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놀랐다. 까마득히 잊혔던 노동자들의 참혹한 현실을 접한 사람들은 쇠망치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민주화와 함께 민중 생존권 문제가 시대의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기독교인들, 특히 진보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무리 가운데서 민중의 고난에 대해 한국 기독교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하는 뼈아픈 자책과 반성이 일었다.
안병무는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신학자로서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그는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씹고 또 씹은 끝에, 전태일의 자기희생은 타자를 구원하는 민중적 메시아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2000년 전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현대 한국 민중의 역사 현장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안병무는 미발표 설교집 ‘전태일 이야기와 부활’에 이렇게 썼다.
“1970년 한 무명의 어린 노동자가 평화시장 앞거리에서 대낮에 자기 몸에 휘발유를 부어 불을 그었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겨우 소년기를 벗은 젊은 사람, 그 어린 손으로 큰 교회들의 문을 두드리고, 정부와 노동부(노동부는 1981년 설립됐으므로 그 역할을 맡은 정부 부처를 말함-필자 주) 등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분신이었습니다. …그 분신과 함께 전태일이라는 청년은 갑자기 거인처럼 민중 사이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해와 다음해를 비교해보면,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자는 자주적인 운동이 10배, 20배, 30배로 증가했습니다. 전태일이 어떻게 살았나, 하늘에 갔는지, 땅에 갔는지, 그건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에게,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전해지는 동안 뜻밖에도 전태일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씨알사상’ ‘금관의 예수’
미국에서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들은 함석헌은 ‘태일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하며 밤새 목 놓아 울었다. 이보다 앞서 1970년 4월에 함석헌은 ‘사상계’ 폐간 이후 ‘씨의 소리’를 창간, ‘민중’이란 한자 대신 ‘씨’이란 말을 사용했다. 함석헌은 씨이 역사와 민중의 주체요, 동시에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를 ‘참된 씨’, 곧 ‘옹근 씨’로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는 ‘현존의 그리스도’를 씨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씨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고 씨을 역사와 민중의 주체로 본 함석헌의 ‘씨사상’은 안병무의 신학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김성수, ‘함석헌 평전’, 삼인, 2001)
1971년 원주에서는 가톨릭 문화운동과 민족문화운동을 화이부동(和而不同) 차원에서 융합하려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싹텄다. 그 중심에 김지하가 있었다. 김지하는 가톨릭의 진보적 사상과 남미의 해방신학 및 개신교의 민중신학적 맹아를 일찌감치 예감했다. 강원도 탄광지역에 피신해 있던 김지하는 그 무렵 ‘금관의 예수’란 희곡 한 편을 썼다.
김지하는 이 희곡에서 거지 창녀 문둥이 술주정뱅이 같은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 예수의 머리에서 금칠한 장식을 벗겨냄으로써 예수를 본래 모습으로 되살려냈다. 로마제국과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권력화한 기독교 계층에 의해 콘크리트에 갇혀 있던 예수가 ‘가시관을 쓴 예수’,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형된 예수로 전위(轉位)된다. 예수 고상(苦像)의 웅변에 성직자와 수녀, 신자들이 흐느껴 우는 등 ‘금관의 예수’는 기독교계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주제음악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김지하의 글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노래로, 양희은이 음반으로 내서 유명해졌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헤겔은 그의 ‘법철학’ 서문에서 학문은 대낮에 일어난 일을 추사(追思)하여 밤에 정리하는 것이라고 해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짙어지자 날기 시작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함석헌의 씨사상, 전태일의 분신,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등은 민중신학이 싹트기 바로 전에 일어난 사건과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