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병근씨(오른쪽)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꼽는 부인 유정현씨.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대학원생 연구상을 수상하던 날 찍은 사진이다.
난치병과 전쟁을 치르며 나는 자연스럽게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하얀 가운은 병약한 소년에게 곧 치유의 희망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힘들게 시작된 고교시절, 호흡기 증상은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심해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아보자는 생각에 훗날 모교가 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만난 분이 고(故) 한용철 선생님이다. 그는 내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던 날 병원장으로 졸업식장에 나오셔서 친히 내 손을 잡아주셨다. 미래에 존경하는 스승이 될 분을 고교시절 내과병동에서 주치의로 처음 만난 것이다.
입원한 뒤에도 병실의 불을 밝히고 공부하던 내가 기특했던지, 선생님은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셨다. “여기 들어와서 의사가 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들어만 와”라면서 환히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인자하신 의사선생님의 모습과 달리 그 시절의 의학은 차갑기만 했다. 서울대병원에서 내가 받은 것은 진단뿐이었다. 치료법이 없는 질환을 진단하는 과정에 몸은 더 황폐해져갔다. 아마 그때가 내 생애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당시의 기관지확장증 진단법은 무시무시했다. 어떻게 그런 진단법을 만들어냈는지 의사가 된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 지금은 CT 촬영으로 간단하게 진단할 수 있지만, 그때는 요즘 위장관 사진을 찍을 때 흔히 들이켜는 하얀 색깔의 조영제를 기도를 통해 폐 속으로 쏟아넣고 기관지확장증 여부를 판단했다.
조영제가 기관지를 타고 흘러들어가면 자연스레 기침이 나온다. 의사들은 기침을 참으라고 한다. 기관지를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기침을 하면 안 된단다. 의식을 잃을 만큼의 고통이 몰려와, 촬영을 마치고 나면 기진맥진 상태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기침을 해서 조영제를 뱉어내라고 한다. 기침을 하면 하얀 조영제가 쏟아져 나온다. 검사를 받으면서 이미 탈진 상태가 됐는데, 그 기력에 기침을 하라고 한다. 며칠 터울을 두고 양쪽 폐를 촬영했는데,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셨다.
이런 진단법은 환자를 단순한 객체로 생각하는 일방통행적 의료철학의 산물이다. 진단 결과에 따라 치료법에 큰 차이가 난다거나 기존의 치료법에 변화를 줘야 한다면 모를까, 치료법도 제대로 없는 질환에 정밀한 진단만 해서 뭘 하자는 것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치료법이 없다”
서울대병원에 다녀온 후 나는 앞으로 의사가 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고교시절을 보냈다. 고교 3년간 내가 다닌 곳은 학교, 독서실, 병원뿐. 내 고교시절은 투병과 학업이 전부였다. 3년 동안 극장 한 번 안 갔다면 요즘 젊은 친구들은 믿을 수 있을까. 어머니는 학교로 도시락을 실어 나르셨고 나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늘 병원을 드나들며 항생제 주사를 달고 살았지만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내가 고등학교 3년을 못 버틸 것이라고 염려했지만, 나는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붙들고 절대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나는 그토록 꿈꾸던 의사가 된다는 희망으로, 그래서 이제 내가 짊어진 난치의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들떴다. 관악에서 보낸 예과 시절은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할 만큼 꿈이 차오르던 시절이다. 그런데 예과 2학년, 한창 즐거운 캠퍼스 생활에 젖어갈 무렵 내 가슴엔 긴긴 세월 씻기지 않을 생채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