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농구코트의‘꽃보다 남자’이상민

지치고, 아프고, 힘들다 그러나 아직도 승리에 목이 마르다

  • 최용석│ 스포츠동아 스포츠부 기자 gtyong@donga.com│

    입력2009-03-05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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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소 같은 남자’ 이상민.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코트의 사령관이다. 8년 연속 올스타 팬 투표 1위라는 사실이 말해주듯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한국 남자프로농구 최고의 별. 드라마‘꽃보다 남자’의 F4 못지않은 이 인기남의 속살을 들여다보았다.
    농구코트의‘꽃보다 남자’이상민

    이상민은 힘든 상황을 우승트로피에 대한 열정으로 이겨내고 있다.

    이상민(37·서울 삼성)은 허리 통증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의원을 찾아 침을 맞고 오느라 약속 시간에도 조금 늦었다. 그는 “뭣하러 인터뷰하러 왔어요. 별로 할말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그의 숙소(삼성농구단 체육관이 자리 잡은 경기 용인시 삼성휴먼센터)엔 운동화 상자가 가득했다.

    “원래 운동화를 자주 갈아 신는 편은 아닌데요. 가져다주니까 챙겨놓았어요. 정리를 잘하는 성격도 아닌데, 후배들이 필요한 물건 가져가면서 정리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죠.”

    방바닥에 앉아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허리가 아프다”며 그는 침대에 등을 기댔다.

    농구는 운명

    “나이는 속이기 어려운 것 같아요. 이젠 다됐어요. 시즌 내내 허리가 아파서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경기에만 뛰고 있는데요. 옛날 같았으면 금방 나았을 텐데 벌써 5개월째예요. 지겨워요.”



    그가 방안 냉장고에서 캔 커피 2개를 꺼내온다. 냉장고 안엔 캔 커피가 가득하다. 보양식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를 물으니 웃는다.

    “저번에 팬들한테 커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거든요. 아시죠? 별다방(스타벅스) 커피. 그랬더니만 왕창 사 가지고 온 거예요. 후배들하고 나눠 먹는데도 아직 많이 남았어요. 일부는 집에 가져다놓기도 했고요.”

    기자는 그의 유년 시절이 긍금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공을 잡았다. 우연이었다. 운명이라고나 할까. 이상민이 다니던 성북초등학교는 그가 5학년이 되던 해에 처음 농구 골대를 세웠다. 당시는 축구와 야구가 인기 스포츠였다. 이상민이 다니던 학교 인근에 차범근이 나온 경신고가 있었고, 야구의 인기도 엄청났다.

    “원래는 친구들과 축구를 즐겨 했죠. 야구도 좋아했고요. 농구는 전혀 몰랐어요. 학교 운동장에 농구 골대가 세워지는 걸 보고 ‘저게 뭐지’라고 생각했을 만큼 농구가 생소했죠. 그런데 평생 농구 골대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성북초교는 곧바로 농구부를 창단했다. 홍대부중·고가 농구부를 창단한 후 선수를 키울 초등학교를 물색하다 지원금을 주고 성북초교의 농구부 창단을 유도한 것이다. 성북초는 농구부원을 각 반에서 맨 뒷줄에 앉은 학생을 대상으로 뽑았다. 당시는 키가 큰 아이들이 뒷줄에 앉았다고 한다. 이상민도 그 대상이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가입비 5000원을 내고 시작했어요. 처음엔 농구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냥 학교에서 또래들과 합숙하고, 함께 지내는 게 마냥 좋았죠.”

    그렇게 시작한 농구가 업이 됐다. 농구선수로는 키가 작았던 그는 중학교 시절엔 그저 그런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중학교 3 학년 때 선배로부터 책 한 권을 받았는데, 키 크는 방법이 씌어 있는 책이었다. 그 책에는 당근, 사과, 우유, 정어리를 많이 섭취하면 좋다고 적혀 있었고, 그는 이 4가지 음식을 챙겨 먹었다. 다른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매일 같은 음식만 먹다 보니 질렸고, 키를 키우겠다는 노력은 3개월 만에 끝났다. 이 방법으로 효과를 본 걸까? 매년 5cm 이상은 크지 않던 키가 이 해엔 8cm나 자랐다. 고등학교 때도 계속 자라 현재의 182cm가 됐다.

    “키가 좀처럼 안 크더군요. 중학교 3학년 때 8cm가 자란 뒤로 출전 기회가 조금씩 찾아왔어요. 고1 때부터 경기에 나서는 일이 늘었고, 고2 때는 (조)성원이형과 함께 경기를 자주 뛰었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고요.”

