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 마카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라진 슬픈 섬

澳 카지노 왕국의 그늘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7-02-10 09: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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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역이 끊기면서 도박과 성매매를 호구지책으로 삼은 마카오. 100여 년 뒤 그 호구지책은 주력 산업이 됐고, ‘동양의 몬테카를로’는 세계 최대 도박장이 됐다. ‘완전고용’과 ‘흑자 예산’을 자랑하는 돈 많은 카지노 왕국이지만, 민초들의 삶은 힘겹기만 하다. 변변한 의료·교통시설은 찾아볼 수 없고, 카지노산업 외에는 마땅한 일자리도 없다. 차별은 여전하고 민주화의 길은 요원하다.
    1991년 KBS 드라마 ‘야망의 세월’은 어릴 때 무척 재미있게 본 드라마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일제강점기 사업가 박만석이 흰 모자에 흰 재킷, 흰 바지, 흰 구두로 ‘쫙~’ 빼입고 등장하자 그의 지인들이 “와, 마카오 신사 됐수다!” 하며 감탄하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사의 대명사 마카오, 이름도 이국적인 마카오는 어떤 곳일까. 마카오는 그 이름만으로도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훗날 마카오가 중국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적잖이 실망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마카오는 어릴 적 필자의 환상을 아쉽게나마 달래주었다. 대항해의 선구자 바스코 다 가마와 예수회 창시자 로욜라의 동상이 시내에 서 있고, 희고 노란 파스텔톤 건물들 사이를 걸으며 먹는 에그 타르트와 푸딩은 유럽의 정취를 자아낸다.



    대항해시대가 낳은 마카오

    마카오의 약칭은 ‘깊을 오(澳)’ 자다. ‘오(澳)’는 배가 정박하기 쉽게 해안선이 움푹 들어간 곳을 말한다. 마카오는 중국어로 ‘아오먼(澳門)’, 천혜의 항구임을 뜻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마카오라는 이름이 훨씬 친숙하다. 식민지 이름이 대체로 그렇듯, 마카오라는 이름도 제국주의자와 현지인의 대화로 만들어졌다.

    중국 뱃사람들은 바다의 수호여신인 ‘마조(媽祖)’를 섬기고 사원을 지었다.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의 마조 사원 근처에 정착하며 현지인에게 이 땅의 이름을 물었다. 현지인은 사원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착각해서 “아마 까오(마조 사원)”라고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마카오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포르투갈인은 왜 마카오에 자리를 잡았을까. 광둥성의 중심 광저우(廣州)는 명·청(明淸) 쇄국정책 때에도 유일하게 개방한 대외무역항이었다. 중국과 교역하길 원하는 각국의 배들이 광저우에 몰려들어 “강을 따라 떠들썩한 번화가, 순식간에 수천 척의 배가 솟아난다”는 장관을 연출했다. 광둥성의 젖줄 주장(珠江)은 광저우의 남쪽으로 흘러 남중국해로 들어간다. 주장과 남중국해가 만나는 지점, 중국 대륙의 땅끝에 마카오 반도가 있다. 즉 마카오는 당시 세계 최대 항구였던 광저우와 가까우면서도, 중국 조정의 삼엄한 감시를 ‘살짝’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중국과 교역하는 한편, 독자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은 해외상인 집단이 탐낼 만했다.

    포르투갈은 “육지는 이곳에서 끝나고, 바다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처럼 유럽의 서남쪽 끝에 있다. 대서양과 지중해의 경계이고, 유럽과 아프리카의 경계이며, 가톨릭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경계다. 예부터 포르투갈은 라틴족, 켈트족, 게르만족 등 유럽민족과 카르타고인, 무어인, 베르베르인 등 북아프리카인들이 부대끼며 살았다. 따라서 다양한 종족과 문화를 접하며 교역하는 것에 익숙했다.

    더욱이 포르투갈은 땅도 작고 인구도 적다 보니 장사가 아니면 먹고살기 힘들었다. 그러나 베네치아공화국이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어 대서양으로 나가는 다른 항로를 찾아야 했다. 열악한 사정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던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항해 왕자’ 엔리케가 아프리카를 탐색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열었다. 포르투갈의 동진은 거침없었다. 인도를 넘어 동남아시아를 지나 중국과 일본까지 닿았다.



