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진강을 굽어보며 서정을 노래하는 목가적 시인으로 생각하면 오해다. 젊어서는 참교육과 농촌 문제를 끌어안고 발버둥치며 시를 썼고, 지금은 학교 문제와 환경파괴에 맞서 싸우며 살아 있는 시를 쓴다.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고 있지만 묵묵히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섬진강처럼 겸손하다.
그때 그 사람들의 아픔이나 상처는 지금 아물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견디고 있을까. 강물은 그렇게 꼭 내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거울 같았다. 정작 나의 얼굴은 강물에 빠져버린 듯 보이지 않는다. 강은 나를 품지 않았다. 내가 강에 가지 않았으므로 강은 저만치 멀리서 흐르고 있었고, 나는 망연하게 섬진강을 바라만 보았다.
그 강가에 김용택(金龍澤·59) 시인이 서 있었다. 그의 시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숨결이었다. 섬진강 진매마을에서 태어나 민물고기처럼 그는 그렇게 살았다. 그가 요즘 관심을 가지는 환경 문제는 생래(生來)적인 것이다. 자신의 몸과 같은 것을 툭툭 건드리고 파내니, 몸이 아파서 난리치는 것이다. 정작 그의 시는 그 삶의 외피이고, 독자에게는 자신의 속살이다. 첫눈이 내리듯이 그의 시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에게 내려왔다. 그의 시를 읽으면, 한동안 나는 정말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의 짧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첫눈’ |
평범함 속의 비범한 삶
김용택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1982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한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 ‘섬진강’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시 쓰기. 이미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통해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덩달아 섬진강도 유명해졌다. 김수영 문학상(1986), 소월시 문학상(1997)을 받기도 했다.
시인은 ‘평범 속의 비범’한 삶을 살고 있다. 순창농림고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고, 섬진강에서 시골사람으로 살면서 시를 쓴다. 그러나 시보다는 삶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그에게서 들었다. 온 국토가 공사 중인 이 각박한 세상에 시 쓰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될까.
“나의 글은 내가 살아온 삶의 껍데기다. 삶을 그대로 쓰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 삶이 좋았다. 그것을 글로 옮겼을 뿐이다. 삶에 비하면 시는 하잘것없는 것이다.”
또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내가 한가하게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서 시 쓴 것 아니다. 젊어서는 시골서 농사짓고 교사생활 하면서 썼고, 전주에 살면서는 환경운동으로 뛰어다니면서 쓰고, 지금은 학교 문제를 비롯해서 여러 비환경적인 권력과 싸우면서 쓴다.”
시인이 30년 전에 심었다는 진매마을 느티나무. 나무는 우람하게 자랐다. 진매마을은 땅 기운이 좋은 곳이다. 나무가 저렇게 잘 자라는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큰 나무가 있는 곳에 큰 인간이 난다. 시인도 이 땅의 저러한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하지만, 나무는 인간에게 오래 사는 삶을 보여준다.
“글만 잘 쓰면 뭣 허냐. 시는 진실이야.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진실이여.”
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진매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가의 바위고, 자신이 일하는 덕치초등학교이고, 진매마을에서 순창으로 향한 좁은 길이다. 시인은 자신이 사는 지역의 문제를 안고 씨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군청에서 진매마을의 섬진강가에 벤치를 놓겠다는 것을 시인은 반대했다. 군청 직원들은 사람들이 다니다가 벤치에 앉아서 쉬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냥 땅바닥에 앉아서 쉬면 된다고 했다. 그게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길가에 팬지꽃을 심겠다고 해서 또 반대했다. 봄, 가을로 얼마나 많은 야생화가 아름답게 피는데 그런 꽃들을 심느냐고 호통을 쳤다.
