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이 나올 땅, 帝王之地란 어떤 곳일까
-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 선영, 명당인 동시에 역룡(逆龍)의 땅
- 문재인 생가, 금거북이 진흙 속에 숨어드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
- 안철수 생가와 고향, 조심스럽고도 치밀하게 일을 도모하는 호랑이
- 제왕의 일어남(帝王之興)은 덕에 있다
2015년 11월 하순 어느 날, 서울 구로의 어느 음식점에서 필자는 최창조(전 서울대·풍수학) 교수와 노자키 미쓰히코(野崎充彦) 일본 오사카시립대(大阪市立大·한국고전문학) 교수와 점심을 하던 중이었다. 노자키 교수가 잠시 한국을 방문했기에 셋이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마침 그날은 며칠 전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가 끝난 직후라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의 생애와 무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끈 것은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무덤 터였다. “봉황이 알을 낳은 자리”라고 그 터를 잡았던 풍수사 황모 씨 인터뷰가 나오기도 했다.
그 증거로서 “광중에서 일곱 개의 큰 바위가 나왔는데 바로 그 바위들이 봉황의 알”이라는 것이다. TV 화면을 보던 최창조 교수는 “봉황이 알을 일곱 개 낳았다고? 그 봉황, 항문 파열로 죽겠는데…”라고 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김 전 대통령 후손들이 이 말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이 말을 듣던 노자키 교수는 “왜 대통령들이 풍수상 길지에 묻히고자 하는 것일까요”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에 최 교수는 망설임 없이 “후손이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라고 답변했다. 권력자들이 풍수상 길지에 무덤을 쓰고자 하는 이기적 목적을 직설적으로 밝힌 것이다. 또 그가 “봉황의 항문 파열”이라는 다소 과격한 발언을 한 근거는 풍수에서 광중에 돌이 나오는 것은 흉지임을 증명하는 금기 사항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돌이 나온 땅을 왕릉으로 소점한 지관들이 곤장을 맞아 죽거나 유배를 당한 적이 있었다. 조선 중종 때 성담기와 황득정이란 풍수 관리가 돌이 나온 곳을 왕비(장경왕후 윤씨)의 능 자리로 잡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아 죽었다. 1901년 풍수관리 6인이 장기 유배형을 받았는데 명성황후 능역 조성 중 광중에서 ‘돌흔적(石痕)’이 보였다는 이유였다. 그만큼 광중의 돌은 흉지(凶地)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 묘지를 선정한 이는 그 돌을 ‘봉황의 알’이라고 호도했다. 황씨는 그 무렵 박정희 전 대통령 묘를 재정비했다며 자칭 ‘국장(國葬)을 주관’한 사람이라고 자랑했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까닭 없이 묘를 건드리는 거 아니다”라며 황씨에 대해 “큰일 낼 사람”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1년여 후 그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고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까닭 없이 묘지를 건드린 것과 파면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최 교수를 만나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중국 천자들의 풍수 사랑
지금부터 1400여 년 전 소길(蕭吉)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멸망한 양나라 무제(梁武帝)의 형 장사선무왕(長沙宣武王)의 손자였다. 왕족의 후손이다. 박학다식해 음양과 풍수지리에도 능했으나 자존심이 강해 조정 대신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권력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소길은 자신이 터득한 음양설과 풍수지리를 활용한다. 서기 594년 그는 수문제(隋文帝)에게 그해 황제 운이 아주 좋다는 글을 올려 황제의 신임을 얻는다.“금년(594년)은 갑인년입니다. 11월 초하룻날이 육십갑자로 신유일로서 동짓날이 되기도 합니다(고대 중국에서는 음력 11월 초하루에 동지가 드는 것이 2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큰 경사로 여겼다). 음양서 ‘낙즙도징’에 ‘동짓날이 초하루에 들면 임금에게 하늘의 큰 복이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황제께서 즉위하시어 이와 같은 복날을 맞이하니 이것이 폐하의 경사입니다.”(‘수서·隋書’, 이하 인용문 출전도 같음)
소길의 글을 읽은 수문제는 큰 선물을 내렸다. 얼마 후 수문제의 부인 헌황후(獻皇后)가 죽었다. 황제는 소길에게 장지를 잡게 했다. 소길은 무산(筮山)의 한 곳을 소점하면서 황제에게 말했다. “이곳은 2000년지지(二千年之地)에 자자손손 200세 후손까지 보존해줄 자리입니다.”
이에 황제는 다음과 같이 핀잔을 주었다. “길흉화복이란 인간에게 있지, 땅의 좋고 나쁨에 있지 않다. 북제(北齊)의 황제 고위(高緯)가 그 아버지를 장사 지내면서 어찌 명당을 고르지 않았겠느냐. 그럼에도 고위가 다스리던 나라는 얼마 안 가 망하고 말았다. 만약 우리 집안 선조 무덤 자리가 나쁘다고 한다면, 나는 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만약 흉하지 않다면 왜 내 동생은 전쟁에서 죽었는가.”
