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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굶긴 사회주의에 회의… 北 주민 ‘민주화 주체’ 되는 길 돕기로

나는 왜 북한인권 운동가가 됐나

  • 한기홍 |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paul@nknet.org

인민 굶긴 사회주의에 회의… 北 주민 ‘민주화 주체’ 되는 길 돕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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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노동운동을 했다. 용접 기술을 배워 공장에 취업했고, 철도청 기능직 노동자로 일했다. 사상적 방황, 전환을 거쳐 북한인권 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북한의 인권은 진보·보수가 다툴 사안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내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분으로 자수성가해 경기 수원시에서 LPG 가스 대리점과 한일전기 총판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9년부터 집에서 정부에 비판적이던 동아일보를 구독했다. 나는 신문을 열심히 읽었고 자연스럽게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78년 말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여당인 공화당에 득표율에서 앞서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강력한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과 신민당의 대결은 1979년 내내 긴장 속에 진행됐다. 박정희 정권은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문제 삼아 김영삼(YS) 신민당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YS 제명이 계기로 작용한 부마항쟁(부산·마산의 대규모 시위)이 10·26으로 이어지면서 박정희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해 나는 입시에서 떨어졌다.

1980년 봄, 전두환 신(新)군부의 집권 시도에 저항하는 시위가 각 대학과 거리에서 진행됐다. 내가 서울역 인근 입시학원에 다닐 때인데, 5월 중순에는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광주민주화운동도 발생했다. 나는 시위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재수생 신분인 터라 그러지 못했다. 학원 공부와는 별개로 백낙청, 리영희, 송건호, 한완상 등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이나 해직 교수 등이 쓴 사회 비판서를 많이 읽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다

1981년 봄 연세대에 입학했다. 운동권 서클이던 탈춤반에 가입했다. 농악과 탈춤을 배웠으나 의식교육이 주였다. 2학년 때는 지하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학교 수업을 팽개치고 전업적 학생운동가가 됐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 같은 책을 섭렵했다. 운동권 동기들보다 이른 1학년 2학기부터 일본어 읽는 법을 배워 ‘경제사 입문’ ‘소유와 생산양식의 역사이론’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등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경제서적을 읽었다. 2, 3학년 때는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서적과 좌파적 혹은 민족주의적 인식에서 쓰인 한국 근·현대사 책을 독파했다.

교내·외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거나 비밀리에 유인물을 살포할 때마다 앞장서 참여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는 충북 진천군에서 열흘 가까이 농촌활동을 했다. 그해 말 군사훈련 교육 때 시위를 주동했다가 난생처음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2학년 여름방학 때는 뚝섬에 있는 한 공장에 일주일간 취업해 공장 현실을 체험했다.

1983년 가을 교내 시위를 주동했다가 구속돼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회 각 부문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는 분위기가 거세지기 시작할 즈음이다. 전두환 정권이 유화적 태도를 보이면서 이듬해 봄 수감된 학생들이 전원 석방된다. 나도 6개월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학생운동과 수감생활을 거치면서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려면 단순히 민주화에 머무는 게 아니라 현존 제도를 전복하는 혁명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 혁명가가 돼 있었다.



철도청에 노동자로 취업

사회주의 이론에서 혁명의 주력으로 중요시하는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고, 의식화하고자 용접 기술을 배워 공장에 취직했다. 인쇄공, 철도청 기능직 노동자 등으로 취업해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1984년 봄부터 2년여간은 인천 부평구 일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서울로 활동 지역을 옮겨 김문수, 심상정 등이 주도한 서울노동운동연합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보안사의 추적을 받았다. 을지로, 충무로 일대의 인쇄공을 조직해 함께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1988년 여름 서울지역인쇄노동조합 결성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3년간 일했다. 그러곤 철도청에 기능직으로 취업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졌다. 대안은 불확실했다. 철도청 노동자로서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기보다는 생활인으로 변해가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던 때는 NL(민족해방) PD(민중민주) 등의 노선이 등장하기 전이다. 나는 리영희 교수가 쓴 책을 읽으면서 중국 혁명에 매력을 느꼈다. 훗날 문화대혁명이 명분과는 달리 권력투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까지는 중국 혁명을 동경했다. 그런 나에게 1989년 톈안먼 시위는 큰 충격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위를 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주의에 의구심을 가졌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옛 소련을 비롯해 현존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사상적 방황이 시작됐다. 혁명적 사회주의는 던져버렸으나 점진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진보라는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한번 약해진 혁명에 대한 열정이 사상적 측면에서도 회의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는 사상적 공백을 메우고자 논어 맹자 한비자 등 중국 고전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스터디 그룹에서 혹은 현대판 서당에서 공부했다. 1996년 무렵에는 공부를 좀 더 심도 있게 하고자 중국으로 유학을 가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지내다 대선이 있던 1997년 말 철도청을 그만두면서 노동운동을 정리했다.



사상적 방황과 전환

1997년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일성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인민을 굶겨 죽이는가”였다. 나는 북한을 추종하던 이른바 주사파는 아니었기에 북한에 대해 약간의 비판적 의식을 갖기는 했으나, 북한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김일성 등 지도부가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북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주체사상을 만들었다는 황장엽 씨가 망명한 것은 충격이었다. 그가 북한 체제에 관해 쓴 글의 핵심은 ‘북한의 사회주의는 봉건체제에 가까우며 진보적인 체제가 아니라 낙후한 체제’라는 것이었다. 황장엽 씨의 글을 읽으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확대됐다. 탈북자들의 수기도 찾아 읽었는데 믿기 어려울 만큼 내용이 끔찍했다. 1998년에는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를 직접 만났는데 그가 전한 수용소의 현실은 너무나 참혹했다.



