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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고노담화 정신 지켜야 위안부 해결” (일본군위안부에 사과)

위안부 보도로 협박받는 日언론인 우에무라 다카시

  • 이혜민 | 아일보 출판국 디지털미디어팀 기자 behappy@donga.com

“고노담화 정신 지켜야 위안부 해결” (일본군위안부에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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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학순 할머니 증언’ 최초 보도
  • ● 살해 협박 받고, 교수 임용 취소
  • ● 부인은 한국인, 장모는 태평양전쟁유족회장
  • ● ‘날조 기자’라고 비방한 인사 2명 제소
  • ● 前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가톨릭대 초빙교수
우에무라 다카시(58)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위안부 최초 보도 기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1991년 8월 11일 아사히신문에 ‘김학순 할머니(1924~1997·한국 거주자 중 최초로 피해 사실을 알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기사화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 “국익을 해친 날조 기자”라는 공격을 받아왔다. 잇따른 협박으로 가족의 신변까지 위협받았고, 신문사 조기퇴직 후 부임하기로 한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 교수도 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비방한 대학교수와 발행처 ‘문예춘추’, 저널리스트와 ‘신초샤’ 등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2건을 2015년 제기해 1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계속되는 우익의 협박

그간의 힘겨운 ‘투쟁’을 기록해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푸른역사, 길윤형 옮김)를 펴낸 그를 지난해 말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만났다. 서울특파원을 지낸 데다 2016년부터 한국 가톨릭대 초빙교수로 ‘동아시아평화문화’를 강의하는 그는 한국어가 유창하다. 인터뷰에 앞서 그는 가방에서 자료 뭉치와 노트북을 꺼내놓았다. 자신의 기사와 책, 다른 기자가 쓴 관련 기사, 협박 편지, 우에무라 다카시 비난 현상을 조명한 잡지 부록, 서울특파원 시절의 자신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자신이 만드는 평화 동영상…. 인터뷰 도중 설명이 필요하면 그는 적절히 그 자료들을 제시했다. 자신이 ‘날조 기자’가 아니라 팩트에 충실한 언론인임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듯했다.

▼ 가족들이 일본 우익에게 협박을 받았다고 들었다. 요즘 상황은 어떤가.



“(협박 편지를 보여주며) 안심할 수준은 아니다. 나를 고용키로 한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은 나의 교수 임용을 취소하라는 메일을 250통이나 받았다. 내가 2012년 봄부터 시간강사로 재직한 호쿠세이학원대학도 협박 편지를 받았다. 나에 대한 비판 기사가 나오면서 3일 만에 가족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았다.”

▼ 비판은 언제부터 받았나.

“일본 주간지 ‘주간문춘’이 2014년 2월 6일 기사에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아가씨 여자대학 교수에’라는 기사를 내면서부터다. 아사히신문은 통상적으로 우익의 비판을 받는 데다 회사(아사히신문사)는 내가 날조한 것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교수 임용은 취소됐고, 아사히신문은 5개월 만에 검증을 시작했다.”

▼ 어떤 기사 때문에 비판받는 것인가.

“1990년 1월 윤정옥 선생님(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 전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이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원혼의 발자취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미디어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그해 여름 특집기사를 준비하며 위안부를 주제로 잡았다. 위안부가 한일관계의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2주 동안 한국에서 취재했다. 아사히신문 선배인 마쓰이 야요리 위안부·인권 전문기자의 소개로 윤 선생님도 만났다. 윤 선생님의 이화여대 연구실에 찾아가 “위안부 할머니를 꼭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에 사는 배봉기 할머니(1977년 고백), 태국에 사는 노수복 할머니(1984년 고백)가 알려졌지만 한국에 돌아온 할머니들은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한국 여성 저널리스트의 소개로 당사자를 만나봤지만 취재를 거부했다. 내가 일본인인 데다 남자이니 말하기 어려웠을 거다. 이해한다.”



한국 거주 위안부 최초 보도

▼ 위안부 기사는 이듬해인 1991년 8월 11일자에 보도됐던데.