황제는 묘지와 인간의 길흉화복이 관계없다는 전제에서 풍수학자 소길을 비웃었다. 그러나 수문제의 다음 태도가 흥미롭다. 그렇게 말해놓고도 끝내 소길의 말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소길에게 큰 상을 내렸다. 수나라 황실 이야기를 좀 더 소개하자. 수문제보다 좀 더 솔직한 사람은 그 둘째 아들 방릉왕(房陵王)이었다.
어머니(헌황후) 장지 선정에 소길이 관여함을 알고 그에 접근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빨리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주시오. 내가 천자가 되면 마땅히 그대를 부귀로 보답하겠소.” 방릉왕의 은밀한 부탁을 받은 소길은 그가 황제가 될 자리를 잡아주며 “4년 후에 황제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4년 후인 604년 수문제가 죽자 방릉왕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바로 양제(煬帝)다. 양제는 소길의 공을 높이 인정해 태부소경의 벼슬을 주었다. 비록 정사(正史)에 수록된 이야기이지만 모두 믿을 수는 없다. 세월이 흐르면 늘 부풀려지는 것이 ‘도사’들의 과장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쑨원과 장제스의 권력의지
중산릉을 답사해보면 풍수 문외한이 보아도 참으로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뒷산은 일자(一字) 형태의 토형(土形) 산이다. 오행에서 토는 중앙이자 황제를 상징하며, 한 일(一)자 모양의 산은 임금을 배출할 땅이라고 한다. 쑨원의 무덤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좌우와 앞의 수많은 산이 머리를 조아리는 형상이다. 이른바 뭇 신하들이 임금에게 절을 하는 ‘군신봉조형(群臣奉詔形)’의 길지다.
쑨원의 후계자가 장제스(蔣介石)다. 그는 쑨원을 존경하기에 그의 옆에 묻히고 싶다면서 중산릉이 조성된 직후부터 이곳에 자주 들러 자신의 무덤 자리를 찾았다. 중산릉 좌측(정면에서 바라볼 때)의 다른 지맥에 자신의 무덤자리를 잡고 그 표지로 정자를 세워놓았다. 정자 이름을 바른 기운이 흐르는 곳이란 뜻의 ‘정기정(正氣亭)’이라고 지었다. 존경하는 쑨원의 무덤보다 등고선상 조금 낮은 자리에 잡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금 높거나 거의 같다고 한다.
장제스가 자신의 무덤자리로 정해놓은 곳은 풍수상 중산릉 못지않게 절묘하다. 주산(산 정상)은 중산릉과 마찬가지로 일자(一字) 모양 토형(土形)이다. 산 정상에서 무덤자리로 이어지는 중간 부분에 작은 봉우리가 하나 맺혔는데, 종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으로 오행상 금형(金形)에 속한다.
그리고 그 아래 무덤자리가 정해지고 다시 그 아래로 수백m 내려가면 자하호(紫霞湖)라는 호수가 있다. 1930년대 장제스의 지시로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흐르는 지기를 멈추게 하는 진압풍수의 흔적이다. 산 정상에서 호수까지 오행의 상생관계, 즉 토(土)→금(金)→수(水)를 만들어 생생불식(生生不息)으로 좋은 기운이 끊이지 않게 했다. 이렇듯 장제스는 생전에 자신이 묻힐 천하의 명당을 잡아놓았지만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의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그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만다. 아직도 그 자리는 주인을 기다리며 그대로 있다.
중산릉(쑨원)과 정기정(장제스) 좌측(정면에서 보아) 산줄기가 밑으로 쭉 내려오는 곳에 황릉이 하나 있다. 명나라 창업자 주원장의 무덤 효릉(孝陵)이다. 주원장이 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잡은 길지다. 그런데 수백 년 후 쑨원과 장제스는 효릉보다 등고선상 더 높은 곳에 자신들의 무덤자리를 잡는다. 쑨원은 주원장보다 더 큰 권력을 갖겠다는 야심을 보였다. 또 그 후계자 장제스는 쑨원과 동급이거나 약간 더 큰 권력을 원했음은 그가 잡은 무덤 터의 입지에서 드러난다.
다시 주원장의 이야기다. 원래 이곳 자금산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 임금 손권의 무덤이 있었다. 당연히 손권도 최고 길지를 찾아 이곳에 자신의 무덤을 쓰게 했다. 그러나 1000년 세월이 흐르면서 손권도 오나라도 역사에서 사라졌고 무덤 흔적만 남아 있다. 주원장은 이곳에 자신의 무덤을 잡을 때 손권의 무덤이 있음을 알았다.
