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호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한국의 부장들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김건희 객원기자 | kkh4792@hanmail.net

    입력2015-11-19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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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의 부장은 성공한 중산층이자 우리 사회의 중추다. 노동생산성이 가장 높은 일꾼이자, 정치 지형을 결정하는 ‘캐스팅보터’이다. 그런 부장들이 요즘 우울하다. 책임질 일은 많고 권한은 없으니 ‘부장 노릇 못 해먹겠다’는 말이 나온다. 정년 60세 시대가 도래한다지만 회사는 퇴출을 예고한다.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1973년생인 L그룹 K부장은 스스로 ‘저주받은 세대’라고 말한다. 그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유독 추웠던 1998년 2월 대학을 졸업해 ‘IMF 학번’으로 불린다. 그가 태어난 해 출생한 96만여 명은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유례없는 취업난을 겪었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1999년 1월 대기업에 입사한 뒤 사내에서 회자될 만큼 제법 굵직한 성과도 냈다. 입사 당시 대리였던 선배들이 임원으로 승진하면서, 그는 올해 부장(팀장)을 달았다.

    주변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대기업 부장에 올랐으니 좋겠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손사래를 친다. 일찍 부장을 단 만큼 퇴직 시기도 그만큼 앞당겨질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퇴직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가족이 불안해할까 입에서만 맴돈다. 이래저래 벙어리 냉가슴 앓는 듯하다.

    “요즘은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말이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다. 요즘 부장들 사이에선 ‘빨리 내보내려고 빨리 승진시킨다’는 말이 떠돈다. 승진 축하 인사 들을 때마다 사회생활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느낌이다.”

    “팀장 안 맡고 버텨라”


    부장은 부서를 책임지는 우두머리다. 다른 직급과 비교하면 조직에서 연령대가 가장 넓은 직급이기도 하다. 승진이 이른 사람은 40대 초반, 늦은 경우는 40대 후반. 기업마다 인사 적체 현상이 심한 탓에 대리 진급 때 한 번, 과장 승진 때 또 한 번 연거푸 물을 먹으면 50줄에 늦깎이 부장이 되기도 한다. 부장들은 한국 사회를 척추처럼 지지한다. 직장에선 탄탄한 경력을 바탕으로 높은 노동생산성을 내고, 가정에선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과 부모 봉양을 책임진다.

    그러나 한국의 부장들은 우울하다. 10월 한달 간 기자가 만나거나 전화 인터뷰한 기업체 부장 22명 중 상당수가 ‘부장 승진은 하되 팀장을 달지 않고 오래 버티다 퇴직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듯,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자가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평균연령은 49세(남성 52세, 여성 47세)다. 남성 직원이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사업 부진·조업 중단·휴폐업’(34.1%)이 가장 많고, ‘권고사직·명예퇴직·정리해고’가 16.9%로 뒤를 이었다.



    결국 ‘고참 부장’의 나이가 ‘직장생활 데드라인’이다. 회사 문 밖으로 나서면 칼바람이 분다. 2013년 재취업한 장년층 중 절반(45.6%)이 임시직 아니면 일용직 일자리를 얻었다. 급여는 월평균 184만 원으로 20년 이상 장기근속자 평균임금 593만 원의 31% 수준이다(통계청).

    최근 H사에서 희망퇴직한 C부장은 “40대 후반, 50대 직장인들은 외환위기 때 직장을 떠난 동료들이 사업 실패 등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트라우마’가 있어 어지간하면 회사에서 정년을 맞고 싶어 한다. 퇴직자들은 끝까지 버티다가 그런 험한 꼴 보고 쫓겨나는 게 싫어 짐을 꾸리는 것뿐”이라고 했다.

    앞에서 예로 든 K부장의 회사 직급체계는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팀장(부장)-담당(부장 혹은 상무)’이고, 팀장부터는 책임자로 분류된다. 회사는 부장에게 팀장, 담당과 같은 보직을 맡겨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그는 “회사는 연차가 높고 연봉을 많이 받는 부장이나 50세 전후의 직원들을 빨리 내보내기 위해 책임을 지우기도 한다. 결국 승진 인사를 활용해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니 팀장을 맡은 게 그리 반가운 얘기는 아니다”고 했다. 그가 이번 승진을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괴롭혀서라도 내보낸다”


    S사에 다니는 L부장(47)은 최근 휴대전화 부문 실적 부진이 이어지자 은근히 퇴직 압박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었지만, 요즘은 ‘인력 재배치’라는 명목으로 5년차 이상 고참급 부장들과 임원들의 ‘조용한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찍혀서 퇴사한다고 ‘찍퇴’다. 버티다가 보직해임을 당한 부장도 있고, 일부 임원들은 버티다가 연말까지 ‘유급 안식년’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회사 퇴직 인사 모임을 기웃거리는 임직원이 많아졌다. 내년부터 정년이 60세로 연장된다고 하지만 그건 남의 나라 얘긴 것 같다.”

