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중국 민주화는 한국 통일의 지름길”

  • 이혜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09-03-09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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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집 단무지 냄새가 나는 가리봉동, 그곳에 중국동포교회가 있다. 번듯한 간판이 있어 큰 교회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보니 지하 작은 공간이다. 그곳에 중국민주화인사라는 사람이 앉아 있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얼굴의 그이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4시간(1월29일) 동안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다음날 그만큼 묻고 또 묻는데도 그 소 같은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사진 장승윤기자

    언뜻 봐도 얼굴이 부어 있는 우전룽(武振榮·60)씨. 그는 한 끼만 먹는 날이 많다. 서울 가리봉동 단칸방에 동료와 같이 살며 매일같이 라면을 먹는다. 운 좋은 날엔 교회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그는 온종일 방에 앉아 인터넷을 연결하곤 자판을 두드린다. 그간 자신이 지은 책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중국 공안에게 적발될까 염려해 땅에 묻어놨기 때문인지 그가 지은 책에선 묵은 흙냄새가 난다. 일본에서 중국민주화운동하는 친구가 보내준 노트북은 더없이 요긴한 존재다. 덕분에 자다가도 문장 이 떠오르면 쉬이 적어놓을 수 있다. 인터넷으로 글을 쓸 때마다 그런 (중국민주화 관련) 사이트(boxun. com 등)를 차단하지 않은 한국 정부에 고맙다.

    생활방편으로 건설 현장을 전전했지만 연로한 그에게는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밥 먹자고 타향살이하는 게 아닌 그에게는 저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간 지은 책의 내용을 알리기 위해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가. 인터넷으로 올린 글에 대해 여기저기서 원고료라며 보내오는 돈이 많진 않지만 식량 살 만큼은 된다.

    지난해 11월14일, 중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난민지위판결(대법원)을 받은 다섯 사람 중 하나인 우전룽은 들떠 있다(국내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한 외국인은 2100명이지만, 실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95명이고, 그중 중국인은 이들 5명뿐이다. 이들은 중국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다).

    “법무부에서 파기한 걸 대법원에서 인정해줬습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은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법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만약 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서 안 받아주는데, 그럼 본국으로 송환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법무부가 발급한 여행증으로) 자유로이 외국도 갈 수 있게 됐으니, 정말이지 이제부터 민주화의 빛이 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그동안에는 해외에서 나를 민주화인사로 초청해도 외국에 갈 수 없어 화상으로만 교류했는데 이젠 어느 곳이든 가서 중국 민주화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위협받는 난민

    그가 빛을 보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 2002년 11월12일 한국에 입국한 그는 4년 만에 법무부로부터 ‘난민 불허 판정’(2008년 1월)을 받았다. 출입국관리소에서 3개월마다 난민 신청을 하며 체류를 이어왔던 그는 더는 버틸 근거가 없게 됐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7일 이내 항소하지 않으면 본국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말을 들어서다.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에 대한 중국의 처벌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기 때문에 겁이 났다.

    실제로 이들보다 먼저 중국 공산당에 공개편지를 쓴 산시(陝西)성의 조씨는 5년형을 받아 수감돼 있고,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 회원인 양씨는 2002년 귀국해 중국동북공인운동을 이끌던 중 중국 공산당에 체포돼 역시 5년 실형을 살았다. ‘국가법을 무시하고 불법 창당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해외 적대분자와 불법자들과 연락해 공연히 당을 조직하고 계획하면서 국가정권을 전복하는 활동을 해 국가정권전복죄를 행했으므로 유기형 4년과 2년간의 정치권 박탈을 선고한다’는 판결을 받은 여씨(2001년 3월)도 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난민고등판무관 한국지부로 달려가 변호사협회를 소개받고, 수소문 끝에 한국 변호사와 연결됐다. 그렇게 서울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대법원을 거쳤고,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법무부 견해는 “뚜렷한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돼도 문제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가 한 달에 2만원씩 회비를 모은 것도 석연치 않다고 보았다. 간간이 만나는 법무부 직원들은 그에게“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위해서도 난민 지위를 주긴 곤란하다”며 외교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미 자살하려고 유서까지 써놓은 처지라 우전룽은 겁이 나지 않았다. 3개월마다 난민 신청을 연장하러 가는 게 도리어 귀찮아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운한 건 있었다.

