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원세훈 신임 국가정보원장

‘국정원 개조’ 위해 투하된 ‘MB-2’스마트 폭탄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9-03-10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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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세훈 신임 국가정보원장

    2월10일 국회 정보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원세훈 국정원장 후보자가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기자에게 인물기사를 쓰기 가장 어려운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캐릭터가 복잡해 까다로운 경우도 있겠지만, 더 곤란한 케이스는 친구가 거의 없는 인물이다. 그가 누구인지, 개인적으로 어떤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 말해줄 사람이 드문 인물, 원세훈 신임 국정원장은 그 극단적인 사례에 속한다. 한 국가정보원 관계자의 말이다.

    “신임 수장이 내정되면 어느 부처든 그와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나서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정말 하나도 없다. 신임 원장 성격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오죽 혼자 움직이는 걸 좋아하면 ‘원 따로’라는 별명이 관가에 좌악 퍼졌겠나.”

    ‘원 따로’라는 별명은 경북 영주에서 출생한 원 원장을 빗대어 서울시 공무원들이 처음 붙인 것. 대구지방 음식으로 유명한 따로국밥과 그의 출신지인 TK를 엮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와 친분이 있음이 확인되는 사람은 서울대 법대 동기인 양창수 대법관 정도다. 서울시에서 수십년을 함께 근무한 인사들이나 그의 측근으로 분류되며 동선을 공유해온 인사들조차 그가 주말에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흡사 사생활이 없는 인물 같은 느낌이 들 정도. 그의 캐릭터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1974년 이래 30여 년간 이어진 공직생활이 전부다.

    그는 전형적인 ‘얼리버드’다. 오전 7시면 출근하고 늦어도 저녁 8시 전에는 퇴근한다는 것이 함께 일했던 이들의 설명이다. 퇴근 후에는 비서실에서도 어디를 갔는지 잘 모를 정도로 의전이나 격식과는 거리가 멀다고도 한다. 그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 일이다. 당시 부시장이던 원 장관이 퇴근 후 술자리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술 마시고 싶으면 마셔라, 대신 아침에 시장님 나오기 전에 일찍 출근해라.’ 솔직히 사람이 그게 되겠나. 한마디로 마시지 말라는 얘기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서울시에서든 행정안전부에서든 부하직원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면서 폭탄주를 나누는 식의 술자리는 거의 갖지 않았다는 원세훈 원장은, 식사자리도 회식보다는 한두 사람을 ‘찍어’ 함께 밥을 먹는 스타일이다. 쉽게 말해 밥이나 술로 조직의 화합을 도모하는 전통적인 ‘보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기자들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출입기자를 대형음식점에 초대하는 식의 간담회는 손꼽을 정도. 필요하면 출입기자 대신 알고 지내는 언론계 인사를 한두 명씩 만나 자리를 갖곤 한다는 것이다. 술을 마셔도 맥주 한두 잔. 골프도 칠 줄은 안다지만 함께 골프를 쳤다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걸 보면 자주 즐기지는 않는 편인 듯하다. 사교성과는 담을 쌓은 인물인 셈이다.

    무서운 보스,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

    가장 흥미로운 점은 업무용 신용카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서울시 부시장으로 재직할 때도, 행안부 장관 재임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 업무 관계자들은 물론 부하직원들과 밥을 먹을 때도 개인카드로 결제하곤 해서 매년 수천만원이 카드대금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밥이나 술도 고급 한정식집보다는 맥주집을 주로 이용한다고. 자타가 그의 측근으로 공인하는 한 인사는 그의 이런 독특한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마디로 깔끔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두루두루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태도를 가장 싫어한다. 보고를 받을 때도 목적에 맞게 정확한 대책을 들고 와야지 이해관계자 모두의 의견을 대충 얼버무린 보고서는 호되게 꾸중한다. 워낙 무섭게 화내는 편이기 때문에 옆에서 보는 사람도 편치 않을 정도다. 업무도 마찬가지다. 두루 관리하며 큰 실수 없이 유지해나가는 식보다는 한 분야에 올인해서 끝장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런 독특한 캐릭터 덕분에 서울시 직원들 사이에서 ‘상사로서의 원세훈’은 그리 호감 가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부하직원들과의 스킨십도 많지 않고, 업무는 끝장을 봐야 하고, 화를 낼 때는 불같은 스타일이다 보니 무서운 상사였다는 소감이 많다. 함께 근무했던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라는 평이 가장 먼저 들린다. 99명이 그렇다고 해도 본인이 아니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서울시 고위직을 지내고 퇴직한 인사의 설명이다.