신하들이 손권의 무덤을 없애자고 하자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 두어라. 내 발밑에서 시중이나 들게 하자.” 주원장도 손권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하기를 원했다. 비록 동시대인은 아니지만 손권·주원장·쑨원·장제스 그들은 자금산에서 서로 권력을 다투었다.
조선 정조의 풍수 공부
생가나 무덤을 보고 다음 번 대통령이 누가 될지 소개하는 글이 넘쳐난다. 자칭 ‘도사’들의 예언이다. 그러나 정작 지나고 보면 예언이 적중한 경우는 전무하다. 왜 그러한가. 선영과 생가를 보고 대통령 당선 여부를 가늠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앞에서 소개한 것은 중국의 사례였다. 조선과 광복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어떠했을까.
정조 임금은 조선 최고의 풍수학자였다. 세손(世孫) 시절인 1774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성묘하면서 그곳이 소문대로 흉지(凶地)임을 확인하고 뉘우치는 바가 있어 풍수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풍수 공부 방법과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는 옛사람들이 풍수지리를 논한 여러 가지 책을 취하여 전심으로 연구하여 그 종지를 얻은 듯하였다. 그래서 역대 조상 왕릉의 용혈사수(龍穴砂水)를 가지고 옛날 방술과 참고하여 보았더니, 하자가 많고 길격(吉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을 갖지 못하여 세속의 지사로서 안목이 있는 자를 널리 불러 그 사람의 조예를 시험해본 바 그들의 언론과 지식이 옛 방술에 어긋나지 않아 곧 앞뒤로 전날 능원을 논한 것을 찾아 살펴보았더니 그들의 논한 바가 상자에 넘칠 정도였다.”(‘홍재전서’).
정조 임금의 풍수 공부 과정 역시 다른 풍수술사들과 비슷하다. 우선 풍수지리서를 많이 읽어 그 대략을 이해한 뒤, 조상의 능역을 답사했고, 마지막으로 당시의 유명하다는 지사들을 불러 미진한 점들을 확인했다. 정조는 개인적으로 슬픈 일을 많이 겪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얻은 왕자 문효세자가 다섯 살 때 석연치 않게 죽었고, 이어서 문효세자의 생모가 다시 임신을 했으나 갑자기 죽는 등 왕실에 불길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이것이 모두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배봉산, 현재 서울시립대 부근) 터가 나쁜 탓이라는 소문과 상소가 이어지자 1789년 그는 사도세자 무덤을 수원으로 옮긴다(현재의 융릉). 왕릉을 옮기고 1년 안에 국가의 큰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정조실록’에 기록)이 있었는데, 예언대로 왕자가 태어났다(훗날 순조 임금). 정조로서는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 터가 나빠 왕실에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좋은 땅으로 모시니 그 발복으로 왕자를 얻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정조의 사례를 몰락한 왕손 흥선군이 모를 리 없었다. 흥선군은 1846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무덤을 많은 정성과 노력 끝에 충남 예산 가야사 터로 옮긴다. 2명의 천자가 나올 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853년에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나고, 명복이 열두 살 되던 1863년 임금이 된다. 그 후 임금에서 황제로 즉위한다. 결국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 두 명이 나왔으니 예언된 풍수설이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당연히 흥선대원군은 풍수를 더욱 믿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고른 며느리 민비(명성황후)가 시아버지의 풍수를 통한 권력 쟁취 사건을 모를 리 없었다. 1866년 왕비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친정아버지 묘 이장이었다. 1858년 친정아버지 민치록은 여주 선영에 안장됐다. 비록 몰락했지만 명문가 선영이라 지세가 좋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제천·이천·광주로 이장을 거듭한다. 그리고 1894년에는 경기도를 떠나 멀리 서해안 바닷가 충남 보령으로 이장한다. 이곳을 추천한 이는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였다. 그는 이 공로로 공조판서가 된다. 여주·제천·이천·광주의 땅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왕비가 올바른 풍수관·인생관·국가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비의 정성이 부족했는지 명당발복은 고사하고 재앙만 일었다. 이장 다음 해인 1895년 명성황후는 일본인에게 시해돼 시신도 추리지 못했다.
길지라면 암장이라도…
새로 무덤이 조성될 때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전답을 빼앗기고 정든 고향에서 쫓겨났다. 1990년대 중반, 필자는 보령에 있던 명성황후 친정아버지 묘를 답사했다. 그때 그곳 촌로들은 100여 년 전 그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당한 고통과 원한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2003년 명성황후 친정아버지 묘는 초장지(初葬地·맨 처음 묻힌 곳)로 다시 이장된다(여주 가남읍 안금2리 마을 뒤). 다섯 번 이장하고 여섯 번 장사를 치른 이른바 ‘오천육장(五遷六葬)’은 조선풍수사의 진기록이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풍수 이야기다. 윤보선 전 대통령 집안의 경우다. 윤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 5대조 할아버지 묘를 이순신 장군 후손들의 땅에 암장했다고 한다. 굶주려 죽기 직전의 스님을 구해준 보답으로 그 스님이 좋은 자리를 찾아주었는데, 그 땅이 이순신 장군 후손에게 국가가 내린 사패지지(賜牌之地)였던 까닭에 부득불 암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발복으로 집안이 번성했다고 믿고 있고, 윤 대통령도 그 땅을 사랑해 사후 국립묘지가 아닌 그곳에 안장됐다.
