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송광사 들머리 숲길

불국토 앞 수양공간 온기에 몸과 마음은 깃털이 되고

  •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입력2010-12-03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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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집 숲의 강인한 생명력과 복원력 못지않게 스님들의 바지런한 손길은 숲의 번영에 필수적 요소였다.
    • 송광사의 보물 ‘조계산송광사사고’는 이 땅의 절집 숲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시킨다.
    • 냉혹한 억불(抑佛)의 시대에 살아남고자 한편으로는 원당(願堂)을 자임하고, 또 한편으론 봉산(封山)의 책무를 짊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송광사 들머리 숲길

    조선왕실의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으로 지정된 송광사의 숲.

    송광사로 향하는 들머리 숲길은 조용했다. 들머리 숲에는 삼보사찰이란 세속의 유명세에 어울릴 법한 위엄이나 신비로움은 없었다. 불국토를 에워싼 숲은 오히려 편안하고 아기자기했다. 통도사 무풍한송의 소나무 숲길에서 느끼던 결기(潔己)의 기운이나 해인사 홍류동의 솔숲길을 거닐면서 느끼던 비장함을 송광사의 들머리 숲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다.

    부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 통도사 숲이나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사찰 해인사 숲이 풍기는 위용과는 달리, 송광사의 들머리 숲이 한결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송광사가 부처의 교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사부대중이 모인 승보(僧寶)사찰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佛)과 법(法)을 수호하는 공간의 의미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주인공인 스님(僧)들의 수양 공간에서 풍기는 독특한 온기와 소박함이 숲을 통해서도 발현되고 있다면 지나친 아전인수일까.

    송광사 제일의 풍경 ‘우화청풍’

    송광사 들머리 숲길

    들머리 숲길에서 본 극락교와 청량각.

    송광사의 들머리 숲길은 산문 입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극락교(極樂橋)에서 시작된다. 극락교는 조계산에서 발원해 절집 옆을 지나 서쪽의 주암호로 흘러가는 계류 위에 놓인 돌다리로, 그 위에는 ‘청량각(淸凉閣)’이란 누각이 세워져 있어서 아름답고 이채롭다. 극락이란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 없이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고, 청량이란 ‘깨끗하고 선량한 상태’를 뜻하기에 청량각과 극락교를 건너는 일은 바로 속세의 번뇌와 망상을 씻어내고 부처의 나라에 진입하는 첫 통과의례인 셈이다.

    다른 삼보사찰의 들머리 숲에 비해 송광사 들머리 숲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형상이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고자 돌다리 위에 전각을 세운 스님들의 지혜가 놀랍다. 극락과 청량의 세계에 진입하기에 앞서 극락교 주변의 정자에서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져보자. 작은 건축물 하나에도 자연과의 조화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옛 사람들의 지혜를 헤아려보는 것은 절집 숲을 찾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극락교에서 송광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들머리 숲길은 계류를 중심으로 왼편에 인도가, 오른편에 차도가 분리되어 있다. 인도와 차도 중 어느 길을 택해도 아름다운 숲길은 절집에까지 이어진다. 오른편으로 난 차도를 따라 조금 오르다보면 느티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와 같은 넓은잎나무로 구성된 활엽수림 속에 노송들이 길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절집이 겪은 굴곡의 현장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송광사의 풍광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편백 숲도 뜨문뜨문 나타난다.

    송광사 들머리 숲의 나무들이 활엽수는 물론이고 침엽수인 소나무마저 대부분 굽은 형태로 자라는 데 반해, 일본에서 도입한 편백과 삼나무는 쪽쪽 곧은 형태로 자라는 특징 때문에 조화롭지 못한 풍광을 연출하기도 한다. 우리의 전통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편백 숲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스님들의 족적을 나타내는 또 다른 흔적이다.