“내가 1990년에 위안부를 취재하려다 실패한 걸 안 서울지국장이 정보를 준 덕에 서울에 와서 다시 취재해 썼다. 내가 쓴 기사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당사자를 만나서 쓴 게 아니라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제공한, 익명의 당사자가 말한 기록을 담은 녹음테이프를 근거로 정대협의 조사 계획을 전달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어떤 언론도 내 보도를 소개하지 않았다. (김학순 할머니 기자회견 동영상을 보여주며) 보도 3일 후인 8월 14일 이 할머니가 커밍아웃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도 가보지 못했다.”



일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연행돼 일본 군인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강요당한 ‘조선인 종군위안부’ 가운데 1명이 서울 시내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윤정옥 공동대표, 16단체 약 30만 회원)가 (증언)청취 작업을 시작했다. 동 협의회는 10일 여성의 사연을 녹음한 테이프를 ‘아사히신문’ 기자에게 공개했다. 테이프 안의 여성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끼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숨겨오기만 했던 그녀들의 무거운 입이 전후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지난 끝에 겨우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판 1991년 8월 11일




▼ 당신의 기사는 최초의 위안부 보도로 알려졌다.



“아니다. 내 보도 전에 이미 한국 여성지에서 수기 형식으로 한국 거주 위안부의 존재가 공개됐다. 내 기사가 한국에 사는 위안부의 존재를 전국지(일간지)로 알린 첫 보도인 것은 맞다.”

▼ 왜 한국인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생겼나.

“입사 후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조선어사전을 책상 위에 올려뒀다. 시간은 없지만 돈은 있었으니까 공부는 안 하고 사전만 사둔 거다. 그걸 본 선배가 내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해 어학연수를 추천해줬다. 그 덕에 1987년 아사히신문 어학연수 프로그램으로 1년간 한국에 유학 와 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평소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일본에는 백정 대접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노트북을 꺼내 1990년대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영상에는 그와 그가 진행한 연재물 ‘이웃사람’이 나왔다. 기사에는 일본 교토부 우지 이세탄초 우토로에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거주지 우토로 마을이 소개됐다.



약한 쪽 서는 게 습관

▼ ‘이웃사람’ 연재는 어떻게 시작했나.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썼다. 1978년 와세다대에 입학해 기숙사에 살면서 재일한국인 선배를 만났다. 서울대 의대 유학생이던 그 선배는 재일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정치범으로 몰려 구속되는 경우를 목격하면서 두려워져, 일본으로 돌아와 와세다대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 선배를 보며 이웃 나라의 현대사가 가깝게 느껴졌다. 김대중 씨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인물로 구속돼 사형판결(이후 무기로 감형)까지 받았을 때 세계 각지에서 석방운동이 활발했는데 대학생인 나도 아사히신문에 구명 글을 기고했다.”  

▼ 인권에 관심을 둔 특별한 계기가 있나.

“부모님이 이혼해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아버지 없이 살았다. 이후 어머니가 재혼했는데 어린 시절에는 소외를 경험했다. 아버지도 없고 못살았기 때문에 무시당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언제나 약한 쪽에 서는 게 습관이 됐다.”

▼ 언제부터 기자를 꿈꿨나.

“사실 산악인이 되고 싶었다. 산악 동아리가 유명한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떨어졌고, 재수해 와세다대에 입학했다. 그때 막연히 ‘신문기자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한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을 보며 서울특파원을 꿈꿨다.”

▼ 한국에는 언제 처음 왔나.

“첫 해외여행으로 대학 4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왔다. 인심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런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졌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만난 한 아저씨가 아침을 사주고, 광주에서 만난 군인이 유원지에 데리고 가줬다. 내가 시장에서 새마을운동 모자를 쓰고 다녀서 그런지 사람들이 좋아했다. (여행 사진을 보여주며) 이건 종로에서 머문 여관, 옛 서울역, 연세대에서 만난 여학생들과 독수리다방에서 찍은 사진이다.”

▼ 1987년 어학연수 시절 기록한 것들을 묶어 ‘서울의 바람 가운데’(1991)를 냈더라.

“어학연수 기간에도 월급을 받았지만 기사 쓸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는 신촌에 살고 있는 데다 6·29선언 이후 민주화운동이 대단해, 나만의 신문 ‘서울유학생통신’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이 신문과 유학 시절 일기를 묶어서 책을 냈다.(그가 보여준 책에는 노래 ‘아침이슬’ 해금 뉴스, 최루탄 집회 사진이 있었다).”