문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다. 그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구미시 상모동의 조상 묘는 이전부터 길지라고 소문난 곳이다. 그런데 그 자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그 아버지가 잡은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보다 열두 살 많은 셋째 형 박상희가 젊은 시절에 잡은 자리였다. 박상희는 누구인가. 흔히 원로 정치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광복 이후 좌익 활동을 하다 사살됐지만 광복 전에는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런 그도 당시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풍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현재 구미시 상모동 금오산 자락에 자리한 박 전 대통령의 선영은 박상희가 숙부들(박일빈·박용빈)과 공동출자해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1990년대 구미 상모동 답사 당시 그 마을의 여든 넘은 노인들 및 박정희 생가보존회장인 김재학 씨의 증언. 모두 작고).
그렇게 잡은 자리는 당연 풍수상 길지였다. 특히 무덤의 조산(朝山)은 구미의 명산 천생산(天生山)이다. 경부고속도로 구미를 지나가다 보면 좌측에 보이는 산이다(하행선 방향). 이 산의 생김새는 풍수용어로 박두(樸頭)라고 하는데 이러한 산의 정기에 감응되면 왕후와 열사를 배출한다고 한다. 박상희는 제왕지지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피살됐고 열두 살 어린 아우가 훗날 대통령이 됐다.
박정희 조상묘, 역룡(逆龍)의 땅
이러한 천하의 대길지도 완전할 수 없다. 반드시 흠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풍수 고전마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완벽할 수 없다(好地無全美)”라는 단서를 단다. 이 터의 흠은 무엇일까. 바로 묘역 앞에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 및 여러 자잘한 바위들이다. 풍수 용어로 이것을 역룡(逆龍)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룡에선 하극상을 일으키는 자손이 나오며, 명당 발복이 다하면 쇠붙이(金)로 인한 죽음 즉 이금치사(以金致死)한다”고 풍수술사 김종철(작고) 선생이 현장에서 단언했다. 아직도 그분의 목소리가 생생하다(1990년대 초).“박근혜 전 대통령도 이곳 선영의 명당 기운을 받았으나 동시에 역룡(逆龍)의 기운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동시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부모의 묘가 물에 차서 그로 인한 수재(水災)의 재앙을 피할 길이 없다”고 일부 술사들은 이야기하기도 한다. 실제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 묘는 광중에 물이 차서 묘 옆으로 배수시설을 해놓았다. 잔디가 잘 자라지 않아 해마다 교체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10여 년 전 답사 당시 그곳 관리인의 증언이다.
부당하게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과 그 후임 노태우의 풍수 관련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한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풍수 관련 이야기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95년 당시 국민회의 총재인 김 전 대통령은 부모님 묘를 전남 하의도 선영에서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묘동으로 옮겼다.
그 자리는 천선하강(天仙下降·신선이 하강하는 형상)의 명당으로 ‘남북통일을 완수할 영도자가 날 자리’라고 1996년 월간 ‘신동아’가 보도했다. 또 동교동 자택을 두고 일산 정발산 아래로 이사했다. 동교동에서는 절대 대통령이 되지 못하니 제왕의 기운이 있는 정발산 아래로 가야 한다는 참모들의 의견을 수용했다고 한다. 그 뒤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김대중 총재가 DJP 연합을 통해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 말고도 정치인들 가운데 대통령을 꿈꾸었거나 출마한 사람들은 풍수설을 믿었다. 2001년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조상의 무덤을 전설적인 ‘자미원(紫微垣)’ 명당이 있다는 충청도로 옮겼고,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도 2002년 16대 대선에서 낙선한 후 조상 묘를 이장했다. 대통령 후보였다가 낙선한 이인제 의원도 2005년 부모 묘를 옮겼다. 정동영 국민의당 의원은 17대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뒤 풍수설을 믿어 조상 묘 이장에 관심을 갖고 ‘이해 못할 작업’을 했으나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임금과 대통령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풍수를 통해 권력을 잡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풍수행위’와 ‘풍수신앙’이 있어야 한다. 풍수행위와 풍수신앙이란 무엇인가.