    숲과 물과 함께 바람소리까지 절묘하게 어울리는 송광사 제일의 풍광은 능허교(凌虛橋)와 우화각(羽化閣)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조계문을 들어선 참배객이 경내로 진입하려면 먼저 계류를 건너야 하는데, 그 통로가 바로 능허교와 우화각이다.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는 뜻을 지닌 우화각은 소동파의 적벽가에 나오는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에서 딴 것으로, 불국토로 들어가기 위해 참배객이 가져야 할 순수한 마음 자세를 담고 있다. 이 일대의 풍광은 송광사의 대표적 상징이 되어 오늘날도 ‘우화청풍(羽化淸風)’이라는 구절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화청풍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송광사의 또 다른 상징은 고향수(枯香樹)다. 고향수는 우화각과 세월각(洗月閣) 사이에 선, 말라비틀어진 죽은 향나무 그루터기를 말한다. 산내 부속암자인 천자암의 곱향나무(일명 雙香樹·천연기념물 88호)와 함께 이 절집에 전해 내려오는 지팡이 설화의 주인공이다. 두 나무 모두 향나무지만, 고향수는 900년 전에 죽은 고사목이고, 곱향나무는 800년째 생을 이어온 살아 있는 나무라서 더욱 이채롭다.

    지눌의 지팡이와 고향수

    고향수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사용하던 지팡이를 꽂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내용은 보조국사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잘 자라던 이 향나무도 말라 죽었다는 점이다. 보조국사가 남겼다는 “너와 나는 생사를 같이하니, 내가 떠나면 너도 그러하리라. 다음날 너의 잎이 푸르게 되면 나 또한 그런 줄 알리라(爾我同生死 我謝爾亦然, 會看爾靑葉 方知我亦爾)”라는 이야기 때문인지 몰라도 송광사 대중 스님들은 이 고사목을 끔찍하게 아낀다.

    송광사를 찾는 방문객 대부분이 능허교와 우화각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 고사목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친다. 나 역시 송광사를 몇 차례 드나들면서도 이 고사목의 존재를 몰랐다. 나무와 숲에 초점을 맞춰 절집을 순례한 덕분에 최근에야 이 고향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명산대찰의 절집마다 전해 내려오는 지팡이 설화의 의미를 새삼스레 깨치게 됐다. 나무를 숭배한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을 불교가 배척하기보다 포용한 사례였음을.

    송광사의 고향수는 1751년에 간행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도 기록돼 있고, 왕실에 보고하고자 1886년에 간행된 ‘송광사 지도’에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글자 곁에 새겨진 고향수를 찾을 수 있다. 고향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노산 이은상과 송광사 인암 주지 스님의 시조 대결은 사뭇 흥미롭다. 먼저 노산 이은상이 운을 뗐다.

    어디메 계시나요 언제 오시나요

    말세 창생을 뉘 있어 건지리까

    기다려 애타는 마음 임도 하마 아시리



    노산의 시조에 화답한 인암스님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살아서 푸른 잎도 떨어지는 가을인데

    마른 나무 앞에 산 잎 찾는 이 마음

    아신 듯 모르시오니 못내 야속합니다

    고향수가 푸른 잎을 싹틔우며 새롭게 생명을 시작하면, 조계종을 창시한 보조국사 지눌스님도 환생할 것이란 믿음 때문일까. 지난 수백 년 사이에 몇 번의 화재로 절집은 결딴났지만, 6.7m 높이의 말라비틀어진 이 향나무는 오늘도 변함없이 제자리에서 송광사를 지켜보고 있다. 도대체 한국인에게 나무란 어떤 존재란 말인가.

    조계종의 발상지인 송광사는 신라 말기 혜린(慧璘)스님에 의해 조계산 자락(처음에는 송광산이라 불렀다)에 창건된 이후,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지눌스님에 의해 대찰로 자리 잡게 됐다. 특히 보조국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국가나 임금의 사표(師表)가 되는 국사를 열여섯 분이나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임진왜란과 여수·순천10·19 사건, 6·25 전쟁을 거치면서 사찰의 중심부가 여러 번 불탔지만, 1980년대에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해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또 하나의 보물, 송광사사고

    송광사 들머리 숲길

    송광사를 상징하는 능허교와 우화각.

    송광사는 삼보사찰의 한 축을 담당하는 독특한 상징성과 함께 수많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절집으로도 유명하다.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제43호), 국사전(국보 제56호), 화엄경 변상도(국보 제314호)를 비롯해 다양한 보물이 있지만, 산림학자의 처지에선 이 절집의 역사를 샅샅이 기록한 ‘조계산송광사사고(曹溪山松廣寺史庫)’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최근 인물부와 산림부가 번역된 이 ‘사고’에는 건물부, 잡부도 함께 수록돼 있다.

