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안병무

시대의 아픔 딛고 피어난 신학적 사유 민중에게서 예수를 보다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입력2009-03-06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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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의 갈릴리’ 만주 간도에서 성장, 독일 유학 시절 실존주의 신학에 심취했던 안병무는 전태일의 죽음을 접하고 민중신학으로 급선회했다. 그는 1970~80년대 정권의 탄압에 맞선 민중의 저항을,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현대에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안병무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5가에서 피복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이 분신자살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재봉 일을 하던 여공이 과로 끝에 폐병에 걸리자 해고되는 ‘노동지옥’ 현실을 전태일은 사회 각계각층에 호소해왔다. 그러나 폭압적 근대화와 돌진적 성장신화에 매몰돼 있던 당시, 그 누구도 전태일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이다 몸을 불살랐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가 죽어가면서 울부짖은 마지막 말이다.

    세상이 놀랐다. 까마득히 잊혔던 노동자들의 참혹한 현실을 접한 사람들은 쇠망치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민주화와 함께 민중 생존권 문제가 시대의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기독교인들, 특히 진보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무리 가운데서 민중의 고난에 대해 한국 기독교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하는 뼈아픈 자책과 반성이 일었다.

    안병무는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신학자로서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그는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씹고 또 씹은 끝에, 전태일의 자기희생은 타자를 구원하는 민중적 메시아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2000년 전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현대 한국 민중의 역사 현장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안병무는 미발표 설교집 ‘전태일 이야기와 부활’에 이렇게 썼다.

    “1970년 한 무명의 어린 노동자가 평화시장 앞거리에서 대낮에 자기 몸에 휘발유를 부어 불을 그었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겨우 소년기를 벗은 젊은 사람, 그 어린 손으로 큰 교회들의 문을 두드리고, 정부와 노동부(노동부는 1981년 설립됐으므로 그 역할을 맡은 정부 부처를 말함-필자 주) 등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분신이었습니다. …그 분신과 함께 전태일이라는 청년은 갑자기 거인처럼 민중 사이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해와 다음해를 비교해보면,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자는 자주적인 운동이 10배, 20배, 30배로 증가했습니다. 전태일이 어떻게 살았나, 하늘에 갔는지, 땅에 갔는지, 그건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에게,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전해지는 동안 뜻밖에도 전태일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씨알사상’ ‘금관의 예수’



    미국에서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들은 함석헌은 ‘태일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하며 밤새 목 놓아 울었다. 이보다 앞서 1970년 4월에 함석헌은 ‘사상계’ 폐간 이후 ‘씨의 소리’를 창간, ‘민중’이란 한자 대신 ‘씨’이란 말을 사용했다. 함석헌은 씨이 역사와 민중의 주체요, 동시에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를 ‘참된 씨’, 곧 ‘옹근 씨’로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는 ‘현존의 그리스도’를 씨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씨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고 씨을 역사와 민중의 주체로 본 함석헌의 ‘씨사상’은 안병무의 신학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김성수, ‘함석헌 평전’, 삼인, 2001)

    1971년 원주에서는 가톨릭 문화운동과 민족문화운동을 화이부동(和而不同) 차원에서 융합하려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싹텄다. 그 중심에 김지하가 있었다. 김지하는 가톨릭의 진보적 사상과 남미의 해방신학 및 개신교의 민중신학적 맹아를 일찌감치 예감했다. 강원도 탄광지역에 피신해 있던 김지하는 그 무렵 ‘금관의 예수’란 희곡 한 편을 썼다.

    김지하는 이 희곡에서 거지 창녀 문둥이 술주정뱅이 같은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 예수의 머리에서 금칠한 장식을 벗겨냄으로써 예수를 본래 모습으로 되살려냈다. 로마제국과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권력화한 기독교 계층에 의해 콘크리트에 갇혀 있던 예수가 ‘가시관을 쓴 예수’,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형된 예수로 전위(轉位)된다. 예수 고상(苦像)의 웅변에 성직자와 수녀, 신자들이 흐느껴 우는 등 ‘금관의 예수’는 기독교계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주제음악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김지하의 글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노래로, 양희은이 음반으로 내서 유명해졌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헤겔은 그의 ‘법철학’ 서문에서 학문은 대낮에 일어난 일을 추사(追思)하여 밤에 정리하는 것이라고 해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짙어지자 날기 시작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함석헌의 씨사상, 전태일의 분신,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등은 민중신학이 싹트기 바로 전에 일어난 사건과 사상이다.