    고려대의 유혹

    그는 고2 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빠른 스피드와 재치 있는 패스, 정확한 외곽슛으로 홍대부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고교 졸업반 때 대학농구 ‘빅3’로 꼽히던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고3 때 3위와 준우승을 각각 1번씩 차지했고, 나머지 대회는 홍대부고가 모두 우승했어요. 그때는 용산고와 휘문고가 라이벌이었는데 우리는 키가 작았지만 빠른 농구로 상대를 제압했죠. 한마디로 무서울 게 없었어요.”

    그에게 가장 먼저 러브콜을 보낸 곳은 연세대. 최희암 당시 연세대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이어 고려대가 뛰어들었다.

    “사실 그때 저는 고려대를 갈 운명이었어요. 말하긴 힘든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겨서 연세대를 갔어요. 누나들도 큰 힘이 됐죠.”

    고려대는 동문을 동원해 이상민과 그의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당시 홍대부고 감독도 고려대 출신이었다. 고려대는 베팅도 세게 했다. 연세대와 비교도 안 될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연세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고1 때 연고전을 보면서 당시 연세대 가드이던 유재학 현 모비스 감독의 플레이에 매료된 터였다. 그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누나들도 “동생이 원하는 곳에 가야 한다”면서 부모를 설득했다.

    “결국 꿈에 그리던 연세대에 진학했죠. 대학생이 되면 여러 가지 해보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낭만의 캠퍼스 같은 건 다 꿈이었을 뿐이에요. 막상 가보니까 고등학교 숙소와 별반 다를 게 없더군요. 그래서 농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이상민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 것은 처음으로 참가한 연세대 동계 훈련이었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해요. 충북 옥천의 서대산이란 곳에서 합숙했는데, 20km를 뛰는 훈련이 있었어요. 잘 뛰면 고교 졸업식과 대학 오리엔테이션에 보내준다고 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죠. 그런데 시간을 못 맞춰서 계곡 얼음을 깨고 차가운 물에 들어갔어요. 소똥에 머리도 박아봤고요. 그때 농구 시작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는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서 농구를 포기하겠다고 부모에게 말했다. 그러자 부모는 “네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으니 그만두는 것도 네 마음대로 해”라고 말했다. 예상외 반응에 이상민은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숙소로 돌아가 선배들의 수발을 혼자 들며 힘든 대학 운동부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동기가 4명이었는데 1학년 초반에 다 그만뒀어요. 혼자서 빨래 다 챙기고 무지 힘들었죠. 특히 겨울에 선배들 양말을 말리느라고 고생한 게 기억나요. 유니폼은 덜 말라도 입을 만하거든요. 그런데 양말은 그게 안 돼요. 그래서 드라이어로 하나하나 다 말리고 새벽에 자고 그랬어요.”

    선배들은 혹독한 새내기 시절을 보낸 이상민을 친동생처럼 챙겼다. 혼자서 고생하니 잔소리나 얼차려 대신 따뜻한 말로 그를 보듬어줬다. 그 덕분에 이상민은 1, 2학년 시절을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큰 문제없이 보냈다.

    인기가 절정에 오른 3, 4학년 때 이상민은 최희암 감독에게 혼나는 일이 잦았다. 당시 최 감독은 후배들이 잘못하면 선배를 다그쳤고, 이상민이 주로 타깃이 됐다.

    “최 감독님 특유의 스타일이 있어요. 혼내고 나서 따로 불러요. ‘내가 왜 혼냈는지 알지’라고 말하면서 씩 웃으시거든요. 그러면 어쩔 수 없잖아요.”

    잘생긴 지원이

    대학시절 이상민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팬들이 따라붙었다. 농구코트에서 원조 ‘오빠부대’를 만들어낸 주인공이 바로 그다. 가는 곳마다 사인 공세를 받는 게 귀찮아서 모자를 쓰고 피해 다닌 적도 있다. 모자를 썼다고 해서 연예인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던 그를 팬들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솔직히 부담스러웠어요. 농구를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보다 잘생긴 (우)지원이도 있었는데 제가 왜 인기가 많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그래서 한때는 모자를 쓰고 피했는데 사람들이 다 알아보니 오히려 ‘내가 왜 피할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창피하더군요. 그 뒤로는 모자 벗고 그냥 다녔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더 편하던데요.”

