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활동에 ‘애국정신’ 있었다
명품을 금고에 넣고 혼자 보면 뭐하나
대를 이은 문화재 지키기
좋은 물건을 값을 따지지 말라
미국 가정집 스탠드로 쓰인 조선백자
1980년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집무실에서 서예 연습 중인 호암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당시 부회장. 이병철 선대 회장의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이건희 회장에게 고스란히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성 제공]
수집활동에 ‘애국정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개한 이건희 컬렉션 기증품 가운데 희귀작으로 꼽히는 이중섭의 ‘흰소’. 생전에 이 회장은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 희귀 문화재들을 한데 사 모으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삼성가가 국보급 문화재 16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국보100점 수집 프로젝트’에 따른 것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수집 철학은 명품을 목표로 하되 일류를 모으는 것이었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그의 제일주의와도 연결되는 대목이다…이 무렵 시중에서는 ‘좋은 물건은 모두 삼성으로 간다’고 할 정도로 고미술은 물론이고 근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 명품들이 속속 둥지를 틀었다.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부부의 대작 30여 점이 일거에 수집되기도 했고, 원각사 벽화 원본과 거의 동일한 소정 변관식의 보덕굴 대작도 들어왔다. 국전 초대 대통령상을 수상해 유명해졌던 유경채의 유작 수십 점, 박수근 대작 ‘소와 유동(遊童)’, 이중섭의 대표작 ‘소’ 시리즈도 이때 들어왔다. 수화 김환기의 점묘 대작, 평생 소품만 고집했던 장욱진의 주옥같은 작품들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이 시기는) 비교적 미술시장이 활황을 보였던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로 마음만 먹으면 좋은 작품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시장이 좋고 매물이 끊이지 않는다고 해서 명품들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운도 따랐지만 이렇게 수준을 높일 수 있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건희 회장의 결심과 추진력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한 개인이 국가 보물을 100점 넘게 갖고 있는 경우는 일본에도 없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국보를 수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쉽지 않은 경로를 통해 어렵게 우리 국보를 사들이거나 우여곡절 끝에 해외로 유출될 뻔한 우리 보물들을 지켜냈다는 시각으로 볼 때 (회장의) 수집 활동에는 ‘애국정신’이 있었다.”
명품을 금고에 넣고 혼자 보면 뭐하나
역시 호암과 리움 미술관에서 부관장으로 일했던 김재열 전 상무의 증언도 비슷하다. 그의 말이다.“이건희 회장님이 부회장이던 시절로 기억하는데 밤중에 혼자 훌쩍 호암 미술관 전시작들을 둘러보고 올라가신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미술품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지요. 컬렉터들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주관과 선호가 뚜렷합니다. 고미술품도 누구는 도자기, 누구는 서화, 금속하는 식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정해져 있지요. 하지만 고인은 장르를 불문하고 우리 고미술 자체를 사랑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 고미술품의 아름다움과 격조는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하다면서 국민들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어 하셨지요.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를 세우고 리움 미술관을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명품을 개인 금고 속에 넣어 놓고 있으면 뭐하나, 한데 모아 보여줘 우리 미술의 진정한 가치를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으니까요.”
고인은 집무실에 작은 도자기 전시관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당신을 만나러 오는 외국인들에게 우리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알려야 한다며 집무실 책상 맞은편에 시대별로 대표적인 도자기들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중국계 미국인이었던 사디(SADI·삼성이 만든 디자인학교) 교장이 ‘회장님이 다녀오라고 했다’며 호암 미술관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박물관 투어를 마친 그의 입에서 ‘삼성이 하는 디자인의 바탕은 결국 한국 미술이었다’는 말이 나오더군요.”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미적인 상상력을 제품 생산에서도 구현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게 교육이었다. 다시 김 전 부관장 말이다.
“한번은 저더러 ‘한국 고미술이 왜 훌륭한가’를 주제로 비서실 임원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라고 했습니다. 경영 마인드에 미적인 것들이 더해지면 사고의 지평이 훨씬 넓어지고 부드러워진다면서 말이지요. ‘이익만 생각하는 계산적인 사고만 중요한 게 아니고 시적(詩的)이나 미적인 감성이 필요해지는 세상이 올 테니 그걸 준비해야 된다’고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교육은 별로 호응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이었으니 회장의 그런 생각이 스며들기가 힘들었지요.”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문화는 든든한 부모와도 같다’고 했다.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밝힌 내용이다.
“사실 우리 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 문화에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다. 일본의 ‘구다라나이’는 형편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다라’는 바로 백제(百濟)를 말한다. 구다라나이의 본래 의미는 ‘백제가 없는’, 즉 ‘백제의 정신이 깃들지 않은 물건은 시시하다’는 뜻이었다. 조선시대의 문화유산들을 보아도 우리 민족은 문화적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과거에 우리가 무엇 무엇을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느니, 서양보다 몇 백 년이나 앞섰다느니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바로 오늘 우리 문화의 색깔이 있는가, 세계에 내세울만한 우리의 문화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문화적 특성이 강한 나라의 기업은 든든한 부모를 가진 아이와 같다. 기업 활동이 세계화할수록 오히려 문화적 차이와 색깔은 점점 더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된다. 전통 문화의 우수성만 되뇐다고 해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적인 경쟁력이 생기지 않을까 한다.”