    송광산사고에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 및 일제 초기에 이르기까지 송광사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 불교의 흐름뿐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사원경제사, 지방사회사, 문학사에 활용할 수 있는 소중한 내용도 담겨 있어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이를 활용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하지만 여기에 기록된 산림부의 중요성을 인식한 산림전문가는 별로 없었다. 송광사 승보박물관장 고경(古鏡)스님의 배려 덕택에 아무나 관람할 수 없는 ‘산림부’를 직접 확인하고, 1830년에 지정된 율목봉산(栗木封山)과 1900년에 지정된 향탄봉산(香炭封山)에 관한 귀중한 목패 유물을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절집 숲을 순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덕분이었다.

    송광사의 산림부가 중요한 이유는 크게 3가지 내용 때문이다. 먼저 이 산림부를 통해서 조선시대에 시행된 율목봉산의 지정과 관리 및 이용에 관한 자세한 절차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둘째, 15년간에 걸쳐 사찰림의 소유권 분쟁에 대한 조선시대의 송사(訟事)가 자세히 수록돼 있어 사찰림의 소유권 확립과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셋째, 사찰림의 조림과 경영에 관한 일제 강점기의 시업안(施業案)도 수록돼 있어 사찰림에 대한 일제의 산림정책을 엿볼 수 있다.

    송광사 들머리 숲길

    보조국사의 향나무 지팡이 설화가 녹아 있는 고향수(枯香樹).

    율목봉산은 왕실, 공신(功臣), 향교(鄕校)에 사용할 위패용 목재를 생산하던 밤나무 숲을 말한다. 우리 선조들이 위패를 만들면서 유독 밤나무(栗木) 목재를 사용한 이유는 싹을 틔워도 밤톨의 껍질이 오랫동안 뿌리에 붙어 있는 밤나무의 독특한 생장 특성을 ‘근본(根本)을 잊지 않는 행위’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송광사보다 85년 앞서 1745년부터 율목봉산을 운영한 연곡사의 경우 율목봉산에 대한 몇몇 기록은 남아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율목봉산의 관리 책임을 위해 연곡사의 주지스님이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됐으며, 그 덕분에 연곡사는 지방 향리들의 경제적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선박 건조 등의 목적으로 밤나무를 남벌해 연곡사 일대가 율목봉산의 기능을 더는 수행할 수 없게 됐고, 그 책임이 두려워 1895년 스님들이 절집을 버려 폐사로 변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조선시대의 기록은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 편찬)의 ‘경상도 하동부 산수조(山水條)’에서 찾을 수 있다. ‘하동부 산수조’에는 “직전동 서북쪽 70리다. 지리산 남쪽에 있는데 율목봉산이 있다(稷田洞 西北七十里 智異之南 有 栗木封山)”고 기술되어 있다. 바로 연곡사의 율목봉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내용은 이미 학계에 알려진 사실이다.

    국가가 직접 감독한 栗木封山

    조선 조정은 율목봉산을 어떻게 지정했을까. ‘사고’에는 율목봉산의 지정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중창 불사를 위해 왕실의 재정적 지원을 원한 송광사의 절실한 요청도 있었겠지만, 형식상으로는 먼저 전라관찰사가 율목봉산의 지정을 요청하는 절차를 따랐다. 전라관찰사는 국가의 제사와 시호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에 연곡사의 율목봉산(栗木封山)만으로는 나라에서 필요한 위패 제작용 밤나무를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형편을 설명하고, 그 해결책으로 송광사 일대를 율목봉산으로 지정하기를 원한다는 장계를 올린다. 전라관찰사가 올린 장계에 따라 봉상시는 왕세자에게 송광사의 율목봉산 지정을 요청하고, 조정에서는 왕세자의 이름으로 경인년(1830년) 3월에 요청대로 허가했다고 한다.

