에 찬연하던 빛의 변화가 스러지고, 길이 열리는 공간에서는 오직 검붉은 기류만 찰나처럼 명멸할 뿐이었다.

    누가 이 말무리를 멈출 수 있으랴.

    - 중편소설 ‘말무리반도’ 중에서

    그는 문득 떠난다고 했지만, 그가 떠나고 돌아오는 길에 소설만이 남았다. 그곳이 말무리 반도가 되었건, 대관령이 되었건, 자유로가 되었건 그가 다녀온 공간은 모두 그의 소설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 공간으로 가는 길이 바로 소설이다.

    그간 박상우가 걸어온 길을 간단하게 약도로 표시해본다. 등단 후에 ‘샤걀의 마을에 내리는 눈’ ‘독산동 천사의 시’ ‘사랑보다 낯선’ ‘화성’ ‘짬뽕’ 등의 작품집을 냈고, 장편소설 ‘호텔 캘리포니아’ ‘가시 면류관의 초상’ ‘지붕’ 등을 발표했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이던 이어령 선생은 그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박상우의 ‘내 마음의 옥탑방’은 빈곤이 낳은 허술한 주거의 한 공간을, 빈손의 젊음이 삶의 세속화와 물신화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고투의 산실로서 환치해놓은 그 발상이 주목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는 지금도 역시 그 젊음의 빈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손으로 많을 걸 썼다. 조금 긴 한 문장으로 그간 그가 쓴 소설을 다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박상우라는 작가의 표피일 것이다. 그가 말한 망상자아일 수도 있다. 그의 소설 제목에 들어 있는 진짜 속살은 행복한 독자의 몫이다.

    ‘글밭 일구는 호미’ 소설가 박상우
    동해의 긴장감 서해의 휴식

    그는 최근에 태안반도를 다시 다녀왔다고 했다.

    “새벽에 가서 잠시 보고 돌아왔지요. 마침 산문집을 탈고하고 나서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글이 끝나면 길이 시작됩니다. 서해는 일을 끝내고 쉬러 가는 공간으로 적절합니다. 반대로 일을 시작할 때는 동해를 가지요. 거기는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입니다. 동해의 긴장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글밭으로 호미 하나 들고 들어갑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요즘 발표가 뜸한 소설가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을 너무 안 쓰는 작가들, 그들 나름대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모씨는 정치와 연관된 일을 하더니 그만 글이 뚝 끊어져버렸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과 정치, 학문과 정치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서로 말했다. 이상하게 멀쩡하던 사람이 정치인이 되면 스타일을 구겨버리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장석주씨의 최근 시집인 ‘새벽’을 이야기했다. 다재다능하게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장석주 시인의 시집을 보면서 그간 참 많이 고생했고, 그 고생 끝에 이제는 뭔가 다른 작품이 기다려지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찌든 때와 먼지

    가까이 두고 읽는 책은 사마천의 ‘사기열전’이라고 일러 주었다. ‘사기열전’은 최근에 필자 역시 어떤 연유로 가까이 두고 있는 책이다. 가까이 지내는 철학박사인 친구는 사기열전을 잘 보면 세상이 다 보인다고 했다. 사람 사는 유형이 모두 사기열전에 들어 있다. 우리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인간유형 중에 하나일 뿐이다. 옛 선비들도 자신의 모범을 사기열전에서 찾았다. 그래 나는 진시황이야. 나는 그렇게 살아야 돼. 그래 나는 여불위야 그렇게 살아야 돼. 그럼 나는?

    ‘글밭 일구는 호미’ 소설가 박상우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등


    인터뷰를 마치고 술 한잔하는 게 보통 코스인데 박상우 선배에게 집안일이 있어 아쉬운 자리를 마쳤다. 처음엔 일산의 번화가인 라페스타의 커피 빈에서 만나기로 했더랬다. 그런데 거기엔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토요일 거리로 나온 젊은이들이 싱싱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소란스러웠고 번잡스러웠다.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그 자리에 가서 커피 한 잔을 더 마셨다. 저녁 시간이라 더 붐비는 그 자리. 그곳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담배를 피웠다. 좌우사방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아득하게 사라졌다.

    박상우의 여행 산문집을 읽고 박상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자,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디에 가기 전에 내 마음에 잔득 찌들어 있는 때와 먼지를 벗겨내지 못한다면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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