명당발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에른스트 아이텔(Ernst Eitel· 1838~1908)이라는 독일인이 있었다. 튀빙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복음주의 루터 교단’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파견된다. 1896년 홍콩을 떠나기 전까지 30년간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런 그가 1878년 ‘풍수: 혹은 중국에서의 자연과학의 근원(Feng-shui: or, The rudiments of natural science in China)’이라는 책을 영어로 출간한다.서구에 풍수의 본질을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그가 풍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풍수라는 사실을 알고부터였다. 주택·무덤·관공서·도로에서 광산 개발에 이르기까지 풍수가 관여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백성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풍수에 ‘절대적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텔은 중국인들의 이 어리석은 미신을 반박하고 계몽하기 위해 풍수를 공부한다.
그런데 처음 의도와 달리 그는 점차 풍수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나중에 그는 풍수가 하느님의 말씀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확신에 이른다. 그는 풍수를 하늘과 땅을 잇는 조화의 이론으로서 중국적 자연과학으로 정의한다. “풍수의 목적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읽어내는 것”이며 그 부산물로서 대지 위에 거주하는 피조물들의 길흉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당신의 운명을 알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다음 세 가지 가르침을 인정하십시오. 첫째, 하늘(하느님)이 이 땅을 지배합니다. 둘째, 하늘과 땅이 모든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는데, 이것의 활용 여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셋째, 운명은 당신의 선한 의지와 돌아가신 조상의 영향력에 좌우됩니다.”
세 번째 문장과 관련해 저자는 “후손이 돌아가신 조상을 진심으로 공경하면 조상의 혼령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 역시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조상을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실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철저히 중국화하여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다.
아이텔의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언급한 ‘풍수행위’와 ‘풍수신앙’을 전제한다. 풍수행위란 풍수설을 바탕으로 땅을 고르고 건물을 짓고 묘지를 쓴 행위를 말한다. 풍수설을 믿어 길지로 이사를 하거나 이장을 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풍수신앙이란 그를 통해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말한다. 그러한 확고한 믿음에는 풍수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을 전제한다. 동기감응은 ‘주역’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 부연설명이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를 구한다. (만물 가운데)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번지고, 용이 승천하는 데에는 구름이 뒤따르고, 호랑이 포효에 골짜기 바람이 흔들린다. 성인의 출현에 만인이 우러러본다.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해와 달과 별(日月星辰)은 위로 친하고, 땅에 뿌리를 둔 것은 아래와 친하니, 만물도 각기 그 동류끼리 공감 상통하는 것이다.”
후세의 유학자들이 인용하는 것이 앞에서 소개한 ‘동성상응 동기상구(同聲相應. 同氣相求)’란 문장이다. 즉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를 구한다”는 의미인데 풍수의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의 토대가 된다. 자기가 진정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그에 상응하는 땅을 찾아서 무덤을 쓰고 집터를 정한다는 풍수신앙의 전거로 삼았다. 이때 ‘서로서로 응하고 서로서로 구하는’ 행위에서 전제되는 것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믿음이다. 이를 다시 주역 중부괘(中孚卦)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학이 언덕 모퉁이에서 우니 새끼가 화답을 하는구나(鳴鶴在陰. 其子和之).’ 어미와 새끼들이 교감하고 화답하는 것은 지성한 마음 때문이다. 조상과 후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어미가 새끼 새를 발톱에 쥐고 하늘을 날아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새끼 새는 그 어미가 자신을 떨어뜨리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풍수신앙’ 역시 그러하다. 조상을 좋은 자리에 모시고 나면 그로 인해 좋은 일이 생길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추호의 의심도 없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풍수설을 맹신한 것도 이와 같은 사상적 토대 때문이었다.
산과 물 모두 힘이 있어야
중국에서 7세기 수나라 황제 양제에서 20세기 쑨원과 장제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19세기 정조와 흥선대원군, 20세기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대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많은 수단 가운데 하나로 풍수를 활용했으며(풍수행위), 일단 일을 도모하면 그 결과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풍수신앙).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유력 대통령후보가 낙선 뒤에 선영을 이장하고 이장을 거듭한 이들도 있다.그렇다면 대통령이 나올 터(제왕지지·帝王之地)는 어떤 곳일까. 전통적으로 제왕지지는 하늘이 내는 것이라서 술사들이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풍수 고전의 기본 전제다. 조선조 풍수학 필수과목이던 ‘감룡경’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자미원(제왕지지)에 있는 북극성이 하늘에서 가장 존귀하며, 상상(上相·재상)과 상장(上將·상장군)의 별자리가 네 모퉁이에 이를 보좌하고 있다. 천을과 태을(天乙太乙)은 명당을 비추고, 화개(華蓋)와 삼태(三台) 별자리가 앞뒤에서 보좌하고 있다. 이 별(北辰)의 조응을 받은 혈(제왕지지)은 만 리에 걸쳐 하나 얻을까 말까 하는데, 이 별에 상응하는 용(龍)을 세속의 술사들은 인식할 수 없다. 설사 알았다 할지라도 그 땅을 쓸 수 없고, 임금에게 주어지거나 나라를 평안케 하는 용도로 쓰일 뿐이다.”(‘감룡경’)
즉 “제왕지지는 하찮은 풍수술사들이 함부로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니, 평범하게 일반인이 쓸 수 있는 땅에나 관심을 가져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풍수술사들이 제왕지지에 대한 관심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장 오래된 풍수서이며 역시 조선왕조에서 풍수학 필수과목이던 ‘청오경’은 제왕은 아니나 그에 버금하는 땅을 논하고 있다.
