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김정은 아킬레스건 ‘외화 지갑’… “이르면 2021년 고갈”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9-10-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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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환보유고 줄어들수록 협상력 약화

    • 2018년 말 외환보유액 25억~58억 달러 추정

    • 현재 추세라면 내년부터 식량·상품 수입 줄여야

    • 외화 수급 고려하면 北 협상 타결 원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개장을 앞둔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관광지구 건설장을 찾았다고 8월 31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개장을 앞둔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관광지구 건설장을 찾았다고 8월 31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평양 출신으로 2015년 탈북해 서울 서초구에서 평양냉면 식당을 운영하는 문연희(28) 씨에게 “옥류관 냉면이 최고예요?”라고 물으니 “단체관광객이나 가는 식당이다. 평양 사람들은 ‘달러 받는 식당’에 간다”고 답했다. “평양에서 냉면 값은 얼마나 해요”라고 묻자 곧바로 “4달러”라는 답이 돌아왔다. 

    북한 화폐 단위는 ‘원’이다. 평양 사람들은 ‘원’보다 ‘달러’를 반긴다. 일상에서도 원화가 아닌 달러화를 쓴다. 2016년 홍콩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을 딴 후 탈북한 리정렬(21) 군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 돈도 쓰긴 하는데 ‘무거워서’ 못 써요. 100달러면 북한 돈으로 80만 원인데, 최고액권인 5000원권으로도 160장입니다. 그걸 어떻게 들고 다녀요. 못 들고 다니죠. 지갑이 아닌 가방에 넣어야 해요.”

    천덕꾸러기 된 북한 원화

    북한 화폐. [동아DB]

    북한 화폐. [동아DB]

    북한 원화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건 시장에서 신뢰를 잃어서다. 2009년 화폐개혁 때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바꾸면서 1인당 교환 한도를 10만 원으로 제한했다. 10만 원 넘는 돈은 휴지조각이 돼버린 것이다. 

    현재 평양에서는 달러화와 유로화, 북·중 국경지역에서는 위안화가 경제 활동 시 주로 쓰인다. 북한 주민들은 치부(致富)도 달러화, 유로화, 위안화로 한다. 은행에 원화를 맡기지 않고 외화를 은닉해 보관한다. ‘원화’가 아닌 ‘외화’로 국가 경제와 생활 경제가 운영되는 것이다. 



    평양에서 달러로 결제하지 못하는 곳은 없다. 원화로 가격표를 적어놓은 식당에 달러를 내면 장마당 환율로 환산해 계산해준다. 10월 16일 현재 1달러는 장마당에서 북한 돈 8300원. 자국 통화가 달러로 대체돼 공식 화폐로 사용되는 현상을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이라고 한다. 

    2017년 탈북해 올해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정시우(28) 씨는 평양에서 탁구장, 휴대전화 판매 사업을 했다. 북한에서 사업한 경험에 대해 묻자 그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달러’ 단위를 사용해 설명했다. 요새 누가 북한 돈을 쓰냐는 거다. 

    “탁구장 사업을 시작할 때 3500달러(한국 돈 420만 원)를 투자했어요. 월 매출이 많을 때는 800달러였습니다. 대신 나가는 돈이 많아요. 매달 400~500달러가 비용으로 들거든요. 종업원 월급은 1인 30달러였고요. ‘기관’에 바치는 돈이 매달 300달러쯤 됐어요.” 

    정시우 씨는 “주체사상? 물 건너갔다”면서 “평양은 돈이 돈을 버는 곳”이라고 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는 “북한 주민의 신심(信心)이 수령에서 돈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말하는 돈은 ‘달러’다. “수령님, 원수님보다 더 위대한 것이 달러화”라는 말도 나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달러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북한 경제는 탈이 날 수밖에 없다. 김정은의 통치자금도 외화로 축적돼 있다. 노동당 39호실이 통치자금을 관리한다. 김정은의 ‘달러 지갑’ 노릇을 하는 것이다.

    가산국가(家産國家·Patrimonial State)

    비핵화를 비롯한 북한 체제의 미래는 정치학의 영역에서 주로 논의된다. 대북정책 수립 과정에도 정치학자나 국제정치 연구자들의 입김이 주로 영향을 미친다. 정치학은 누가 의사 결정을 하는지에 주목한다. 김정은과 평양 엘리트들의 정치공학과 의사 결정 과정을 주로 살피는 것이다. 

    경제학의 시각은 정치학과 다르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인간은 이기적이다. 인간의 합리성은 완전하다. 인간은 쾌락과 성공을 추구하는 공리적 존재로 경제적 이익에 몰두한다”고 가정(假定)한다. ‘구조’를 ‘인간의 의사 결정 과정’보다 중요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보다 구조를 본다. 

    경제학은 경제구조가 다른 사회구조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포용정책을 통해 ‘독재자 김정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거나 독재자가 “이제부터는 인민을 위해 헌신하고자 핵을 포기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경제학 교과서에는 없다. 

    경제학은 비핵화 해법도 이익-손해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경제구조 변화에 맞지 않는 정책을 펼치면 통치자는 실각하거나 불이익을 당한다. 김정은도 경제구조의 변화에 맞서면 통치권을 유지하기 어렵다. 

