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천부의 일이나 보았을까.
- 그런데도 마음이 이처럼 둥둥 뜨니 감춰진 속살 모두를 다 본다면 과연 또 무엇을 느낄런가.
▲ 지난 여름 겪은 홍수로 지금 금강산은 온통 물이다. 구룡폭포 장관 앞에서 넋을 놓다
쿵쾅대고 내달리며 지축을 후려치다. 문득 흐름을 멈추고 돌확에 누운 물은 또 어떤가. 계곡을 태우는 붉은 단풍에 물들세라 안으로 안으로 깊이를 더해 비취를 빚어냈다. 흙 한줌 없는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한 그루 소나무가 담소(潭沼)의 푸르름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구룡연, 물의 퍼포먼스
금강산 일만이천봉, 그중에서도 계곡경치가 으뜸인 외금강 구룡연코스는 요즘 아우성이다. 앙지다리를 건너자마자 헉-숨막히게 길을 막은 세존봉의 깎아지른 절벽과 마주보는 옥류봉 자락에 단풍이 붉게 타올랐다. 운보의 바보 산수화에서나 보았던 소나무들은 단풍 빛이 눈부신지 한 발씩 비켜 앉았다.
삐죽삐죽 솟거나, 웅크리고, 비틀리고, 포개지며 만 가지 형상으로 버텨선 봉우리들은 찍어누를 듯 나무와 사람을 굽어본다. 그런 산과 나무와 사람도 아랑곳없이 수정보다 맑은 물은 함성을 지르며 내달린다. 물은 계곡을 뒤흔들며 휘도는 웅장한 소리로 사람들의 넋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란지 곳곳에서 색깔과 빠르기와 깊이를 뽐내며 다툰다.
▲ 구룡대에서 내려다본 상팔담. 여인의 가슴팍 같은 산을 여덟 개의 푸른 보석이 목걸이 처럼 둘러쳤다.
사실 10월8일 금강산 탐승에 나설 때 기분은 썩 좋은 게 아니었다. 2박3일 짧은 여정이지만 남측 관광객에게 허용된 구룡연과 만물상,삼일포ㆍ해금강 코스는 지난 9월 몰아닥친 태풍 루사로 길과 다리가 대부분 유실돼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됐다는 거였다.
바다에 떠있는 호텔 해금강을 나와 관광출발점인 온정리로 가는 길 곳곳에도 수마가 할퀸 상처가 여실했다.온정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폭삭 내려앉았고 둑길은 수십 미터가 유실돼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물난리를 겪어서인가, 요즘 금강산 계곡에 넘처나는 건 물이다.`풍악(楓樂)'이란 가을 이름에 맞게 단풍이 익고, 거기에만 하늘은 흰 구름을 띄우는데, 그걸로 모자랐는지 차고 넘치는 물이 수천 수만의 퍼포먼스를 이루어낸다. `수정 같은 물이 누운 폭포를 이루며 구슬처럼 흘러내리는'옥류동에 이르면 산이 물인지 물이 산인지 그저 아득한 느낌에 빠져든다.
▲ 평양 교예단의 몸놀림은 백조를 닮고 표범을 닮았다.
겨우 상팔담을 내려다보는 구룡대에 올라서야 숨을 고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번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백길 낭떠러지 밑으로 펼쳐지는 기묘한 풍광ㆍㆍㆍ, 여인의 가슴팍 같은 산을 빙그르르 에워싸고 여덟 개의 푸른 보석이 목걸이처럼 둘러쳐졌다. 그냥 푸르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살을 벨 듯 시리게 보이는 여덟 개의 돌확 연못은 여인의 홍조처럼 빨간 뾰족산 단풍과 대비돼 가슴에 쿵쿵 부닥쳐온다.
구룡대 위로 바람이 분다. 땀이 식어 온몸에 한기가 드는데 상팔담의 시린 마력은 눈을 떼지 못하도록 내내 잡아끈다. 벌렁 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보니 뭉게구름이 이불처럼 몰려든다. 집선봉, 천화대로 이어지는 병풍이 우뚝한 속에 매 한 마리가 여유롭게 날고 있다.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천분의 일이나 보았을까. 그런데도 마음이 이처럼 둥둥 뜨니 감춰진 속살 모두를 다 본다면 과연 또 무엇을 느낄런가.
▲ 멀리서 본 동해선 복구현장은 삼국시대 전쟁터의 진(陣) 같다
불과 다섯 시간 산행만으로 주술에 걸린 듯 멍한 상태에 빠진 건 기자만일까. 산을 내려와 마음 둘 데 없어 멀리 금강산 주봉인 비로봉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안내원들은”힘들여 왔으니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교예를 꼭 봐야한다”고 채근한다. 어차피 다른 코스 탐승이 불가능해 공연장에 들어섰는데, 어럽쇼, 그 감흥도 만만치 않다.
한복 미인이 북측 특유의 가성으로 교예단원들을 `공훈배우'니`인민배우'니 하고 소개할 때만해도 객석 반응은 밋밋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숨가쁘게 던지는 접시를 한 사람이 받아 챙기는 공연이 여러 차례 실패하고 끝내 다음 공연으로 넘어가면서부터 객석도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널뛰기 재주부리기와 그네 타기 순서에 들어가자 비명과 타성이 교차돼 흘러나왔다. 봄ㆍ가을ㆍ겨울 산을 배경으로 때론 백조처럼, 또 때론 표범처롬 율동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 못지 않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는다. 자연이 빚은 최고의 경치를 산에서 보았으니 인간이 만드는 최고의 경지도 보아달라는 자부가 거기에 있었다.
금강산 자락에 밤이 내렸다. 공연장에서 온천장으로 이동하며 문득 하늘을 보니 깨알처럼 박힌 별이 금세라도 쏟아질 듯 반짝인다. 온정리를 둘러싼 수정봉ㆍ관음연봉의 거대한 실루엣은 시시각각 컴컴한 어둠에 묻혀간다. 갑자기 몰려드는 정적, 그리고 어둠 앞에서 자연과 사람은 다시 내일을 준비한다.
이튿날, 삼일포에서
▲ 봉래대에 올라 삼일포를 굽어보면 신선이라도 된 듯 절로 흥이 인다
삼일포는 외금강과는 또 다른 마력을 지녔다. 강릉 경포대, 양양 낙산사 등과 함께 관동8경으로 유명한 절경답게 산과 호수와 섬,나무와 바위의 조화가 일품이다. 비로봉ㆍ옥녀봉에서 동쪽으로 밀려 내려오는 외금강과 고성평야, 그리고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도 출중해 삼일포를 내려보는 봉래대 위에 서면 신선이라도 된 듯 흥이 절로 인다.
호수 가운데 섬과 정자, 연꽃 모양 누각과 차곡차곡 포개진 너럭바위 등을 느긋이 보며 걷다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떴다. 이름 모를 들꽃이 예뻐 고개를 숙이다보니 가슴에 단 패찰이 흔들린다. 북측이 발부한 금강산 관광증이다. 사진 바로 옆에는 입국 허가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다.
그렇지, 허가받아야만 오는 땅이이었지. 문득 그리움이 세차게 밀려든다. 삼일포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등에 업고 외금강 봉우리들을 눈에 넣을 듯 쳐다보며 그 이름을 나직이 외워본다. 남측 관광객들은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