    법무부가 ‘28년간 쏟은 땀의 산물’인 자신의 저술활동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평범했던 일상. 다음은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기자가 정리한 우전룽의 일생이다.

    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 1965년

    1949년에 태어난 나는 중학 졸업 전해 ‘강호협객’이란 제목의 글을 매일같이 써서 친구들 앞에서 읽어주다 벌을 받게 됐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협객’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난 2주간 비판을 받았는데, 정풍운동이 일어 자유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때여서 비판의 강도가 더 심했다. 교사들은 생각의 독을 없애야 한다면서 질책하고,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타 지역에 가서 세수를 하니 피부가 더 좋아진다고 말한 아이’는 ‘자유사상의 소유자’라는 이유로 추방되기도 했다.

    학교에선 날 집에 못 가게 하고 가둬둔 채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겁 많은 나는 선생님과 학생이 퇴출되는 걸 보고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남 탓을 했다. 토지개혁운동(50년대) 시절 역사반혁명분자 판결을 받은 작은아버지, 공산화되기 전 국민당의 촌장이었던 외삼촌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다. 그 뒤부터는 진실한 생각을 발표하면 혼날 것 내 안에 같아 감추며 살았다.

    ■ 1967년

    문화대혁명 시절 나는 홍위병(조반사령부에서 정치위원)이었다. 난 진심으로 활동했다. 문화대혁명으로 학교가 파괴돼 공부할 데도 마땅찮은데다 당시 겨우 초중(한국의 중학교)을 졸업한 나로서는 ‘대분화, 대와해, 대개조’라는 3대 구호가 마음에 들었다. 이 구호를 통해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없애자는 말도 나와 내심 기뻤다.

    그러나 홍위병이 둘로 나뉘며 갈등이 시작됐다. 소수파이던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런데 다수파 사람들이 자꾸만 와서 회유했다. 내가 천안문 광장에 가서 마오쩌둥을 보고 온 리더급이었기 때문일까. 난 다른 견해를 가진 조직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 싫어졌다.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다음, 공산당을 비난했던 공산당지부위원회의 한 사람인 학교당지부 서기관이 도끼로 자신의 골을 찍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금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1968년

    그렇게 진행되는 문화대혁명이 싫어서 인민해방군에 지원해 정치교관으로 근무했다. 문화대혁 때는 전 중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진학할 수도 없었다. 당시 초중(중학교)만 졸업했는데도 지식층으로 인정해줬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현실에서 19년간 도피한 셈이다. 대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교관에겐 자유 시간과 개인 공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연구할 여유는 얼마든 있었다. 게다가 감시도 소홀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헤겔, 칸트 같은 고전을 읽고, ‘문화대혁명은 양당제를 포용하지 못하므로 실패한 것’이란 내용의 글도 썼다. 그러나 후폭풍이 무서워 글을 쓰면 땅속 깊이 파묻었다. 이것이 무용지물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의견을 개진할 날이 올 거라 믿었다.

    ■ 1987년

    ‘장제스 국민당’ 출신이자 동향인 사람(브라질 국적 소유자)을 소개받았다. 그를 따라 브라질에 가면 기존에 내가 써놓은 책을 얼마든지 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운이 없어 그 사람의 사업이 갑자기 잘못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됐다. 결국 난 산시성 기계연구원이 돼 기존의 일을 계속 하기로 했다.

    ■ 2002년

    자식 사업을 도와주다 이렇게 해서는 내 책을 영원히 출판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홍콩의 유명 사회과학서적 출판사에 편지를 부쳤다. ‘내 책은 양심의 소리인데, 중국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출간이 가능하겠느냐’는 게 요지. 혹시 몰라 가명으로 보냈다. 그날이 2002년 2월15일이었다. 3월14일, 기다리던 답장은 안 오고 국가안정국 공안들이 연거푸 찾아왔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단 걸 알았다. 일이 악화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내 말을 듣고 가족은 울기 시작했다. 그날 이 말을 하고 나와 지금껏 가족을 만나보지 못했다.

    “울기는 왜 울어, 망하면 나 혼자 망한다, 걱정마라.”