    북한은 더는 폐쇄 경제가 아니다. 400곳에 달하는 시장이 인민의 생명 줄이 된 지 오래다. 또한 대외 무역과 인력 송출 등으로 달러를 수급해왔다. 

    요컨대 김정은이 권력을 유지하는 원천은 달러다. 달러를 확보하면 체제 생존도 가능하고 북한 주민에게 지도자로서의 성과도 과시할 수 있다. 달러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통치의 계속성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북한은 일종의 가산국가(家産國家·Patrimonial State)다. 통치권, 소유권 구별이 없다. 국가 재정이 김정은의 사수입(私收入)이나 다름없다. 권력 유지를 위해 달러가 필요한 김정은에게 ‘얇아진 외화 지갑’은 아킬레스건이다.

    “외환보유액 날마다 줄고 있어”

    평양 문수대물놀이장. [동아DB]

    평양 문수대물놀이장. [동아DB]

    북한 쌀 가격은 10월 16일 현재 1㎏당 북한 돈 5200원(0.6달러)이다. 유엔과 국제사회 제재에도 불구하고 식량 가격은 안정세다. 

    거울 통계(북한과 교역하는 나라의 데이터로 추정한 북한 경제 통계)에 따르면 북한은 해마다 식량 20만~30만t을 수입한다. 외환보유고가 줄어들면 식량 수입도 줄일 수밖에 없다. 식량 가격 앙등은 통치 권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북한이 문수대물놀이장(워터파크), 동물원 등 위락시설을 대거 건설한 데는 시중의 달러를 국가가 흡수하려는 의도도 있다.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백두산 일대 무봉국제관광특구 개발 사업에 소매를 걷어붙인 것도 외화 확보가 목적이다. 

    북한의 외환보유액은 김정은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당·군·내각에 외화가 분산돼 쌓여 있는 데다 기업과 개인도 외화를 은닉하기 때문이다. 30년 가까이 북한 경제를 연구해온 방찬영 카자흐스탄 키멥대 총장은 북한의 외환보유고가 고갈되고 있다고 봤다. 

    “김정은 체제 안위를 보장하는 통치 기반은 인민 대중의 지지가 아니라 소수 엘리트와의 공생·공존을 통한 실리적 동맹(Mutually Beneficial Coalition)이다. 소수 엘리트 집단에는 무역을 통해 신흥 재벌로 부상한 돈주와 군, 당, 행정의 고위층 관료가 포함돼 있다. 최고지도자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과 특권을 향유하도록 배려해주고, 그 보답으로 충성과 지지를 얻어낸다. 최고통치자와 엘리트 간 실리적 동맹이 강력한 제재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으로 첨예한 도전을 받고 있다. 유엔과 미국이 채택한 제재로 인해 북한의 대중(對中) 수출이 급감했다. 노동당 39호실이 관장하는 통치자금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다.”(신동아 9월호 “김정은-평양 엘리트 동맹 와해” 제하 기사 참조) 

    미국 정보 당국에서 오랫동안 북한 경제를 분석한 윌리엄 브라운 조지타운대 객원교수도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대북제재로 인해 수출길은 막힌 대신 수입은 이어지면서 무역적자가 증가해 외환보유액이 날마다 줄고 있다”고 말했다.

    크게 줄어든 ‘외화 돈줄’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의 행태를 예측하려면 평양이 내뱉는 정치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숫자로 된 통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북제재 효과로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보이면 북한의 대미 협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외환보유고가 넉넉하면 협상력을 유지한 채 상당 기간 더 버틸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물자 수입을 통해 주민 생활에 주는 타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외환보유고는 얼마나 될까. 

    장형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와 김석진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이 최근 발표한 ‘북한의 외화 수급 및 외환보유액 추정과 북·미 비핵화 협상에 대한 시사점’ 제하 논문은 2018년 말 북한의 외환보유액을 25억~58억 달러로 추정한다. 

    북한은 △무연탄 등 지하자원 수출 △무기 수출 △관광 △개성공단 △해외 송출 노동자 송금 △한국 거주 탈북민 송금 등의 경로로 외화를 수급해왔으나 유엔 안보리 제재로 무연탄 수출 등이 중단되면서 외화 돈줄이 크게 줄었다. 

    2017년 상반기까지의 대북 경제제재는 북한에 실질적 타격을 주기에는 한계가 컸다. 무역 전반에 대한 ‘포괄적 제재’가 아니라 핵·미사일 개발에 사용되는 외화 수급에 대한 ‘표적 제재’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2016년 3월 안보리 결의 2270호는 포괄적 제재의 양상을 취하기는 했으나 석탄 및 철광석 수출 금지 조항이 포함되지 않아 북한의 외화 수급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2017년 7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을 시험발사한 후 안보리에서 결의된 2371호부터 대북제재가 북한을 본격적으로 타격하기 시작했다. 결의 2371호는 석탄, 철광석 수출을 금지했으며 수산물 수출까지 막았다. 2017년 12월 안보리가 결의한 2397호는 광산물, 수산물뿐 아니라 농산물, 기계류, 전자기기, 목재, 선박 등의 수출, 어업권 거래를 금지했으며 북한이 해외에 송출한 노동자를 중국· 러시아 등이 2019년 말까지 출국시켜야 한다고 규정했다.

