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고종환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
“한번은 병원 화장실에 갔는데 딸그락 소리가 나는 거예요. 한 간호사가 피 묻은 링거병을 씻고 있더군요. ‘왜 버리지 않고 씻느냐’고 하니 거기에 버섯 종균을 배양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왜 위험하게 유리병을 쓰냐’고 다시 물었더니 100℃ 이상에서 멸균해야 하는데 이 온도를 견디는 플라스틱이 없다고 하더군요. 곧 바로 100℃ 이상의 온도를 견딜 수 있는 플라스틱 버섯재배 용기 개발에 들어갔죠. 때마침 국가에서 농촌 소득신장을 위해 200개 농가에 매년 200만원씩 지원을 했어요. 당시엔 특산물로 버섯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았거든요. 돈도 생겼겠다, 그들이 우리 회사가 만든 용기를 사들이기 시작했죠.”
그렇게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작은 실수로 재산을 모두 날릴 뻔한 위기도 있었다. 1980년대 고향 사람이 자신을 찾아와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보증서를 보니 꽤 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어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는데, 나중에 보니 나머지 이름들은 모두 가짜였던 것. 그 사람은 20억원을 사기 치고 미국으로 도망쳤고 고 회장의 회사와 집안의 모든 물건엔 ‘빨간딱지’가 붙었다.
하지만 쉽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재기할 수 있는 방법은 수출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동안 사업차 만났던 외국인들의 명함을 모두 꺼내들고 명함에 적힌 주소로 모조리 한글로 쓴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나는 플라스틱 제조업을 하는 고종환이다. 플라스틱 제품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 주문해달라’는 것이었다.
“영어를 모르니 한국말로 쓸 수밖에요(웃음). 그런데 상대방에서 어떻게든 번역을 해서 읽어보고는 연락을 해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연결된 게 소련이었어요. 당시 소련은 고사리를 염장해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그것을 담을 용기를 만들어달라는 거였죠. 처음으로 물건을 배에 싣는 날 컨테이너 차량을 10대나 불렀어요. 1대만 불러도 되는 용량이었지만 고종환이는 이렇게 재기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거죠. 이런 일을 겪으면서 경영을 할 때 정이나 인간관계 등 기업 외적인 것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됐죠.”
한국 고대사에 관심 많아
이런저런 시련을 겪으며 키워온 사업체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됐다. 회사명도 (주)가나다화학으로 바꿨고 1994년에는 (주)세림을 세워 플라스틱 원재료 판매를 전담하게 했다. 그 무렵 고 회장은 ‘이젠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96년 세운 사업체가 바로 (주)세림현미다.
“사실 현미가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알지만 재질이 꺼끌꺼끌해 많이 먹질 않잖아요. 하지만 영양분은 미강(쌀눈과 현미껍질)에 다 들어 있어요. 그 버려지는 부분을 살릴 수 없을까 고민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미강에서 고품질의 현미식용유를 생산하고 남은 찌꺼기로 유기질 비료와 각종 유해물질을 정화시키는 미생물 제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동안 했던 사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로의 진출이었죠.”
현미식용유와 유기질 비료 등을 생산, 판매하는 (주)세림현미가 고 회장에게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무엇보다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고 싶어서 한 첫 번째 사업이기 때문. 현재 전국에 6개 공장을 가지고 있는 (주)세림현미의 1년 매출액은 170억원 정도. 앞으로 5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게 목표다.
“물론 사업가로서 매출을 많이 올리는 것도 중요하죠. 그러나 그보다도 저는 건강을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쌀로 만든 현미식용유를 먹었으면 좋겠어요.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 몸은 우리 땅에서 난 음식을 먹어야 해요. 지기(地氣)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고 회장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우리 몸’ ‘우리 땅’ ‘우리 민족’ 등 ‘우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기자와 만나 처음 나눈 이야기도 ‘우리’ 고구려사를 자기네 변방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었다. 항상 ‘우리’를 위한 사업을 하고 싶었다는 그는 (주)세림현미를 세운 1996년, 사단법인 ‘겨레얼 찾아 가꾸기 모임’을 만들었다.
“주로 회원들과 사연이 있는 고적지를 답사해 조상의 얼을 되새기고, 전문가를 초빙해 역사에 대한 강연을 들으며 자유롭게 토론하기도 합니다. 방학 때는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유적지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요. 세림 직원들도 참여하는데, 무척이나 좋아해요. 사실 정신 없이 일하다 보면 역사나 겨레에 대해 생각할 짬이 없잖아요. 그런데 회사 차원에서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니까 직원 스스로도 무언가 얻는 게 있다며 뿌듯해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