    외교, 전쟁, 밀무역

    다만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안착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포르투갈은 동남아 일대를 석권할 수 있는 요충지 말라카를 점령한 후, 1517년 국왕 마누엘 1세의 공식 사절 토메 페레스를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 외교·교역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이때 명나라 황제 정덕제는 스스로 대장군에 봉하고 몸소 몽골군과 싸우는 등 기행을 일삼은 황제이긴 했으나, 외국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자금성에서 살기보다 북해공원 근처에 몽골식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것을 좋아했고, 몽골어와 산크리스트어에 능해 서역인과의 만남을 즐겼다. 그런 만큼 정덕제 자신은 포르투갈과의 관계도 흥미롭게 검토해볼 만했다.

    마침 말라카의 사신이 명나라에 와 ‘포르투갈이 범선과 화포로 왕국을 점령하고 국왕을 축출했다’며 구원을 요청했다. 말라카는 ‘칙서를 내려 책봉한 나라’로 명나라 조공 질서의 일원이었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은 명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신하들은 일제히 포르투갈을 비난했다.

    “지금 그들이 왕래하여 무역하는 것을 듣건대, 위세를 내세워 반드시 싸우고 살상을 자행하니 남방의 환란과 위태로움이 끝이 없습니다.”

    포르투갈은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자 함포로 명나라 문을 열고자 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선두주자답게 화력도 만만치 않았으나 명나라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차례 전투 모두 명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외교와 전쟁, 두 가지 공식 루트가 모두 실패하자 남은 길은 비공식 루트, 즉 밀무역뿐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해안에서 밀무역과 해적질을 일삼았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핀투는 당시 저장성 닝보(寧波)에 있던 불법체류 포르투갈촌(村)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고 전한다.

    “닝보에는…(중략)…약 3000명의 포르투갈인이 백인과 인도인 혼혈 여성과 결혼해 살았고, 두 곳의 병원과 연간 약 3만 크루자도(cruzado·금화)로 유지되는 성당 2곳이 있었으며, 도시 의회는 매년 6000크루자도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 규모로 미루어 아시아에서 가장 고풍스럽고 부유하고 풍족한 도시라는 것은 분명한 듯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불법행위로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익을 볼지 몰라도, 포르투갈 왕국이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1552년 포르투갈 왕실함대 사령관 리오넬 데 소사가 포르투갈 해적선과 밀무역 상인을 소탕해 명나라 조정의 환심을 샀다. 소사는 포르투갈 왕국이 질서와 명예를 중시하는 ‘바다의 제국’이며 일부 몰지각한 포르투갈 무뢰배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한편 광둥성은 진(秦)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에도 이미 남중국해의 중요 무역항일 정도로 상업의 역사가 뿌리깊은 곳이었다. 광둥의 현지 관원과 호족들은 조정과 달리 교역을 원했다. 이들이 조정에 통상 허용을 계속 탄원하자, 조정도 이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했다. 포르투갈은 이에 편승해 명의 조공국인 말라카의 무역선으로 위장하고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기 마련이다. 포르투갈인은 무역·해군기지로 쓸 수 있는 마카오 반도를 탐냈다. 1553년 포르투갈 상인은 바닷물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며 마카오 반도에 상륙 허가를 받았다. 이후 소사는 상인의 경거망동을 자제시키는 한편 중국에 20%의 세금을 내며 마카오에 은근슬쩍 눌러앉았고, 결국 1557년 조정은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 살 수 있는 거주권을 부여했다.