대를 이은 문화재 지키기
이종선 전 부관장은 이 회장의 컬렉션에 ‘애국정신’이 깔려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점은 이런 고인의 내면은 아버지 호암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호암은 한국인들이 먹고 살기에 급급해 문화재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작품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세웠다.“단지 개인이 집에서 보고 즐기는 호사가 아니라 ‘소통을 전제로 하는 공개’와 ‘상업적인 판단이 배제된 윤리’가 중요한 박물관을 세워 일반에게 공개했다는 것은 기부와 나눔을 생각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행위”(이종선 책)다. 지금이야 미술관 박물관을 운영하는 기업들이 많지만 1982년 문을 연 호암 미술관의 개관은 기업이 박물관을 운영하는 첫 신호탄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왜 문화재를 모았을까. 자서전 ‘호암 자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나의 미술품 수집은 33세 때로 소급된다. 대구에서 삼성물산의 전신이라고 할 삼성상회를 설립해 양조업을 주 사업으로 확장해가던 시기였다. 서(書)에서 시작해 회화에 끌리고 신라 토기, 이조백자와 고려청자를 거쳐 불상을 포함한 철물, 석물, 조각, 금동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점수(點數)로는 2000여 점, 이중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이 50여 점 있다…민족 문화 유산을 더 이상 해외에 유출시켜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사명감과도 같은 생각이 나를 더욱 미술 수집의 길로 이끌어갔다…10여 년 전 60세가 될 무렵부터 이들 컬렉션을 어떻게 후세에 남길 것인가를 이리저리 생각해왔다. 비록 개인 소장품이라고는 하나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영구히 보존해 국민 누구나가 널리 쉽게 볼 수 있게 전시하는 방법으로는 미술관을 세워서 문화재단 사업으로 공영화하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일본만 해도 건평이 700평이나 되는 큰 규모의 유명한 이데미츠 미술관을 위시하여 전국에 1500개 개인미술관이 있다. 우리는 국립박물관 외에 불과 한 두 곳이 있을 뿐이다. 참으로 놀랍고 서운한 일이다.”
호암이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으니 장남 이맹희 씨다. 그는 1993년에 펴낸 칼럼집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근 30년 전(1960년대) 일이다. 한때 나는 북한의 미술품을 국내로 반입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상당수 고미술품들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니까 전부 일본으로 실려 갔다. 몇몇 경로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무척 안타까워했다. 여기저기 탐문한 결과 북송선으로 유명한 (일본) 니가타 항구를 통해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 물건들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부분 한국으로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아버지가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한 것은 우리가 영구히 간직해야할 문화유산이 엉뚱한 곳에서 훼손될는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심정 때문이었다. 일본인들 손에 우리 것이 들어가서 영영 그들이 소유하게 된다거나 옛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지식 없이 투기 대상으로 물건을 사 모으는 사람들 손에 들어가는 것을 제일 염려스러워했다. 그래서 하나둘 손에 들어온 물건들을 전부 호암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곁에 있었던 우리는 그런 물건들을 하나도 개인적으로 소장하지는 못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누이나 건희, 세상 떠난 창희(이병철 회장의 2남)도 감히 탐내지 못했다. 모든 미술품과 골동품은 잘 간직하고 있다가 전부 미술관에 기증됐다.”
좋은 물건은 값을 따지지 말라
‘이건희 컬렉션’인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인왕산에 비가 내린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순간을 대담한 필치로 담은 진경산수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삼성 제공]
김재열 전 부관장은 “해외에 나가 있는 문화재들을 꼭 한국으로 갖고 와야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며 이렇게 전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수많은 전란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들이 반출되어 국내에는 사실 명품이라고 꼽을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한국 문화재를 해외에 알리는 전시를 할 때마다 같은 작품들이 자꾸 나가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건희 회장이 명품 문화재들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고인은 ‘우리나라에 최고의 골동 미술품을 어떻게 해서든 빨리 모아 놔야겠다’는 소명감 같은 걸 갖고 있었습니다.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라는 게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재 거래는 까다로운 법률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들여올 때도 상당히 애를 많이 먹습니다. 회장님은 그 바쁜 와중에도 일일이 그런 것들까지 신경을 쓰셨습니다. 물건은 크리스티 경매 같은 공식 채널을 통해 사오기도 하고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개인이 소장한 것들을 접촉해서 사오기도 했는데 ‘좋은 물건은 값을 따지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국보 제309호인 백자 달 항아리도 보통 작품의 배 이상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건희 회장은 선친과도 조금 달랐다고 한다(이종선 책).
