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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 20주기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기쁨을 찾기 위해 고통스럽게 시를 썼던 완벽주의자”

  • 정규웅│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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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7일이면 기형도 시인의 20주기다. 시인이 세상을 뜨고 세월은 흘렀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이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기형도 시인의 일간지 문화부 기자 시절 데스크였던 정규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시인과의 인연과 기억을 글에 담아 보내왔다. ‘편집자’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1987년 유럽여행 중인 27세의 기형도 시인

시의 세계를 종교의 세계에 비유한 철학자가 있었다.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점에서 시와 종교는 유사하다는 것, 그러나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고 살벌한 사회일수록 사악한 영혼은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을 두려워해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사악한 영혼은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에 의해 언젠가는 자신의 껍질이 벗겨지리라 믿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시인의 죽음, 특히 젊은 시인의 돌발적인 죽음은 사악한 영혼의 보이지 않는 작용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년 전, 1989년 3월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허름한 심야극장에서 홀연히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기형도 시인은 바로 그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의 전형이었다. 그의 삶은 비극적인 것이었으나 그는 비극조차 아름답게 채색하는 특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는 대개 슬프고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으되 저 밑바닥에서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희망의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문화부 기자와 데스크로서 첫 만남

내가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1985년의 이른 봄, 한 통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그때 나는 잠깐 편집국을 떠나 출판국에서 계간 문예지의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그 전해에 내가 일하던 중앙일보에 입사했고,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돼 기형도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그는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대개 외근을 하고 있었으므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사근사근했다.

“정 부장, 중앙고등학교 나오셨죠? 저도 중앙 출신인데요, 70횝니다. 찾아뵈어야 하는데 전화로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그로부터 1년도 훨씬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5년 만에 다시 편집국 문화부장 자리로 되돌아온 어느 날 퇴근 무렵 기형도가 외근에서 귀사하면서 나를 찾아왔다. 여자처럼 수줍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더니 내 귀에다가 들릴 듯 말 듯 소곤거렸다.

“정 부장, 아니 선배님. 문화부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꼭 힘 좀 써주세요.”

그의 첫인상은 매우 복잡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세상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고통을 가득 담고 있는 듯 눈빛은 깊은 우수에 잠겨 있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거운 머리를 이끌고 다니면서도 머릿속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구는 적이 많았다. 나이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가 하면 이따금 10대의 치기를 보이기도 했다.

문화부의 막내둥이 기자가 늘 그래왔듯 기형도는 방송담당으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의 방송은 마치 암흑과도 같았던 제5공화국의 시녀 역을 자임하여 국민을 현혹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고, 양식 있는 젊은 기자들은 그와 같은 방송사들의 행태를 기회 있을 때마다 거세게 비판했다. 기형도는 방송사들이 두려워하는 몇몇 방송기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날카로운 방송 비판기사가 나가기만 하면 방송사의 고위층은 신문 쪽의 간부들에게 거칠게 항의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상사들로부터 곤욕을 치러야 하는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형도의 필봉은 갈수록 예리해졌고 나는 그의 방패막이 노릇에 급급해야 했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이것이 결국 그가 갈망했던 문화부 기자 생활을 만 2년쯤에서 막을 내리게 했으니 자승자박이라고나 해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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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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