나는 동료들과 북한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 체제의 민주화와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촉진하는데 기여할 잡지를 창간하기로 했다. 1998년 11월 세상에 나온 격월간 ‘시대정신’이 그것이다. 나는 이 잡지의 발행인과 편집장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 개선을 위해 행동하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창립했다. 창립 대표를 맡은 동료가 1년 만에 그만두면서 내가 후임 대표가 됐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 초창기 활동은 북한 실상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Keys’라는 월간지를 발행했다. Keys에는 북한의 닫힌 체제를 여는 열쇠라는 뜻을 담았다. 중국에 체류하는 탈북자를 인터뷰해 실상을 전하고, 국내외에서 진행되는 북한 인권 관련 활동 등을 소개했다. 영어판과 일본어판도 3개월에 한 번꼴로 출간해 해외에도 북한의 실상을 알리려 노력했다.  

2005년 프리덤하우스가 주관한 회의에 참석하고자 난생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비자를 받으려고 주한 미국대사관을 찾았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운동권 시절 나는 반미주의자였다. 시위를 마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마시고 귀가하다 미국대사관 앞을 지나갔다. 밤늦게까지 불을 밝힌 대사관 건물을 보면서 ‘미국 놈들은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려고 밤새도록 일하는데 내가 술 취해 다니는 게 말이 안 되지’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후 밤늦도록 이념서적을 읽은 기억이 미국대사관을 찾으면서 떠올랐다.



북한인권 운동가의 길

2003년 북한에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는 ‘자유조선방송’을 설립해 창립 대표를 맡았다.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 방송을 한 것은 ‘북한 주민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체제를 외부와 비교해 현실을 깨닫고 행동에 나서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재정이 부족해 단파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북한 당국은 방해 전파를 쏴 청취를 막았다.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에 발맞춰 2004년에 북한 소식을 신속히 알리고자 ‘The Daily NK’라는 인터넷신문을 창간했다. ‘The Daily NK’는 북한 전문 언론으로 자리를 잡았다. 북한에서 자행된 공개처형 동영상을 최초로 입수해 보도했으며 북한에서 2009년 실시된 화폐개혁을 세계 최초로 전했다.

북한인권 운동가로 살면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잘못된 인식의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군부독재에 저항해 싸운 이들이 유독 북한인권 문제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개는 그 심각성을 모르거나 어느 정도 안다 해도 ‘자신들과 이념· 정치 성향이 반대인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이슈이고 자칫 잘못하면 상대편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북한인권 문제는 진보·보수가 다툴 사안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 같은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재정이다. 활동에 필요한 기금을 회원과 후원회원이 내는 소액 후원금과 정부보조금, 각종 프로젝트 수행에 따른 수입 등으로 충당한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The Daily NK, 자유조선방송의 대표를 겸직하던 때는 사업비와 활동가들의 활동비를 내가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활동비는 1인당 100만 원 전후여서 큰돈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활동가가 40여 명에 달했기에 재정을 맞추는 일이 힘들었다.

북한 인권 문제는 어둡고 답답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민들이 쉽게 참여하지 못한다. 좀 더 가볍게 접근해보자는 취지로 2011년 시작한 북한인권국제영화제가 지난해 6회를 마무리했다. 나는 이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2015년 5회 영화제 때는 중국 당국이 간섭해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소망교회의 도움을 받아 제작을 지원한 ‘간도경찰’이 두만강 일대에서 마무리 촬영을 할 때다. 감독이 재중 동포인데, ‘간도경찰’을 우리 영화제에 출품할 경우 중국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중국 당국이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영화제 개막을 3주 앞두고 발생한 일이다. 개막작 없는 영화제는 상상할 수조차 없어 취소도 검토했다. 천만다행으로 개막 1주일을 앞두고 대체 작품을 구했다. ‘설지’라는 영화인데 탈북 화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자유·인권 찾는 그날

북한인권 운동을 시작한 지 어느덧 20년이 됐다. 시작할 때는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북한의 저 끔찍한 체제가 대략 10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 북한의 인권 현실은 여전히 참담하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관한 인식이 해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로 확산된 덕분이다. 국내에서도 미약하지만 변화가 감지된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2005년부터 매년 유엔 총회를 통해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킨다. 북한 인권 문제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제로도 채택됐다. 2013년 발족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북한인권조사보고서를 제출했으며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004년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제정됐으며 2006년에는 일본에서도 북한인권법이 통과됐다.  

국제사회의 노력과 달리 한국에서는 북한인권법 제정을 둘러싼 여·야, 진보·보수 간 대립이 거셌다. 논의가 시작된 지 11년 만인 2016년 3월에야 여야 합의로 북한인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북한인권법의 주요 내용은 북한인권 실태 조사 및 기록·보존, 북한인권 특명대사 임명, 북한 인권 활동 단체 지원 재단 설치 등이다.

북한인권법 제정 등으로 활동가들이 일할 여건이 좋아졌으나 노력과 희생 없이 역사는 전진하지 않는다. 북한 주민들이 민주화의 주체로 등장해 자유와 인권을 찾는 그날까지 나와 동료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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