    안병무

    1970년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영결식.

    1970년대 경제성장의 주요 동력이었던 노동자를 비롯해 농민과 도시빈민은 성장과 분배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근대화의 타자(他者)였다. 한국 교회는 그때까지 사회모순과 민중의 생존권 문제에 등을 돌린 채 개인의 영혼구원을 선교목표의 전부로 삼고 있었다. 기득권적 세계에 파묻혀 있던 한국 교회는 전태일 사건으로 비로소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안병무를 비롯해 서남동 현영학 서광선 문동환 김용복 한완상 허병섭 등이 민중 현실의 ‘중심에서’ 새로운 신학, 실천적 신학에의 길을 모색했다.

    민중신학은 성서의 민중 이야기가 1970년대 한국의 민중사건과 합류해서 나타난 한국적 신학이론이다. 민중신학은 한국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신학적 메아리였다. 민중신학에 의하면 현실의 민중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메시아를 만나는 것이며, 민중과의 연대적 실천을 통해 메시아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 안병무는 ‘민중신학의 회고와 전망’에서 민중신학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민중신학은 서재에서 나온 사변이 아니고, 한국의 정치현장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요, 신학적인 귀결이다. 구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수립된 이래 그들의 탄압 밑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 민중과의 만남과, 그들의 고난에 어떠한 형태로든 참여한 결과가 민중신학을 낳았다.”

    조선 민중의 삶을 가로지른 성장기

    안병무는 태어날 때부터 상황적으로 민족적·민중적 고난의 현장에 있었다. 그는 1922년 평남 안주군에서 태어나, 만주 간도에서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란 엄혹한 시대적 조건에서 만주 땅을 유랑하던 조선 민중의 삶을 가로지른 것이다. 당시 조선 민중의 삶은 예수시대 팔레스타인의 갈릴리(갈릴래아) 지역을 떠돌던 유대민족의 삶과 흡사했을 것이다. 갈릴리는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비천한 땅이었다. 그곳에 살던 주민은 농노와 소작인, 소농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예수의 갈릴리 선교는 곧 민중 선교의 성격이 짙었다.(‘갈릴래아의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1990)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 재학 시절 안병무는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문동환 강원룡 등을 만났으며, 훗날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설립한 김재준은 한때 은진중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 시절을 통해 안병무는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고취에 교회만한 터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를 중심으로 야학교와 주일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이때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이집트에서 탈출했는지를 담은 ‘출애굽기’를 어느 성서보다 열심히 읽었다.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불타는 의지에서였다.

    1940년 은진중학을 졸업한 그는 간도에서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해 부전공으로 종교학을 선택했다. 서울대 시절 기독학생총연합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 시절 안병무는 기독교 신앙공동체 조직으로 ‘일신회’를 결성했으나 6·25전쟁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안병무는 전쟁 중에도 일신회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 결국 열매를 맺었다. 일신회는 좌우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제3의 기독교 신앙운동을 표방했다.

    1951년 11월 안병무는 2000년 전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삶을 본떠 ‘야성(野聲)’이란 잡지를 펴냈다. ‘야성’에서 안병무는 예수를 팔아 생활방편으로 삼은 한국의 ‘삯꾼 목사’들과 교회 자체의 기회주의적이며 순응주의적인 자세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그는 서울 남산 약수터 아래에서 ‘향린원(香隣院)’이라는 평신도 신앙공동체를 결성했다. 재산을 공동소유하며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무소유적 삶의 형태를 꿈꾸던 이 신앙공동체는, 그러나 결혼과 가족중심 사회제도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평신도 중심의 일상적 교회에 머물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었다. 서울 명동에 자리 잡은 향린교회의 전신이 바로 안병무가 세운 이 향린원이다.

