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눈이 올 듯한 날, 그가 전화를 건 이유는?

  • 글: 신경숙

    입력2003-01-06 18: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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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올 듯한 날, 그가 전화를 건 이유는?
    저번 날, 눈이 올 듯한 날이었다. 이미 산간지방에 눈이 너무 내려서 수해 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임시로 지은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턴테일러 집에서 공포에 가까운 근심 속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본 터라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가 심란하게 느껴졌다.

    저녁밥을 지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를 정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제는 일상 속에서 까마득히 잊고 사는 초등학교 때 남자친구였다.

    어째서인가.

    세월이 그리 오래 흘렀는데도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 그 애구나 싶었다. 솔직히 그 애라니. 마흔이 된 아이도 있는가. 가당치도 않는 말이긴 하나 하여간 나는 그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들으며 그 애로구나 생각했다.

    반가웠으나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라 뭐라 해야 될지를 몰라 어어, 하는 사이에 그는 마치 어제도 그제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처럼 잘 있었냐고 물었다. 어떻게 지내는가도 물었다. 전화는 그냥 걸었다고도 했다. 그의 말에 따라 잘 지냈어, 잘 지내고 있어, 라고 대답하고 나면 말이 궁했다.



    침묵 사이로 그는 내가 사는 곳에 눈이 오냐고 물었다. 눈이 오지는 않지만 올 것 같은 날씨를 내다보며 곧 올지도 몰라… 대답하고 나니 또 말이 궁했다. 하도 할 말이 없어 내가 귀신 지나가겠다, 그랬다.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하다가 대화가 끊기는 순간 그 침묵의 시간에 귀신이 지나간다는 얘기를 누군가한테 듣고서는 내가 말이 끊겨 어색한 순간이면 자주 쓰는 혼잣말인데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수화기 저편의 그가 웃었다.

    그는 뜬금없이 한 달 반 전에 셋째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셋째 아이라면? 위로 두 아이가 있다는 얘기구나, 혼자 짐작하며 그래… 응수하고 나니 또 말이 궁했다. 그는 내게 셋째 아이의 이름을 알려줬다. 그 이름을 한번 불러보고 나니 또 말이 궁했다. 위로 딸이 둘 있다고 했다. 남자아이 낳으려고 또 낳았구나… 했더니 나는 괜찮은데 어머니가… 라고 응수했다.

    어머니는 잘 계시니? 안부를 물으며 그의 어머니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가물가물했다. 한참 후에 그가 이젠 집에 가야겠네… 해서 지금은 어딘데? 물었더니 학교 교무실이야… 그랬다. 아, 학교 선생이라고 했었지.

    통화를 하는 중에는 말이 궁해서 띄엄띄엄 대화가 이어졌는데 통화를 끝내고 나니 그가 나에게 왜 그냥 전화를 했을까 궁금해졌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K시에 있는데 살고 있는 집은 J시에 있다고 했으니 어두워지는 교무실에서 나와 자동차를 몰거나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탔을 그가 한 달 반 전에 낳은 셋째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며 무슨 생각을 할까? 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는 왜 갑자기 그냥 내게 전화를 걸어서 셋째 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의 이름을 말해줬을까?가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급기야는 초등학교 앨범을 꺼내서 이 장 저 장 넘겨가며 이제는 까마득히 잊혀져버린 얼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6학년 몇 반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서 눈을 맞춰보니 무뚝뚝하게 생긴 남자아이 하나가 입을 꽉 다물고 앨범 속에 박혀 있었다.

    그 애와 나는 마을에서 가장 키가 컸다. 큰 키 때문에 그 애와 나는 4학년 때부터 가을 운동회 때 있는 ‘행진’ 프로그램의 맨 앞줄에 서야 했다. 맨 앞줄에 선 사람들은 행진을 하며 만들어내는 꽃 모양이나 글씨를 위하여 늦게까지 남아 연습을 해야 했다.