    원세훈 신임 국가정보원장

    2008년 6월29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김경한 법무부 장관과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 등 4개 부처 장관과 국무총리실장이 촛불집회 관련 긴급 담화문을 발표했다.

    “언젠가 모 시장이 산하기관 어딘가 말단자리에 인사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시장이 그를 불러 얘기를 꺼냈는데, 도저히 자리에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끝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 돈 적이 있다. 그 시장도 워낙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두 번 얘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른바 ‘잘나가는 공무원’과는 사뭇 거리가 멀어 보이는 캐릭터의 인물이 어떻게 해서 대통령의 최측근이 되고, 장관을 거쳐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수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다시 앞서의 전 서울시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MB와 닮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닮았다. 사교성 없는 무뚝뚝한 성격에서부터 올인해 밀어붙이는 일처리 방식, 아니면 끝까지 아닌 스타일까지. 심지어 부하직원을 혼내는 것도 비슷하지 않은가. MB도 누군가를 혼낼 때는 회의석상에 세워놓고 거의 나가라는 식으로 무섭게 깬다.”

    1974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원 원장은 재학 중이던 1973년 1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내무부 소속 사무관으로 초기 강원도에서 잠시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울시에서 일했다. 성동구청 도시정비국장과 강남구청장, 서울시 보건사회국장 등을 거쳤지만, 시쳇말로 ‘빵빵한 이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남구청장만 해도 부구청장 재임 중 구청장이 세무비리 사건 여파로 경질되면서 공석을 메워 3개월간 근무한 것이다. 서울대 법대라는 학력과 재학 중 행시 패스라는 화려한 출발에 비추어 보면 더욱 그랬다. 한 서울시 관계자의 말이다.

    “너무 똑똑해서 외톨이가 된 면이 있었다. 인간관계를 잘 관리해서 승진하는 스타일은 분명 아니었으니까. 원래 서울시 업무라는 게 날렵하고 예리한 분석력보다는 이것저것 두루 챙기는 관리능력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오히려 중앙부처에서 경력을 시작했다면 더 두각을 나타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원 원장과 30대부터 함께 일했다는 또 다른 서울시 관계자는 “계장 무렵만 해도 지금처럼 딱딱한 스타일은 아니었다”라고 회고한다. 유들유들하게 잘 웃고 호탕한 모습도 곧잘 눈에 띄는 성격이었다는 것. 이 관계자는 “도시정비국이나 강남구 등 민원인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자리를 거치는 동안 조심스러운 태도가 몸에 밴 듯싶다”고 말했다. 쉽게 생각해 맺은 인간관계가 비리나 수뢰로 이어져 상관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캐릭터가 달라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이력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은 1980년대 후반 총리실 지방행정담당관으로 파견 근무한 부분이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전인 이때는 총리실이 마치 시의회처럼 서울시의 예산과 조직을 견제, 감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조직과 예산을 다루는, 그것도 이왕이면 예산을 깎고 조직 비대화를 경계하는 업무를 이때 처음 본격적으로 맡은 그는 이후에도 이 분야에서 꾸준히 전문성을 쌓았고, 이는 1999년 서울시 행정관리국장 등으로 이어졌다.

    1999년 서울시의회 사무처장을 거쳐 2002년 1월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으로 임명됐던 그는, 6개월 후 이명박 시장 취임과 함께 서울시 안살림을 책임지는 기획예산실장으로 발탁됐다. 시장 취임 전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는 그가 이렇듯 갑작스럽게 요직에 임명된 것은 당시 서울시 직원들 사이에서 놀랄 만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고향이 같은 경북지역이라는 것 외에는 연결점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 그리고 그때까지 변변치 않았던 그의 이력은 이후 ‘잘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앞서의 퇴직한 서울시 관계자의 말이다.