    안병무는 향린교회를 가리켜 ‘본래 호랑이를 그리려 했는데, 그만 고양이를 그리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안병무는 46세에야 결혼했다. 상대는 YWCA 총무를 맡고 있던 박영숙이었다. 안병무는 주위사람들에게 “46세에 늦장가를 가니 하나 좋은 점은 있더라”고 했다. “감옥 갔을 때 면회 올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농담 삼아 말한 것이다.

    불트만 신학을 만나다

    1956년 안병무는 개혁신학의 본고장인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럽에 도착해 먼저 덴마크에 있는 키에르케고르의 묘소를 둘러봤다. 유학기간을 통해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 몰두하는 한편, 신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실존주의 신학은 그 후에도 안병무 신학의 아우라였다.

    안병무는 사도 바울의 실존을 과거 속의 자기와 미래 속의 자기라는 두 지평에서 이해,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 한 것으로 해석했다. 바울에게 ‘현존’은 과거의 소유를 버리고 새롭게 얻으려는 미래의 틈새에 있는 무엇이다. 과거에서 탈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탈존(脫存)’과 ‘향존(向存)’, 그리고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yet not)’ 사이의 존재가 바로 ‘현존’인 것이다.

    과거의 소유에 얽매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리는 ‘도상(途上)의 존재’에서 안병무는 신앙인의 참모습을 보았다.(안병무, ‘성서적 실존’, 한국신학연구소, 1982)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 이야기에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 삶을 보았고, ‘출애굽기’를 통해 유목민의 탈향적(脫向的)인 삶의 전형을 읽어냈다.

    안병무

    아카데미하우스 세미나에 참석한 안병무 교수.

    복음서에서 단편적으로 읽을 수 있는 예수의 삶에서 안병무는 고독한 실존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예수는 하루 종일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다가 날이 저물자 무리를 해산시킨 다음 산으로 올라가 홀로 지냈다. 예수는 틈만 나면 인적을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홀로 있음은 기도하기 위해서였으며, 텅 빈 나를 직시하면서 자신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불트만은 교리주의적이며 관념론적인 성서 해석에 맞서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했다. 불트만은 성서를 신앙교리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초대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고백서로 보았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실존에 관한 물음’이 예수라는 한 인물에게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현존하는 하느님을 내세워 “신학은 인간학이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안병무는 불트만에게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복음서 속 예수의 발자취를 탐색하는 작업에 소홀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불트만이 역사적 예수사건보다 초대 기독교인의 예수에 대한 부활신앙을 더 우위에 둔 점은, 불트만 신학의 결정적 한계라고 보았다. 안병무가 보기에 초대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이전에 예수의 민중사건이 있었으며, 중요한 것은 이 민중사건이었다.

    “민중이 내 눈을 뜨게 했다”

    1965년 안병무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0여 년의 독일유학 생활을 끝냈다. 2년 뒤인 1967년 ‘동베를린 사건’이 발표되자, 안병무는 오로지 독일에서 유학했다는 이유만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수모를 당하고 고생을 했다. 1969년엔 중앙신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김재준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반대 범국민운동에 앞장섰다. 1969년에는 또 ‘현존’이란 월간 신학지를 발간,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해 새로운 신학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 안병무는 한국신학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신대 재직 중 전태일 사건이 일어났다. 안병무의 삶과 신학의 지형이 실존주의에서 민중신학으로 180도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 11월 박 정권은 민주회복을 위해 반정부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제적하지 않으면 한신대 교수들을 해임하겠다고 협박했다. 김정준 학장은 예배설교 도중 강단에 있던 교기(校旗)를 면도칼로 찢으면서 거세게 분노했다. 안병무와 교수, 학생들은 삭발한 채 40일 동안 릴레이식 기도회를 열었다. 민주화와 인간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 때마침 흰 고무신에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논어’를 강의하러 왔던 함석헌도 삭발에 동참했다.

    마르크스는 기독교를 “눈물의 골짜기인 이승에 대한 성스러운 가상”으로 보고, 이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판했다. 카우츠키는 예수를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지도자로, 슈바이처는 철저한 종말사상가로 그렸다. 각자의 철학적 견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 것이다.

