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기쁨을 찾기 위해 고통스럽게 시를 썼던 완벽주의자”

  • 정규웅│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입력2009-03-05 17: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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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7일이면 기형도 시인의 20주기다. 시인이 세상을 뜨고 세월은 흘렀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이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기형도 시인의 일간지 문화부 기자 시절 데스크였던 정규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시인과의 인연과 기억을 글에 담아 보내왔다. ‘편집자’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1987년 유럽여행 중인 27세의 기형도 시인

    시의 세계를 종교의 세계에 비유한 철학자가 있었다.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점에서 시와 종교는 유사하다는 것, 그러나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고 살벌한 사회일수록 사악한 영혼은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을 두려워해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사악한 영혼은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에 의해 언젠가는 자신의 껍질이 벗겨지리라 믿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시인의 죽음, 특히 젊은 시인의 돌발적인 죽음은 사악한 영혼의 보이지 않는 작용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년 전, 1989년 3월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허름한 심야극장에서 홀연히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기형도 시인은 바로 그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의 전형이었다. 그의 삶은 비극적인 것이었으나 그는 비극조차 아름답게 채색하는 특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는 대개 슬프고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으되 저 밑바닥에서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희망의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문화부 기자와 데스크로서 첫 만남

    내가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1985년의 이른 봄, 한 통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그때 나는 잠깐 편집국을 떠나 출판국에서 계간 문예지의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그 전해에 내가 일하던 중앙일보에 입사했고,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돼 기형도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그는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대개 외근을 하고 있었으므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사근사근했다.

    “정 부장, 중앙고등학교 나오셨죠? 저도 중앙 출신인데요, 70횝니다. 찾아뵈어야 하는데 전화로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그로부터 1년도 훨씬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5년 만에 다시 편집국 문화부장 자리로 되돌아온 어느 날 퇴근 무렵 기형도가 외근에서 귀사하면서 나를 찾아왔다. 여자처럼 수줍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더니 내 귀에다가 들릴 듯 말 듯 소곤거렸다.

    “정 부장, 아니 선배님. 문화부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꼭 힘 좀 써주세요.”

    그의 첫인상은 매우 복잡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세상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고통을 가득 담고 있는 듯 눈빛은 깊은 우수에 잠겨 있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거운 머리를 이끌고 다니면서도 머릿속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구는 적이 많았다. 나이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가 하면 이따금 10대의 치기를 보이기도 했다.

    문화부의 막내둥이 기자가 늘 그래왔듯 기형도는 방송담당으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의 방송은 마치 암흑과도 같았던 제5공화국의 시녀 역을 자임하여 국민을 현혹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고, 양식 있는 젊은 기자들은 그와 같은 방송사들의 행태를 기회 있을 때마다 거세게 비판했다. 기형도는 방송사들이 두려워하는 몇몇 방송기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날카로운 방송 비판기사가 나가기만 하면 방송사의 고위층은 신문 쪽의 간부들에게 거칠게 항의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상사들로부터 곤욕을 치러야 하는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형도의 필봉은 갈수록 예리해졌고 나는 그의 방패막이 노릇에 급급해야 했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이것이 결국 그가 갈망했던 문화부 기자 생활을 만 2년쯤에서 막을 내리게 했으니 자승자박이라고나 해야 할는지.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술자리 인기 독차지하던 음유시인

    기형도가 문화부에 들어온 지 몇 달 뒤 문학기자로 일하던 소설가 양헌석 기자가 다른 부서로 전출돼 기형도가 문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가 맡던 방송은 새로 문화부에 들어온 그의 1년 후배 박해현(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 떠맡았다. 문학기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를 쓸 수 있었던 1년 반 남짓의 이 기간이 그에게는 짧은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나게 뛰었고 그의 일상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의 두꺼운 노트는 습작시와 시작(詩作), 그리고 취재 메모 따위로 항상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가 20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내 문단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자주 끼어든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었고 그 또래의 문단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시 동인모임인 ‘시운동’에 참여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신문사 밖 기형도의 일상에 대해선 깜깜하던 내가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 것도 밖에서 함께 어울리면서부터였다.