‘청오경’은 공후(公侯)가 나올 땅, 재상이 나올 땅, 높은 벼슬을 할 땅, 문사가 나올 땅, 큰 부자가 나올 땅, 가난하고 천하게 될 땅 등을 세분해 그 입지 조건을 설명한다. 여기서 공후가 나올 땅이라면 5년짜리 보통 대통령 자리에 버금할지 모르겠다. ‘청오경’은 공후가 나올 자리를 “용마(龍馬)가 뛰어오르는 듯 날아오르는 듯하고, (앞쪽의) 면대한 옥규(玉圭)봉이 작지만 봉우리가 날렵한 곳으로 좌향만 제대로 되면 배움이 없이도 공후에 이를 것이다(不學而至)고 하였다.”
풍수의 묘미는 바로 위 인용문의 줄친 문장과 같은 부분일 것이다. 제대로 된 자리만 쓰면 “배우지 않아도 절로 공후의 자리에 오른다”니 누군들 욕심을 내보지 않겠는가.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수많은 권력자가 풍수라는 ‘아편(阿片)’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문장이다.
조선조에서 풍수관리(지관)가 되려면 달달 외워야 했던 ‘금낭경’은 “형세가 병풍을 둘러쳐놓은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우뚝 솟은 산능선이 있어, 그 끝 지점에 장사를 지내면 왕후가 나온다”고 했다. 또 “산능선의 기세가 마치 만 마리의 말이 하늘에서 절도 있게 내려오는 듯 멀리서 웅장하게 뻗어내리는 그러한 땅에 장사 지내면 왕이 나오며” “산능선 기세가 큰 파도같이 산봉우리가 중첩하여 이어져 있으면 큰 제후가 나올 땅이다”고 했다.
‘청오경’과 ‘금낭경’보다 훨씬 후에 쓰여진 ‘(九天元女靑囊海角經구천원녀청낭해각경)’은 “왕이 나올 땅은 큰 물결이 강을 가로지르듯 하며, 운기가 서로 따르되 그 변화가 구불구불하며(산능선의 변화가 마치 구름이 연이어 흘러가면서 구불구불하며) 큰물이 감싸 도는 형세”라고 서술한다. 이어서 “공경 제후가 나올 땅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며, 흙은 두텁고 초목은 무성하며, 구부린 다리에 머리를 수그린 형상(즉 좌우 산들이 안으로 감싸고, 주산은 머리를 숙이고 있는 형상)”이라고 묘사한다.
이처럼 여러 풍수 고전에서 묘사하는 제왕지지는 산과 물 모두가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규모가 웅장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 한 평의 땅일지라도 강한 기운과 사방을 감싸는 산들의 정치(精緻)함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정조 임금이 터를 잡은 융릉이 그렇고, 흥선군이 천자 자식을 두기 위해 이장한 예산군 남연군 묘가 그러하다. 또한 윤보선·김대중·김종필 등 이전 정치인들의 선영 역시 ‘단독주택(개인묘지)’으로서 주변 산들을 압도하며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풍수 고전에서 말하는 제왕의 땅과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선영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대선일자가 12월이 아닌 5월 9일로 당겨 잡히면서 벌써 각 당의 후보들이 정해졌다. 후보들이 있으나 현재의 지지율로 보면 문재인과 안철수 두 후보의 대결로 귀착될 것이다. 그런데 5년 전인 2012년 18대 대선과 비슷한 상황이다. 당시 박근혜·문재인·안철수의 지지율이 가장 높았기에 3인 가운데 누가 될 것인지가 관심사였다.5년 전 필자는 대선후보 3인의 생가와 선영을 답사했다. 그리고 1년 전인 2016년 5월 다시 문재인과 안철수 두 후보의 생가와 선영을 답사했다. 5년이란 시차가 있지만 보고 느끼는 바는 같았다. 기존의 역대 대통령이나 대선후보들의 선영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일단 두 후보의 선영 모두 공원묘지에 자리하고 있다. 문재인 부친 묘는 양산시 상북면 천주교 하늘공원에(묘번호: 8-11), 그 윗대 조상묘는 이북에 있어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안철수 조부모 묘는 부산 기장군 정관읍 대정공원묘지에 있다(묘번호: 35-563).