정신대 용어 썼다고 공격받아

▼ 신문까지 만든 것이 흥미롭다.

“저널리스트이니까 기록했다. 신문은 한 달에 한 번 만들었다. 기사는 샤프펜슬로 쓴 뒤 복사해 오려붙였다. 만화 ‘고바우영감’ 팬이라 그것을 흉내 내 그림도 넣었다. 한국말을 고바우영감으로 배운 나는 고바우영감 연재물 중 현대사적으로 중요한 걸 뽑아 책(‘만화 한국현대사 고바우영감의 50년’(2003))으로 만들었다. 책의 연표는 사건을 쉽게 찾아보려고 만들었다. 나중에 아사히신문에 고바우영감 특집 기사도 썼다.”  

▼ 부지런해 보인다.

“사람들에게 뭔가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갖고 살았다. 서울특파원 때는 한국 분단 반세기 연재, 38선 르포르타주도 기획해 보도했다. 위안부도 내가 진행한 기획 중 하나다. 전쟁 희생자의 인권 문제 차원에서 접근했고, 위안부를 끝까지 취재하지는 못했다. 다만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작업은 계속했다. 아사히신문의 전쟁 부역 행위를 조명한 책 ‘신문과 전쟁’(2008)을 썼다.”

▼ 위안부 문제를 보도한 뒤 일본 우익들은 특히 어떤 대목을 비판했나.

“내가 위안부를 소개하며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를 썼다는 부분이다.(현재, 정신대는 근로정신대 즉 일제에 강제 징용돼 군수 공장과 방직 공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던 여성들의 줄임말로 쓰인다) (위안부 문제의 쟁점인) 강제연행이란 말을 썼다는 비판도 받았다.”

▼ 그때 ‘정신대’란 단어를 왜 썼나.

“당시 당사자들은 물론 단체들도 위안부를 가리켜 정신대라고 썼다. 일본 연구자의 조사에 따르면 해방 후부터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우에무라 다카시 보도 논란을 다룬 잡지 별책부록을 보여주며) 송건호 선생님도 1963년 경향신문에 일제 정신대란 용어로 위안부를 설명했다. 나도, 일본 언론도 그런 맥락에서 이 용어를 썼다.”

▼ ‘김학순 할머니가 기생학교 출신이란 점을 쓰지 않았다’고 우익이 지적했던데.

“난 정대협이 들려주는, 익명의 증언을 담은 테이프를 듣고 기사를 썼다. 그 안에는 기생학교 얘기가 들어 있지 않았다. 초기 보도와 나중에 쓴 기사를 대조하면서 다른 내용이 들어 있다고 초기 보도를 날조라고 비판할 수 있나. 기생학교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기생학교 출신이 위안부로 갔다고 해서 인권유린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또 기생은 성매매자와 동일하지 않다.”



강제동원 인정한 고노담화

▼ 강제연행이란 표현을 썼나.

“그 표현은 안 썼다. ‘이 여성은 17세 때 속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썼다. 우익은 “우에무라가 강제연행이란 말을 써서 일본 사람들이 국제사회에 사과하게 됐다”며 나를 비난한다. (1991년 신문을 보여주며)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은 강제연행이란 말을 썼다. 비판자들이 “왜 당신만 강제연행이란 용어를 안 썼느냐”고 묻는다면 사과하겠다.”

▼ 강제연행은 일본의 법적 책임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이슈다. 한겨레 2014년 12월 21일자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는 조선에선 위안부의 강제연행이 없었고, 적어도 지금까진 이와 관련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더라.  



“말 그대로 강제로 사람을 끌고 간,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뜻이다. 일본 우익은 강제동원이 없었다면서 위안부를 성매매자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넓은 의미의 강제연행은 인정한다. 개인이 속아서, 인신매매돼 그런 생활을 했다면 강제연행이라고 봐야 한다.”

