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 사회에서는 물론 가정에서까지 퇴역으로 물러나 이제 이름만 어르신이지 어르신 노릇도 못하고, 대접도 못 받는 사람들. 이 나라 여명기에 태어나 국민(초등)학교를 다니면서 6·25를 맞았고 교복, 군복, 예비군복, 민방위복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제복에 얽매여 살아온 사람들. 신세대란 말은 들어보지도 못한 채 어느 날 구세대로 몰려, 한두 가지 지병(持病)을 친구해서 인생의 황혼 길을 걷는 사람들. 말로(末路)가 안겨다주는 약간의 안식에 빠져 사는 사람들. 그들이 우리 세대, 나의 현주소다.
하룻길을 가도 소도 보고, 중도 본다고 했는데 왜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오늘을 사는 이 나라 보통 노인네들의 삶의 굴레 같은 이야기를 여기에 그려본다.
×월 ×일 져서 이기는 길
아내와 같이 쑥을 뜯으러 나선다. 장소는 고향 가까운 가야산(伽倻山) 밑 들녘. 신토불이를 염두에 두고 간 건 아니지만, 어쩌다가 오늘은 그쪽을 택했다.
장소는 때마다 다르지만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맘때쯤 우리는 쑥을 뜯으러 갔다. 해마다 봄이 오면 두어 번씩 그런 식으로 나들이를 해, 늦게나마 연중행사 하나를 만든 셈이다.
길섶 조경으로 심어놓은 개나리가 만발하고, 산자락으로는 진달래도 울긋불긋 몸단장이 한창이다. 이쪽 절후로 봐 개나리꽃이 다 져야 쑥이 제 철을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모퉁이 난전에 쑥이 눈에 띄어 한번 나서보자고 한 것인데, 너무 일러 허탕 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으나 꼭 거기에만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분 좋게 달린다.
성주에서 해인사로 넘어가는 오르막길에 차를 세워놓고, 이농(離農)으로 묵밭이 된 밭둑을 타고 앉아 우리는 쑥을 뜯는다. 좀 이르긴 하나 양지바른 곳이어서 쑥은 뜯어도 좋을 만큼 자라 있었다. 아내는 딱 알맞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밀레의 ‘만종’ 그림이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풍정(風情)일 수도 있다. 우리 나이에 건강을 위한 시식(時食)을 찾아, 그보다는 해로동혈(偕老同穴)의 금실을 추억은행에 저장하기 위해 나온 이런 나들이는, 실속이야 어떻건 외형으로는 얼마나 그럴싸한가 말이다.
TV화면 같은 데서 은발을 날리며 노후의 크루즈여행을 즐기는 백인부부를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운이 좋아 우리도 저런 세월을 한번 누릴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그건 그냥 꿈일 뿐 이런 일로 대신 자위(自慰)해본다.
여기 오면서 점심 요기한다고 김밥을 사온 아내가 말했다.
“밀가루 값이 올랐다 카드이만 김밥값은 왜 올랐는지 모르겠다. 전에는 한 줄에 천원했는데 오늘은 천삼백원 달라네. 잔돈도 그렇고 해서 석 줄밖에 몬샀구마.”
네 줄 살 돈을 준비해 갔다가 세 줄밖에 못 샀다는 이야기다. 김밥 한 줄에도 이런저런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우리네 살림살이인데,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런 건 그림의 떡일 뿐이다.
40년 가까운 결혼생활을 돌아보노라면, 그 가운데는 웃는 날이 한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늘진 얼굴로 산 날이 훨씬 많았다. 아닌 게 아니라 생각해보면 푸지게도 아옹다옹했고 옹색(壅塞)으로 몸부림을 쳤다.
고부의 갈등으로, 형제 간 부조화로, 자식들에 대한 불만으로…그 끝은 모두 우리 부부의 불협화음 난조(亂調)로 나타났다. 이혼이란 말을 마치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 내뱉으며 지낸 나날이 있었는가 하면, 한집에 살면서 열흘이 넘도록 아이들 통역(?)으로 지내온 날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힘들었던 때는 막내가 다쳤을 때다. 대학 2학년 마치고 군대부터 먼저 갔다 온다며 공군에 시험을 쳐 합격증(입영영장)을 받아놓고, 막간을 이용해 제주도나 한번 다녀온다며, 그 경비를 장만한다고 현풍(玄風)공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일을 만들었다.