    “업무 스타일이 그렇듯 조직 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오직 한 사람에게 꽂히는 스타일이다. 판단기준을 그 한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가 그제야 ‘임자’를 만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로 MB였다.”

    이듬해 행정1부시장에 임명된 후 그의 약진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 시기 청계천 복원사업과 시내버스 체제 개편, 상암DMC 등 이명박 시장이 강력하게 추진하던 주요사업을 예산과 조직개편을 통해 지원하는 것이 그의 핵심임무였다. 특히 4조8000억원에 달하던 서울시 지하철 부채를 절반 가까이 줄이는 수완을 발휘해 이명박 시장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통상 1년이 임기이던 부시장 자리를 이 시장 임기가 끝날 때까지 3년 반이나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시장 재임기간 그의 임무는 라인보다는 스태프에 가까웠다는 것이 서울시 안팎의 중론이다. 특정한 사업을 맡아 성과물을 내놓기보다는 인사와 예산을 틀어쥐고 1인자를 보좌하는 참모에 가까웠다는 것. 서울시 내부에서는 부시장 재임기간에 그가 세부사정까지 챙기기 어려운 이 시장을 대신해 인사문제를 거의 전적으로 책임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 과정에서 인사를 둘러싸고 뒷말이 남은 경우도 있다. 시장과 인사담당 부시장이 모두 TK 출신이다 보니 간부급 인사에서 영남권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중용됐다는 것이 그 골자다. 실제로 이명박 시장 재임기간에 이뤄진 3급 이상 인사에서 호남지역 출신자가 적은 것은 분명한 사실. 다른 지역 출신의 한 서울시 관계자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면서도 “납득이 불가능할 정도로 선을 넘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S라인’의 대표주자

    2006년 6월 이명박 시장의 임기종료와 함께 30여 년 공직생활을 중단한 원 원장은 그해 가을 미국 스탠퍼드대로 연수를 떠났다가 불과 두 달 만에 MB의 대선준비를 돕기 위해 귀국했다. 이후 2007년 한 해 동안 그는 상근특보 직함을 달고 대선과정에서 쏟아진 MB관련 갖가지 의혹가운데 상암DMC 등 서울시 관련 의혹 해명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게 원 원장을 긴 시간 취재해온 한 기자의 말이다.

    “행정뿐 아니라 정무분야 이슈에 대해서도 조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박근혜 대표 측과 경선 선거인단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을 무렵 직접 통화해‘양보하시라’고 조언하는 식이었다. 이후에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MB가 이렇게 말하더라’면서 편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눈다는 사실이 표나지 않게 엿보이는 식이었다.”

    원세훈 신임 국가정보원장

    2008년 2월19일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이명박 정부 국정운영에 관한 합동 워크숍’에서 국무위원 내정자들이 이명박 당선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의 대선 승리가 분명해지던 2007년 늦가을, 서울시 관계자 상당수는 청와대나 내각에 입성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들떠 있었다. 이 후보의 인재풀 가운데 행정이나 조직관리에 경험이 있는 이들은 사실상 서울시 그룹이 유일했고, 시장 재임 기간 중앙부처와 마찰이 적지 않았던 이 전 시장이 여러 차례 중앙부처 공직자들에 대해 탁상행정만 일삼는다고 비판한 것이 잘 알려져 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대표주자가 원 전 부시장이라는 점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S라인’의 선두였던 셈이다.