    안병무는 서구의 정통신학이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민중에게 아무런 해답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통신학은 그리스도를 세상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 고백하거나(신정통주의 신학),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 신앙보다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 더 무게중심을 두어 기독교가 공공성을 상실한 채 ‘개인의 사사로운 종교(자유주의 신학)’가 돼버렸다고 비판했다.

    전태일 사건 이후 안병무는 한신대 학생들과 함께 소외된 민중의 삶을 체험하는 현장 프로그램을 계획,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틈이 나는 대로 청계천의 영세 피복공장, 서울역 부근의 집창촌, 월곡동 달동네, 성남의 빈민촌, 인천과 안양, 부평 등지의 공장노동자들을 찾았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채 ‘국민의 영토’ 바깥으로 퇴출당한 이들 뿌리 뽑힌 삶을 찾는 가운데, 안병무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민중을 새롭게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는 고난 받는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새롭게 읽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두고 “민중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고백했다.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1986)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둘러싼 ‘무리’를 ‘오클로스(ochlos)’라고 부른다. 오클로스는 유대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가난한 사람, 날품팔이, 실업자, 세리, 죄인, 병자, 불구자, 맹인, 창녀, 귀신 씌어 고통 받는 사람, 눌린 자, 포로 등 슬퍼하고 통곡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이들 오클로스(민중)를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며 이들을 “내 어머니와 형제자매”라고 선포했다.(‘민족·민중·교회’, ‘기독교사상’ 1975년 4월호)

    몰트만과의 신학논쟁

    1970년대에 들어오기까지 한국 신학계는 학문적 기반이 취약했고 세계 신학계와의 교류도 영성(零星)했다. 안병무는 불트만을 이은 보른캄의 제자였다. 함께 수학한 페르디난트 한 교수의 재정지원과 신학적 뒷받침을 받아 1973년 안병무는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계간 ‘신학사상’을 펴냈으며, 외국의 신학서적을 번역·출간하여 세계 신학의 흐름을 국내에 소개했다. 신학과 사회과학의 소통을 통해 신학의 인식영역을 확장했으며, 신학의 대중화에도 앞장섰다. 특히 연구소에서 출간한 ‘국제성서 주석’ 시리즈는 서구 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몰트만은 1975년 ‘희망의 신학’을 발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신학자다. 몰트만은 독재체제 아래서 민중의 편에 서서 민주회복과 인권을 위해 고투하던 한국교회의 민중선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민중신학을 주도한 서남동 현영학 김용복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신학적 논문들을 독일어로 번역, 세계 신학계에 소개하기도 했다.

    몰트만은 연세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신대에서 ‘민중의 희망 속에 있는 한국교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몰트만은 이 강연에서 전태일 사건을 비롯한 한국 민중의 고난과 희망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으로 해석,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안병무는 강연이 끝난 후 몰트만과 처음 대면했다. 몰트만은 뒷날 안병무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안병무 교수와 나는 빠른 시일 내에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그를 찾아갔다. 귄터 바움과 함께 나는 1984년에 한국 민중신학자들의 논문을 모아서 ‘민중, 한국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신학’이란 책을 편집하여 (독일어로)출판하였다.”(몰트만, ‘갈릴래아의 예수와 안병무’, 한국신학연구소, 1998)

    몰트만은 안병무가 ‘마가복음’에서 ‘오클로스’를 발견, 민중을 신학의 주요 과제의 하나로 떠올린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해방신학에 관심이 컸던 몰트만은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 민중신학을 남미 해방신학의 지점에서 재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병무의 민중구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민중구원론이 자칫 민중을 우상화할 수 있음을 경계, “민중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적 사항이지, 결코 민중 자신의 선택사항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몰트만의 이러한 주장에는 ‘외계인 그리스도’ 사상이 전제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마치 우주의 어느 혹성에서 온 외계인이 인간을 구원하듯이, 민중을 구원할 분이 외부로부터 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을 분리해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예수 자신의 삶이 곧 민중의 고난과 해방의 삶이라고 주장했다. 민중구원론에서 민중은 단순히 수동적이고 무력한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민중 또한 예수와 함께 역동적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몰트만은 혹시 안병무의 민중구원론에 자율성과 타율성의 변증법적 통일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간과했던 게 아닐까.