    다른 유명 농구선수에 비해 이상민은 스캔들이 없다. 그는 단 한번의 열애설도 없었고, 구설에 시달린 적도 없다. 사건, 사고에 이름이 오르내린 적도 없다. 그 비결을 물으니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웃는다.

    “대학시절 술도 먹고, 나이트클럽도 갔어요. 지금 같은 세상이면 인터넷에 사진이 올라왔겠죠. 하지만 그때는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발달이 안 돼 그럴 일이 없었잖아요.”

    이렇게 농을 던진 그는 구설에 시달리지 않은 이유를 내성적인 성격에서 찾았다.

    “제가 수줍음이 많아요. 누구를 만나면 쉽게 말을 건네고 그러지를 못해요. 그래서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는 잘 친해지지 못 해요. 그 탓인 것 같아요. 대학시절 방송 출연을 많이 해 연예인도 적지 않게 만났지만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분은 (손)지창이형밖에 없어요.”

    말 없고, 탈 없는 이상민에게서 팬들이 떠나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물론 이상한 팬도 있었다. 하루는 한 팬이 집으로 찾아왔다. 이상민의 어머니는 이따금씩 집 앞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팬들을 집으로 초청해 차를 끓여주고, 방도 구경시켜주곤 했다. 때마침 이상민은 휴가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 여자는 다짜고짜 자기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자고 졸랐다.

    “정략결혼을 할 처지에 몰렸는데 결혼하기 싫다면서 자기 부모님께 남자친구로 위장해 인사하러 가달라고 하잖아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거절했어요. 어머니가 팬들에게 방을 구경시켜주곤 했는데 물건이 자꾸 사라졌던 기억도 나네요. 그런데 스토킹 같은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행이죠.”

    농구코트의‘꽃보다 남자’이상민
    왕 회장의 농구 사랑

    그의 업인 농구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이상민의 연세대’는 당시 최강이었다. 현대, 삼성, 기아 같은 실업팀도 연세대를 버거워했다.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가 우승할 때 그는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때는 농구하기가 참 편했어요. 각자 맡은 역할을 하면 됐으니까요. 분업농구였죠. 나는 패스만 하면 됐고, 지원이는 슛, 장훈이는 골밑 식으로 딱딱 구분됐으니 농구하기 참 좋았고, 손발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연세대는 그가 활약하던 1990년대 초중반 대학 최강이었으며, 실업팀들마저 물리치고 한국농구 정상의 팀으로 군림했다. 당시 멤버들은 지금도 농구대잔치 세대라고 불리며 각 팀에서 핵심전력으로 활약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그는 고교 졸업 때와 마찬가지로 현대, 삼성, 기아, SBS 등 실업팀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현대, 삼성이 적극성을 보였고, 기아와 SBS는 관심을 보이는 정도였다. 현대와 삼성이 베팅을 워낙 세게 했기 때문에 다른 팀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운명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현대보다는 삼성의 조건이 조금 더 좋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현대를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어요.”

    현대는 연세대로부터 받기로 한 선수 2명을 놓쳤다. 88학번 정재근은 현대가 공을 들였지만 SBS가 구단을 창단하면서 지명권을 행사했다. 89학번 오성식도 현대행이 결정됐지만 그가 거부하면서 스카우트 파동이 일어났다. 이상민의 1년 선배인 90학번 문경은이 삼성행을 결정하면서 연세대는 3년 동안 현대로 선수를 보내지 못했다. 연세대가 91학번 이상민을 현대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솔직히 삼성이 많이 끌렸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고집을 피울 수 없다는 걸 알았죠. 학교 처지도 생각했어야 하니까요. 하루는 최 감독님이 ‘결정했어?’라고 물어보시기에 마음속으로 ‘어차피 내 뜻대로 되지도 않을 텐데요.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대답했죠. 겉으로는 ‘현대로 가야죠’라고 말했고요.”

    이상민과 현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상민은 한 팀(현대→KCC)에서만 10년을 뛰었다. 상무에서 제대해 곧바로 프로에 뛰어든 이상민은 현대를 정규리그 3연패로 이끌며 최고의 가드임을 증명했다. 그 후에도 그는 최고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현대그룹 고위 인사들한테도 사랑을 받았다.

    “뭐 특별한 것은 아니에요. 현대는 왕회장(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께서 농구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어요. 체육관에도 자주 오셨고요. 선수들과 식사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그런 것을 좋아하셨죠. 그뿐이에요. 특별대우는 없었어요.”