행복의 뿌리는 고통
그는 시골학교 교사로 아이들과 놀면서 한가하게 문학 하는 김용택이 아니라고 했다. 사정을 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촌사람 김용택의 이미지만 보고 자신을 그렇게 이야기하면 억울한 모양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김용택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섬진강이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김용택은 끊임없이 걸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산책이 아닌 출근이었고, 투쟁이었고, 기록이었다. 김용택의 실핏줄을 타고 올라오는 섬진강의 물고기들은 선생의 몸속에 살고 있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 ‘섬진강 1’ 중에서 |
김용택의 시에 조그만 관심이 있다면 그를 팔자 좋은, 한가한 사람으로 보지는 않는다. 나는 항상 웃고, 다정하고, 잘 주는 그를 행복한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웃음 뒤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어쩌면 그 눈물은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면서 본 폭력과 난개발과 아픔인지도 모른다. 행복의 뿌리는 고통이다.
“시는 고통이 있어야 돼. 시인의 가슴에 고통이 없다면 뭔 시가 나오겄어. 가슴속에 응어리진 고통이 담금질되어 한 편의 시가 나오는 거지.”
시인은 섬진강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나라의 시인들이 ‘또랑’(개천) 하나, 마을의 바위 하나를 지키면서 글을 쓴다면, 그것이 바로 환경 생태시가 될 것이다. 고요한 절간이나 문학관에서 쓰는 것보다, 자신의 삶이 바로 시나 산문이 되는 그런 글을 보고 싶다.”
물길은 곡선으로 흐른다. 곡선은 자연이고 도시는 직선이다. 섬진강에 서면 완만하게 혹은 급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해마다 일어나는 수해는 저 곡선의 물길을 인간의 인위적인 힘으로 직선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둑이 무너지고 다리가 침수되는 것은 바로 그 자리가 물이 지나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물이 지나가는 자리에 놓인 인위적인 것들은 모두 무너져내린다. 우리나라의 수해는 대부분 인재(人災)이다. 강원도에 수해가 났을 때 동네할아버지들이 둑 무너진 자리를 보고 말했다.
김용택 시인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생가에 ‘관란헌’이란 이름의 서재를 꾸몄다.
물은 그저 자신이 갈 길을 갈 뿐이다. 그 길을 가로막고선 사람들이 수해가 났다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김용택 시인은 요즘 네 가지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덕치초등학교와 진매마을을 하나의 환경·생명공간의 벨트로 묶어 보존하는 일이다. 그는 그냥 두고 보면 온갖 개발이 밀려들어온다고 한탄했다. 우리나라 행정부에서 건교부가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 건교부가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나라 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일을 환경부가 한다. 김용택은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건교부가 있는 나라에서 살아남기다. 폭력적인 개발논리에서 마을을 살리고 학교를 살리는 길은 우리가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은 이렇다.
환경·생명공간의 벨트
첫째, 농촌체험학교를 운영하는 것이다. 지난 11월에 10명의 도시 아이가 신청을 해서 지내고 있다. 서울 강남에서 온 아이도 있다. 1년간 덕치초등학교에서 기숙하면서 김용택 선생에게 배운다.
선생은 뜻밖에도 아이들에게 삶의 고통과 고난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갈등과 곤란을 겪어야 성숙한 사람이 된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교육이 무슨 소용인가.
사회 문제인 왕따도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의 성장과정에 좋은 효과가 있다. 왕따는 본질적으로 없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 사는 것이 어디 그런가. 시골학교에서 서너 명에게 왕따를 당하는 경험은 오히려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야 애들한테 붙어서 같이 놀고 어울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골아이와 도시아이가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고 가는 행복한 학교생활이 될 것이다.
둘째, 주말도서관 운영이다. 4억원 정도면 덕치초등학교 건물 하나를 도서관으로 개조해서 운영할 수가 있다. 주말도서관이 만들어질 예정인 건물 안에는 장구와 의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예산이 확보되면 주말도서관이라는 신선한 생각이 봄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늘 자연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김용택 시인의 도서관은 덕치초등학교의 꽃처럼 나무처럼 운영될 것이다. 큰 나무 아래서 사람들은 쉬어간다. 그 자리를 만들려 하고 있다. 주말에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책 읽고 쉬어가는 것이다. 한 가족이 책 읽는 풍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셋째, 마을 가꾸기다. 진매마을은 시인의 고향이다. 이 마을을 훼손 없이 지키는 것이 요즘 그의 일이 되어버렸다. 시 쓰는 일보다 마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시집 출간도 뒤로 미룬 채 마을에 무슨 공사가 벌어지려는 조짐이 보이면 동분서주하면서 그것을 막아낸다.