    ‘사고’에는 율목봉산의 운영에 대한 기록도 자세히 수록돼 있다. 운영에 필요한 시행규칙(節目)은 율목봉산을 이미 운영하고 있는 연곡사와 쌍계사의 절목을 참고해 시행하게 하는 한편, 그 절목 사본을 병영(兵營)과 수영(水營)과 진영(鎭營) 및 고을 수령에게 보내어 율목봉산의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지시했다. 이 ‘사고’를 통해서 새롭게 알려진 사실은 하동의 쌍계사도 왕실의 율목봉산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 조정은 위패용 밤나무 목재를 원활하게 조달받고자 사찰이 운영하는 율목봉산을 어떻게 감독했을까. 조정(봉상시)에서는 해당 사찰에 차감을 파견해 관리감독 업무를 수시로 확인하는 한편, 차감과는 별개로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경차관을 3년마다 절집(연곡사, 쌍계사, 송광사)에 보내 밤나무 식재와 위패용 재목을 조달하기 위한 벌채작업을 감독했다. 그 일환으로 송광사에는 율목봉산의 업무를 총괄할 책임자인 총섭(總攝)과 부책임자인 율목도별장(栗木都別將)을 임명하고, 관인(官印)과 나무 패(將牌)(송광사 박물관에 전시)를 하사해 인허가 업무를 관할하게 했다.

    또 송광사에서는 도벌 단속과 보호업무를 수행할 승려(都山直)와 봉산순찰을 담당할 마을주민(牌山直)을 지정해 도벌경작(冒耕)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봉산 경계로 동(굴목치), 서(외문치), 남(이읍촌), 북(오도치) 4곳에 표석을 설치하기도 했다. 10년 전 연곡사 인근계곡 피아골에서 율목봉산의 표석이 발견된 것과는 달리, 송광사의 율목봉산 표석은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도 발견된 것이 없다.

    봉산의 밤나무는 승려와 백성들이 심었고, 매년 조정에서 감독관을 보내 식재 작업을 감독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위패에 사용할 밤나무 재목을 확보하고자 먼저 감독관(경차관)을 현장으로 파견했으며, 경차관은 목수 1명과 범칠관을 대동해 벌채목을 선정했다. 그리고 운반작업(목수 1인과 군인 30명), 치목작업(목수 6명과 봉표 구역 내 백성 6명이 보조일꾼), 도배작업(승려)을 실시해 조정에 진상할 밤나무를 준비했다. 벌채목의 도배작업은 밤나무를 소금물에 찌고 몇 겹의 종이를 바르는 작업으로, 승려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조정은 위패용 밤나무 목재 생산의 임무만 절집에 지웠을까.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도 당연히 있었다. 절집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종류의 승역(僧役)을 감면받게 됐으며, 왕실의 종찰로서 중창이나 중건사업에 필요한 재정적, 물적(재목 등)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참나무→느티나무→소나무

    송광사 들머리 숲길

    조선 왕실에서 송광사에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의 관리 책임을 맡겼음을 보여주는 목패.

    ‘조계산송광사사고’를 활용한 다양한 연구 중에 건축학계의 연구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제공한다. 헌종 8년(1842) 봄에 난 불로 2000여 칸이 넘는 송광사의 건물이 일시에 소실됐는데, ‘사고’에는 중창 공사를 실시하면서 필요한 공사비와 목재를 조달한 자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 절집의 중창 공사는 엄격하게 금지됐다. 그러나 송광사는 영조 32년(1756)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위해서 육상궁의 원당으로 지정되는 한편, 순조 30년(1830)에는 율목봉산으로 지정된 덕분에 왕실과 조정으로부터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큰 화재가 있은 해 가을부터 조정에서는 중창에 필요한 목재들을 멀리 떨어진 여러 곳의 개인 소유 산림(私養山)에서 벌채하게 했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벌채지의 목재를 송광사로 가져오기 위해 전라도 53개 사찰에 운반을 책임지게 했다.

    서치상 교수 등이 수행한 이 연구를 통해, 지금부터 160여 년 전 절집의 중창 공사에 쓸 만한 재목감이 조계산 일대에는 많지 않았고, 원당과 같은 나라에서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사찰(國刹)의 경우에는 원근을 가리지 않고 중창에 필요한 목재를 벌채해 충당했으며, 벌채목의 운반은 관내의 여러 절집에 부역으로 수행하게 했고, 인력 동원이 힘든 절집들은 금전을 대납해 부역을 대신했음을 알 수 있다.