“이병철 회장은 특정 분야에 쏠리거나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지는 않았고 고려 불화를 역수입한 것에서 보듯이 애국적인 역할에 해당되는 일이면 주저하지 않고 수집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거나 고가의 작품에 휘둘리지 않았다. 같은 물건이라도 비싸다는 소문이 나면 고민을 많이 했다. 이에 비해 이건희 회장은 값을 따지지 않고 별로 묻지도 않았다. 좋다는 전문가의 확인만 있으면 별 말없이 결론을 내고 구입했다. 그래서 리움 컬렉션에는 명품이 상당히 많다. 어느 개인도 이보다 많지 않다. 이회장의 명품주의가 미술에 있어서도 적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명품주의는 ‘특급이 있으면 컬렉션 전체의 위상이 덩달아 올라 간다’는 지론에 따른 결과였다.”
김재열 전 부관장은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그렇게 해서 소장하게 된 ‘이건희 컬렉션’은 질과 양으로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나라 국보, 보물 지정 절차는 매우 까다롭습니다. 리움 미술관이 100여 점이 넘는 국보를 갖게 된 건 애초에 뛰어난 명품들을 전 세계에서 수소문해 들여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전에 이 회장은 박물관의 원리를 통해 ‘합치는 것의 힘’을 말한 적이 있다. 바로 복합화의 원리다(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영국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문화유산들이 박물관에 진열되지 않고 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면 과연 그토록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5000년이 넘는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면서도 세계에 내세울만한 박물관이 없다. 국립박물관에 가서 여러 문화재들을 둘러보며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고 지혜를 엿볼 수 있지만 박물관을 나설 때면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상당한 양의 빛나는 우리 문화재가 아직도 국내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실정인데 이것들을 어떻게든 모아서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문화재를 전쟁으로 잃었고 관리를 제대로 못해 흔적없이 사라진 것도 많지만 남아있는 것만이라도 한데 모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이제는 사람뿐만 아니라 장점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꾸 모아서 결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소위 복합화(複合化)가 필요한 것이다…멀티미디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금 있는 기능을 한꺼번에 모은 것이고 거기에다 소프트웨어를 조금 가미시킨 것이다. 앞으로는 모으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 될 지도 모른다.”
미국 가정집 스탠드로 쓰인 조선백자
한편 이 대목에서 김재열 전 부관장은 “해외에 반출된 우리 문화재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었는지를 상징하는 에피소드가 생각난다”며 이런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백자철화매죽문항아리(白磁鐵畵梅竹文立壺)’라고 나중에 보물 제1425호로 지정된 것을 리움 미술관이 들여온 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인 16~17세기 경에 만든 늘씬한 백자 항아리인데 철화(鐵畵‧철 성분이 들어있는 채색 물감) 안료로 정면은 매화나무, 뒷면은 대나무가 그려진 멋진 작품이지요. 처음에 이 물건을 샀을 때 바닥이 뚫려있는 상태였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일제 때 반출된 것이 미국 가정집까지 흘러 들어갔는데 집 주인이 밑바닥을 깨서 전기스탠드로 썼다는 군요. 나중에서야 귀한 물건이란 걸 알고 경매에 내놓았다는 겁니다.”
북한 ‘김일성 컬렉션’이 될 뻔 했던 물건을 이건희 회장이 사진만 보고 구매를 결정한 일도 있다. 훗날 보물 제1392호로 지정된 16세기 대표 화가 이암의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가 그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미술 중개상이 이종선 전 부관장을 찾아와 조선 초 대나무 그림의 대가 이수문(李秀文)의 묵죽화첩(墨竹畵帖)이 김일성 콜렉션으로 들어갔다면서 일본으로 반출된 명품 문화재 일부가 그렇게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묵죽화첩의 소재를 추적해온 이 전 부관장은 깜짝 놀라며 이에 버금가는 작품들이 있으면 꼭 알려달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개상이 사진 한 장을 갖고 왔는데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증손자이자 16세기를 대표하는 조선 화가 이암(1499~?)이 그린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였다. 봄날 꽃나무 아래서 강아지 세 마리가 놀고 있는 이 그림은 조선 초기 동물화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한 이암의 걸작이었다. 이 전 부관장은 ‘당장 사고 싶었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실물을 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고서화를 사진만 보고 구입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참으로 고민스러웠다…그 거간은 계약금이라도 우선 만들어주면 실물을 빌려오겠다고 했다. 고심 끝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했다. 사진만 보고 결정할 수밖에 없지만, 일본에 실물이 있고 계약금을 내야 실물을 빌려볼 수 있다는 사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이 회장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전후 사정을 파악한 뒤에 내리는 이 회장의 결정은 단순명쾌하고 빨랐다. 여느 사람 같으면 이런저런 말이 많았겠지만 상호간에 믿음이 있으니 단답형의 문답으로 충분했다. 이때 이암의 그림 두 점을 구입했다.”
‘화조구자도’는 2003년 보물 제1392호로 지정된다. 한편 이암은 훗날 17~18세기 일본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학계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유키오 리핏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 3월 19일 열린 한국미술사학회 창립 6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에서 ‘강아지 애호: 일본 에도시대 이암 회화가 남긴 유산’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암의 그림들이 17세기 초 일본에 들어와 유통되면서 에도 시대 저명한 화가들에게 영감을 줬고, 다양한 아류작을 파생시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