    원 전 부시장이 인수위 상근자문위원을 거쳐 새 정부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발탁된 것은 이런 서울시 인사들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원 장관을 소개하며 “공직사회의 새 바람을 위해 모셔온 분”이라는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실무추진 경험이 많지 않은 인사들 사이에서 원 장관의 행보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방향이나 계획 대신 실제 업무추진 방식에 포커스를 맞추는 식이었다. 특히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에게 공연히 친한 척하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대통령의 신임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이 굽히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마인드가 읽혔다. 그를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임기 말에는 총리까지 갈 수 있는 인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보고자 이력까지 통째로 외워”

    한 언론계 인사는 “MB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눈치인데, 자기는 그게 한눈에 보이더라는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스치듯 한 이야기의 행간을 다른 이들이 읽지 못하는 것에 무척 답답해하는 눈치였다는 것.

    민감한 사안에 대해 ‘대통령과의 직접 소통’을 드러내는 행동방식은 행안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차이가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2008년 5월 불거진 ‘감사원장 사퇴’ 논란이다.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원 장관은 “지난 1월 이명박 당선자와 저는 전윤철 감사원장을 모양 좋게 나가게 하기로 의견 일치를 봤고, 3월초에 제가 전 원장을 만나 그런 의사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헌법기관인 감사원장의 독립성과 관계가 깊은 이 발언내용은 야당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부하직원들을 강하게 다루는 스타일 역시 마찬가지다. 한 행안부 관계자는 “보고하기 위해 들어오는 실무자의 업무이력이나 배경을 훤히 암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단순히 보고 내용만 듣는 게 아니라 어떤 맥락과 취지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까지 유추해내기 위해 부하직원들의 신상을 통째로 외워버린 것 같았다는 후문이다. 근무경험이 거의 없던 중앙부처를 조기에 장악하는 데 성공했던 것 역시 이런 스타일이 한몫한 것 같다는 게 행안부 관계자들의 평가다.

    ‘충성심’ ‘조직’ ‘예산’

    반면 낯가림이 심한 캐릭터를 바꾸기 위해 애쓴 흔적도 보인다. 2008년 5월에는 행안부 출입기자들과 ‘호프데이’ 미팅을 갖기도 했다. ‘언론과의 스킨십을 넓히시라’는 참모들의 설득에 따른 행사였다는 것. 그러나 그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이날 자리에서 그가 한 발언이 한 신문을 통해 ‘땅투기 옹호’로 보도되는 해프닝이 있었고, 이후 비슷한 행사는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장관 재임 동안 그는 이 대통령이 강도 높게 주문했던 공직사회 개혁을 책임지고 추진했다. 중앙인사위원회와 행정자치부, 비상기획위원회를 통합해 행정안전부로 만드는 초기과제부터 행안부 대과(大科)체계 도입 등 중앙부처 조직개편, 공무원 감축, 고위공직자 ‘2진아웃제’ 도입 등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진행됐다. 사안의 잠재적 폭발력에도 큰 논란 없이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 역시 대통령의 신임을 굳히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 행안부 관계자의 말이다.

    “요란하게 언론보도가 이어지면서 일이 진행되는 게 아니다 보니 과연 대통령 최측근이 맞긴 맞는지 의문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국정원장 임명 소식이 나오면서 그런 의문은 한 방에 날아간 것 아니겠나.”

    그의 국정원장 임명과 관련해 유난히 눈에 띄는 단어는 ‘충성심’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국정원에서 워낙 잡음이 끊이지 않다 보니 결국 자타가 공인하는 충성심을 가진 원 장관을 보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원 원장 내정소식을 전하면서 김은혜 청와대 부대변인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정보기관의 수장을 임명하면서 ‘충성심’이 키워드가 되는 이 이례적인 상황은 2008년 한 해 동안 국정원의 움직임을 두고 여권 내부에서 이어져온 비판과 관계가 깊다. “촛불시위 정국에서 국정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견해가 대표적. 이 같은 주장은 ‘창업공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김성호 전 원장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국정원장 경질의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권 내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원 원장은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현장에서 촛불시위에 강도 높게 대응했던 경찰을 관장해왔고, 김경한 법무부 장관과 공동으로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위참여를 독려한 공무원노조 관계자들을 징계하는가 하면, 국회에 출석해 “촛불집회는 100% 불법”이라며 “경찰의 엄정한 법 집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강한 태도를 보였다.