    ‘로또 같은 외화’로 평양에 마천루 지어

    고층 아파트로 빼곡한 평양 여명거리 전경. [동아DB]

    고층 아파트로 빼곡한 평양 여명거리 전경. [동아DB]

    현재 가동하는 대북제재가 북한의 무역을 완전히 금지한 것은 아니다. 수출의 상당 부분을 막았으나 수입은 열어놓았다. △식품 △식품 원료 △소비재 △비료 △산업용 원자재 및 중간재 수입이 가능하다. 

    외환보유고가 넉넉하다면 주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언제든 외국으로부터 들여올 수 있다. 북한이 생산하는 경공업 제품의 품질이 제고되고 있으며, 쌀, 휘발유 가격이 안정적인 것은 아직은 경제가 버틸 만하다는 뜻이다. 

    북한은 2011~2013년 급상승한 지하자원 가격에 힘입어 ‘로또 같은 외화’를 벌었다. 2008년 2억 달러 규모이던 중국으로의 무연탄 수출이 2011년 11억 달러로 급증했다. 이 같은 수준의 무연탄 수출이 2016년까지 이어졌으며 중국, 러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으로 인력을 수출해 벌어들인 외화도 상당했다. 

    북한은 ‘로또 같은 외화’를 바탕으로 평양에 초고층 아파트를 짓고, 마식령 스키장 건설 같은 전시성 사업을 수행했다. 

    장형수 교수, 김석진 연구위원은 2011~2013년 3년간 북한이 12억 달러의 외화를 추가로 축적했다고 추정했다. 2010년 한국의 5·24조치(천안함 폭침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 정부가 내놓은 대북제재)로 남북 교역이 끊기면서 감소한 외화 수급액이 3억~4억 달러에 달하는데도 ‘외화 풍년’을 맞은 것이다. 

    장형수, 김석진 박사에 따르면 2014~2016년 북한의 무역수지 적자는 연평균 6억8000만 달러로 확대된다. 이 같은 적자는 수입 확대가 원인이다. 지출 확대 정책을 통해 평양의 면모가 눈에 띄게 화려해졌으며 주민들의 생활도 개선됐다.

    2017년 하반기 이후 현재까지 무역적자 40억 달러 넘어

    2016년 9억 달러이던 북한의 무역적자는 2017년 20억 달러로 폭증한다. 북한 역사상 최악의 무역수지 적자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추가 제재가 가동된 2018년 북한의 수출은 추가 제재 이전의 10분의 1로 줄어들었으나 수입은 3분의 2 정도 수준을 유지했다. 그 결과 대중 무역수지 적자가 20억 달러에 달했다. 장형수, 김석진 박사는 2018년 무역적자도 17억60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따라서 2017년 하반기 강력한 제재가 가동된 후 현재까지 북한이 40억 달러 넘는 무역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18년 말 북한의 외환보유고가 25억~58억 달러라고 보면 현재와 같은 무역적자가 이어질 경우, 빠르면 2021년 북한의 외환보유고가 0달러가 된다. 강력한 제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외환보유고의 고갈을 막으려면 수입을 줄이면서 버텨야 한다. 북한이 결핍의 경제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경제학 용어를 사용하면 문재인 정부의 포용정책은 신뢰를 바탕으로 독재자의 목적함수(objective function)를 ‘독재 유지’에서 ‘인민생활 향상’으로 바꾸겠다는 것이고, 강력한 제재를 강조하는 ‘압박 정책’은 목점함수를 바꾸는 대신 목적함수에 영향을 주는 제약(constraints)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2018년 신년사를 통해 유화 제스처를 내놓은 후 평창올림픽 참가 등을 통해 대화 국면을 만들었다.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온 것은 제재와 압박의 효과이기도 하고, 핵보유국으로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

    ‘오래 버티기 전략’ 선회할 수도

    문재인 정부는 비핵화를 촉진하는 수단으로서 제재 완화를 주장한다. 제재를 완화하면 북한의 달러 수급이 개선된다. 달러 수급이 개선되면 북한의 대미 협상력이 커진다. 반대로 외환보유고가 줄어들면 미국과의 협상을 어떤 식으로든 타결하기로 결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외환보유고 규모에 따라 협상 태도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장형수 교수는 10월 13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도 북한은 축적한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상품 수입을 줄이지 않고 있다. 제재에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협상을 타결하는 게 북한의 1차적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늦어도 2020년 말까지는 비핵화-체제보장을 교환하는 협상을 타결하려는 시간표를 갖고 있다고 본다. 북한이 상품 수입을 줄이기 시작하면 ‘오래 버티기 전략’에 돌입한 것으로 봐야 한다. 상품 수입을 줄이면 민생이 어려워져 주민들의 신뢰를 일부 잃겠으나 상당 기간 더 버틸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은 미국 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외화 수급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이 협상 타결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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