    추억 속 남자아이가 마흔이 돼 전화를 걸다니…

    연습이 끝나고 나면 사방이 어두워졌다. 산길과 논길로 이어지는 십리 길을 그 애와 나는 함께 걸어가야 했는데 그 애는 무뚝뚝하게 앞만 보고 걸었다.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그 애를 쫓아가느라 늘 힘을 뺐다. 그렇게라도 그 애를 따라가지 않으면 길이 무서웠다.

    언젠가 한번 하늘에 달이 뜬 날이었는데 앞서 가던 그 애가 내 쪽을 향해 돌더니 참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늘의 달이 계속 쫓아온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걸으면 달이 천천히 쫓아오고 빨리 걸으면 빨리 쫓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애는 막 달리기 시작했다. 달도 달음박질해 쫓아온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나 나는 정신없이 달리는 그 애를 놓칠세라 함께 달리느라 숨이 턱에 받쳐 기절할 뻔했다. 밉살맞고 얄궂게만 느껴지던 그때의 일이 훗날엔 추억이 되었던 모양이다. 혼자 걷는 밤길에 하늘의 달을 보게 되면 나 혼자 빨리 걸어보고 늦게 걸어보고 가끔은 막 달려보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그런다. 그 추억 속의 남자아이가 마흔이 되어서 어느 겨울날 저물녁에 셋째 아이를 한 달 반 전에 낳았다고 전화를 걸어왔단 말인가? 몇 장 건너에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나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종이에 박혀 있었다.

    단발머리도 아니고 긴머리도 아닌 머리를 내려뜨리고는 멋을 내어 꽃핀까지 찌르고는 재미없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그 계집아이를 들여다보자니 점점 마음이 요상해졌다. 자주 허리가 삐긋하고 목덜미가 저리기도 하는 마흔의 여자가 들여다보는 열세 살인지 열네 살 때의 계집아이는 참말로 낯설었다.

    오랜만에 여고 동창생이나 대학 때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아, 이 애가 그 애인가? 속으로 깜짝 놀랄 때나 느끼는 그런 요상함. 넌 어쩜 이렇게 변한 게 없니? 말은 그리 하면서도 숱이 적어진 머리나 눈가에 잡히기 시작한 주름, 팔이나 목덜미에 도도록하게 붙기 시작하는 나잇살을 엿보는 마음은 아무래도 울적하기 마련이다. 친구의 얼굴은 곧 내 얼굴 아니던가. 내가 친구를 보며 이 애가 그 애야? 느끼듯이 그는 나를 보며 그리 느낄 것은 빤한 일이다.

    낡은 앨범을 닫는데,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그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한달 반 전에 셋째 아이를 낳은 초등학교 때의 나의 남자친구는 텅 빈 교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겠지. 이제 갓 태어난 아이의 아빠 노릇을 다시 하게 된 것이 기쁘기도 할 것이나 얼마간 공포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무언가 새 생활로 접어든다는 것은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에 혼자 있는 듯이 쓸쓸함이 덧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우연히 알게 된 나의 전화번호가 그 순간 눈에 띄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만물은 서로 그렇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냥 한번 전화번호를 돌려보았는데 내가 덜컥 받았을 것이다.

    꼭 내가 아니라도 그에겐 상관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 않는 가깝지 않은 누군가에게 이제 갓 얻은 아이의 이름을 알려주는 순간 어쩌면 그는 스스로 마음속으로 용기를 북돋우고 있었을 것이다.

    K시에서 J시로 가는 동안 그도 잠시 나를 생각하며 그냥 건 전화에 쑥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쯤의 쑥스러움이야 나눌 권리가 그에게나 나에게나 있다. 왜냐면 초등학교 동창생인 데다 더구나 눈이 올 것 같은 날씨 아니었는가.

    새로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달 반 전이나 두 달 전에 새 아이를 얻은 것 같은 마음 아닐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위로가 되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가까이 있는 이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며 누군가에게 그냥 전화를 걸게 되는 그런 쓸쓸함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어느 쪽의 비중이 더 클지는 살아봐야 알 일이나 지금은 모두가 기쁜 일이 많은 새해 첫달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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