    당시 황제가 가정제였던 것이 포르투갈에 큰 행운이었다. 가정제는 불로장생술에 빠져 생리혈과 아침이슬 등으로 불사의 약을 만든답시고 궁녀들을 학대했다. 학대를 견디지 못한 궁녀 16명이 황제를 목 졸라 죽이려 한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토록 불로장생에 집착하던 가정제가 찾던 물품 중 하나가 용연향(龍涎香)이었다. 용연향은 ‘용의 침으로 만든 향’이라는 뜻으로, 향유고래의 토사물이다. 오늘날에도 ‘바다의 금덩이’라고 불릴 만큼 희귀한 최고급 향료다. 가정제는 환관을 채향사(採香使)로 임명해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고, 못 구하면 중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10여 년이나 애타게 찾아도 구하기 힘들던 용연향을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이 구해주었다. ‘향료천국’ 인도와 동남아를 석권한 포르투갈 상인에게 용연향 조달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조정은 마카오에 향의 품질을 관리하는 향산험향소(香山驗香所)를 세웠다. 포르투갈인은 ‘위험한 오랑캐’에서 황제에게 꼭 필요한 상인으로 바뀌었고, 마카오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중국은 아편으로 홍콩을 잃고, 용연향으로 마카오를 잃었다”는 말이 생겼다.



    “천여 채 집, 만여 명 오랑캐”

    “초왕(楚王)이 마른 여자를 좋아하니 많은 후궁이 굶어죽었다”는 말이 있다. 황제가 마카오 포르투갈 상인에게 사치품을 사니, 황제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마카오에서 물건을 구했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마카오는 “천여 채의 집에 만여 명의 오랑캐”가 사는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높은 건물이 치솟고 서로 바라다 보일 정도로 즐비하여”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수백 블록이 되더니 지금은 거의 1000블록 이상”이 됐고, 만력제 중기에 이르면 “마카오로 모이는 자가 1만 가구 10여만 명”에 달했으며 “서양 국적을 지닌 자가 대략 6000~7000명”이었다.

    1591년 극작가 탕현조는 마카오에 와서 중국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 사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부유한 상인은 전원에 살지 않고 뽕나무도 심지 않지만, 마노(수정) 장식에 비단옷을 입고 구름 같은 돛대에서 내렸고, 꽃 같은 얼굴의 오랑캐 여인 열다섯이 장미 이슬로 아침 단장을 했다.”

    당시 마카오는 “황금의 명령이 하늘을 지배하고, 돈의 신이 땅에 우뚝 솟은” 땅이었다. 광둥의 권세가들은 대형 선박을 건조해 상업 활동에 뛰어들었고, 경쟁이 격화되자 상인들은 태풍이 와도 출항을 강행해 목숨을 잃곤 했다.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명이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하자, 마카오는 전성기를 맞았다. 정치적 이유로 무역을 금지하긴 했지만, 중국은 일본의 은이 필요했고, 일본은 중국의 비단이 필요했다. 포르투갈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양국과 중계무역을 했다. 포르투갈이 구축한 ‘포르투갈 리스본~인도 고아~동남아 말라카~중국 마카오~일본 나가사키’의 무역 네트워크 중 ‘마카오~나가사키’ 구간이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마카오의 삶이 속 편한 일만은 아니었다. 스페인을 꺾은 신진 강호 네덜란드가 마카오를 노렸다. 1601년부터 네덜란드는 장장 20년 동안 마카오 점령을 시도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에 성벽과 요새를 지으려 했으나, 명나라는 포르투갈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포르투갈인이 성벽을 쌓으면 광둥성 군대가 곧바로 출동해 성을 허물어버렸다.

    그러던 중 포르투갈에 또 한 번 행운이 찾아왔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군이 명나라에 맹공을 퍼붓자, 1621년 천계제는 마카오에 100명의 정예병, 몇 명의 뛰어난 포수와 문사(文士, 가톨릭 신부)를 파견해 관군들에게 화포 사용법을 가르치라는 성지를 내렸다. 마카오에서 사들인 홍이포는 후금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일개 쇳덩어리인데도 ‘안변정로진국대장군(安邊靖虜鎭國大將軍)’에 봉해졌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마카오의 포르투갈인은 중국인과 같은 권리를 보장받았고, 마카오의 숙원사업인 군사방어시설 건축도 허가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명나라는 이미 기강이 무너지고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만주족 역시 포르투갈에서 화포를 수입해 화력을 강화했다. 결국 한족의 명나라는 만주족의 청나라로 바뀌었다.