대표적인 것이 진매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서 난 오솔길이다. 이 길은 김용택의 인생길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들이대는 개발에 맞서 그는 길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길에 ‘공사중’이라는 관공서의 표지판이 서 있다.
넷째, 생태하천 체험이다. 어느 가을날 진매마을 앞 섬진강을 징검다리로 건너 밤을 주워온 적이 있었다. 시인은 그 징검다리 위에서 내게 꺽지나 쉬리와 같은 민물고기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보여주었다. 아이들에게 강의 흐름을 따라 걷게 하면서 자연을 보게 하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는 강의 흐름을, 그 순리를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 네 가지 일을 하나로 묶어 그는 부지런히 움직일 것이다.
아버지의 새벽 소리
진매마을에 있는 시골집에는 선생의 모친이 살고 계신다. 남편과 사별하신 후 조용하고 단아하게, 그러나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고 계시는 어머님의 모습은 한결같다. 수년 만에 뵈었는데도 그 모습 그대로다.
처마에 매달아놓은 곶감을 빼먹었다. 섬진강의 바람과 물결이 스며들어 맛이 달고 그윽하다. 서너 개를 한꺼번에 먹어도 웃으시며 하나 더 빼주신다. 마당 한 편에는 작은 항아리들이 소담하다. 한때는 저 항아리들이 무척 크고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사시기에 작은 항아리가 몇 개 돌 받침 위에 놓여 있다. 남편은 하늘나라로 올려 보내고,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나갔기에 혼사 사신다.
지금은 개조된 부엌에서 가스레인지를 사용하지만, 그 옆에는 옛 부엌이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궁이 위에 가마솥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을 텐데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여 있었다.
이분은 고향이라는 전통적인 공간에 사시는 마지막 어머니가 되지 않을까. 어머니와 시골집은 같은 모양이었다. 사람과 집은 그렇게 마을에서 같이 나이를 먹고 있었다. 그 시골집은 선생이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좌절하고, 또한 결혼하고, 시를 쓴 곳이다. 선생은 겨울방학 내내 이 집에서 시집 ‘나무’ 원고를 정리했다. 지금도 서재로 이용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집에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선생은 아버지와 같이 찍은 사진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아버지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사진이 시골집 서재에 있었다. 책장에 놓인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은 선생에게 이런 추억의 사진이다.
젊은 시절, 그는 긴 겨울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새벽이 되고, 닭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때쯤이면 지난 밤 뜨거웠던 온돌이 식어 방안에 한기가 스민다. 졸음은 몰려오고 추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새벽, 아버지가 쇠죽을 끓이기 시작한다. 탁탁거리면서 마른 것들이 타고, 훌훌 불길이 아궁이로 몰려 들어가는 소리는 젊은 김용택에겐 자장가와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기척은 아득하게 잠길로 들어가는 아들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소리였다. 방안에 온기가 돌면서 온돌이 뜨거워진다. 젊은 김용택은 어느새 까마득히 새벽잠에 빠진다. 아침까지 서너 시간의 꿀잠이었다.
왕희지의 무릎
그런 아버지의 기척과 온기가 배어 있는 시골집 서재에는 ‘관란헌(觀欄 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시인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왕희지(王羲之) 집자라고 글씨의 주인을 일러 주었다. 왕희지도 가난한 선비였는데 늘 글을 썼다고 한다. 앉아 있을 땐 무릎 위에다 썼다고 한다. 하도 써서 무릎 부분 옷감이 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떤 분야건 일가를 이룬 사람의 남다른 점이 있다면 진정성과 무서운 집중력이다. 오직 한길만 걸어온 이가 무엇인가를 이룬다. 세상의 이치는 같은 것이다. 그는 문리가 터진다는 말을 그렇게 들려주었다.
