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기억이 흘러가 머무는 곳, 그곳엔 늘 병마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소년이 있다. 날마다 치유의 희망을 안고 잠자리에 들지만 신은 그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았다. 초등학교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시작된 난치병과의 투쟁은 내 나이 마흔 중반,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다. 병을 이겨내기 위해 의사가 되고 과학자가 되고 다시 병원 레지던트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그 기나긴 여정 내내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한글도 못 깨친 꼬맹이 시절부터 아버지가 구해오신 결핵 주사약을 들고 동네병원을 전전했다. 주사 자국으로 퍼렇게 멍든 엉덩이를 까고 눈물을 참으며 주사를 맞던 기억이 생생하고, 시내에 있는 방사선과에 가서 무시로 엑스레이 촬영을 하던 장면도 떠오른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이번에는 코가 문제를 일으켰다. 콧속 염증은 재발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언젠가는 축농증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의 수술법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벅찼다. 지금처럼 내시경으로 간단하게 하는 시술이 아니라 입 안을 절개한 뒤 광대뼈 아래쪽을 부수고 들어가는 수술법이었다. 결국 부모님은 차선책으로 콧속을 마취시키고 바늘을 넣어 콧속 농을 씻어내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코 외에도 몸 이곳저곳에 염증이 생겼다. 온몸에서 감염성 질환이 떠날 날이 없었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서양의학은 내 병을 잡아내지 못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는 호흡기 증상과 함께 코, 귀, 기관지에 염증이 계속 발생했다. 기존 의학은 내가 가진 질병에 대해 해줄 게 없었다.
온몸 덮은 염증
내 몸에 분명 문제가 있는데도 “세균감염이 되기 전까진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서양의학. 마침내 어머니는 여린 자식을 구원할 방책을 찾아 세상을 헤매기 시작했다. 용하다는 한의사와 비방(秘方)의 명인들을 찾아냈고, 그들이 건네준 ‘명약’, 정체불명의 약물은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고스란히 내 어린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저 건강해지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그 어떤 쓰디쓴 약도 참고 삼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역겨운 맛과 향의 약을 불평불만 한번 털어놓지 않고 받아먹었는지 기특하기만 하다.
사진처럼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기차를 타고 간 어느 시골마을, 마을에 들어서서도 한참을 걸은 후 다다른 자그마한 집, 그곳 할머니가 건넨 편지봉투 속의 작은 환약들, 그리고 그 봉투를 들고 나오며 새 희망에 부푼 어머니와 아들…. “몸을 바로잡아주겠다”며 자신 있게 쏟아내던 자칭, 타칭 명의들의 지시사항대로 한 치 틀림없이 몸을 돌봤지만, 그 어떤 비방도 내 병을 고치지 못했다. 그 ‘명약’들에 들어간 돈은 넉넉지 않은 우리집 살림을 축내고 허탈감만 안겼다.
온갖 명약과 비방을 다 써봐도 차도는 없었다. 어머니는 콧속 염증을 더 이상 방치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전 여러가지 검사를 했는데 방사선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이비인후과에서 내과로 옮겨야 했다. 폐 엑스레이 검사 소견이 안 좋아서 일단 치료를 시작해봐야 축농증 수술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당초엔 폐렴으로 내려진 진단이 2주쯤 지난 뒤엔 ‘기관지확장증 같다’로 바뀌었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세요.”
결국 폐 질환 치료를 마치지 못한 채 이비인후과로 옮겨져 양쪽 축농증 수술을 받고 병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