    ‘건달’ 출신 해상왕

    대륙에서 격변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마카오는 활력이 넘쳤다. 명나라 말기 필리핀 마닐라는 멕시코에서 수입한 백은 2644만8000페소 중 2569만 페소(97.1%)를 중국으로 수출했다. 이 중에서 마카오를 거친 양은 2025만 페소로, 중국 전체 유입량의 79.1%에 달했다. 마카오는 서양 최대의 동방무역항이 됐다.

    이때 마카오를 찾은 중국의 한 건달이 훗날 동중국해를 주름잡는 해적왕이 된다. 바로 정성공(鄭成功)의 아버지 정지룡이다. 푸젠성 말단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정지룡은 천성적으로 게을러서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없던 반면, 힘이 세고 무술을 좋아했다. 골칫덩이 정지룡은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마카오의 외갓집으로 도망쳤다. 외가 황씨 가문은 마카오에서 큰돈을 번 상인이었다. 많은 마카오 상인대부분이 그렇듯 그들의 사업도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갔을 것이다.

    건달 정지룡은 거친 바다 사나이들과 쉽게 의기투합했다. 그는 마카오 밀수단 두령인 이단의 오른팔이 돼 광둥·푸젠뿐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 동아시아 바다를 종횡무진 누볐다. 포르투갈 상인, 선교사들과 어울리며 당대 국제 무역공용어였던 포르투갈어를 익혔고, 무역과 밀수, 해적이 묘하게 뒤섞인 활동을 하며 ‘바다사업’에 눈을 떴다.

    이단이 죽은 후 정지룡은 밀수단을 크게 키워 해적왕이 됐다. 그는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 사략선(私掠船, 무장한 사유 선박)을 지휘하며 유럽의 항해술과 해적의 노하우까지 습득했다. 쇠약한 명나라 조정은 정지룡에게 “해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면 전 해역을 통제하는 도독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전형적인 차도살인(借刀殺人) 전략이지만, 정지룡은 동료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 바다를 석권했다. 명 조정은 다시 이이제이 전략을 써서 네덜란드에 무역을 허가해줄 테니 정지룡을 치라고 했지만, 정지룡은 이미 400척의 정크선과 6만~7만 명의 인력을 자랑하는 선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네덜란드 해군이 패한 뒤 정지룡을 제압할 자가 없어지게 되자 조정은 별수 없이 벼슬을 내렸다. 훗날 명나라가 망할 때 조정은 정지룡이 구원해주길 바랐으나 정지룡은 명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청에 투항했다. 다만 그의 아들 정성공은 대만을 근거지로 삼아 죽는 날까지 반청복명(反清復明)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카오는 정지룡·성공 부자를 바다의 제왕으로 만든 숨은 공신이다.

    청나라는 대만의 정성공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연해지역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고 널빤지 한 장 바다 위에 띄우지 못하게 하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시랑이 대만을 정복한 후 해금령이 완화되긴 했지만, 조정은 한인들이 해외에 나가는 것을 경계했다. 한족 선비가 동남아 등에서 재상이 돼 청나라의 화근이 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마카오는 다소 부침을 겪었지만, 순치제·강희제의 신임을 받던 선교사 아담 샬과 페르비스트 덕분에 큰 타격은 받지 않았다.


    뜨는 홍콩, 지는 마카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마카오의 위상은 갈수록 약해졌다. 마카오 항은 수심이 얕아 범선은 드나들 수 있었으나 거대한 무역선과 군함이 정박하긴 어려웠다.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해지며 상업도 쇠퇴했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 마카오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 신진 강호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청을 꺾고 홍콩을 차지했다. 수심이 깊고 항만이 넓은 홍콩은 산업시대의 거함을 정박시키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영국이 홍콩에 근대 인프라를 확충하자 홍콩은 무역뿐 아니라 금융·교육·문화의 중심이 됐다.

    홍콩이 떠오르며 마카오는 급속히 쇠퇴했다. 청말 광둥 순무는 조정에 보고했다.