지게차에 실은 물건이 제 앞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정강이가 박살났다. 병원에서는 다리를 절단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늘이 노랬다. 1995년 5월, 내가 직장 명퇴(명예퇴직)를 한 달 남겨두고 일어난 일이다.
병원생활 2년5개월. 4번의 대수술. 군복무로 보내야 할 기간을 꼬박 병원에서 보낸 셈이다. 뱃살을 환부에 이식하느라 뱃구멍이 옆구리 쪽으로 돌아간 형국이라니. 그동안 막내를 간호하면서 흘린 아내의 눈물은 큰 독으로 하나를 채우고도 남으리라. 다행히 다리는 절단하지 않고 붙어 있게 됐지만 상처투성이 육신과 기우뚱하며 걷는, 멀쩡하던 놈이 3급 장애인이 된 모습은 지금도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진다.
“두 번 손대지 않게 잘 뜯어라카이. 먼젓번 모양 돼지 꼴 뜯듯 해서 반도 더 버리게 하지 말고이. 괘니 쓰레기봉투만 축내는구마.”
아내의 지청구는 이런 데 나와서도 계속 따라다닌다.
“알았다이까.”
말이 나왔으니 얘기지만 아내와는 TV를 봐도 한 시간을 같이 못 본다. 채널권(權) 문제가 아니다. 같이 연속극을 보는 데도 무슨 일이 꼭 터진다. 트집 잡는 시어미가 나와도, 못된 시누이가 나와도, 잘난 가장이 나와도, 거창한 양옥이 나와도 그게 모두 빌미를 만든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앙금으로 쌓였던 일들이 모두 연속극에서 우리들의 일로 살아나와 아내를 한 번씩 괴롭히는 모양이다.
그럭저럭 점심시간이 돼, 자리를 밭둑으로 옮겨 준비해 온 김밥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는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 아이가. 쑥이 아직 어리더구만.”
“마치 맞더라 카이. 너무 커도 안 좋구마.”
“너무 작아서 소출이 나야지. 종일 뜯어봐야 쑥떡도 한번 못 해먹겠는 걸.”
“쇠면 맛이 없다 캐도 그러네. 저엉 적으믄 담에 한 번 더 오면 대지 머.”
“제길헐, 차라리 여기 오는 기름값 가지고 사 먹는 기 낫겠다.”
“또 계산을 저래 한다. 주말농장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도 그거 계산해가꼬 가는강.”
“좋아, 난 당신이 좋다면야.”
얼른 수습을 한다. 모처럼 동행으로 나온 야외 밀월(?)인데, 그리고 봉사하기로 작정하고 나온 건데 긁어 부스럼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신문에 보니까 최근 중국에서 가장 인기를 누린 연속극은 정샤오룽이란 작가의 ‘金婚’이라고 한다. 금혼식을 맞은 한 부부의 살아온 결혼생활 50년을 조명했다는데, 그게 시청자의 심금을 그렇게 울렸다는 것이다. 직접 보지 않아서 내용이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금혼식을 맞는 부부가 흔하지 않을 텐데, 50년을 탈 없이 살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본다.
산 그리메(그림자)가 들녘으로 기어내리는 것을 보고 나는 오금을 편다.
“자 그만 갑시다.”
돌아오는 차 뒷자리에서 아내는 내가 뜯어 담은 쑥 봉지를 쏟아놓고 다듬고 있다. 백미러로 그런 아내를 힐끔힐끔 보면서 잠시나마 지나온 세월을 돌아본다.
사랑으로 만난 사람들은 곧잘 헤어지나 불쌍해서 만난 사람들은 그 연민(憐愍) 때문에 못 헤어진다고 한다. 아직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누구도 해본 일이 없다. 늘 고마움 속에 살면서도 ‘고맙다’ 소리도 안 받아봤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고리타분한 이야기라 하겠지만 조강지처의 그 조강(糟糠)이 갖는 의미, 어려웠던 시절 서로가 불쌍하게 여기며 살아온 그 어려움이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뿌리가 아니겠는가.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 대신불약(大信不約)이라 하지 않는가. 참으로 믿는 사람한테는 허튼 말은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그 생각도 10분을 못 가 지운다.
“암만 잔소리를 해도 안 댄다 카이. 이거 한번 보라고. 내뿌리는 기 더 만타이까.”
“….”
난 못 들은 척 입을 닫는다. 맞장구를 쳐봐야 돌아오는 건 뻔한 일. 져서 이기는 길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