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가을, 속살 감춘 봉우리마다 타는 그리움 금강산

  • 글: 민병욱 그림:박수룡

    입력2002-11-07 0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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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천부의 일이나 보았을까.
    • 그런데도 마음이 이처럼 둥둥 뜨니 감춰진 속살 모두를 다 본다면 과연 또 무엇을 느낄런가.
    가을, 속살 감춘 봉우리마다 타는 그리움 금강산

    ▲ 지난 여름 겪은 홍수로 지금 금강산은 온통 물이다. 구룡폭포 장관 앞에서 넋을 놓다

    누가 물은 다투지 않는다고 했는가. 너럭바위를 타고 쏜살같이 내려가다, 떨어지지 않으려 바둥대는니 차라리 뛰어내려 산산이 부서지는 물보라를 보라. 다투어 쏟아지는 그 장렬함에도 산도 놀라 일곱 색깔 무지개를 걸어주지 않는가.

    쿵쾅대고 내달리며 지축을 후려치다. 문득 흐름을 멈추고 돌확에 누운 물은 또 어떤가. 계곡을 태우는 붉은 단풍에 물들세라 안으로 안으로 깊이를 더해 비취를 빚어냈다. 흙 한줌 없는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한 그루 소나무가 담소(潭沼)의 푸르름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구룡연, 물의 퍼포먼스

    금강산 일만이천봉, 그중에서도 계곡경치가 으뜸인 외금강 구룡연코스는 요즘 아우성이다. 앙지다리를 건너자마자 헉-숨막히게 길을 막은 세존봉의 깎아지른 절벽과 마주보는 옥류봉 자락에 단풍이 붉게 타올랐다. 운보의 바보 산수화에서나 보았던 소나무들은 단풍 빛이 눈부신지 한 발씩 비켜 앉았다.

    삐죽삐죽 솟거나, 웅크리고, 비틀리고, 포개지며 만 가지 형상으로 버텨선 봉우리들은 찍어누를 듯 나무와 사람을 굽어본다. 그런 산과 나무와 사람도 아랑곳없이 수정보다 맑은 물은 함성을 지르며 내달린다. 물은 계곡을 뒤흔들며 휘도는 웅장한 소리로 사람들의 넋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란지 곳곳에서 색깔과 빠르기와 깊이를 뽐내며 다툰다.



    가을, 속살 감춘 봉우리마다 타는 그리움 금강산

    ▲ 구룡대에서 내려다본 상팔담. 여인의 가슴팍 같은 산을 여덟 개의 푸른 보석이 목걸이 처럼 둘러쳤다.

    ”아, 좋구나. 참 좋아.” 외마디 탄사를 연발하는 탐승객들에게 안내원 한성희씨는 ”아직 반의 반, 또 그 반의 반도 못 봤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아아 제 산도 아니요, 그 경치 저 혼자만 보는 것도 아닌데 으쓱거리긴ㆍㆍㆍ.공연히 흘겨보지만 그게 다 산수와 단풍에 취해 터질 듯한 감격 때문이란 걸 왜 모르겠는가.

    사실 10월8일 금강산 탐승에 나설 때 기분은 썩 좋은 게 아니었다. 2박3일 짧은 여정이지만 남측 관광객에게 허용된 구룡연과 만물상,삼일포ㆍ해금강 코스는 지난 9월 몰아닥친 태풍 루사로 길과 다리가 대부분 유실돼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됐다는 거였다.

    바다에 떠있는 호텔 해금강을 나와 관광출발점인 온정리로 가는 길 곳곳에도 수마가 할퀸 상처가 여실했다.온정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폭삭 내려앉았고 둑길은 수십 미터가 유실돼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물난리를 겪어서인가, 요즘 금강산 계곡에 넘처나는 건 물이다.`풍악(楓樂)'이란 가을 이름에 맞게 단풍이 익고, 거기에만 하늘은 흰 구름을 띄우는데, 그걸로 모자랐는지 차고 넘치는 물이 수천 수만의 퍼포먼스를 이루어낸다. `수정 같은 물이 누운 폭포를 이루며 구슬처럼 흘러내리는'옥류동에 이르면 산이 물인지 물이 산인지 그저 아득한 느낌에 빠져든다.

    가을, 속살 감춘 봉우리마다 타는 그리움 금강산

    ▲ 평양 교예단의 몸놀림은 백조를 닮고 표범을 닮았다.

    연주담과 비봉ㆍ무봉폭포를 거쳐 상팔담으로 오르는 길에 이르러서야 절경은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땀을 뚝뚝 흘리며 가파른 등성이를 오르다보면 헉헉 가쁜 숨이 절로 나오고 `이제 다 왔나' 싶어 위를 올려보면 계속 나타나는 철사다리가 참으로 야속하다. 먼저 갔거나 뒤따르는 사람들의 소리가 웅얼웅얼 메아리지는 골에서 `이러다 수백리 아래로 떨어지는 것아니냐'는 무섬증이 버썩들기도 한다.

    겨우 상팔담을 내려다보는 구룡대에 올라서야 숨을 고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번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백길 낭떠러지 밑으로 펼쳐지는 기묘한 풍광ㆍㆍㆍ, 여인의 가슴팍 같은 산을 빙그르르 에워싸고 여덟 개의 푸른 보석이 목걸이처럼 둘러쳐졌다. 그냥 푸르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살을 벨 듯 시리게 보이는 여덟 개의 돌확 연못은 여인의 홍조처럼 빨간 뾰족산 단풍과 대비돼 가슴에 쿵쿵 부닥쳐온다.