    안병무 자신은 민중의 개념규정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의 교차’ 같은 ‘마주침’이었다. 특별한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찰나적 ‘만남’, 그것은 섬광과 같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유언비어, 예수사건의 전승양식

    민중신학이라는 개념을 학문적으로 제기한 사람 중에 서남동이 있다. 서남동의 별명이 ‘신학의 안테나’였다. 세계 신학계 동향을 소개하는 데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는 이유에서 붙은 별명이다. 1960년대 이후 서남동은 본회퍼, 불트만, 테야르 드 샤르댕,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 진보적인 서구 신학자의 사상을 국내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남동은 기독교의 민중 이야기와 한국역사의 민중 이야기가 1970년대 민중사건에서 합류한다는 상상 안에서 전태일 사건과 김지하의 옥중 구상 ‘장일담’을 떠올린다. ‘장일담’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지하가 옥중에서 구상한 극작으로, 이 작품을 통해 김지하는 민중과 종교의 혁명적 통일을 형상화했다.

    장일담은 백정 아비와 성매매 여성 어미에게서 태어난 도둑의 이름이다. 장일담은 어느 날 깨달은 바가 있어 의적이 되고 혁명을 꾀한다. 그러나 결국 반공법 국가보안법 내란죄로 목이 잘린다. 장일담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 억압받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된다. 김지하에게서 발신된 이 민중사건의 메시아성(性)은 서남동에게 깊은 공명을 일으켰다.

    1975년 봄 학기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로 시작됐다. 그해 6월 안병무는 문동환과 함께 독재타도,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한신대 학생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해직됐다. 이들 외에 서울대 한완상, 연세대 김찬국·서남동, 고려대 이문영, 이화여대 현영학 교수 등이 해직됐다. 교수직을 박탈당한 안병무는 ‘거리의 신학자’로 민중에게 한걸음 더 다가갔고, 이들 해직교수들과 함께 갈릴리교회를 세웠다. 갈릴리교회는 갈릴리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 교회를 통해 신자들은 소위 ‘유비통신(유언비어로 퍼진 소식)’을 공유했다.

    안병무의 대표적인 논문의 하나인 ‘예수사건의 전승모체’(‘신학사상’ 1984년 겨울호에 게재)는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이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민중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안병무는 예수사건의 전승양식이 유언비어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이 논문에서 주장했다. 그는 경험의 유사성에서 기억의 유사성을 찾아냈다. 안병무에 의하면 로마 식민지 지배세력이 예수 처형 사실 유포를 막기 위해 ‘포고령’을 내렸고,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는 은밀하게 쑥덕이며 예수 처형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그들이 본 예수와 그의 처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르코복음’은 안병무가 보기에 오클로스가 기억해낸 사실을 토대로 한 텍스트였다. 따라서 안병무는 예수에 관해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예수 개인이 누구였는지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그 주변 민중이 일으킨 사건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사건을 통한 예수 이해는 역사적으로 가능하며, 이런 역사적 가능성에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기반을 두고 있다.

    종래까지 서구의 어떤 신학적 담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이고도 자생적인 신학이론이 이렇게 해서 생성되었다. 신학적으로는 가위 전복적인 이론이었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안병무는 성서에서 ‘민중’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존재의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들은 ‘민중’으로 불림으로써 비로소 ‘꽃’이 될 수 있었다.

    절망과 꿈이 담긴 메시지

    민중의 비공식적인 대화 나눔이나 귀엣말을 유언비어로 볼 때, 이런 유언비어는 민중의 동선을 따라 전파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기억을 말하면 다른 이가 이에 동조하거나 상반된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다듬어진 이야기 구조를 갖고 전개됐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서사는 집단적인 기억이 되며, 한편의 예수 이야기 유형을 만들어내면서 전승되어갔을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다. 민중의 예수사건 이야기는 전기작가의 사실적인 묘사나 보고서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전달자의 절망과 꿈이 함께 담겨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나눈 복음’이었다. 그 복음을 전파한 사람도 ‘예수와 민중’이었다.