    “마카오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인을 보면, 관청은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며, 상인은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동자는 선의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도박장과 사창가가 불법적으로 비도를 비호하고, 관리들은 이들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중략)…포르투갈에서는 이미 상선이 왕래하지 않고 마카오는 지리적인 이점으로써 도모할 만한 것이 없으며, 시장은 경기가 없고 인정은 메말라 있으니 곤경에 처하여 활로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곧 도래할 것입니다.”

    1842년 영국이 홍콩을 식민지로 만든 것을 본받아 포르투갈도 1887년 마카오를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딱히 마카오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1835년 화재로 앞면만 남은 성 바오로 성당도 복원하지 않았고, 몬테 요새의 대포도 1860년 이후로 바뀌지 않았다. 무역이 끊긴 마카오는 도박과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갔다. 임시방편 호구지책이던 도박과 성매매가 어느새 주력 산업이 됐다.

    1847년 마카오 당국이 도박을 합법화한 지 몇 년 안 돼 마카오에 200개가 넘는 도박장이 들어서 ‘동양의 몬테카를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상업의 활기가 환락의 광기로 변했다. 마카오는 중국 3대 악(惡)인 성매매·도박·마약(黃賭毒)의 천국이었다. 작가 헨드릭 드리우는 1930년대 마카오를 보고 말했다.

    “(마카오는) 세상의 모든 하층민과 술 취한 선장들, 바다의 부랑자들, 낙오자들, 세계 어느 항구의 여인들보다 뻔뻔하고 아름다우며 야만적인 여인들의 집으로 지옥이 따로 없다.”

    오늘날 푸룽신제(福隆新街)의 집들은 흰 벽과 빨간 대문·창문으로 단장했지만 원래 이 거리는 퇴폐 마사지와 성매매가 판을 치던 곳이다. 말 그대로 ‘쾌락의 거리(Rua da Felicidade)’인 환락가요, 홍등가였다.

    날이 갈수록 홍콩은 선진화하며 부유해졌지만, 마카오는 도박과 성매매로 푼돈을 벌었다. 지역 격차는 지역감정을 낳았다. 영화 ‘천장지구(원제 天若有情)’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도 사실 홍콩과 마카오의 현실에 근거한다. 배우 유덕화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돈 벌러 온 창녀의 사생아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창녀촌에서 창녀 이모들 손에 자라 건달이 된다. 반면 오천련은 홍콩의 부잣집 딸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어요”라는 노래가 애절하게 울려 퍼지며 둘은 격렬하게 키스하고,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홍콩 거리를 질주한다. 두 연인의 뜨거운 사랑도 지역 격차와 신분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국으로 향한다.


    the Gate to Nowhere

    홍콩과 마카오가 모두 중국에 반환된 후 제작된 영화 ‘익사일(Exiled, 放逐)’에서도 첨예한 지역감정이 드러난다. 마카오 조폭 보스는 홍콩 조폭 보스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난 타지에서 온 놈이랑 협력할 생각은 없어.” 브로커가 “그래도 우린 같은 정권하에 있잖아요. 모두 다 중국인이고”라며 흥정을 붙이려 하자, 마카오 보스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우린 마카오 사람이지만, 페이는 홍콩 놈이잖아.” 지역감정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카오의 랜드마크인 성 바오로 성당은 앞면만 보면 엄청나게 크고 근사하다. 기대를 품고 문 안에 한 발짝 들여놓으면 텅 빈 공터만 펼쳐진다. 앞면 껍데기가 전부다. 서양인은 성 바오로 성당을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문(the Gate to Nowhere)’라고 부른다. 성당을 흔히 ‘천국에 이르는 문(the Gate to Paradise)’이라 부르는 것을 빗댄 별명이다.

    ‘성당인 듯, 성당 아닌, 성당 같은’ 성 바오로 성당은 마카오를 은유한다. 마카오에서는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이 불분명하다. 세계 최대 카지노인 베네치안 리조트는 중국의 변두리인 마카오에 있지만,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베네치아를 재현해놓았다. 이 실내의 베네치아는 항상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보여준다. 여기서 공간, 시간, 기후, 날씨 등은 모두 의미를 잃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도 사라진다.