공원묘지이기는 하나 안 후보 조부모의 좌측 상단의 높은 산 정상에 있는 바위는 벼슬봉으로 강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사설 공원묘지는 풍수를 고려하기보다 더 많은 수익을 위해 묘역을 조성한다. 더 많은 무덤을 조성하기 위한 넓은 부지를 값싼 임야에서 찾기 때문에 대통령이 나올 만한 길지를 기대하기 어렵다.
필자와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2016년 5월 답사에 필자와 동행한 유기상 박사(전북대 사학과, 전라북도 도청 기획관리실장 역임)는 필자와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유 박사는 ‘조선후기 호남파 실학자의 풍수인식과 풍수생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기에 참고로 그의 의견을 소개한다.
“문재인 부친 묘는 공원묘지 내 중출맥(中出脈)에 있으므로 최상의 혈자리를 차지한다. 좌청룡이 없는 듯 있는 것이 특이하고 멀리 안산의 귀인(貴人)봉이 아름답다. 문재인의 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일까. 공동묘지에도 명당이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하는 혈처다. 북한에 있을 문 후보 조부모 이상의 묘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안철수 조부모 묘소도 공동묘지 안에 있다. 백운산 너른 품안에 있는 수백 기 공동묘지 속에서도 결혈(結穴)지를 차지한다. 일종의 괴혈(怪穴)로 여겨진다. 안산이 기울고 달아나는 것이 좀 아쉽다. 안 후보 고조부모 묘소(양산시 용주로 부근)는 조부모 묘소보다 더 좋다. 무덤 앞 바위맥(石脈)이 큰 기운을 응축한다(좋은 바위는 권력을 거머쥐게 한다고 한다). 안산은 노적봉과 천마사(天馬砂)가 있어 부귀겸전의 땅이다. 용띠인 문재인과 호랑이띠인 안철수는 문자 그대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다.”
문재인 생가
한 인간의 흥망성쇠에서 집터가 중요할까, 조상 묘가 중요할까. 양택풍수 고전 ‘황제택경(黃帝宅經)’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묏자리가 흉하고 집터가 좋으면 자손은 벼슬길이 좋다. 묏자리가 좋고 집터가 나쁘면 자손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란다. 묏자리와 집터가 모두 좋으면 자손이 영화를 누린다. 묏자리와 집터가 모두 나쁘면 자손이 타향살이에 손이 끊긴다.” 묏자리와 집터 가운데 집터가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생가와 어린 시절을 보낸 집터가 중요하다.문재인 후보의 생가는 거제시 거제면 명진 1길 27번지다. 6·25전쟁 때 이북에서 가족이 배를 타고 피란 와서 처음 세를 얻어 산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6세까지 살다가 산 넘어 용산에서 다시 1년을 더 살고 7세에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따라서 문 후보에게는 거제가 진정한 고향인 셈이며, 거제의 땅 기운을 충분히 받고 성장했다 말할 수 있다. 문 후보 생가는 거제의 진산 계룡산(570m)에서 뻗어 나온 선자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흔히 계룡산 하면 충남의 계룡산이 떠오르지만 원래 우리 민족에게 3개의 계룡산이 존재했다. 북조선의 계룡산(만주 소재), 중조선의 계룡산(충남 소재), 남조선의 계룡산(거제 소재)이 바로 그것이다. ‘계룡산 제왕지지설’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으며 조선조 ‘정감록’에도 등장한다.
계룡산 정기를 끌어온 마을 주산 선자산(扇子山)은 이름 그대로 ‘부채 모양의 산’이다.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는 산으로 주산이 되기에 충분하다. 계룡산과 선자산의 강한 바위 기운이 부드러운 땅의 기운으로 바뀌고(박환·剝換), 그 가운데 숨은 지맥 하나가 밭과 논으로 숨어들어 들판 한 가운데 작은 터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금거북이 진흙 속에 숨어드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이다. 또 생가 앞으로는 명당수(明堂水) 오수천이 흘러 한산도 섬을 바라보고 객수(客水) 남해로 흘러들어간다. 섬이기는 하지만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사방의 산과 섬들이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그것은 밤하늘 수많은 별이 오롯이 내려와 제 모습들을 드러낸 듯하다. 한려해상공원이 바로 그곳이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땅이다. 조선조 풍수학 필수과목 ‘감룡경’은 이와 같은 땅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산의 형상은 땅에 있지만 그 형상의 원형은 하늘에 있으며, 하늘의 참 기운이 땅에 내려와 감응을 하면 그 결과가 그 땅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길흉화복으로 응험한다(山形在地星在天. 星氣下感禍福驗).”