    마셜 맥루한이 말했듯 “미디어는 메시지다.” 안병무는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로서 민중의 유언비어에 대해 상상력을 발동, 최초로 복음서를 펴낸 사람이 마르코라고 보았다. 안병무는 마르코로 인해 추상적인 복음말씀의 배후에 은폐된 예수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고 주장, 정통적인 서구의 신학체계를 뒤집는 도전적 선언을 했다.

    안병무에게 민중신학은 이제 ‘사건의 신학’이 되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사건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이면서 ‘민중신학의 기초’라며, 안병무는 종래의 신학과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놓았다.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이었다.(‘민중과 성서’)

    “민중신학이 탄생한 것은 물론 유신체제하에서였고, 민중신학을 말하려고 하면 유신체제하에서의 한국 민중의 상황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렇지만 민중에 대한 가슴에 사무친 생각은 일제시대로, 저 간도에서의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민중에 대한 나 자신의 관심은 그러한 뿌리를 가진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신학적으로 개화한 것이라고나 할까요?”(‘민중신학을 말한다’)

    그런데 안병무에게 중요한 것은 ‘민중이 누구냐’가 아니라 ‘민중을 어떻게 만나느냐’였다.‘마주침’ 바로 그것이 중요했다. 민중은 관조의 대상일 수 없다. 민중은 구경꾼에게는 가려져 있다. 민중은 민중사건에 참여할 때만 비로소 그 실상을 보여준다. 안병무는 전태일도, 김상진도 ‘누구냐’ 혹은 ‘무엇이냐’ 묻지 말고 “보라!”고 할 뿐이다. “불타는 저들을, 저 몸을 보라!” 할 뿐이다.(‘역사와 민중’)

    1978년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라는 글에서 안병무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자신의 삶과 신앙, 그리고 과제를 고백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 그것은 ‘역사 앞에 민중(이웃)과 더불어’다. 역사라고 쓴 말은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다. …민중은 물론 바로 ‘역사’의 실체다. …‘민중과 더불어’는 그런 뜻에서 ‘역사 앞에’와 동의어일 수 있으나, ‘앞에서’와 ‘더불어’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주객의 어느 한 입장에 서서는 안 되고, 역사적 연대성과 책임성에서 ‘나’라는 달팽이집 같은 것에 칩거해버릴 수 없고, 오직 행동이 있을 수 있는 숙명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3·1민주구국선언, “기껏 동메달?”

    1976년 3월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는 천주교 사제단이 공동 집전하고 2000여 명의 신·구 교회 관계자 및 신자가 참석한 가운에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이어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정일형 문동환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이우정 등이 서명한 ‘3·1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됐다. 민주주의 회복, 민중의 생존권 보장과 경제적 평등, 민족의 평화적 통일 등이 핵심이었다. 검찰은 이 선언을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선동사건’으로 몰아 관련자들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기소했다.

    유신체제의 암흑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이 사건의 파장은 국내외적으로 심대했다. 전직 대통령 윤보선과 제1야당 대통령후보, 현역 정치인, 함석헌 등 재야 원로, 교수, 신·구 교회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된 사건이었으니, 당국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대했을까는 짐작할 만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재야 민주세력이 연합·연대했다는 점이다.(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창비, 2005)

    함석헌은 재판과정에서 하나님의 법정, 역사의 법정에 선다는 각오로 베옷을 입고 나왔다. 사건 관련 가족들은 보라색 옷을 입고 나오거나 입에 테이프를 붙인 채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피고인들은 최후진술에서 적어도 학생들보다는 무거운 형을 달라고 요구했다. 1심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은 안병무는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나는 금메달을 기대했는데 기껏 동메달을 주느냐?”고 항의(?)했다.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된 뒤 안병무는 한신대에 복직했다. 그러나 1980년 봄은 짧았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한 뒤 안병무는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죄’에 연루돼 한신대에서 다시 쫓겨났다. 그 후 서울지역 해직교수협의회가 결성됐는데, 안병무가 산파 노릇을 했다. 그 무렵 해직교수들은 수유리에 있던 그의 자택에서 자주 만났다. ‘전국 해직교수 합동 시국선언문’ 작성을 위해 안병무의 집에 모일 때 일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진균 교수는 안병무의 부인 박영숙의 음식솜씨를 잊을 수 없다고 술회했다.