    ‘The House of Dancing Water’ 쇼에서는 가짜 용이 춤을 추고, 경견장의 경주용 개들은 가짜 토끼를 쫓아 미친 듯이 질주한다. 현실감각은 뒤틀리고, 돈은 그저 한낱 종이쪼가리 게임용 칩처럼 느껴진다. 안내방송과 전광판은 시도 때도 없이 누군가 횡재했다고 요란스레 떠든다.

    “축하합니다. 당첨이 되셨습니다. 빵빠라 빵~.”

    “상금 150만 위안의 주인공이 오늘 밤 드디어 탄생했습니다!”

    돈이 넘쳐나고, 공짜 음료수는 무제한이다. 행운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곳에만 있으면 나도 일확천금의 주인공이 될 것 같다. 도박의 규칙은 너무도 간단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쉽게 돈을 딸 수 있다는 착각을 낳는다. 블랙잭은 숫자 21에 가깝기만 하면 되고, 슬롯머신은 레버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룰렛은 구슬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홍콩인은 “오늘은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야겠어”라고 말하며 마카오 카지노에 와서 일확천금을 노린다. 그러나 마카오는 돈을 맡길 수만 있을 뿐, 돈을 찾을 수는 없는 신기한 은행이다.

    마카오는 흔히 ‘동양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려왔다. 그러나 마카오 카지노의 수입은 이미 2007년에 라스베이거스를 넘어서 “라스베이거스가 75년 만에 해낸 일을 우리는 15년 만에 해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2013년에는 라스베이거스 수입의 7배에 달하는 450억 달러를 벌었다.



    라스베이거스 수입의 7배

    4200개의 게임테이블과 슬롯머신이 있는 베네치안 리조트를 필두로 세계 10대 카지노 중 8개가 마카오에 있다. 마카오는 명실 공히 세계 최대의 도박장이다. 관광보다 쇼핑, 쇼핑보다 도박에 열중하는 중국인 덕분이다. 마카오의 한 카지노 사장은 말한다.

    “우리는 ‘할아버지(본토 도박꾼)’가 와서 도박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도박 판돈도 크고 시원시원하며, 돈을 잃어도 우리를 귀찮게 하지도 않아 아주 편합니다.”



    마카오의 빛 이면에 중국의 그림자가 있다. VIP룸의 본토 도박꾼 중에는 기업이 초대한 정부관계자가 많다. 많은 사업가가 접대비 명목으로 회사 공금을 정·관계 인사들의 도박자금으로 대주고 있다.

    물론 도박하고 돈 잃는 이들은 하수에 불과하다. 도박장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고수들도 있다. 전 샤먼(廈門)시 부시장 란푸(藍甫)는 마카오에서 도박으로 65만 달러와 33만 홍콩달러를 따서 ‘도박의 신(賭神)’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실은 도박장과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란푸는 비자금을 도박장에 건넸고, 도박장은 비자금을 깨끗한 카지노 칩으로 바꿔주었다. 도박은 돈세탁 수단이 됐고, 카지노는 돈세탁 전문 금융기관이 됐다. 정쥔난 지린대 법학원 부교수는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매년 약 6000억 위안이 해외와 홍콩·마카오 도박장으로 유출돼 중국 경제와 공익산업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2013년 미국 의회 산하 의회·행정부 중국위원회(CECC) 연례보고서는 매년 2020억 달러의 불법자금이 마카오로 흘러 들어가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중국인은 돈 못지않게 교육도 중요하게 여긴다. 중국인들은 끊임없는 난리에 시달리면서도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이라고 다 교육을 중시하지는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산증인이 바로 마카오인이다. 마카오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공부하라고 훈계하면 학생은 이렇게 대꾸한다.

    “카지노에 가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취직할 수 있고 선생님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요.”

    세계 최대 도박 도시 마카오에서는 일자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카지노에는 언제나 일자리가 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마카오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카지노 외에는 일할 곳이 없다. 카지노가 다른 산업을 모두 삼켜버린 카지노 경제의 빛과 어둠이다.