“무엇이든 하나만 진정으로 한다면 그것으로 세상이치를 통달하는 것이다.”
시골의 면서기가 면(面) 사정에 통달한다면 그는 진정한 전문가다. 자신의 마을에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 사람 사람들에 대한 진정성이 있다면 허랑한 담론만 뱉어내는 지식인보다 이 사회에 더 필요한 사람이다.
“이상한 일이야. 내가 살면서 쭉 보니까 사심 없이 한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 박원순 선생도 그렇고. 참 신기한 세상 이치야.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쓴 휘호도 삿됨 없이 살라는 사무사(思無邪) 아니냐.”
‘사무사’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시경 300편을 개괄하는 공자(孔子)의 말이다. 공자도 시집을 엮으면서 시인에게는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김구 선생의 이 휘호에는 아직까지 핏자국이 있다. 이 글을 쓰고 난 자리에서 선생은 암살을 당했다.
시인을 닮은 사람들
그에게는 고마운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중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선 월부 책장수다. 선생이 청운초등학교 옥석분교에 근무하던 시절에 ‘찾아온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길이 좀 나아졌지만 첫 교사 부임 옥석분교(지금은 폐교)로 가는 길은 바지를 걷어붙이고 ‘또랑’을 몇 개 건너야 했다. 그래야 겨우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어떻게 김용택을 찾아온 것일까, 그것이 지금도 신기하다고 한다.
시인은 그에게서 월부로 많은 책을 샀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헤르만 헤세 전집. 이어령 전집, 박목월 전집, 괴테 전집, 니체 전집 등이었는데, 그 책을 통해서 문학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인적이 드문 산골 학교에서 젊은 총각 선생의 책 읽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책읽기를 통해서 시인으로서 다시 태어나고, 인간으로서 성숙해졌을 것이다. 그가 월부로 판 책들이 시인 김용택을 만드는 초석이 된 셈이다. 그 책들은 지금도 시골집 서재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두 번째는 친구 권철호씨다. 역시 ‘희한한 사람’이다. 순창농림고를 졸업한 김용택이 처음 한 일은 전공을 살려 오리를 키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험부족으로 결국 망하고 만다. 젊은 김용택은 낙담하여 서울로 올라가 두어 달 놀다가 다시 내려와 순창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교사시험을 보러가자고 부추긴 사람이 바로 권철호씨다. 교원이 부족해서 사범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국가시험을 거쳐서 서너 달 선생교육을 받고 초등학교에 임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땐 아무 생각이 없었어. 선생은 꿈도 꾸지 않았어. 그래서 교원 시험을 보라는 친구에게 그게 뭔 말이냐고, 난 시험 안 보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친구가 사진만 찍으면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거야. 하도 닦달을 해 귀찮아서 사진을 찍어 줬더니 지가 원서 써서 광주까지 가 접수해 수험표를 가져다주는 거야. 그래서 시험 보고 교사가 된 거지.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인지도 몰라. 그런데 정작 그 놈은 떨어졌어.”
그 친구는 지금도 자주 만나는 죽마고우라고 일러주었다. 시인 곁에는 그를 닮은 사람이 많이 있는 것 같았다.
또 한 사람은 중학교 시절에 만난 동네 형이다. 그는 당시 서너 살 위 고교생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점잖은 사람이었다. 시인은 중고교 시절 진매마을에서 순창까지 40리길을 오로지 갈 차비만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용돈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올 때는 걸었다. 무척 가난했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도 많았다.
중학교 때 꼭 갖고 싶었던 책이 ‘메들리 삼위일체’라는 영어 참고서였다. 당시 중학생들의 영어공부에 바이블과 같은 책이었다. 책을 살 돈이 없었던 김용택은 늘 아쉬운 마음을 품고 살았다. 집안 사정을 아는지라 부모님께 사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책, 내일 가지고 와라”
어느 날 영화관에 단체관람을 갔는데, 옆자리에 그 형이 앉아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형의 가방을 보니 그 참고서가 보였다. 영화를 보느라고 형이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중학생 김용택은 참고서를 슬쩍 훔치고야 말았다. 훔치기는 했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서웠다.