    기형도는 맥주 한두 잔만 마시면 곧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술에는 약한 편이었으나 술자리의 분위기를 즐거워했고 무엇보다 노래를 잘 불러 문단 술꾼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노래를 부를 때의 기형도는 말 그대로 음유시인이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림솜씨도 뛰어나 문단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따금 술자리에서 사인펜으로 종잇조각에 문인들의 얼굴을 스케치하곤 했는데 그림마다 그 인물의 특징이 실감 나게 묘사돼 프로의 솜씨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다양한 재주, 남다른 친화력에도 그의 본성은 일찍부터 외로움에 깊이 길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유년시절 소년시절의 불우했던 가정환경, 그리고 그에 따른 몇 가지 불행한 일이 원인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빼어난 시적 감수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천성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자넨 언제부터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나?”

    “아주 어릴 적,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서부터요.”

    “그럼 왜 대학에선 정치외교학을 공부했지?”

    “제 뜻이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지?”

    “부모님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시인이 된 것은 부모님의 뜻이 아니었을 텐데.”

    “결국 이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니까요.”

    “시 쓰는 일이 즐거운가?”

    “아니, 괴로워요. 하지만 그 괴로움 뒤쪽에는 아주 커다란 기쁨이 있어요. 그 기쁨을 찾으려 시를 써요.”

    아홉 살 연상 여류작가와의 로맨스

    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의 기형도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진무구해 보였다. 그처럼 그의 언행과 표정은 기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전화 통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남이 간섭하거나 끼어드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세계에 틈입해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했고, 그것은 그 특유의 결벽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령 자신의 책상이 다른 사람에 의해 어지럽혀져 있거나 누군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으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서 기형도를 괴팍하거나 별난 사람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는 신체건강하고 생각이 올바르며 행동거지가 신중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주변의 몇몇 사람은 그가 혹 여성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편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남성이었다. 그는 여성의 보이는 아름다움에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아름다움까지 깊이 꿰뚫고 있었다.

    그 흔한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좋아하던 여성이 있었다. 여류작가 K였다. K는 그 무렵 내가 일하던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던 관계로 담당기자인 기형도와 비교적 자주 접촉하고 있었다. 이따금 K와의 통화로 짐작되는 통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체했다. 어느 날 한밤중 신문사 근처 음식점에서 회식에 참석했다가 볼일이 남아 있어 신문사에 잠깐 들렀는데 기형도가 문화부에 혼자 남아 누군가와 소곤소곤 통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술김에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는데 기형도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얼른 전화를 끊고 희미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깊은 밤중에 누구랑 전화하는 건가?”

    “모르셔도 돼요.”

    기형도는 고개를 외로 꼬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여자 아닌가, 맞지?”

    내가 웃음을 머금고 짓궂게 다그치자 기형도는 말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취재노트만 분주하게 뒤적였다. 이번에는 목청을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자네와 통화한 사람, 혹시 K 아닌가?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그래. 그래야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말이야. K, 좋은 여성임엔 틀림없지만 자네와 나이 차이가 너무 심해. 여자가 남자보다 열 살이나 위라면 누가 봐도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기형도의 옆얼굴이 금세 홍조를 띠는 듯 보였다. 그는 이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고 항의하듯 말했다.

    “열 살은 무슨 열 살, 아홉 살 차이밖에 안 되는데…”

    나는 ‘밖에’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K가 1951년생, 기형도가 1960년생이므로 그들의 나이 차이가 아홉 살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나이 차이가 심하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한 살 늘려 말한 것뿐인데 나무랄 수 없는 그의 항의에 부닥친 것이다. 그것은 완벽주의자이고자 했던 그의 결벽증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글과 삶에 결벽증을 가진 완벽주의자

    그런데 그런 결벽증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문화부의 문학기자를 단명으로 그치게 했으니 결국 그것도 기형도의 운명이었을까. 경위는 이렇다. 나는 그의 결벽증을 일찍부터 눈치 채고 있었으므로 그가 넘긴 기사를 손질할 때면 그를 불러 의견을 묻곤 했다. 대개는 수긍했으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때도 간혹 있었다. 그때마다 절충안을 내놓아 그럭저럭 넘어가곤 했는데 그의 기사로 말썽이 생겨 내가 곤욕을 치르게 되면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순수함을 보이기도 했다.