안철수 생가와 고향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생가와 고향은 두 곳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태어난 곳은 밀양이지만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곳은 부산이다. 부친 안영모 선생이 밀양에서 군의관으로 재직할 때 안 후보가 태어나 두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밀양시 내일상가 1길 10) 현재 이곳엔 ‘향촌’이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필자가 5년 전인 2012년 이곳을 답사했을 때에도 성업 중이었는데, 2016년 5월에 갔을 때에도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이후 안영모 선생이 부산 범천동에서 범천의원을 개업하면서 안 후보는 그곳에서 자란다(부산 동구 망양로 911). 따라서 안 후보는 이 두 곳을 모두 살펴야 한다.
밀양의 안 후보 생가는 영남루를 좌청룡(左靑龍)으로 하여 그 안쪽에 작은 지맥이 내려와 뭉친 곳으로 전체적으로 영남루 지기(地氣)권이다. 영남루는 조선 최고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밀양의 뒷산 추화산(243m) 지기가 흘러가다가 밀양천을 만나 땅기운이 멈춘 곳에 세워졌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영남루에 대한 평을 누각 현판에다가 남겼는데, 그 가운데 ‘天地東南第一樓. 洗來千古丈夫愁’란 문장이 압권이다. ‘영남의 제일 좋은 터에 자리한 누각은 옛날부터 장부의 근심을 씻어주었다’란 뜻이다. 이 땅의 기운을 단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맑은 선비의 정신과 부합하는 땅이다. ‘장부의 근심’이란 다름 아닌 국가와 백성을 위한 선비의 근심이다. 그러한 근심을 씻어줄 인물을 배출할 터이다. ‘청아한 선비(淸儒)’의 땅이다.
안 후보 부친 안영모 선생이 개업해 몇 년 전까지 49년간 의료 활동을 한 범천의원은 안 후보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의 ‘고향집’이다. 그리 높지 않지만 단엄한 호천산(虎川山) 지맥을 받은 곳이다. 범(虎)이 작은 내(川)를 뛰어넘은 형국, 즉 ‘맹호도천형(猛虎跳川形)’의 땅이다.
호랑이가 비록 뭇 짐승의 으뜸이지만 작은 내 하나를 건너려 할 때도 신중함을 기하여 일에 실패가 없게 한다는 것이 ‘맹호도천형’이다. 안 후보의 생가와 고향, 이 두 곳은 안 후보에게 어떤 땅기운을 주었을까. ‘맑은 선비의 정신으로 조심스럽고도 치밀하게 일을 도모하는 호랑이’ 기운이다.
그런데 풍수설 자체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반문할 것이다. “그렇게 좋은 땅이라면 왜 거제도 명진마을과 밀양의 영남루에서는 지금까지 대통령은커녕 대통령후보조차 나오지 않았는가. 왜 이전에 거기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문재인이나 안철수처럼 되지 않았는가.”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에는 풍수가 전부가 아니다. 풍수술사들 가운데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어리석은 자들이다. 한 인간과 한 가문의 흥망성쇠에는 다섯 가지가 순서대로 영향을 끼친다.
결국은 德에 달렸다
‘일명(一命)·이운(二運)·삼풍수(三風水)·사적음덕(四積陰德)·오독서(五讀書)’첫째는 명(命)이다. 금수저로 태어난 것도 명이고, 흙수저로 태어난 것도 명이다. 둘째는 운(運)이다. 같은 금수저로 태어났어도 가는 길이 다르면 훗날 삶의 결과는 달라진다. 명과 운을 합해서 ‘운명’이라 하며 이것을 엿보고자 하는 숱한 시도가 사주·관상·궁합 등과 같은 술수다.
셋째, 풍수(風水)다. 어느 곳에 터(집터와 무덤터)를 잡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 왕이 되려면 제왕지지에 터를 잡으면 된다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장과 암장을 통해서라도 천하의 대권을 잡으려 했다. 넷째는 음덕 쌓기다(積陰德). 훌륭한 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섯 번째가 공부다(讀書). 공부를 잘하면 인생 초반에는 분명 유리하게 작용한다.
위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명(命)’과 ‘운(運)’ 그리고 ‘공부’는 선천적인 것이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자기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풍수’와 ‘음덕 쌓기’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천년 넘게 풍수가 수용돼온 것은 풍수를 통해 하늘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풍수 고전 ‘금낭경’은 이를 ‘탈신공개천명(奪神功改天命)’, 즉 “하늘이 하는 일을 빼앗아 자신의 운명을 고친다”라고 정의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집터와 좋은 무덤 자리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풍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덕(德)을 쌓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덕에 대해 조선조 풍수학 고시과목이었던 ‘탁옥부’는 말한다. 이 글 ‘제왕의 풍수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帝王之興也以德而不以力. 其守也以道而不以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제왕의 일어남은 덕에 있는 것이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지킴은 도에 있는 것이지 땅에 의한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의 덕에 달려 있다. 그 덕이란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