    ■ 2002년 11월

    이후 난 한국행을 택했다. 가까운 데다 민주화가 잘된 나라라고 여겨서다. 한국에 온 목적은 ‘중국 민주화 23개 조항’ 서안문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 서안엔 ▲일당제가 아닌 다당제가 돼야 한다 ▲언론 개방하라 ▲국민에게 자유를 돌려달라 ▲재야 정치범을 석방하라 ▲당내 민주화 실현돼야 한다 ▲군대는 공산당의 소유물 아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인사라 나를 만나줄 거라 믿었다. 다섯 번 죽다 살아남고 6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10년간 망명한 분이지 않은가. 그래서 청와대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중앙 일간지에서도 우리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프랑스대사관에서도 정치망명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경찰서 조서를 받은 끝에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난민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004년 3월18일 이후

    그때부터 지금까지 360편 정도의 글을 인터넷에 발표했다. 기존에 있던 것을 정리해 옮기기도 하지만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 얼마 안 돼 다시 쓰는 경우가 많다. 운 좋게 이곳저곳에서 인정을 받아 중국 민주화를 이끄는 지도자 100인에 뽑히기도 했다. 다만 그 인터넷 사이트는 폐쇄돼 증명할 수 없는데 당시 화면을 출력한 것은 보관하고 있다.

    반체제인사 웨이징성이 이끄는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 한국지부장을 맡아 6·4운동 기념 규탄식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 조직은 해외에서 중국 민주화운동을 하는 가장 큰 조직이다. 연고가 없어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다행히 중국동포 교회의 도움을 받아 난민 인정 소송을 진행하며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다.

    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땅에 묻어놓았다 어렵게 찾아온 우전룽씨의 원고.

    1951년 제정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선 난민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난민이라 함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합리적인 우려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그러한 우려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 국적을 가진 자 또는 종전의 상주국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그러한 우려로 인해 상주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자를 말한다.”

    우전룽의 변론을 맡았던 조영선 변호사(법무법인 동화)는 중국인도 얼마든지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난민 인정을 받은 것은 민주화운동으로 중국에서 박해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 참여자 50여 명이 함께 난민 신청을 했지만 그 사람들은 당시 운동만 한 정도였다. 다만 우전룽씨는 저술 활동과 지부장이라는 반정부 행동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가 집필한 내용의 질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일단 그런 의견을 개진한다는 점에서 처벌받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으므로, 보호해줄 필요가 있다.”

    편안히 여생을 즐겨도 되는 나이에 민주화를 위해 고생하는 이유는 뭘까 싶다. 억눌렸던 그 무엇을 감추고 살기에는 그 무엇이 너무도 소중한 걸까.

    2003년, 천안문 사태 14주년을 맞아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할 피켓을 만드는 우전룽(가운데).

    우전룽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한국지부 부장이 보내온 원고

    내가 한국에 와서 난민신청을 한 이유는 중국에는 경제적 자유(먹고사는 자유)는 있지만 사상과 출판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청년 때부터 나는 중국의 민주운동을 연구했고 2002년 11월12일 한국에 오기 전까지 약 30권 분량의 원고를 썼다. 이 원고는 내 영혼이 28년간 쏟아낸 작품이다. 그런데 나의 조국 중국에서는 한 글자도 출판할 수 없었다. 출판되는 순간 나의 인생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법무부는 이런 나에게 ‘난민인정 불허’라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나는 이 결정에 불복해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통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인터넷을 만나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내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이 암담한 상황에서 나는 위대한 무기를 만났다.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나의 민주사상을 전세계로 전하는 문명의 이기였다. 이 기간에 나는 한국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렸다. 무슨 자유인가?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자유다. 인터넷을 통해 나는 그동안 가슴에 담고 있던 민주사상을 전세계를 향해 확산시켰다. 중국민주운동에 관심을 가진 해외 및 중국 내부 중국인들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나 자신 이제 중국민주운동의 주요인사가 되었다. 미국에 있는 주쉐위안 선생과 홍콩에 있는 張三一言 선생 같은 분들은 나의 사상과 이론을 높게 평가한다.

    나는 중국민주운동을 하면서 이론과 사상을 주로 연구했고 저술을 통해 중국민주운동을 고취시키고 있다. 중국에도 민주운동의 전통이 있다. 100여 년 전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한 무술유신(戊戌維新)이다. 그 후 국민당이 이끈 신해혁명, 공산당이 이끈 농민혁명이 있다.

