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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미국 못 이기는 까닭

[이근의 텔레스코프] 과거 머무른 국가, ‘선진 강대국’ 될 수 없다

  •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24-04-1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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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 발전 최종 목적 = 선진 강대국

    • ‘리더십 소프트파워’ 갖춰야 진정한 강대국

    • 미래 제시 美 > 과거 의존 中

    • 대한민국, 과거 벗어나 미래 얘기할 때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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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국가는 발전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선진 강대국’을 목표로 한다. 즉 국가 비전의 마지막 단계는 선진 강대국이다. 물론 중간 단계에서 중진국·중견국을 목표로 할 수는 있지만, 선진 강대국을 향한 국가 비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국가 비전이 중진국에서 멈추게 되면 발전 의지가 꺾이면서 선진 강대국을 목표로 하는 국가와 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데 있다. 그 결과는 불행하게도 중진국도 못 되는 ‘약소국’이다.

    특히 전쟁도 불사하는 강대국 러시아와 중국,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이웃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중진국으로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나라의 운명을 주변 강대국이 결정하는 날이 올 수 있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우방 미국이 언제까지 이 지역에 남아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주제 파악하고 그냥 중견국이나 잘하시라”는 말은 패배주의일 뿐이다. 마치 조선시대에 “중화제국 밑에서 조공이나 바치며 조선으로 사는 것이 속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다름없다.

    선진 강대국의 조건은 시대와 당대 국제질서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전근대 농업경제 시대엔 로마제국, 페르시아제국, 오스만제국, 중화제국 등과 같은 거대 영토 제국이 선진 강대국이었지만 산업혁명 이후 근대로 들어서면서 산업화에 성공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과 같은 국가가 선진 강대국이 됐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꾸는 21세기엔 미국이 먼저 치고 나가고 있고, 다른 국가들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 미국을 쫓아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21세기에 기마군단으로 무장하고, 농업을 숭상하며, 비단·차·향료·금·은 등 교역을 통한 강대국을 꿈꾸는 자가 있다면 시대착오적 과대망상자일 뿐이다.

    즉 선진 강대국은 그 시대의 국제질서에 가장 잘 조응하는 국가체제를 만든 국가다. 다른 국가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당 국가를 모델로 해 국가 비전을 그린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전근대 질서에 조응하는 국가체제를 고집한 조선, 중국은 망하거나 강대국의 먹잇감이 됐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시대에 사회주의를 고집한 북한, 쿠바는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만약 지금 유럽이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이들의 운명도 알 수 없다.

    강대국 → 선진 강대국 조건, 소프트파워

    시대별 강대국이 그저 ‘강대국’이 아니라 ‘선진 강대국’인 데엔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당대의 강대국이 군사력과 같은 ‘하드파워’뿐 아니라 다른 국가가 모방하고 싶은 ‘선진 모델’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지금의 강대국으로부터 선진적 무언가를 배우고, 따라 하고 싶은 존경·동경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바로 강대국 ‘소프트파워’의 원천이다.



    조셉 나이(Joseph Nye)가 1990년 출판한 ‘Bound to Lead’라는 책에서 소프트파워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한 당시는 미국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일본과 유럽이 경제적으로 급부상하던 때다. 책에서 조셉 나이는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군사력·경제력이라는 하드파워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미국은 일본과 독일이 넘볼 수 없는 세계적 대학 시스템, 민주적 제도, 문화적 매력 등 소프트파워가 있기에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은 향후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셉 나이의 소프트파워 개념은 학술적으로 자리 잡힌 개념 정의는 아니었기에 후일 학문적 공헌이 크지는 않았지만 국가, 조직, 개인의 ‘리더십’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개념 틀을 제공했다. 즉 리더십이라는 것은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하는 소프트파워 능력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이 된 것이다. 조셉 나이가 바라보는 소프트파워는 그저 매력적인 것을 총칭하는 말이 아니라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강대국의 소프트파워를 의미한다.

    지난해 7월 20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한류’를 소재로 한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7월 20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한류’를 소재로 한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다. [뉴스1]

    예를 들어 우리는 한국이 K팝·K드라마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라는 매력 자원을 보유했기에 강력한 소프트파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국제정치적 리더십이나 영향력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개 관광객을 유치하거나 한국에 대해 공부하는 외국인의 숫자를 늘리는 정도에 그친다. 즉 국제정치에서 진정한 소프트파워란 다른 국가가 자발적으로 우리를 추종하는 리더십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강대국들은 모두 예외 없이 타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모방하고 싶은 ‘선진성’을 보유한, 즉 리더십 소프트파워가 있는 국가였다. 고대 로마제국의 선진성은 모든 주변국의 경외 대상이었다. 페르시아, 오스만 투르크, 중화제국, 그리고 근대의 일본, 유럽, 미국도 모두 당대 최고 선진성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이 선진성을 표상하는 단어가 바로 ‘문명(civilization)’이다. 그래서 강대국은 ‘문명적’, 후진국은 ‘야만적’이라고 불렸다.