    기업들은 희망퇴직을 실시하면서 주로 부장, 이사급을 타깃으로 삼는다. 올해 초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 대기업은 성과급제도를 도입하면서 사원을 5등급으로 구분한 뒤 하위 2등급에 해당하는 직원들의 임금을 사실상 삭감했다. 중·장년층이 대거 이 그룹에 포함됐다. 이후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면서 “낮은 임금을 감수하는 것보다 위로금 받고 회사를 떠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실상은 권고사직이다.

    이런 권고사직은 금융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지난해 7월 89만4000명이던 금융·보험업 취업자 수가 올해 10월 현재 81만7000명으로 줄었다. 15개월 만에 7만7000명이 직장을 떠났다. 금융업계의 한 부장은 ‘현장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희망퇴직 권고를 받고 버티다가 현재는 무급 휴직 중이다. 1년 4개월 쉬었는데, 12월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 회사는 회유와 설득에도 직원이 퇴사를 거부하면 지방으로 발령 내는데, 막상 지방에 내려가면 출입구 쪽에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한다. 컴퓨터와 전화기도 주지 않고 업무에서도 배제하는데, 더 답답한 일은 지방의 직원들도 ‘왕따’를 시킨다는 거다. 법적 해고 사유가 엄격하다보니, 버티는 직원은 ‘괴롭혀서라도 내보낸다’는 치사한 전략인데, 현재 2명의 선배가 지방에서 ‘버티고’ 있다. 12월 복귀하면 나도 연고가 없는 지방으로 발령 날 것 같아 암울하다.”

    부장들은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2013년 4월 국회를 통과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빛 좋은 개살구’라고 말한다. 개정안은 정년 60세 연장, 임금피크제 도입 등을 담고 있다. 내년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시행하고, 2017년부터는 300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하도록 했다.

    오상식의 열망


    이런 불안감은 글로벌 경기 악화로 인해 제조업계 종사자들에게도 확산되고 있다. 기자가 만난 부장들은 “지금은 회사가 일정 수준의 매출을 유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기업 환경이 크게 달라질 것 같다. 국내 주요 산업들이 10년 내 막다른 골목에 닿을 것이고, 결국 이런저런 방식의 구조조정이 시도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간 한국을 먹여 살리던 주력 산업(전자, 자동차, 철강, 조선, 정보통신 등)이 흔들리고, 세계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엔저 장기화 등으로 수출길도 암울하다.

    G그룹 K부장은 “몇 달 전부터 매출 부진에 따른 정리해고 시나리오가 돌고 있다. 업황이 좋지 않다고 매출 부진이 무마되는 건 아니어서, 조만간 매출 부진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한다. 요즘 바늘방석”이라고 했다. 다음은 K그룹 B부장의 말.

    “글로벌 기업 환경을 예측하기 어려워지면 회사는 단기 성과에 매달린다. 그러면 프로젝트 팀이 활성화할 수밖에 없고, 기존 조직은 없어지거나 위축된다. 부장으로서는 곤욕스럽다. 그럴 때면 드라마 ‘미생’의 오상식을 떠올린다. 오상식은 멋있지만 피곤한 인물이다. 상사와 부딪치고 조직 논리에 깨져도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팀이 존속하게끔 애쓴다. ‘드라마니까…’ 하고 생각했다가도 ‘나도 후배들에게 저런 선배가 돼야 할 텐데…’라고 마음먹는다. 내게도 오상식이 품은 열망은 있다.”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미생’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가 그린 오상식 차장 캐릭터(왼쪽)와 드라마 ‘미생’에서 오상식 역을 한 이성민. 사진제공·tvN

    임원은 ‘고위직 계약직원’


    법적으로 정년연장을 보장한 만큼, ‘살아남은 일부’로 인해 기업문화가 바뀔 거라는 예측도 나온다. L기업 홍보팀 관계자는 “지금까지 팀장(부장)에서 팀원으로 내려온 경우는 있어도 담당(부장 혹은 상무)에서 팀원으로 내려온 사례는 없었는데, 내년부터 정년연장법이 적용되면 상무나 팀장이 팀원으로 일하는 기업문화가 자리 잡을 수도 있다”며 “내년에 회사가 어떤 인사를 할지가 직원들에겐 초미의 관심사”라고 전했다.

