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주장 강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배우 도금봉.
그녀는 바로 도금봉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3인조’(1997)에 전당포 여주인 역으로 특별출연한 도금봉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 세상과 소식을 끊고 지내다 2009년 6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서울 구의동의 노인요양원에서 생을 접은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조용히 저세상 사람이 됐다. 얼마 후 도금봉의 죽음이 알려지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한민국 영화계는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 건강했던 그녀가 감기 때문에 병원을 찾은 것은 그해 5월 하순. 갑작스러운 병세의 악화로 임종을 준비하던 때, 그녀를 간호하던 수녀들이 지인에게 알려 영화인 장을 치를 것을 권하자 도금봉은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부탁했다.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낸 두 아들과 며느리가 뒤늦게 찾아왔고, 30여 년간 언니 동생 하던 유일한 친구 최은희가 찾아왔을 때 도금봉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발인할 때 유족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영정을 한지로 가리고 나갔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성격배우이면서 기가 센 여자 도금봉은 죽음조차 그녀다웠다.
끝없는 사건 사고
영화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은막 위에 명멸한 여배우는 많다. 하지만 손가락질 받는 수많은 스캔들을 배짱과 연기력으로 뒤엎고 당당하게 세상을 헤쳐나간 여배우는 거의 없다. 오로지 한 명, 도금봉뿐이다. 믿거나 말거나, 또는 그랬다카더라류의 소문이 아닌, 당시 일간지에 기사화된 사건·사고만 봐도 도금봉의 1960년대는 평탄치 않았다. 한국 프로복싱 챔피언이던 강세철과의 염문은 미국 배우 매릴린 먼로와 프로야구 선수 조 다마지오의 결합에 비견되는 커다란 사건으로 많은 관심을 샀지만, 강세철이 김기수에게 프로권투 왕좌를 빼앗기자 둘 사이는 끝이 났다. 곧이어 1962년, 그동안 동거해오던 신필름의 신인 미남스타 남궁원과의 결별이 세간의 눈길을 끈다. 장래가 유망한 후배 미남배우와 아이가 둘 딸린 선배 여배우 사이의 관계라는 것 못지않게, 동거라는 형태가 당시 사회에서는 입방아에 오를 만한 일이었다. 결별 이유는 도금봉이 두 아이의 장래 문제를 걱정했기 때문. 두 사람이 헤어진 뒤 한 달이 채 안 돼 그녀가 주연한 영화 ‘새댁’(이봉래 감독, 1962)이 공개된다. 영화는 도금봉의 스캔들과는 상관없이 흥행에 성공한다. 한 해 뒤에는 아시아영화제에서 ‘또순이’(박상호 감독)로 여우주연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도금봉은 와병으로 두문불출해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했는데, 후일 실은 눈 성형수술을 해서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라는 웃지 못할 ‘비밀’이 밝혀져 또 한 번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그리고 2년 후, 이번에는 어느 사이에 예비역 장성과 결혼한 그녀가 남부끄러운 절도 사건의 피해자로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남편의 열네 살 난 아들이 계모 도금봉의 밍크코트, 목걸이, 금팔찌, 현금 등 당시 시가 26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쳐 가출한 것이다. 망신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하지만 몇 달 후 그녀는 다시 ‘살인마’(이용민 감독)라는 공포 괴기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귀신 연기로 세상의 비웃음을 날려버린다.
그뿐인가? 기가 센 후배 여배우들을 모아 도박을 하다가 경찰에 걸리기도 하고, 영화 촬영 중 부상을 당한 후 영화사를 상대로 위자료 지급 소송을 벌여 배우들의 안전을 무시하는 당시 관행에 정면 도전하기도 하는 등 그녀는 끝없이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고향에 고급 호텔을 짓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도금봉은 인천에서 태어나 악극단 ‘창공’에서 연기 생활을 시작하고, 영화 ‘황진이’(조긍하 감독, 1957)의 주연으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그 후 도금봉은 ‘신필름’에 소속돼 신상옥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배역 대부분은 ‘신필름’ 간판스타 최은희를 받쳐주는 조역이었다. ‘로맨스 빠빠’(1960)에서는 장녀 최은희의 여동생, ‘성춘향’(1961)에서는 향단이,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에서는 과부 최은희 집의 식모…. 에너지 넘치는 젊은 도금봉을 가둬놓기에 ‘신필름’은 작은 그릇이었다. ‘신필름’은 최은희의 그늘에 가려졌던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 도금봉을 주연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특수촬영까지 한 ‘대심청전’(이형표 감독, 1962)을 만들었지만 흥행에 실패한다. 도금봉은 ‘신필름’과의 전속계약이 끝나자마자 재계약을 않고 자유계약을 선언한다. 이후 날개를 단 도금봉의 첫 번째 히트작이 ‘새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