    나를 키운 ‘이응사’

    KCC가 현대를 인수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KCC는 농구 경기 결과에 따라 임원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상영 회장은 성적이 좋지 않은 다음날이면 심기가 날카로웠다고 한다. KCC 임원들이 농구단 선수들에게 “일요일 경기만큼은 꼭 이겨줘요. 그래야 월요일 회의 분위기가 좋습니다”라고 당부했을 정도란다.

    “현대가(家) 분들은 정말로 농구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승하면 꼭 따로 불러서 축하연을 열어주셨고, 체육관에도 자주 오셔서 선수들과 교감을 가지면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어요. 그 덕분에 현대가 프로에서도 명문 팀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해요.”

    평생 현대맨으로 남을 줄 알았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2005~2006 시즌을 마치고 KCC가 자유계약선수 신분이던 삼성의 서장훈을 영입하면서 그가 삼성으로 팀을 옮겨야 하는 처지가 됐다. KCC는 보호선수 3명을 지명하면서 이상민을 제외했다. 그러자 삼성은 재빠르게 이상민을 달라고 했다. 이상민은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국 삼성으로 가야 했는데 저보다 와이프가 더 힘들어했어요. 울면서 제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더군요. 삼성이 준비한 기자회견장으로 가면서도 고민을 했어요. 그만둘까,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했죠. 저를 붙잡은 건 팬들이었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이상민의 팬들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그의 공식 팬클럽인 ‘이응사(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일간지에 이상민을 응원하는 광고를 실었다. 프로선수 개인을 위한 광고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깜짝 놀랐고, 너무 고맙고, 감사했어요. 지난해 삼성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것도 팬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성격이 무뚝뚝해서 팬들에게 잘해주는 편도 아닌데 정말 고맙죠. 요즘도 마찬가지고요. ‘이응사’가 아니었다면 은퇴했을지도 모르죠.”

    삼성에서 두 시즌째를 맞이한 이상민. 이번 시즌만큼 그에게 힘든 때는 없었다고 했다. 지난해 가을 그는 허리를 다쳤다. 척추를 감싸는 근육과 천골에 통증이 계속돼 훈련조차 제대로 못하고 경기만 뛰고 있다. 출전 시간은 짧지만 중요한 경기 때는 어김없이 그가 나선다. 5차례나 연장전이 이어진 동부와의 경기 때 이상민은 53분을 뛰었다.

    농구코트의‘꽃보다 남자’이상민
    “그 경기를 마치고 이틀에 한 번씩 경기에 나섰어요. 쉬었어야 했는데. (강)혁이가 부상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죠. 그 후유증으로 이젠 종아리 근육까지 통증이 내려갔어요. 훈련 없이 경기만 하니까 탈이 나는 거죠.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잘하면 올 시즌 팀이 우승할 것 같은데 몸을 잘 추스르면서 플레이오프를 준비해야죠.”

    그는 인터뷰를 마친 뒤 또 병원에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아빠는 겨울엔 집에 안 오는 사람인 줄 알아요”라고 말했다. 최근에 짬을 내 집에 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공부를 곧잘 하던 큰 아이의 성적이 곤두박질했다고 한다. 가수가 되고 싶다며 공부를 등한시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시간을 냈다고.

    “큰아이는 가수, 작은아이는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그래요. 아이들이 9살, 7살로 어리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해줬죠. 가수나 운동선수도 지식을 가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제가 운동선수를 해봐서 그 길이 얼마나 힘든지도 잘 압니다. 연예인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는 주목받지 못하고 스러진 동료와 후배를 많이 봤다. 홍대부고는 고교 최강이었지만 다른 동기들은 명성을 얻지 못했다. 프로선수가 된 이는 그와 노기석 전 고려대 코치 2명. 당시는 운동선수들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면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아이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공부를 어느 정도 해놓고 운동, 연예인 생활을 해도 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애들한테 제 이야기를 하니까 작은놈이 웃더라고요. ‘아빠는 지금까지 인기가 좋은데 그런 사람은 몇 명 안 된다’고 했거든요. 작은놈은 농구 선수하면 아빠보다 잘할 자신 있다고 그래요. 아직 어려서 그러는데 저는 얼마나 힘든지 잘 아니까 신경이 쓰이죠. 그래도 아이들에게 공부만 시키진 않을 생각이에요. 본인이 하고 싶다면 뭐든 시켜보려고요. 그래야 얼마나 어려운지도 배우죠.”

    덩크슛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이상민. 그도 세월의 무게를 느끼면서 은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 시즌을 마치면 그는 삼성과의 계약이 종료된다. 벌써부터 은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올스타전 때 ‘몸도 안 좋은데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엄청 받았어요. 대답하기 지겨울 정도로요.”