    본사에서 큰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능력을 인정받은 금융회사의 L부장은 최근 몇 달을 버티다가 계열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유는 앞의 사례들과 정반대다. 정년이 10년 남은 그에게 지난해부터 임원 승진 요구(?)가 빗발쳤지만 그는 끝까지 견뎌냈다고 한다.

    “노조는 공식, 비공식 경로를 통해 나를 임원 승진시켜야 한다는 뜻을 대표에게 전달했다. 그래야 자기들 승진할 자리가 생기니까. 그런데 나는 ‘왜 벌써 임원을 달아야 하냐’며 버텼다. 3년 임원 달고 나가면 7년을 손해 보는데, 7년이면 대략 11억 원의 수입이 날아간다. 임원이 되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경제와 고용이 불안한 요즘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하면서 굳이 승진할 이유가 없다. 결국 대표와 얘기해서 지방 계열사를 하나 맡았다.”

    L부장의 말처럼, 임원이 된다고 회사를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업 경영성적 분석 웹사이트 ‘CEO스코어’가 10대 그룹 96개 상장사 임원 중 2015년 정기인사에서 퇴임한 2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퇴직 임원은 평균 54.5세였다. 재임기간은 5.2년. 직급별 퇴직 연령은 상무가 53.5세로 가장 낮았고, 부사장이 55.8세, 전무가 56.2세, 사장이 58.7세였다. 어렵게 임원이 되더라도 55세 전후로 퇴사한다는 얘기다. H그룹 C부장은 “어딜 가나 승진에 욕심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 수나 정도가 과거에 비해 줄어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며 “‘기업의 꽃’으로 불리던 임원이 ‘고위직 계약직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임원 이력이 오히려 재취업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D그룹 H부장은 “최근 ‘찍퇴’ 대상이 된 임원이 하도급업체에 ‘부장 자리’라도 가겠다고 했는데, 하도급업체 회사 임원들이 ‘노동 유연성’을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며 “임원의 말로가 추풍낙엽이다 보니 부장들도 임원 승진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앞날은 암울한데, 현실은 팍팍하다. 한국의 부장들은 업무에서도 과부하를 호소한다. 현재의 부장들이 신입사원이던 시절, 그들의 눈에 비친 부장은 권한도 크고 재량권도 많았다. 부장의 넉넉한 업무추진비는 권위의 상징이었고, 회식 ‘명령’이 떨어지면 직원들은 파리떼처럼 부장 주변으로 달라붙었다. 하지만 회사 조직 체계가 팀제로 바뀌면서 부장은 책임질 일은 많아진 대신 결정권은 줄었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직장문화도 퇴색했다.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한국의 부장들은 퇴직 압력 속에 ‘책임질 일은 많고 권한은 없다’며 우울증을 호소한다. 동아일보



    “회사는 부하 중심으로 돈다”


    S그룹 L부장은 “팍팍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게 큰 부담”이라며 “여기(부장)까지 오는 것도 고단했는데, 지금은 더 고단하다”고 하소연했다. PR 담당인 그는 12월까지 평일 점심·저녁 약속이 잡혀 있고, 주말에는 접대성 골프·등산을 해야 한다.

    “과거 부장들은 ‘팔로 미(Follow me,나를 따르라)’를 외치며 조직의 단합과 동일체 정신을 강조했지만 요즘 그렇게 했다가는 직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회식도 사전에 일정을 맞추고, 1차만 가볍게 하고 끝낸다. 가끔 ‘본전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개인 중심의 사고를 하는 신입사원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휴가철이나 연휴 때면 외국에 나가고, 몇 년 되지 않은 차를 바꾸는 등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신입사원을 보면 ‘나도 확 질러볼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떠올리곤 지갑을 닫는다. 우리는 현실적이지만 후배들은 즉흥적이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지를 수 있어 부럽기도 하다.”(D그룹 J부장)

    “우리 회사는 매주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정해 5시 반 퇴근한다. 회사는 이날 회식이나 동호회 활동 등으로 직원들이 소통하는 시간을 갖거나 가족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라고 말하지만, 정작 부장들은 수요일이 부담이다. 가끔 모임을 하자고 해도 후배 직원들은 개인 약속, 운동, 학원 간다며 ‘쌩’하니 나간다.”(L그룹 S부장)

    P그룹 C부장은 ‘후배 눈치 보기’는 참을 만하지만 ‘치고 올라오는’ 직원들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선배 부장들은 스마트폰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몰라도 이미 배운 지식과 정보만 가지고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했지만 지금의 부장은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 회사는 분기별로 MBO(목표관리) 관련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신세대 직원들은 웹과 SNS를 활용해 ‘그럴싸한’ 보고서를 만드는 데 능숙하지만, 우리 세대는 그런 감이 떨어진다. 보고서 작성할 때마다 후배 직원들에게 ‘부탁’을 한다. 예전처럼 ‘계급’으로 눌러서 일을 시키면 금방 소문이 난다. 지금까지 집은 아버지를, 회사는 부장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막상 부장이 되고 보니 집은 자녀를, 회사는 부하직원을 중심으로 도는 것 같다.”

