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국에도 활개 치는 매크로 암표
매크로 앞에선 보안 절차, 예매 한도 기준 속수무책
손으로 하면 1분 걸릴 일도 매크로는 5초 만에 뚝딱
매크로 암표 피해 막을 법적 안전망 강화 시급
“큰돈 주고라도 암표 사려는 자세 바뀌어야”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공연 포스터. 코로나19 확산으로 인기 뮤지컬 티켓이 암표상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GettyImage, OD컴퍼니 제공]
올 4월 간만에 공연 예매에 나선 ‘뮤지컬 덕후’ 이설(31) 씨는 허탈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가 예매에 실패한 ‘최애’(‘최고로 애정한다’의 줄임말) 배우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VIP석 티켓이 한 온라인 중고 거래 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버젓이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티켓은 4월 14일 오전 11시 온라인에서 예매를 시작한 지 6초 만에 모두 팔렸다. 그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티켓 중고 거래 사이트에 ‘맨 오브 라만차 VIP석 암표를 판다’는 게시물이 속속 올라왔다. 그 수가 수십 건에 달했다.
이씨는 “2월부터 줄곧 해당 뮤지컬 티켓 확보에 실패한 터라 눈물을 머금고 정가의 2배가 넘는 암표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며 “구매한 티켓은 ‘플미충’이라 불리는 전문 암표상들이 대량 매집한 뒤 프리미엄을 붙여 내놓은 암표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플미충은 여분의 금액을 뜻하는 영어 ‘프리미엄(premium)’과 벌레를 의미하는 한자 ‘충(忠)’의 합성어로, 원래 가격보다 높은 값을 붙여 되파는 암표상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코로나19 시국에도 활개 치는 매크로 암표
그동안 암표 거래는 인기 아이돌 그룹의 공연에서 주로 이뤄졌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 암표상들은 인기 아이돌 그룹의 공연보다 더 많은 팬이 몰리는 인기 뮤지컬이나 연극 티켓을 대량 매집하는 데 열을 올린다. 코로나19 여파로 인기 아이돌 그룹의 공연이 무산되거나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5월 막을 올린 연극 ‘얼음’의 6만 원짜리 R석 티켓은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호가가 35만 원까지 치솟았다. 뮤지컬 ‘위키드’ VIP석 티켓(15만 원)은 암표 사이트에선 40만 원을 넘는 액수로 거래됐다.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프로듀서인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현재 공연계는 정부의 강화된 방역 지침에 따라 전체 객석의 70%만 판매하고 있다. 그로 인해 좌석수가 3분의 2로 줄어 관람객이 이전보다 티켓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공연 관람을 간절히 바라는 팬들이 암표상의 영업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암표상들이 단 몇 초 만에 티켓을 대량 구매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온라인 자동화 프로그램 ‘매크로(macro)’ 덕분이다. 매크로는 특정 명령을 반복 입력하는 자동 프로그램이어서 공연 일시부터 좌석, 결제 방식까지 각 단계에 필요한 정보를 여러 인터넷주소(IP)로 한 번에 자동 처리해 입력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킨다. 하나하나 마우스를 움직여 예매하는 일반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고, 좌석을 대량으로 선점할 수 있는 것도 큰 이점이다. 2018년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드루킹 댓글 공작 사건’에도 공감과 비공감을 허위로 반복 입력하는 매크로 프로그램 ‘킹크랩’이 사용됐다.
매크로 범죄, 공연·골프장·마스크까지?
매크로는 공연 티켓 예매뿐만 아니라 마스크 물량 확보 등에도 부정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골프장 예약을 두고도 매크로 암표가 활개 친다. 골프장 온라인 예약 사이트 내 양도 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예약권을 양도하겠다는 게시물이 봇물을 이룬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직전인 지난해 초만 하더라도 골프장 예약권 양도 가격은 그린피(green fee·골프장 코스 사용료)보다 1만~2만 원가량 저렴한 수준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내놓은 ‘땡처리’ 상품인 만큼 가격을 낮춘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2월부터 코로나19 여파로 골프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경기 양평 소재 골프장 관계자는 “몇 개의 아이디를 동원해 수도권 소재 골프장의 황금시간만 골라 쓸어가는 전문 예약꾼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암표상들은 골프장에서 제시하는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온라인 양도 게시판에 글을 올린 다음, 고객들이 거래를 문의하면 양도비 명목으로 팀당 10만 원 정도를 별도 계좌번호로 받는다고 한다”고 전했다.
매크로 사용은 그 자체로 불법은 아니지만 범죄에 악용되는 경우에는 불법이다. ‘매크로를 이용해 티켓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행위’와 ‘매크로를 이용해 티켓 판매 사이트 서버에 장애를 일으키는 행위’ 등이 경찰의 중점 단속 대상이다.