    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 지난해보다 개인 성적이 떨어진 점에 신경을 쓰고 있다. 혹자는 FA 자격을 얻어 친정인 KCC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상민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하얀색 약통이 하나 있었다.

    “요즘에는 너무 잠이 안 와서 가끔 약(수면제)을 먹고 잘 때도 있어요. 그만큼 고민이 많아요. 일단 이번 시즌을 잘 치르기로 마음먹었어요. 시즌을 마친 뒤 치료도 받고, 몸을 추스른 뒤 결정할 거예요. 신경을 안 쓴다고 어디 고민이 사라지겠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보려고요.”

    은퇴 후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선수로는 누려볼 것 다 누렸잖아요. 지도자 가운데 스타 출신 감독이 성공한 사례가 드물잖아요. 그래서 욕심이 나요.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농구를 감독으로서 펼쳐보고 싶어요.”

    그가 지도자로서도 성공하리라고 여기는 농구 관계자가 많다. 삼성의 조승연 단장은 “(이)상민이는 감독을 해도 잘할 겁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사람들을 아우르는 리더십까지 갖췄습니다. 지도자로도 성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라고 말한다.

    이상민은 구체적 계획은 없지만 대학 감독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학 코치직도 마찬가지. 만약 은퇴 후 모교에서 코치 제의가 온다면 흔쾌히 수락할 거란다. 모교를 위한 봉사도 되고, 자신을 위한 공부도 되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

    “전 성적에 얽매이는 농구를 하고 싶진 않아요. 나만의 스타일을 살려서 팀을 이끌어보고 실패한다면 미련 없이 그만둘 생각이에요. 물론 팀을 맡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게 먼저겠지요. 공부를 위해서라면 고교, 대학 코치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이상민의 농구는 화려하지 않다. 편지를 정확하게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를 닮았다. 덩크슛을 터뜨리는 지금의 젊은 선수들과 같은 화려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별다른 세리머니도 없다. 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그의 농구에 팬들은 열광하고 그의 손짓 하나에도 함성을 지른다.

    “나는 농구를 잘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패스만 열심히 하는 거죠. 진짜 농구를 잘한 사람은 허재 형이죠. 세계대회에 같이 나간 적이 있는데 입이 딱 벌어지게 하더군요. 그에 비하면 저는 많이 모자라죠. 지난해 삼성으로 온 뒤 ‘회춘 상민’이라고 팬들이 그랬는데 팀에서 별명은 ‘에러 상민’이었을 만큼 실수도 많아요. 빠른 농구를 하다 보니 실수가 잦은 편이죠.”

    이상민이 허재보다 확실하게 잘하는 기술이 있다. 바로 덩크슛이다. 그는 연세대 4학년과 상무 시절 본 경기에 앞서 몸을 풀 때 덩크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탄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정작 경기장에서는 그의 덩크슛을 보기 어려웠다.

    “제가 후회하는 게 바로 덩크슛이에요. ‘똑같은 2점인데 왜 힘들게 덩크슛하지’라고 생각해서 많이 안 했어요. 대학시절에는 경기장에서 몸을 풀 때 덩크슛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정작 경기장에 나가면 덩크슛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볼을 어디로 패스할까 고민하게 돼요. 그러다 보니 실제 경기 중에 덩크슛을 넣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예요.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노마크 찬스에서는 무조건 덩크 때리죠.”

    이상민은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를 치르면서 덩크슛을 연습했다. 그만큼 몸 상태가 좋아졌다. “은퇴하기 전 덩크를 한 번 더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몸이 좀 좋아져서 점프가 제대로 나오면 가능할 텐데 지금 허리도 안 좋고 해서 대답하기가 힘드네요.”

    “나는 목 마르다”

    그는 팬들에게 ‘영원한 오빠’로 남아 있다. 1990년대 중반 그를 보며 열광한 소녀팬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농구장을 찾는 ‘아줌마 부대’가 됐다. 팬들의 변화한 모습을 보면서 그는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 그가 퇴행성 관절염을 앓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방증이다. 후배들과의 몸싸움에 밀려 코트에서 넘어지는 일도 잦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이상민이 언제 코트를 떠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우승에 목말라한다.

    “이번 시즌은 동부하고 맞서볼 만해요. 지치고, 아프고, 힘들지만 끝까지 해봐야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의 명언 ‘여전히 배고프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치고, 아프고, 힘든 상황에서도 그는 우승트로피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는 역시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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