▼ 영화 ‘귀향’에는 일본군이 한국인 소녀를 직접 끌고 가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 게 있다고 들어서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런 장면이 나온 건 민족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중국, 인도네시아에서는 강제적으로 끌고 갔던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없었던 것 같다. 요시다 세이지(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고 증언한 동원부장. 아사히신문은 그의 주장이 담긴 기사에 대해 ‘오보’라고 인정했다)의 증언을 부정하더라도 피해자들의 증언이 많지 않은가. 강제동원 논의는 불필요하다. ‘강제동원 문제만 고집하면 여성 인권 피해를 폭넓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세계 인식이다. 고노담화도 강제동원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나.”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설영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것을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속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아울러 전투지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하면 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한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1993년 8월 4일 위안부 관계 조사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 많은 일본 언론이 당신을 공격한 것으로 안다.

“언론이 정말 무서웠다. ‘주간포스트’ ‘주간신조’ 같은 우파 잡지도 나를 공격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관련 기사를 3번이나 내보냈다. 요미우리 기자 5명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겁이 났지만 반대로 내가 이 사람들에게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섭지 않았다. ‘사실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자네들이 내가 기생학교에 대해 안 썼다며 비판하지만 당시 당신네 선배도 쓰지 않았다는 걸 아느냐, 기생이 뭔지 아느냐’고 묻는데 모른다더라. 그때 나를 인터뷰한 내용은 기사로 나가지 않았다. 산케이신문에는 내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두 신문은 더 이상 나를 비방하지 않는다. 남은 건 내가 제소한 두 사람,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 씨와 대학교수 니시오카 쓰토무 씨다.”  

▼ 이들이 왜 당신을 비판한다고 생각하나.

“우선 내가 리버럴한 아사히신문의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사히신문의 역사 인식과 리버럴리즘을 혐오한다. 둘째, 김학순 할머니에 관한 서명기사를 최초로 썼기 때문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줘 이후 증언자가 잇따라 나타날 수 있었다. 셋째, 내가 한국인과 결혼했고 장모가 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이기 때문이다. ‘공격 스토리’를 만들기 쉬웠던 것이 아닌가. 장모가 몇 년 전 사기혐의로 재판을 받으며(2014년 8월 무죄 확정) 나 또한 인신공격을 받았다. ‘고교생평화대사’(일본 각지에서 선발된 고등학생들이 유엔에서 반핵 평화를 호소하는 활동 진행) 홋카이도 대표로 얼굴이 알려진 고등학생(당시) 딸도 협박을 받았다. 문제의 그 기사가 나오고 6년 뒤 태어난 딸이 도대체 무슨 죄인가.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 반전이 있었나.

“2014년 10월 6일 전국의 학자, 변호사, 언론인 444명이 모여 ‘지지 마라 호쿠세이의 모임’을 꾸렸다. 변호사들이 법적 대리를 자처했다. 호쿠세이학원대학에서도 강사 계약을 1년 갱신했다. 2015년 가톨릭대학은 나를 초빙교수로 불러줬다. 박영식 가톨릭대 총장이 면담 자리에서 그랬다. “당신을 초청하는 것은 한국을 위해서도 아니고, 일본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라고. 그 말을 듣고 사명감을 느꼈다. 2016년 8월 3일에는 도쿄 지방법원이 내 딸을 협박한 남성에 대해 170만 엔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2·28 합의 고노담화에 어긋나

12·28 합의 1주년이 지났다.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된 한일 정부 합의가 이뤄진 뒤 한국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을 지난 7월 발족했고, 재단은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 엔을 바탕으로 생존자 46명 중 34명에게 1억 원씩 지급했다.

하지만 시민사회와 야권에서는 ‘합의 파기’를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배제했고,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법적 책임에 따른 배상금이 아닌 거출금(醵出金)만 받고 공식 사과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합의문에 게재된 ‘일본 정부가 조치(자금 거출)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함’이란 문구는 공분을 부채질했다. 급기야 2016년 12월 28일, 정의기억재단(12·28 합의 후 시민사회가 지난 6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든 재단)을 주축으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11명과 위안부 사망자 6명의 유족들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 앞으로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12·28 합의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기회였다. 하지만 양국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했고, 이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는 고노담화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역사를 기록한 기자를 공격하고, 위안부 자료가 전시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에 폭파협박 편지가 배달되는 것이 현재의 일본이다. 그동안 나는 우익한테 공격 받은 상처가 많아 위안부 기사를 안 썼다. 이제는 이 문제에서 도망치지 않겠다. 기억을 계승해야 문제가 해결된다. 나는 고노담화를 지켜 기억을 계승하는 현장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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