다음날, 그 형이 김용택을 불렀다.
“용택아, 영화 보다가 내 책 가져갔지?”
형은 화도 내지 앉고 조용히 물었다고 한다.
“예.”
“그 책, 내일 다시 가지고 와라.”
“예.”
이게 다다. 형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가져오라고만 했다. 김용택은 그대로 했다. 그러곤 지금까지 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형의 교복 바지는 기운 자국 투성이였다. 엉덩이와 무릎은 헝겊을 덧대놓았다. 오로지 교복 한 벌로 3년을 지내던 시절, 이 참고서 사건은 어린 김용택에게 많은 것을 소리 없이 가르친 것이다.
김용택 선생은 아이들에게 1주일에 한 시간은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가르친다.
그리고 전주 홍지서림의 책방 아가씨가 있다. 김 시인은 교사 시절, 월급을 타서 동생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면 책 살 돈이 없었다고 한다. 어쩌다 한두 권 사긴 했지만, 그때의 독서는 주로 홍지서림에서 했다. 근무가 없는 일요일에는 늘 서점에 서서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그때 서점에 근무하던 아가씨가 의자를 가져다주면서 앉아서 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이 ‘아가씨’는 지금 익산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어느 날, 유명해진 시인 김용택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을 기억하냐고 했다. 전화를 받은 시인은 한달음에 익산까지 달려가 차 한잔을 나누고 왔다고 했다. 시인의 곁에는 이름 없는 진짜 시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쓰잘머리 없는 개발
임실 청소년수련원으로 들어가는 작은 돌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에는 임실각시붕어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인은 각시붕어를 보면서 지금은 전 국토가 죽어가는 시절임을 강조했다. 시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죽어가는 국토를 살리는 것이다.
“마을, 학교, 강을 살려야 해.”
어쩌면 이것이 시인의 고통인지도 모른다. 이 고통이 시를 낳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연인처럼 시인의 마음에는 작게는 마을과 학교의 죽음이, 넓게는 이라크전을 비롯한 전쟁의 죽음이 뱀처럼 고통의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년에 출간하겠다는 시집의 화두는 역시 환경과 전쟁에 관한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살면서 쓰는 것이다. 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고, 노래다. 시인은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후회 없이 치열하게 살면 돼.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지. 가끔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자신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언젠간 풀리지. 진실한 사람의 모습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야.”
그러다가 문득 이런 말도 한다.
“강산이 저렇게 아파하는데, 시는 뭐하게 쓰냐.”
죽어가는 마을 앞에서 시 쓰는 일보다 ‘쓰잘머리 없는 개발’을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공서에 강연요청을 받아 가는 자리에서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고, 제발 관에서 쓸데없는 개발을 안 하기를 당부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시인일 수 있게, 시를 좀 쓰게 해달라고 당부한다고 했다.
전주에서 진매마을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풍경이 많이 있다. 그런 곳엔 어김없이 서양식의 어색한 건축물들이 산을 깎고 들어서 있다. 이른바 ‘전원마을’인 모양인데 시인은 그것이 영 어색하고 볼품없다고 타박한다. 필자가 보기에도 산과 물과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동막골에 들어선 탱크 같은 모습이다. 저것이 어쩌면 폭격이 아닐까 싶다.
“옛 선비들은 절경의 자리엔 거처를 짓지 않았어. 좋은 풍경은 가끔 와서 보는 거여. 그것이 좋은 것이지.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절경이 보이는 곳에 저렇게 집을 지으려고 안달이야. 좋은 것도 자주 보면 그저 그래. 아껴서 봐야지. 그리고 우리 그림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작아. 산수화에 있는 사람은 나무나 풀과 같이 작아. 큰 것은 산과 물이야. 자연에서 사람은 그 정도지.”