    문명은 묘한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소프트파워를 지닌 문명이라도 시대가 바뀌면 소프트파워를 잃는다. 과거 중화제국의 문명은 21세기인 지금도 경탄을 자아내고, 직접 가서 보고 싶게끔 만들지만 더는 관광객 유치와 지적 호기심 이상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떤 국가도 과거 중화제국이 만들어낸 문명을 보고 중국의 리더십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로마 문명이 있는 이탈리아도, 찬란한 고대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도, 페르시아 문명이 남아 있는 이란도 비슷한 사례다. 반면 그러한 고대문명이 없음에도 지금의 미국은 다른 차원의 문명으로 세계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해답은 바로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속에 들어 있다. 즉 당대의 강대국 소프트파워는 과거의 찬란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 배우고, 따라가고 싶은 미래를 보여줘야 나올 수 있다. 과거 선진 강대국인 제국들이 만들어낸 소프트파워, 이른바 문명은 그 당시에 누구나 갖고, 닮고 싶은 미래를 보여줬다. 건축기술과 예술, 번화한 거리와 학문, 강력한 군사력과 무기, 여기에 경이롭고 아름다운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니 자발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신앙의 소프트파워가 생겨났다. 이러한 문명은 전근대 시대 강력한 제국의 리더십을 만들어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는 과거 제국의 문명은 국제정치적으로 그다지 큰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21세기 문명’ 만들어 진정 강하다

    지난해 10월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정상포럼’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 뉴시스]

    지난해 10월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정상포럼’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 뉴시스]

    예전만 못하지만 미국은 경제력·군사력에서 아직 세계적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고, 많은 나라가 미국을 배우고 싶어 한다. 물론 이러한 소프트파워는 이제 조셉 나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세계적 교육 시스템, 민주주의, 문화적 매력, 정교한 외교정책 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요즘 미국의 도시는 더럽고 위험하며 마약과 노숙자가 넘쳐난다. 공교육은 무너졌고, 의료시스템은 너무나 비싸고 불편하다. 딱히 민주주의가 모범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인 것도 아니고, 공공서비스는 비효율적이다. 과연 선진국인지 의심이 가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다른 모든 국가와 비교가 안 되는 소프트파워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미래’를 만드는 능력이다. 특히 21세기의 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기술, 트렌드, 표준은 대부분 미국에서 나온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AI 혁명, 퀀텀 기술, 우주 기술, 전기자동차, 바이오, 그린 산업 등에서 미국이 혁신을 이뤄내면 다른 국가들은 감탄하고, 어떻게든 따라 하려고 한다. 우리는 미국이 만드는 21세기의 미래에서 우리의 미래를 본다. 미국은 ‘21세기 문명’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집권한 이후 자꾸 과거에 의존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한다. 과거 중화제국을 연상시키는 ‘중국몽’ ‘일대일로’, 중화문명을 중심으로 영향권을 갖추려는 ‘문명담론’, 자급자족 순환경제를 만들려는 제국적 경제권 구축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이 mRNA기술로 코로나19 백신을 만들 때 중국은 과거 당·송의 한의학을 국민에게 권하고, 전 국토를 잠그는 ‘제로 코로나’ 정책을 시도했다. 이렇듯 중화제국에서 소프트파워를 찾으려는 중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고 있으며, 친해지고자 하던 국가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시각에서 보면 미국은 ‘선진 강대국’이며 중국은 ‘그냥 강대국’일 뿐이다. 물론 중국이 선진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술력, 인적자원에 세계 2위 경제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도층이 인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미래담론·미래문명에서 멀어지면 결코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선진 강대국이 될 수 없다. 세계 각국은 강한 중국을 무서워하면서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위협을 느껴 중국을 포위하려고 들 수도 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의 국가 비전은 선진 강대국이어야 한다.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 그 외 국가 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선진 강대국이 되려면 강한 경제력·군사력뿐 아니라 세계에 21세기의 미래를 보여주는 소프트파워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에서 소프트파워를 느끼는 것은 우리의 경제적 성공에서 그들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빠른 산업화와 민주화, 높은 수준의 IT와 문화로 치고 나갈 때 개발도상국들은 한국에서 그들이 갖고 싶은 미래를 본 것이다.

    그러던 한국이 과거로 돌아가 어느덧 선거 때만 되면 대규모 개발 공약으로 땅 팔 생각만 하고, 부동산으로 경기를 부양하고, 민주주의와 법치를 무시한 채 과거 이념에 사로잡혀 중국·북한을 추종하고, 과학기술자가 네이버·다음과 같은 기술 기반 신흥 재벌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세상을 원망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기성세대는 저출산을 걱정하면서 미래세대에게 “돈 얼마 주면 애를 낳겠니”라고 묻고 있다. AI 때문에 1인당 생산성이 엄청 늘어날 텐데, 인구를 더 늘려서 불어난 실업자들에게 기본소득을 주며 경제를 운영하기라도 하려는 건지 의문을 떨칠 수 없다.

    한국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선진 강대국으로 살아남으려면 편집된 역사에 의존하며 정통성·정의를 주장하는 역사전쟁은 이제 학문의 영역으로 돌려주고, 다른 선진 강대국과 함께 미래와 미래 문명을 얘기해야 한다. 강대국 소프트파워의 비밀은 ‘선진’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는 ‘미래’에 존재한다. 미래에 대한 통찰을 지닌 지도층의 등장이 우리가 선진 강대국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문턱이 될 것이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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