    사실 마카오에 부임했던 숱한 포르투갈인 총독도 도박 외의 돈벌이 수단을 찾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카오의 작은 땅과 적은 인구는 한계였다. 흔히 ‘홍콩·마카오’로 묶어 말하지만 홍콩과 마카오는 면적과 인구에서부터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홍콩은 면적 1104㎢, 인구 723만 명의 대도시다.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면적 718㎢, 인구 546만 명을 뛰어넘는다. 이에 반해 마카오는 면적 30.5㎢, 인구 64만 명에 불과하다. 서울시 관악구(29.57㎢, 52만 명) 수준이다. 명색이 특별자치구이나 땅 넓고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는 극단적으로 땅 좁고 인구가 적은 곳이다.

    홍콩과 마카오의 역량 차이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하에서 정치적 권리도 달라지게 했다. 도시국가로서 어느 정도 자립이 가능한 홍콩은 형식적으로나마 보통선거권을 확보했고,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마카오는 보통선거권을 얻지 못했고, 중국의 인가를 받은 정재계위원회 위원 300명의 투표에 따라 행정장관이 결정된다. 추이스안(崔世安)은 2009년 마카오 행정장관에 당선됐고, 2014년 재선돼 2019년까지 행정장관 임기를 이어가고 있다. 당연 친중국 인사다.

    중국에서 부패 척결을 외칠 때마다, 마카오 비자 발급을 규제할 때마다 도박산업 의존도가 높은 마카오 경제는 크게 요동친다. 그래서 주민들 역시 전반적으로 홍콩에 비해서는 더 친중국적이고 중국에 고분고분한 편이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크나큰 빈부 격차, 수십 년을 일해야 살 수 있는 주택, 열악한 의료·교통 등 민생 문제가 쌓여 있다.



    ‘카지노 왕국’을 넘어

    2014년 8월 25일 마카오 주민 1000여 명이 임금인상, 이주노동자의 카지노 취업 규제 등을 요구하며 샌즈카지노에서 정부청사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제 불만은 정치 불만과 함께 간다. 2014년 8월 24일 ‘열린 마카오 사회(Open Macau Society)’의 의장 저우팅시(周庭希)는 마카오 주민들이 보통선거권을 지지하는지, 추이스안을 신임하는지 묻는 국민투표를 추진했다. 투표 첫날 경찰은 저우팅시를 포함한 투표소 자원봉사자 5명을 체포했고, 검사는 경찰에 대한 심각한 불복종 혐의로 저우팅시를 기소했다. 마카오 주재 중앙정부 연락사무소는 비공식적인 국민투표를 비난하며 특별행정구는 이런 행동을 조직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2016년 6월 3일의 시위는 매우 색다르다. 마카오 주민 300여 명이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인 ‘우버(Uber)’ 합법화를 요구하며 행진했다. 흔히 택시는 지역주민의 발이고,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곤 하지만, 마카오에서는 택시가 관광객의 발이다. 택시는 지역주민의 승차를 거부하거나 웃돈을 요구한다. 마카오 택시는 불과 1300대. 주민 64만 명, 관광객 3000만 명을 소화할 수 없다. 택시는 독과점 지위를 이용해 큰돈을 벌었다. 2015년 우버의 마카오 상륙은 마카오인에게 복음과 같았다. 순식간에 우버 기사 2000명이 생기고, 2100만 마카오 파타카(약 29억3200만 원)의 수익을 냈다. 그러나 정부는 우버를 인정하지 않고 벌금을 매겼다.

    64만 명의 인구로 매년 라스베이거스의 7배나 되는 돈을 벌어들이는 마카오.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며 세수의 83%를 카지노에서 걷어 정부예산 흑자 세계 2위를 자랑하는 마카오. 그러나 카지노 왕국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어 아프면 홍콩이나 태국으로 가야 하고, 택시도 타기 힘들다. 돈은 넘치나 민생은 힘겹다. 그 와중에 간간이 민주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때 동방무역의 중심이었던 마카오. 카지노 왕국을 넘어서 새로운 모습을 역사에 보여줄 수 있을까.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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