    숲과 문화연구회가 지난 10월 초에 개최한 ‘느티나무와 우리문화’ 학술토론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에 따르면 지금까지 출토된 문화재나 또는 고건축물의 부재로 사용된 목재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는 참나무가 주로 사용됐고, 고려시대에는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참나무보다 더 많이 사용됐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건축물은 주로 소나무로 지어졌다고 한다.

    최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의 배흘림기둥,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52호),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 등의 축조에 사용된 재목들 중 일부가 느티나무로 밝혀졌고, 송광사 국사전의 기둥에는 난대성 수종인 구실잣밤나무도 발견됐다고 한다. 송광사의 사례처럼 궁궐이나 왕실의 원찰인 경우에는 먼 곳에서 소나무를 충당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절집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적당한 나무를 베어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절집 등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이나 목조 유물 중, 시대에 따라 사용된 목재의 종류가 참나무에서 느티나무로, 느티나무에서 다시 소나무로 각각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먼저 역사 발전에 따른 인구 증가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구는 계속 늘어났고, 그에 따라 목재의 수요도 늘어났다. 인구 증가에 따라 필요한 곡물을 생산하기 위해 개간 면적을 늘리다보니 마을 주변의 산림은 점차 황폐해졌다. 늘어난 목재 수요를 충당하고자 운반이 용이한 마을 주변의 참나무나 느티나무와 같은 활엽수부터 사용했지만, 공급보다는 수요가 더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마을 주변의 산림은 농경에 필요한 퇴비생산에 필요한 임상(林相) 유기물과 활엽수의 지속적 채취로 점차 척박해졌다.

    결국 나쁜 토양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이 강한 소나무만이 살아남게 됐고, 다행스럽게도 소나무는 건축재로 재질도 나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활엽수재 대신에 소나무가 주된 건축재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우리 농경문화의 발전에 따른 인구증가와 산림황폐도 한몫을 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절집의 싸리나무와 비사리구시

    국보급 목조 건축물의 나무 재질 못지않게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곱향나무, 능견난사와 함께 송광사의 3대 명물로 알려진 비사리구시다. 흔히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이 구시는 약 4000명이 한꺼번에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진 나무 밥통이다. ‘구시’는 ‘구유’의 옛말로 전라도 지역에서 사용되는 우리말 ‘구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절집 일주문이나 대웅전의 기둥이 흔히 싸리나무로 잘못 알려진 것처럼, 송광사의 비사리구시도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 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해 만든 것으로 절집 기록은 밝히고 있지만, 재질을 해부학적으로 분석해보니 느티나무로 밝혀졌다.

    관목(灌木)인 싸리나무로 몇 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밥통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럼 느티나무가 어떻게 싸리나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됐을까. 몇몇 학자는 느티나무가 싸리나무로 불리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느티나무는 예부터 목재가 치밀하고 목리가 아름다워 건물의 기둥(부석사의 배흘림기둥, 수덕사 대웅전, 해인사 장경판전과 수다라장, 화엄사 대웅전, 쌍계사 대웅전)은 물론이고 불상과 고승의 사리함(舍利函)을 비롯한 각종 불교 용구를 제작하는 데 선호된 수종이었다. 특히 부처님의 사리 못지않게 고승 대덕의 사리 역시 귀하게 여겨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에 넣어 봉안하거나 부도를 세워 유덕을 기려왔다.

    영구 보전하기 전에 임시로 만든 목재 사리함은 무늬가 아름다운 괴목(槐木)으로 주로 만들었다. 괴목은 느티나무의 한자명으로, 글자 자체가 나무 목(木)에 귀신 귀(鬼)가 붙은 형상처럼 영적인 의미가 있다. 사리함을 만든 나무를 절집에서는 ‘사리나무’로 불렀지만, 불자나 절집 밖의 일반인 사이에서는 된소리가 되어 ‘싸리나무’로 변하게 됐다는 국립산림과학원 정성호 박사의 해석은 새롭다. 이와 관련해 광주에서 숲 해설 활동을 하는 강영란 선생은 송광사의 비사리구시를 ‘사리함이 아닌(非舍利) 밥통(구시)’이라고 독특하게 해석했다. 강 선생이 전하는 송광사의 비사리구시와 관련된 옛이야기도 흥미롭다.

    송광사 들머리 숲길

    곱향나무, 능견난사와 함께 송광사의 3대 명물로 알려진 비사리구시.