진매마을의 집들은 주위의 자연과 어울려 있다. 겸손하게 낮게 엎드려 산과 물과 나무와 같이 산다. 시인은 키가 작은데, 진매마을 섬진강의 낮은 물길을 닮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임실군 강진의 길손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매운탕이다. 냄비 안에는 꺽지, 토우, 모자, 갈겨니, 빠가사리, 물종개와 같은 섬진강의 민물고기들이 맛을 내고 있었다. 우거지와 함께 끓여낸 매운탕의 맛에 공기밥을 더 먹어 배가 불러 터질 지경이 되었다.
임실의 모든 사람은 김용택의 이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이 식당 주인 역시 마찬가지다. 식당 주인에게는 가슴 아픔 사연이 있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엔 가설극장이 천막을 치고 영사기를 돌려 시골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어느 날 진매마을에도 흑백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동네 가게에 한 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20원을 내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때 방영된 드라마가 ‘여로’였다. 사람들은 ‘여로’에 열광했다. 더 이상 가설극장을 찾지 않았다.
하루는 김용택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게 아래 설치된 가설극장을 보았다. 천막에는 단 한 명의 관객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조리 가게에 모여 ‘여로’를 보고 있었다. 연속극이 방영되는 그 아래에서 가설극장의 주인인 부부가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 식당의 주인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지금은 돈을 많이 벌었다고 살짝 귀띔해주었다.
“논술은 삶인데…”
김용택 시인은 올해 교사 37년차이다. 그는 “선생과 이 사회의 지식인들은 아이들에게 ‘사회’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사는 마을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살아 있는 목소리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교육인데, 우리의 교육은 죽어가고 있다고 그는 보고 있었다.
학군에 따라, 학원에 따라 집값이 결정되는 현실이 아닌가. 특히 논술 얘기로 시끄러운데, 요즘의 논술 교육은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을 전수한다고 한다. 바보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논술을 이렇게 정의했다.
“논술은 삶이여. 우리가 살았던 삶을 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보고,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글로 정리하는 게 논술이여.”
창의적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말일 것이다. 창의성은 생명을 뿌리로 한다. 그 뿌리에서 꽃이 피듯이 글이 나오는 것이다. 기술이나 암기는 뿌리가 될 수 없다.
김용택은 아이들에게 1년간 1주일에 한 시간은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가르친다. 1년을 계획했으므로 서두르지 않는다. 아이들은 천천히 배운다.
동시 한 편을 쓰는 동안 아이들은 성장한다. 그리고 어떤 시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선생이 책만 읽는다. 교실은 조용하다. 아이들도 선생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읽다가 지루하면 누워서 읽기도 한다. 그렇게 책 읽는 것이 습관이 되면 스스로 얻는 것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들의 동시는 탄생한다. 이미 책으로도 출간된 김용택 제자들의 시와 그림은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다.
선생의 전주 집에도 아이들의 그림이 표구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다혜의 작품은 보기 좋았다. 2학년 때 이런 수업을 받고 난 아이들은 3학년, 4학년이 되어서도 따로 부르지 않아도 김용택 선생의 교실에 와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놀다(?) 간다.
“나 열심히 가르친다. 난 한가하다는 소릴 들으면 억울혀. 나 적당히 놀면서 시 쓰지 않아. 37년 교사생활 하면서 출장을 간 것이 한두 번이여. 선생이 왜 수업을 빼먹고 출장을 가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선생은 아이들의 몸을 가진 분이다. 아이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은 어른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선생의 2학년 교실에는 다혜와 지연, 재석이 있다. 서울에서 내려온 다혜는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고 부모가 서울에 있다. 지연이는 시골아이다. 재석이는 목사님 아들이다. 다혜는 의젓하고 성숙한 아이다. 가끔 선생이 잔소리를 하면 ‘선생님, 집에서 할머니 잔소리도 많이 들으니 잔소리 좀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곤 한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선생은 깜짝 놀랐다. 간이 큰 녀석인데 어쩐 일일까. 재석이와 지연이도 곁에서 울먹이고 있다.