    구룡대 위로 바람이 분다. 땀이 식어 온몸에 한기가 드는데 상팔담의 시린 마력은 눈을 떼지 못하도록 내내 잡아끈다. 벌렁 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보니 뭉게구름이 이불처럼 몰려든다. 집선봉, 천화대로 이어지는 병풍이 우뚝한 속에 매 한 마리가 여유롭게 날고 있다.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천분의 일이나 보았을까. 그런데도 마음이 이처럼 둥둥 뜨니 감춰진 속살 모두를 다 본다면 과연 또 무엇을 느낄런가.

    가을, 속살 감춘 봉우리마다 타는 그리움 금강산

    ▲ 멀리서 본 동해선 복구현장은 삼국시대 전쟁터의 진(陣) 같다

    하산 길에 `조선 3대 명폭'의 하나인 구룡폭포에 이른다. 골을 들었다 놓는 듯한 뇌성과 함께 수억의 진주 비단과 구슬을 쏟아 붓는 물기둥이 장관이다. 상팔담의 여성적 마력에 홀린 눈에 웅장 장쾌한 남성이 근육을 불퉁이며 홀리는 형국이다. ”소리를 뒤쫓아 몸뚱이가 나온다!”던 옛 시인의 찬탄에 수긍하며 뒤돌아서려는데 가는 이 잡지 않겠다는 듯 폭포는 더욱 세차게 기승을 부리며 쏟아진다.

    불과 다섯 시간 산행만으로 주술에 걸린 듯 멍한 상태에 빠진 건 기자만일까. 산을 내려와 마음 둘 데 없어 멀리 금강산 주봉인 비로봉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안내원들은”힘들여 왔으니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교예를 꼭 봐야한다”고 채근한다. 어차피 다른 코스 탐승이 불가능해 공연장에 들어섰는데, 어럽쇼, 그 감흥도 만만치 않다.

    한복 미인이 북측 특유의 가성으로 교예단원들을 `공훈배우'니`인민배우'니 하고 소개할 때만해도 객석 반응은 밋밋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숨가쁘게 던지는 접시를 한 사람이 받아 챙기는 공연이 여러 차례 실패하고 끝내 다음 공연으로 넘어가면서부터 객석도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널뛰기 재주부리기와 그네 타기 순서에 들어가자 비명과 타성이 교차돼 흘러나왔다. 봄ㆍ가을ㆍ겨울 산을 배경으로 때론 백조처럼, 또 때론 표범처롬 율동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 못지 않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는다. 자연이 빚은 최고의 경치를 산에서 보았으니 인간이 만드는 최고의 경지도 보아달라는 자부가 거기에 있었다.

    금강산 자락에 밤이 내렸다. 공연장에서 온천장으로 이동하며 문득 하늘을 보니 깨알처럼 박힌 별이 금세라도 쏟아질 듯 반짝인다. 온정리를 둘러싼 수정봉ㆍ관음연봉의 거대한 실루엣은 시시각각 컴컴한 어둠에 묻혀간다. 갑자기 몰려드는 정적, 그리고 어둠 앞에서 자연과 사람은 다시 내일을 준비한다.

    이튿날, 삼일포에서

    가을, 속살 감춘 봉우리마다 타는 그리움 금강산

    ▲ 봉래대에 올라 삼일포를 굽어보면 신선이라도 된 듯 절로 흥이 인다

    온정리를 벗어나 막 삼일포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금강산 청년' 역사(驛舍)가 있다.6ㆍ25전쟁 때 전파(全破)된 옛 외금강역을 청년들이 짧은 시간에 복구했대서 금강산 청년역이란 이름이 붙었다. 거기서 약 15분을 달려 왼쪽 삼일포로 들지 않고 조금 더 내려가면 교각만 남은 철교가 나타난다. 바로 옆 평양에는 온통 붉은 기가 나부낀다. 남측 관광객은 접근할 수 없는 동해북부선 복구현장이다. `위대한 000'으로 시작하는 구호를 글자 한 개 씩 31개의 대형 간판으로 만들어 들에 가득 세워놓았다. 희뜩희뜩한 간판과 막사, 붉은 기,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을 먼발치서 보니 삼국시대 전쟁터의 진(陣)같은 느낌이 든다.

    삼일포는 외금강과는 또 다른 마력을 지녔다. 강릉 경포대, 양양 낙산사 등과 함께 관동8경으로 유명한 절경답게 산과 호수와 섬,나무와 바위의 조화가 일품이다. 비로봉ㆍ옥녀봉에서 동쪽으로 밀려 내려오는 외금강과 고성평야, 그리고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도 출중해 삼일포를 내려보는 봉래대 위에 서면 신선이라도 된 듯 흥이 절로 인다.

    호수 가운데 섬과 정자, 연꽃 모양 누각과 차곡차곡 포개진 너럭바위 등을 느긋이 보며 걷다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떴다. 이름 모를 들꽃이 예뻐 고개를 숙이다보니 가슴에 단 패찰이 흔들린다. 북측이 발부한 금강산 관광증이다. 사진 바로 옆에는 입국 허가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다.

    그렇지, 허가받아야만 오는 땅이이었지. 문득 그리움이 세차게 밀려든다. 삼일포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등에 업고 외금강 봉우리들을 눈에 넣을 듯 쳐다보며 그 이름을 나직이 외워본다. 남측 관광객들은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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