    대기업 부장을 향한 고루한 시선도 불편하다. H그룹 S부장(1969년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세대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이어서 ‘575세대’(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 대학을 다닌 50대) 부장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부장을 달고 나니 어디를 가든 ‘꼰대’ 취급을 받아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억울하다. 선배들에게 하소연하면 ‘그게 나이 먹었다는 증거’라고 하더라.”

    “살림 팍팍하긴 마찬가지”


    한국의 부장들은 우리 정치 지형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는 40대가 대부분이다. 대개 안정된 중산층인 만큼 그들의 정치 성향도 보수적일 거라고 여겨지지만, 의외로 진보로 기운 부장이 많았다.

    “우리 또래 부장들은 심정적으로 진보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대기업에 다니는 생활인이기에 투표할 때 많은 것을 고려한다. 먹을거리를 만들어보겠다고 글로벌 기업 전쟁에 뛰어드는 우리를 정치권이 밀어주는커녕 반미(反美), 반세계화, 반자본주의에 앞장서는 듯한 행태를 보이면 야당에 투표하려다가 머뭇거린다. 그러니 대개 ‘이 사람만 안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네거티브 보팅’을 한다. 차선책을 택하는 거다.”(D그룹 J부장)

    부장이 되면 살림이 좀 펼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더 빠듯해졌다는 이도 많았다. 연봉(세전)이 1억여 원인 K부장의 자산은 약 4억5000만 원. 매달 650만 원의 급여를 손에 쥔다. 월급봉투가 얇진 않지만 매달 들어가는 돈이 적지 않다. 유치원생과 초등생 자녀의 학비(60만 원), 공과금을 포함한 생활비(250만 원), 전세대출상환금(180만 원), 부모님 용돈(60만 원)으로 550만 원이 들어간다. 여기에서 용돈과 개인연금을 들어내면 통장 잔고는 이내 바닥을 드러낸다.

    “대기업 부장이라고 해도 팍팍하게 사는 건 비슷하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고정 지출을 빼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집을 사지 않고 자식들에게 유산도 안 물려주기로 합의했다. 노후를 희생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싶진 않다. 무리해서 빚을 내면 결국 아이들한테 짐이 된다. 능력이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지원하겠지만 퇴직 후엔 아이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게 할 것이다.”

    L부장도 “내 삶의 ‘평수’를 줄이면서까지 자식을 위해 살진 않겠다”고 했다. 그는 퇴직 후 퇴직금과 노후자금을 탈탈 털어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킨 선배들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한 선배는 집을 줄여서 아들 신혼집 전세자금을 마련해줬는데, 아들 내외가 명절 때 와서는 ‘집이 좁아 잘 곳이 마땅찮다’며 밥만 먹고 갔다며 씁쓸해했다.”

    고참급 부장들은 다가올 ‘그날’을 생각해 보통 두 가지 길을 고민한다고 한다. 하나는 계열사 임원으로 가는 길인데, 자리가 한정적이다 보니 임원 승진하는 것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하다. 또 다른 길은 거래처 임원으로 가는 것인데, 하도급업체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라 대기업 출신을 임원으로 채용할 여력이 되는 회사가 많지 않다.

    적고 좁은 길


    그렇다고 섣불리 창업을 엄두 내기도 어렵다. 국세청의 전국 사업자 통계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개인사업자는 582만9000명으로 2009년 말보다 95만5000명(19.6%) 늘었다. 연령대는 50대(32.1%), 40대(28.5%), 60대(16.1%) 순이었다. 창업을 선택한 이들 역시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 매년 평균 96만 명이 신규 사업자로 신고하고 약 80만 명이 폐업한다.

    S그룹 L부장은 “대기업 부장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혜택 받은 사람으로 보지만, 재취업과 관련해선 까막눈”이라며 “기업체 부장들의 경험을 살리는 동시에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부장 재취업 교육’을 국가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5년 겨울, 한국의 부장들은 ‘생(生)의 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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