    원세훈 신임 국가정보원장

    2008년 3월3일 차관급인사 25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이명박 대통령이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의 설명을 들으며 접견실로 이동하고 있다.

    이와 함께 원 원장이 서울시와 행안부에서 예산과 조직문제를 오랜 기간 담당해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은 팀제 조직개편과 슬림화, 예산절감을 추진해왔다. 김주성 기획조정실장의 주도로 이뤄진 이러한 작업은 그러나 국정원 내부에서 만만찮은 진통을 겪었고, 결국 원장 판공비 내역 등을 둘러싸고 김성호 전 원장과 김주성 실장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는 설로 이어지기도 했다(‘신동아’ 2008년 11월호 ‘내우외환 김성호 국정원’ 기사 참조).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은, ‘복마전(伏魔殿)’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었던 서울시에서 예산과 조직으로 잔뼈가 굵은 원 원장이 대통령의 최종낙점을 받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를 가늠하게 해준다. 부하직원들과의 식사자리에서도 업무 카드를 잘 안 쓴다는 캐릭터만 해도 그렇다. 한마디로 2008년 한 해 동안 국정원 내부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맞춤형 인사’인 셈이다.

    독이냐 약이냐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보나 정보업무에 대해 경험이 전무하다는 원 원장의 약점보다는 강도 높은 내부개혁을 추진할 적임자로서의 강점이 더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국정원 내부의 이슈를 돌파하고자 준비된 ‘스마트 폭탄’으로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장으로서 수행해야 할 업무 전체보다는 특화된 쟁점을 성공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카드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거꾸로 국정원 내부문제에 대해서 이 대통령이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방대한 조직과 예산을 자랑하는 국정원의 역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그 골자다. 바꾸어 말하자면 앞으로 국정원에서 만만찮은 변화의 바람이 불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원장 인사발표 이후 국정원 직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썩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음은 이 때문. 실제로 원 원장은 인사청문회와 취임사를 통해 강도 높은 국정원 개혁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포석, 혹은 원 원장에게 맡겨진 임무가 성공할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핵심 고려사항에서 벗어난‘정보분야 비전문가’라는 약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주시해야 할 부분이다. ‘충성심’이라는 키워드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 수장이라는 자리의 특성에 비춰볼 때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당장 민주당 등 야권에서는 “측근을 원장으로 임명해 국정원을 친위기관화하려는 시도 아니냐”며 노골적인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인사청문회에서 “정치정보 수집이 불가피하다”는 그의 발언이 논란을 빚은 것도 이러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정치정보 수집과 정치사찰이 무 자르듯 깔끔하게 나뉘는 게 아니므로 국가정보기관이 정권보위기구로 활용됐던 과거의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거꾸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대통령과 오랜 기간 인연을 맺었던 한 대선캠프 출신 인사는 “대통령에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국정원장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인연이 짧아 공적인 관계로만 연결돼 있는 사람은 오히려 대통령과 면전에서 토론을 벌이기 어려운 면이 있으므로, 끈끈한 인연을 갖고 있는 국정원장이 도리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원 원장이 가진 ‘원칙주의자’ 캐릭터를 감안하면,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남용할 것이라는 의심은 지나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물러서지 않았다

    2월10일 국회 정보위원회는 원세훈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열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진행된 청문회에서는 병역면제 과정에서의 의문점과 포천 땅 의혹 등 여러 주제에 대해 강도 높은 질의가 이어졌다. 질의를 준비하는 민주당 의원 보좌진과 답변을 준비하는 후보자 측 관계자들이 각각 청문회장 앞 복도에서 선 채로 논점을 가다듬는 분주한 모습도 보였다.

    이어지는 질문에 답하는 원 내정자는 분명 달변은 아니었다. 미처 예상치 못한 공격에는 명확한 답을 못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때로는 스치듯 웃음기까지 내보였다. 기자의 눈에는 자기 회의보다는 확신으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표정이 읽혔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흘렀다. 국정원 직원들이 참으로 까다로운 원장을 만나게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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