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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맞는 방법

  • 이선경 | 문학평론가 doskyee@daum.net

성탄을 맞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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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마이클 패트릭 히언 엮음, 윤혜준 역,
현대문학, 2011

엔도 슈사쿠,
‘예수의 생애’,
이평아 역,
가톨릭출판사, 2003


크리스마스의 계절이다. 사랑과 희생의 성탄을 축하하는.

동방박사들이 떠나온 곳보다도 훨씬 먼 극동의 한 끝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크리스마스 풍경은 조금은 통속적이다. 집집마다 누구의 무엇을 축하하는지도 모를 케이크의 촛불을 켜고, 오락시설마다 일찌감치 예약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이벤트가 펼쳐지고, 음식점마다 계절 한정 메뉴가 매진되는 진부한 장면 말이다.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성탄을 맞는 방법이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도 없고, 무조건적 감사와 경건의 태도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소위 사랑과 나눔의 크리스마스 정신이라는 것도 항상 그래왔던 것은 아니며, 신의 복음 역시 언제나 온화한 방식으로 전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종교적·비정치적·비경제적

‘크리스마스 할아버지’라는 별명까지 가진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마이클 패트릭 히언이 주석을 붙여 재정리한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은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고전이 탄생하고 유통하게 된 맥락을 들춰낸다.

우선 스크루지라는 크리스마스의 대표 캐릭터가 개과천선해 구원받는 이야기는 의외로 비종교적임이 지적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교회나 성직자도 등장하지 않으며, 신의 아들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별이나 목동도 나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거룩한 성령보다는 스크루지의 죽은 친구 말리의 유령이 등장해 짓궂게도 스크루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는가.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스크루지에게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란, 신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보다는 이웃들과 먹고 마시고 나누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다.

즉 디킨스는 크리스마스의 구원을 종교적 기원에서 찾기보다는 소박한 친절이 넘쳐나는 잘 차려진 축제를 통해 보여준다. 현재에는 당연해 보이는,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며 모두가 즐거운 휴일이 돼야 하는 이 ‘크리스마스 정신’은 사실 디킨스의 시대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19세기의 한복판에서 디킨스를 선봉으로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축제를 부활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껏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정신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 책을 엮은 패트릭 히언은 디킨스의 텍스트에 꼼꼼히 주석을 다는 차원을 넘어 디킨스가 어떠한 배경과 상황에서 이 명작을 썼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맥락이 영향을 미쳤음이 밝혀진다.

디킨스가 이 소설을 구상할 때의 영국은 청교도로부터 복고된 왕정이 사람들을 지배했으나, 여전히 청교도적 관습이 남아 즐거움과 화려함이 금지되고 기도와 묵상 속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일반적이었다. 또한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돈의 축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실리적인 ‘경제적 인간’들이 엄밀성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살아가던 시기라 인간의 감성이나 삶의 질, 복지에 무관심한 풍조가 펼쳐졌다.


한없이 무력한 사랑으로

스크루지는 전형적인 청교도적, 경제적 인간이다. 디킨스가 스크루지의 개심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 이 소설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크리스마스 문학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결국 당시 사회에 퍼져나가던 냉랭한 인간적 전형으로부터 심성을 개조하고 사회적 구원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디킨스는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청교도적 결벽증이 강조하는 닿기 힘든 경전의 가치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선한 행위의 힘이라고 믿었다.   

디킨스가 아무리 “우리의 삶은 변함이 없더라도 크리스마스는 즐겁게, 새해는 행복하게 맞아라”(‘크리스마스 축제’ 중)라며 전언을 보낸다더라도, 우리의 일상에서 신의 사랑을 경험하기는 힘들다. 비관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는 삶에서 신의 축복보다 침묵을 더 많이 경험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의심하기 시작하면 기독교적 사랑은 동양인인 우리에게는 더욱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다. 신의 아들이라면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인간으로 태어나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다는 예수의 생애는 이제는 상식적인 지식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여전히 불가해하다.

그래서 엔도 슈사쿠는 그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성탄(聖誕)’을 부정한다. ‘예수의 생애’에서 작가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설이 사실보다는 진실에 가깝다고 말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영혼이 추구하는 진실로 이해하며, 그 진실이 가리키는 사랑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2000년 전 예수의 일생과 그것이 전하는 진실을 극동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파헤친다. 의심과 의혹 끝에 얻어진 추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그의 일생이 전하는 일관된 진실을 보여준다.

엔도가 예수의 일생을 조명하며 가장 불가해한 것으로 여기는 것,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성탄의 의미를 가장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단서의 기원은 같다. 예수가 초반에 보여주던 기적을 행하는 능력 있는 모습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수난에 무능과 무력한 모습으로 수용하는 급속한 변화를 해결하는 것. 왜 예수는 초반에는 불행하고 아픈 군중에게 기적을 행하고 그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면서도, 그들의 기대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않고 지상의 메시아로 떠받들려는 군중을 거부했는가. 그리고 이후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군중이 더 이상 남지 않을 때까지 외면당하고 추방당하는 길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는가. 왜 그는 군중이 그에게 기대하는 어떤 것을 알면서도 응하지 않았는가.



성탄의 사랑이 가진 힘

그것은 정치와 사랑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란 힘과 효과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당시 로마의 압제에 놓여 있던 군중이 그에게 기대한 것은 정치적 메시아였다. 군중은 그들을 핍박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혁명가이자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될 누군가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가 실천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란 현실적인 면에서는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력한 것임에도 사랑은 배신을 견디고 타인의 죄를 내 것으로 받아 든다. 그러다가 죽은 후에도 불행한 군중 옆에서 동반자로서 생생하게 함께한다. 그리고 그제야 아주 보통의 사람들은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성탄의 진실을 인정한다는 것, 그 사랑을 신념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과도 다름없다. 그러나 그 가치의 전환, 사랑에 대한 확신은 정치적인 힘보다도 보통의 인간들을 압도해 버린다. 그것이 성탄의 사랑이 가진 힘이다.

디킨스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축제를 부활시켜 자비로움이 사라져가는 19세기 사회에서 개조와 구원을 달성하고자 했다. 엔도는 20세기 동양의 끝에서 예수의 생애를 통해 종교적 사랑의 역설로 달성되는 삶의 찬미를 찾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이 침묵한 것처럼 보이는 21세기의 성탄에서 어떠한 의미를 발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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