    해직교수로 안병무와 가깝게 지낸 변형윤은 안병무와의 재미있는 대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기독교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한테 기도를 하면 모든 일을 다 이룰 것 같은데, 기독교인들은 왜 죽지요?”하는 변형윤의 다소 짓궂은 질문에, 안병무가 “그 양반 요즘 너무 바쁘셔서 통화가 안 돼요. 통화만 된다면야 문제없지요”하고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는 것이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아 죽음에 이르렀다. 전국적으로 데모의 물결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때마침 고려대 근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서강대 정양모 신부와 함께 시위물결을 지켜보던 안병무가 말했다. “정 신부님, 보세요. 2000년 전 예수의 부활사건이 재현되고 있어요.” 전태일 사건, 박종철 사건, 이한열 사건 등 독재정권 아래서 장렬하게 희생당한 이들 속에서 안병무는 예수의 부활을 현재진행형으로 체험했다.

    1988년 12월, 안병무는 전두환 정권 때 폐간된 ‘현존’을 ‘살림’으로 바꿔 재창간했다. ‘죽임을 넘어’라는 부제가 붙은 ‘살림’은 동시대의 사회구조적 위기가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체감되지 않는 문화를 ‘죽임의 문화’로 보고, 그것을 반(反)생명이 은폐된, 생명친화를 가장한 위선의 문화라고 규정했다. 안병무는 죽임의 문화에 맞서 ‘살림의 신학’을 기획했다.

    ‘실존적으로 번안된 고통’

    만년의 안병무는 불교의 공(空), 도가의 무위(無爲)사상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들 동양사상에서 ‘존재의 침묵’을 깨달았다. 공이나 무위는 안병무에게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기초가 된다. 기독교의 창조신앙도 ‘비어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안병무는 예수의 십자가형 앞에서의 침묵에 대해서도 골똘히 파고들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이 언어로 표현되지 않고 ‘빈 무덤’으로 상징되는 데 주목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길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은 로고스의 신학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였다. 만년의 안병무는 동양사상의 지평에서 이러한 문제에 매달렸다.

    1996년 1월 첫 주일 안병무는 향린교회에서 ‘산상에서 만난 새로운 한 분’이라는 제목으로 생애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다. 유언설교나 다름없었다. 그날 설교의 끝 부분은 이랬다.

    “…어쩌다 내 인생에 주어진 중심테마가 ‘예수만’이라는 것이 되었나 하고 생각하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사상적인 혼란이 왔을 때도, 어떤 현실적인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는 예수만을 찾으리라! 그만 붙잡고 가리라! ’ 이것이 내 인생의 재산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따르려면 본격적으로 그를 붙잡고, 그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은 놓치지 마세요. 끝까지 이 십자가만은 붙잡아야 합니다.”

    1996년 여름 이승을 떠나기 두 달 전 안병무는 평생 그리워하던 간도 땅을 밟았다. 61년 만의 귀환이었다. 얼마 후 안병무는 하얀 세마포(細麻布) 옷을 입고 천사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해 10월19일, 그는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평생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삶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다. ‘유목민적 삶’을 살다 간 평생이었다.

    안병무
    윤무한

    1943년 대구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2004년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와 한백교회는 공동으로 ‘안병무 다시 읽기’ 작업에 들어갔다. 차정식 김진호 황용연 최형묵 이정희 등은 이 기획을 이렇게 정리했다.

    “안병무 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기 시대의 문제의식에서 신학적 사유를 출발한다는 데 있다. 이때 ‘자기 시대의 문제의식’이란 역사적·사회적 고통의 구조를 신학자 자신의 아픔으로 읽는 ‘실존적으로 번안된 고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안병무 다시 읽기’ 작업은 우리 시대의 구조를 아픔으로 읽는 ‘민중신학자의 눈’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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