    옛날 승주 땅에 남편을 여읜 할머니가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숨을 거뒀다.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 앞으로 간 할머니는 먼저 온 많은 사람이 염라대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광경을 보게 됐다. 염라대왕은 사람들에게 송광사를 다녀왔는지 묻고, “예”라고 답하는 이들에게 비사리구시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지만, 송광사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 대부분은 옳은 답을 못해 저승으로 보내졌다. 마침내 차례가 되어 염라대왕 앞에 선 할머니는 송광사에 초파일에도 가고, 보조국사의 제삿날에도 가보고 해서 비사리구시도 여러 번 봤지만, 재어보지를 않아 정확한 크기를 말할 수 없다고 하자, 염라대왕은 정직하다고 칭찬하면서 좀 더 살다 오라고 했다.

    할머니가 눈을 뜨니 죽었다고 난리를 떨던 아들은 깜짝 놀랐고, 할머니는 자초지종 비사리구시의 크기를 묻던 염라대왕의 이야길 들려줬단다. 그길로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송광사로 가서 비사리구시의 크기를 쟀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길이가 17자, 높이는 3자, 너비는 4자라고 알렸지만, 일주문을 나서자마자 할머니는 금방 잊어먹고, 다시금 아들에게 묻곤 했다. 하는 수 없이 아들은 비사리구시의 길이 높이 너비만큼 명주실을 각각 끊어 할머니의 주머니 속에 넣은 후 나중에 염라대왕이 물으면 이 명주실을 꺼내어 길이와 높이와 너비가 요만큼 된다고 말씀드리라 했다.

    할머니는 그 후 천수를 누렸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변의 많은 노인은 비사리구시를 잰 명주실을 넣은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 후 송광사를 찾는 노인의 숫자가 늘어난 것은 비사리구시에 얽힌 염라대왕과 할머니의 이야기 덕분이라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느티나무와 우리문화’(도서출판 숲과 문화)에서 읽고, 평소 궁금하던 절집 싸리나무의 정체를 유추해낸 새로운 해석이 새로웠고, 또 고려시대까지 절집을 비롯한 큰 건축물에는 소나무 못지않게 느티나무가 많이 사용된 과학적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콘텐츠(할머니의 비사리구시)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절집 숲에서 놀면서

    180년 전 송광사의 스님들이 조계산 자락에 조성한 밤나무 숲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절집의 숲을 거닐고 조계산을 오르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물소리와 바람소리에 귀를 열어볼 필요가 있다. 시대를 거슬러 절집의 성쇠에 따라 재생과 쇠퇴의 길을 반복한 숲의 이야기가 계류와 바람 속에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귀를 가진 이들은 흘러내리는 물이, 불어오는 바람이 전하는 이런 사연을 담아낼 수 있는 생태학적 상상력을 지녔을 것이다. 특히 근대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일어난 일제 강점, 광복, 광복 후의 좌우대립, 6·25전쟁, 사회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망가지고, 없어지고, 다시 살아난 숲의 강인한 복원력을 느껴보고 그 강인한 생명력에 찬사를 보내는 일은 오늘 절집 숲을 찾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절집 숲의 강인한 생명력과 복원력 못지않게 스님들의 끊임없는 손길도 숲의 번영에 필수적이었음을 기억하자. ‘조계산송광사사고’를 통해서 이 땅의 절집 숲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냉혹한 억불(抑佛)의 시대에 살아남고자 한편으론 원당(願堂)을 자임하고, 다른 한편으론 봉산(封山)의 책무를 짊어졌기에 오늘날 우리는 이 땅의 유서 깊은 절집 숲을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송광사 들머리 숲길
    全 瑛 宇

    1951년 경남 마산 출생

    고려대 임학과 졸업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석사·박사

    現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저서: ‘숲과 한국문화’ ‘나무와 숲이 있었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숲 보기 읽기 담기’ ‘한국의 명품 소나무’ 외 다수


    ‘신동아’ 덕분에 지난 1년 동안 절집 숲에서 열심히 놀 수 있었다. 절집 숲의 숨은 아름다움을 철마다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과는 별개로 평소 각각의 현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온 절집 숲의 다양한 의미와 세세한 기능을 함께 엮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행운이었다. 모두 ‘신동아’가 내준 귀한 지면 덕분이다. 졸렬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사의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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