매크로를 이용해 티켓을 다수 구매한 경우 판매 업무의 적정성 및 공정성을 방해한 혐의로 업무방해죄를 적용할 수 있다. 매크로로 티켓 판매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서버 장애가 발생하면 컴퓨터장애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 현행 형법에 따르면 업무방해 또는 컴퓨터장애업무방해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개인정보를 도용해 아이디(ID)를 다수 생성하거나 티켓 사이트에 불법적으로 접근하면 정보통신망법 위반(개인정보 누설·정보통신망 침해)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강도도 세다. 5년 이하 징역형이나 5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보안 절차, 예매 한도 기준 속수무책
그렇다면 매크로 암표 조직은 어떤 방식으로 티켓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것일까. 이런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기에 활개 치는 것이 가능할까. 경찰 수사 담당자들은 “매크로 암표 수사가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만큼 어렵다”고 토로한다. 조직원들이 점조직 형태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암표 조직의 판매책으로 활동하는 브로커의 증언에 따르면 매크로 암표 조직단은 총책, 자금관리책, 매크로 개발자, 예매처 계정모집책, 예매책, 수령책, 판매책, 전달책 등으로 이뤄져 있다. 점조직이 전국에 분산돼 있기에 조직원이 모두 모이는 일은 없다. 서로의 연락처도 알지 못한다. 총책의 지도 아래 조직원들이 주도면밀하게 움직인다.자금관리책은 암표를 수십 배 높은 가격에 되팔아 수익금 일부를 계정 대여금 명목으로 예매책에게 넘긴다. 그사이 예매처 계정모집책은 티켓 예매처 계정을 트위터나 텔레그램, 오픈 카카오톡 채팅방 등을 이용해 지인이나 타인에게 대여한다. 대여료 단가는 계정 하나당 12개월 기준 10만 원, 24개월은 20만 원으로 시장가가 형성돼 있다.
매크로 개발자는 마우스 커서가 미리 설정해 둔 온라인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 뒤 로그인부터 일시 및 좌석 선택, 결제 방식, 로그아웃 등 각 단계에 따른 명령을 자동으로 한 번에 클릭하게끔 하는 매크로를 제작한다. 공연 좌석을 하나의 좌표로 볼 때 특정 좌석 버튼 위치에 해당하는 정보를 지정해 자동으로 마우스를 해당 정보로 옮기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마우스를 클릭해 예매하는 경우 1분이 걸리는 일을 매크로는 단 5초 안팎에 끝낼 수 있다.
원래 티켓 예매 사이트들은 로그인한 사용자가 사람인지 로봇인지 구별해주는 보안 도구 ‘캡차(CAPTCHA)’를 적용한다. 특정 문자나 이미지를 보여주고 사용자가 그대로 입력하거나 같은 이미지를 클릭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크로 개발자는 각 예매처가 사용하는 캡차 문자와 이미지를 미리 매크로에 입력하는 수법으로 보안 절차를 무력화한다. 특정 문자나 이미지가 뜨면 1초 만에 매크로가 자동으로 데이터에서 가장 유사한 정보를 찾아낸다.
예매처의 예매 한도 기준도 쉽게 우회한다. 매크로 개발자는 클라우드 서비스와 가상 사설 서버 등을 이용해 인터넷주소(IP) 여러 개를 만들어 ‘1인당 2매’ 예매 제한 정책을 무장해제한다. 계정모집책이 확보한 예매처 계정으로 로그인해 티켓 배송 주소지를 여러 개 돌려가며 입력하는 방법으로 마치 여러 명의 구매자가 각자 티켓을 예매한 것처럼 가장한다. 예매처가 실시간 모니터링을 통해 구매자의 계정과 IP, 주소지, 연락처 등을 대조해 비정상 거래를 취소하거나 문제가 있는 기기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을 염두에 둔 조치다.
매크로 암표 피해 막을 법적 안전망 강화 시급
2019년 11월 14일 경북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온라인에서 아이돌 그룹의 공연 티켓을 구매, 원가의 10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판매한 ‘매크로 암표 조직’ 일당 22명을 붙잡았다. [뉴시스]
매크로 암표 조직은 티켓을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실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주소지로 배달된 티켓을 수거하거나 현장 수령이 필요한 경우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판매책이라고 소개한 브로커 A씨는 “판매책은 암표를 예매 가격보다 높게 판매해 우편 발송 또는 직접 거래 등의 방법으로 판매한다. 전달책은 판매책에게 티켓을 전달받아 직접 또는 우편으로 구매자에게 티켓을 전달한다”고 설명했다.
경찰청과 문화체육관광부는 암표매매 신고센터와 신고포상금제도를 가동하고 있지만 매크로를 통한 암표 유통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실정이다. 매크로 암표 유통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안전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승진 한국소비자원 부연구위원은 “매크로를 이용한 티켓 예매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구매 형태로 볼 수 있지만 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며 “공연법이나 국민체육진흥법 같은 개별법에 매크로를 통한 티켓 구매와 재판매 행위 등을 근절할 수 있는 강도 높은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큰돈 주고라도 암표 사려는 자세 바뀌어야”
매크로를 통한 암표가 설 자리를 잃게 하려면 제도의 한계를 보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크로 암표 조직단에 대한 형량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구서구지방법원이 앞서 언급한 매크로 온라인 암표 조직단 22명 중 총책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매크로 개발자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는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공연계 인사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확보한 암표를 터무니없이 큰돈을 주고라도 사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런 관람객이 있는 한 매크로 암표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공연 관람 의사가 없는 암표상들이 매크로를 이용해 티켓을 대량 구매한 뒤 재판매하는 행위는 티켓을 획득할 공평하고 공정한 기회를 가로막는 것”이라며 “소비자와 공급자 사이의 신뢰와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매크로 암표 유통에 대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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