이유는 손난로 때문이었다. 지연이가 손난로 가지고 다니는 것을 부러워하던 다혜. 할머니는 서울에서 엄마가 내려오면 사 준다고 했다. 서울서 내려온 엄마가 손난로 2개를 사 주었다. 그런데 지연이가 손난로를 가지고 놀다가 그만 망가뜨렸다. 똑딱거리는 손난로의 가열 장치가 부러져버린 것이다.
애들은 애들이다 싶어 그것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500원이라고 한다. 선생은 주머니에 있던 500원을 책상에 올려놓고 이걸로 다시 사고 울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뚝 그치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500원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다혜. 은근히 부아가 나는 선생이다. 녀석, ‘고맙습니다’라든지 ‘아니에요. 엄마한테 또 사달라고 할게요’라든지 한마디는 해야지. 요 녀석 봐라. 시치미를 뚝 떼고 있어. 그래도 이미 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다음 시간이 바른생활 시간이었다. 예의범절을 가르치면서 선생은 다혜에게 말한다.
“어른이 돈이나 물건을 주면 어떻게 하면서 받지?”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하면서 받습니다.”
“그런데 다혜는 아까 어떻게 했지?”
“….”
“그럼 다시 해보자. 다시 그 돈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혜가 주머니에서 500원을 다시 올려놓자 김용택 선생은 얼른 그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고 깔깔대며 웃었다. 다혜는 다시 울고….
선생의 교육관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대충 넘어가면 반드시 뒤탈이 있다. 아이들과 문제가 있으면 끝까지 대화를 해서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공부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 시인 김용택의 교육방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섬진강의 물과 바위와 바람과 그리고 산과 나무와 풀과 같이 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어울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을 고생시켜서라도 반드시 인간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택 부부의 금실이 유난히 좋은 비결은 ‘자세히 들여다보기’였다.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쁜 구석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나도 내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해. 대충 보면 안 돼. 자세히 봐야지.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 같아. 대충 보는 사람은 대충 쓰지. 그리고 어쭙지않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려고 하고. 자기 자신만을 보려고 하고 말이야. 집사람이 처음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주 명언이야. ‘우리 기왕에 만났으니 잘살자’였어. 나에겐 아주 심오한 이야기야. 기왕에 만난 사람들, 다 잘살았으면 좋겠어.”
자세히 들여다보기
산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부인을 어떻게 만났냐는 말에 시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님 탈상에 와서 만났는데,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만난다. 기차에서 만나고, 비행기에서 만나고, 길거리에서도 만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만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다. 말은 쉽지만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부부사랑은 잘 가꾸는 거여. 그리고 아내를 부려먹으려 하면 안 돼. 집안일도 서로 도와가면서 하는 거야. 그렇게 작은 것을 자세히 보면 지루한 것이 좀 괜찮아. 같이 20년 살면서 그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
선생의 전주 집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홀로 진매마을을 다시 찾았다. 날은 조금씩 어두워진다. 섬진강은 선생의 시에 나온 대로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의 섬진강이었다. 강은 삶이다. 그것은 시인의 삶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다. 시는 강물에 조금 흐드러져 있는 억새이거나,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는 달이다.
억새와 달은 사람들에게 묻는다. ‘어떻게들 살고 계시는가. 아직도 어떻게 살 것인가만을 꿈꾸는가’ 하고. 시인은 말한다. 꿈꾸지 말고 죽도록 열심히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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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면서 말이야, 가끔은 멈추어야 한다고. 요즘 얼마나 빠른 세상이야 정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들 달려가고 있지. 정신이 없어. 그럴 때 가끔 멈추어서 뒤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지. ‘성찰’하는 거 말이야. 그래서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고, 새롭게 또 가는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삶은 재미없어. 삶의 재미는 그런 게 아니니까. 삶은 고속도로가 아니야. 저기 보이는 섬진강 물줄기처럼 휘어지기도 하고,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하고, 잠깐 멈추기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