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콩비지

입 안에서 ‘예술’ 되는 담백하고 고소한 맛

  • 글: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사진: 김용해 기자 sun@donga.com

    입력2004-05-03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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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년 풍(豊), 머리 두(頭), 오를 등(登), 예도 예(禮). 풍년기원제와 관련된 이들 한자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기본부수가 바로 ‘콩 두(豆)’다. 태고부터 콩은 풍요의 씨앗이자 한자 문화권 민족의 주곡이었다.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콩비지
    서울과 인접해 있지만 시골풍이 물씬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중고개마을. 그 한켠에 자리잡은 비닐하우스형 무허가 건물에 전위예술가 무세중(巫世衆·본명 김세중·대동전위극회 대표·67)씨가 살고 있다. 마을 어귀에 커다란 글씨로 ‘무세중’이라고 쓴 입간판이 있어 집 찾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모르는 이들이 보면 ‘카페’이름으로 오해하기 쉽다.

    무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인스턴트 음식이 만연한 요즘 세태를 개탄했다. “젊은이들이 왜 라면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콩 한줌을 물에 담가놓고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보면 다섯 배 정도로 불어요. 그 콩을 믹서에 갈아서 뼛국에 넣어 끓인 후 양념장으로 간을 해 먹으면 맛이 그만인데. 단백질과 지방, 필수 아미노산 등 영양소도 풍부해서 라면과는 비교도 안 되죠.”

    무씨는 콩 신봉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겨울에는 콩으로 콩비지나 콩죽을 만들어 먹고, 여름에는 콩국수를 즐긴다. 콩에 대해 상당한 연구도 했다.

    “콩은 천신께 바친 최초의 곡물이에요. 밝음을 지향하는 우리 문화의 정신적, 육체적 씨앗이죠. 흔히 말하는 담백하고 고소한 맛의 최고가 바로 콩입니다. 된장, 고추장, 간장도 모두 콩으로 만들어진 것이에요. 요즘엔 콩이 없으면 못살 것 같아요. 내 DNA가 콩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니까요.”

    무씨가 이처럼 콩에 집착하는 것은 그의 건강과도 무관치 않다. 무씨는 행위예술 또는 전위예술이라고 불리는 국내 퍼포먼스(performance)계의 1세대 작가다. 지난 3월24일 부인 무나미(본명 이나미·45)씨와 함께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로부터 제2회 한국ITI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이야 국내외 연극예술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지만, 과거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이방인이었다.



    무씨의 전위예술적 철학과 사상은 무속신앙 ‘굿’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살풀이, 탈춤, 마당극 등 전통 민속극에 전위적 행위예술이 더해져서 완성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연극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 민속극도 아니었다. 때문에 국내 예술계 어느 곳에서도 그의 예술세계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콩비지

    올 가을에 있을 ‘무사위’ 공연 연습중인 무세중씨와 대진대 연극영화과 학생들. 무사위는 무씨가 한국인의 의식과 춤에서 창안한 기본동작이다.

    그가 무속신앙에 빠진 것은 성균관대 불문학과 졸업 후 한민족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뿌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뿌리를 찾아 끊임없이 쫓다 보니 결국 ‘무(巫)’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하더군요. 그래서 평생 ‘무’를 알고 싶어서 성도 김씨에서 무씨로 바꾸었죠. 그런데 ‘무’가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무’를 깨닫기 위한 도전을 시작할 때 20대 후반이던 그는 어느덧 70을 바라보고 있다. 남은 건 병마뿐. 지난해 8월 간암 판정을 받은 무씨는 7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다행히 ‘삶의 끈’을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수술을 앞두고 ‘이제는 끝이다’ 싶어 주변 정리도 할 겸, 없는 살림에 수술비로 전세금을 보탠 터라 마땅한 거처조차 마련키 어려웠던 것.

    간신히 아는 사람의 땅에 남은 전재산 2000만원을 털어 지은 게 바로 지금 살고 있는 무허가 비닐하우스다. 하지만 이곳도 1~2년 사이 땅 주인이 바뀌면 떠나야 할 처지. 무씨는 수술 후 건강이 회복돼 대진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지만 강사료는 대책을 마련하기엔 턱없이 적은 액수다. 이처럼 힘든 생활고를 겪고 있는 무씨에게 콩은 경제적이면서도 건강을 책임져주는 고마운 곡식이다.

    콩비지를 만드는 방법은 앞서 무씨의 설명처럼 그다지 어렵지 않다. 먼저 흰콩을 12시간 정도 불린 후 껍질을 벗겨낸다. 제대로 불린 콩이라면 물에 담근 채 주무르기만 해도 쉽게 껍질이 벗겨진다. 껍질을 헹궈낸 후 불린 콩에 물을 조금 부어 믹서에 부드럽게 간다.

    무씨가 추천하는 육수는 돼지 등뼈 국물. 콩에 부족한 칼슘성분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돼지 등뼈를 찬물에 담가 핏기를 뺀 후 1시간 정도 푹 삶으면 살코기와 뼈에서 우러난 국물 맛이 담백하면서도 깔끔하다.

    이 육수에 갈아놓은 콩비지를 넣고 중불에 비린 맛이 없어질 때까지 끓인다. 이 때 거품이 잠깐 끓어올랐다가 잦아들 정도로 살짝 익혀야 콩의 영양소가 그대로 보존된다. 콩비지에 끼얹을 양념간장은 잘게 썬 파와 마늘 다진 것, 깨소금, 참기름 등을 간장과 잘 섞어 만든다.

    양념간장으로 적당히 간한 콩비지는 그야말로 ‘담백한 맛’의 진수다. 콩비지 속에 섞인 돼지 등뼈고기 맛 또한 일품이다. 여기에 밥을 비벼서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으면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돼지 등뼈고기 대신 김치를 넣으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도 있다.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콩비지

    조그만 방 하나를 가득 채운 갖가지 곡식들. 무씨의 건강을 지켜주는 소중한 보물들이다.

    무씨는 그 맛이 바로 ‘한국의 맛’이라고 평가한다. “서양음식은 먹기 전에 이미 복합적으로 조합된 것이에요. 하지만 우리의 음식은 여러 가지 반찬과 곡식이 입 안에서 충돌하면서 다양한 맛을 만들어내죠. 입 안에서 요리되어 진정한 맛을 우려내는 겁니다.”

    무씨는 건강이 나빠지기 전, 부인과 함께 국내외에서 매년 10회 이상 공연을 해왔다. 이제 그가 건강을 추스르며 새로운 공연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전위(행위)예술을 향한 도전, 과연 그에게 전위란 무엇일까.

    “옛날 탈춤도 실은 전위예술이에요. 전위란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 그러니까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나도 변해야 하고, 예술도 변해야 하는 것이죠.”

    무씨는 통일과 같은 민족의 본질적 과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무참하게 짓밟힌 자연환경에 대한 경고,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넋과 혼을 달래는 굿을 또 다른 전위적 형태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그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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