    1949년 정권을 세운 중국공산당은 민주적 제도를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전제주의적 공산당 일당 독재정치를 만들었다. 결국 중국에는 민주적 진행과정이 멈추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60년 통치한 기간에도 간헐적으로 민주운동은 일어났다. 1957년 지식인의 명방운동(鳴放運動: 마음에 있는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자는 운동), 1966년의 조반운동(造反運動), 1976년의 제1차 천안문운동, 1979년의 자유화운동과 1989년의 6·4운동은 중국민주화를 어느 정도 진전시켰다. 하지만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중국의 민주화가 실현되는 날 앞서 말한 민주운동들은 빛을 발할 것이다. 나는 이런 환경에서 중국의 민주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면 중국은 왜 민주가 필요한가? 부의 분배문제 때문이다. 중국은 현재 0.4%의 인구가 70%의 재부(財富)를 점유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 대단히 위험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선진국을 보라. 선진국은 5%의 인구가 재부의 50~60%를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로 볼 때 나는 이미 중국사회가 ‘고(高)위험’에 들어섰다고 예견했다. 만일 민주제도를 통해 이 상황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중국엔 대동란(大動亂)이 발생할 것이다. 이건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아울러 중국의 정신적, 도덕적 타락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사회엔 돈만 번다면 다른 사람은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독이 든 분유사건(멜라민)을 생각해보라. 독을 음식물에 넣어 판다. 중국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먹기가 무섭다. 독이 든 기름, 독이 든 쌀, 독이 있는 채소 등. 가짜 약, 가짜 술, 가짜 음료수가 도처에서 팔리고 있다. 중국제품은 현재 전세계에 공포를 주고 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중국공산당

    그뿐 아니라 쓰촨성 지진 때 학생들을 놔두고 혼자 도망간 교사, 인민대학교의 깡패 교수, 부패한 공산당 관리들이 있다. 사법기관은 흑사회(깡패)와 결탁하고 심지어 불교성지도 음란한 장소가 되었다. 중국엔 이미 엄중한 도덕위기와 문화위기가 발생했다. 사람들의 행위가 법도를 떠났고 물질적이고 육체적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사람들의 이성능력은 동물성(動物性)에 굴복하고 심지어 마귀성(性)에 굴복하고 있다. 이런 사회환경이 보편적이고 심각하다. 내가 아는 중국인민대학교 부교수 유리화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을 잃은 중국인의 전체 상태는 단순화, 동물화, 마귀화되었다. 인간을 물건으로 본다.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영역 등 처처가 다 이렇다. 중화민족은 자기의 민족신분과 본래 면목을 상실했다.”(유리화의 ‘중국 현재의 문화위기’강의 원고. 한마디로 중국공산당은 중화민족의 아름다운 도덕, 정신 그리고 문화를 파괴하고 압살시킨 것이다. 북한이 북조선 인민의 정신과 도덕 그리고 문화에 끼친 파괴적 해악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을 누가 정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가.

    현재 중국공산당의 통치는 이미 중국 사회의 이런 중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다만 공산당은 모든 것을 억압의 방식으로 통치한다. 총과 칼로 인민의 입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숨이 끊어져가고 있다는 신호다. 나는 한국인에게 말하고 싶다. 대다수 한국인은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을 이해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국 내부에 존재하는 위기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중국민주화는 한반도 통일의 지름길이다. 한국인의 가장 큰 소망은 한반도 통일이지 않은가. 한반도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이어야 한다. 공산중국은 절대 북한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이 민주화되면 한반도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 없어지며 동시에 가짜 사회주의 봉건왕조인 북한의 권력집단도 붕괴되고 자유와 민주 체제가 된다. 이후 민주중국과 민주통일한국은 민주와 자유, 그리고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가치동맹이 되어 중국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누리게 된다. 나아가 민주중국, 민주통일한국, 민주미국이 가치동맹으로 서로 손잡고 아시아와 전세계의 억압적 정치와 독재정치를 몰아내고 자유와 인권을 확대할 수 있다. 나아가 민주중국은 통일한국이 세계 7대 강국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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