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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 20주기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기쁨을 찾기 위해 고통스럽게 시를 썼던 완벽주의자”

  • 정규웅│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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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술자리 인기 독차지하던 음유시인

기형도가 문화부에 들어온 지 몇 달 뒤 문학기자로 일하던 소설가 양헌석 기자가 다른 부서로 전출돼 기형도가 문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가 맡던 방송은 새로 문화부에 들어온 그의 1년 후배 박해현(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 떠맡았다. 문학기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를 쓸 수 있었던 1년 반 남짓의 이 기간이 그에게는 짧은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나게 뛰었고 그의 일상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의 두꺼운 노트는 습작시와 시작(詩作), 그리고 취재 메모 따위로 항상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가 20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내 문단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자주 끼어든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었고 그 또래의 문단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시 동인모임인 ‘시운동’에 참여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신문사 밖 기형도의 일상에 대해선 깜깜하던 내가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 것도 밖에서 함께 어울리면서부터였다.

기형도는 맥주 한두 잔만 마시면 곧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술에는 약한 편이었으나 술자리의 분위기를 즐거워했고 무엇보다 노래를 잘 불러 문단 술꾼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노래를 부를 때의 기형도는 말 그대로 음유시인이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림솜씨도 뛰어나 문단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따금 술자리에서 사인펜으로 종잇조각에 문인들의 얼굴을 스케치하곤 했는데 그림마다 그 인물의 특징이 실감 나게 묘사돼 프로의 솜씨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다양한 재주, 남다른 친화력에도 그의 본성은 일찍부터 외로움에 깊이 길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유년시절 소년시절의 불우했던 가정환경, 그리고 그에 따른 몇 가지 불행한 일이 원인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빼어난 시적 감수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천성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자넨 언제부터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나?”

“아주 어릴 적,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서부터요.”

“그럼 왜 대학에선 정치외교학을 공부했지?”

“제 뜻이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지?”

“부모님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시인이 된 것은 부모님의 뜻이 아니었을 텐데.”

“결국 이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니까요.”

“시 쓰는 일이 즐거운가?”

“아니, 괴로워요. 하지만 그 괴로움 뒤쪽에는 아주 커다란 기쁨이 있어요. 그 기쁨을 찾으려 시를 써요.”

아홉 살 연상 여류작가와의 로맨스

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의 기형도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진무구해 보였다. 그처럼 그의 언행과 표정은 기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전화 통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남이 간섭하거나 끼어드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세계에 틈입해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했고, 그것은 그 특유의 결벽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령 자신의 책상이 다른 사람에 의해 어지럽혀져 있거나 누군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으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서 기형도를 괴팍하거나 별난 사람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는 신체건강하고 생각이 올바르며 행동거지가 신중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주변의 몇몇 사람은 그가 혹 여성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편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남성이었다. 그는 여성의 보이는 아름다움에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아름다움까지 깊이 꿰뚫고 있었다.

그 흔한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좋아하던 여성이 있었다. 여류작가 K였다. K는 그 무렵 내가 일하던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던 관계로 담당기자인 기형도와 비교적 자주 접촉하고 있었다. 이따금 K와의 통화로 짐작되는 통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체했다. 어느 날 한밤중 신문사 근처 음식점에서 회식에 참석했다가 볼일이 남아 있어 신문사에 잠깐 들렀는데 기형도가 문화부에 혼자 남아 누군가와 소곤소곤 통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술김에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는데 기형도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얼른 전화를 끊고 희미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깊은 밤중에 누구랑 전화하는 건가?”

“모르셔도 돼요.”

기형도는 고개를 외로 꼬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여자 아닌가, 맞지?”

내가 웃음을 머금고 짓궂게 다그치자 기형도는 말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취재노트만 분주하게 뒤적였다. 이번에는 목청을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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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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