    1988년 1월 신문사 내의 불협화음으로 나는 문화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박해현이 새로 창간되는 신문에서 나와 함께 일하게 됐으므로 기형도는 박해현이 맡았던 방송담당 기자 일을 다시 떠맡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했던 방송사들의 파행은 기형도의 펜 끝 아래서 다시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그해 5월 어느 날이었다. 기형도의 날카로운 방송비판 기사가 데스크에 의해 톤다운(tone down)돼 출고됐는데 기형도가 공무국으로 가서 제 기사가 만신창이가 된 것을 확인하고 직원들의 협조로 그 기사를 본래의 기사로 원상 복원시켜놓은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신문이 나오자 편집국은 발칵 뒤집혔다. 원인 규명을 위해 기사 원고를 찾아보니 데스크가 고쳐 쓴 것을 기형도 자신이 본래의 기사로 환원시킨 것으로 판명됐다. 신문사 편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이 일로 해서 기형도는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때의 일이 기형도의 죽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후 줄곧 상심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기형도가 세상을 등지기까지 4~5년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잘 짜인 어떤 다큐멘터리의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완성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시인 박정만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서울대 교수를 지낸 문학평론가 김현이다. 박정만은 기형도보다 약 5개월 먼저, 김현은 기형도보다 약 1년3개월 후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형도의 시는 ‘현재형’이다.

    사진은 지난 2006년 기형도 시비 건립 기념 세미나 광경.

    중앙일보 기자 시절 신문사 동료들과 함께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시인 박정만, 평론가 김현과의 인연

    기형도가 문학기자로 일하는 동안 가장 공들여 쓴 기사는 박정만에 관한 기사였다. 1981년 5월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나와 함께 서빙고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박정만은 그 후 술과 방황으로 일관하다가 죽기 1년 전 끼니때마다 소주만 마시며 20일 동안 30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토’해 냈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데뷔 이후 20여 년 동안 시집을 2권밖에 내지 못한 ‘과작(寡作)의 시인’이었던 박정만으로서는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기사화한 사람이 기형도였다.

    박정만은 서울올림픽이 개막되기 직전인 1988년 10월2일 저녁 5시께 화장실에 앉은 채 자는 듯 숨을 거두었는데 그날 저녁 나와 함께 문상을 가는 차 안에서 기형도는 혼잣말처럼 ‘그처럼 접신의 경지에서 시를 쓸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소리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 무렵은 기형도도 문화부를 떠나 왕성하게 시를 쓰던 때였다.

    김현과 얽힌 사연은 기형도가 아직 문학기자로 일하던 1988년 3월의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출판국의 한 귀퉁이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기형도는 틈틈이 내 자리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 오후 기형도는 잔뜩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원고지 몇 장이 들려 있었다. 내미는 원고를 읽어보니 중앙일보에 게재될 김현의 시 월평 원고였다. 그런데 원고지 10장 분량의 그 원고는 그달에 발표된 기형도의 시작품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었다.

    “제가 문학담당 기자인데 월평에서 제 작품만 집중적으로 다루면 제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김현 선생과 가까운 친구잖습니까? 제 작품 이야기는 빼고 원고를 새로 써주십사 부탁 좀 드려주셨으면 해서요.”

    얼마간 승강이가 오갔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연을 들은 김현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기형도의 소심함을 탓했지만 대범하게 원고를 새로 써주겠노라 약속했다. 기형도는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나중에 신문에 게재된 김현의 월평을 보니 다른 몇몇 시인의 작품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후반부에서는 역시 기형도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기형도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이따금 김현을 만나 기형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현은 ‘기형도는 젊어 죽을 수밖에 없는 시인’이라고 잘라 말하곤 했다. 그의 시를 읽으면 곳곳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을 김현이 맡았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그 해설에서 김현은 기형도의 시세계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면서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빨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썼다.

    기이하게도 김현의 그 말은 마치 주술과도 같은 힘을 발휘해서 기형도가 죽은 뒤 폭발적인 ‘기형도 신드롬’을 낳고 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지난 20년 동안 수십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를 상상한다. 아니, 상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가 어디엔가 존재하리라고 믿는다.

    기형도가 떠난 자리

    기형도가 죽던 날, 그날 오후 나는 여러 시간 자리를 비웠는데 그는 서너 차례 내 자리로 와 나를 찾았다고 한다. 내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는데 결국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하려 했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말았다. 어쩌면 우회적으로라도 나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지 못한 대신,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몇 편의 시 가운데 하나인 ‘빈 집’에서 떨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후에 나온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정규웅(鄭奎雄)
    중앙일보 문화부장 편집국장대리
    논설위원 등 역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등 역임
    저서: ‘휴게실의 문학’ ‘글동네 사람들’‘글동네에서 생긴 일’ ‘나혜석 평전’‘추리소설의 세계’등
    역서: ‘케네디가의 여인들(펄 벅)’ ‘애너벨 리(에드가 앨런 포 시선집)’ ‘지하철 정거장에서 (에즈라 파운드 시선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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