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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賢者)에게 배우는 대폭락시대의 생존철학

이병철의 이성적 ‘몰빵’ 투자 정주영의 ‘늑대식’파도타기

현자(賢者)에게 배우는 대폭락시대의 생존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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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백년을 이어온 서양 주식시장에는 크게 두 가지 계보가 있다. 벤저민 그레이엄에서 워런 버핏으로 이어지는 가치투자파가 한 축이고, 제시 리버모어에서 터틀트레이더에 이르는 추세추종 세력이 다른 한 축. 그들의 투자 철학은 지금 같은 주식 대폭락기에 더 빛을 발한다. 국내에도 양대 세력을 대변하는 현자가 있었다. 반도체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인생 말기에 ‘몰빵’ 투자를 결정한 이병철이 전자라면 굶을 때 굶더라도 일단 포식을 하고 보는 ‘늑대식’ 투자를 한 정주영이 후자다.
현자(賢者)에게 배우는 대폭락시대의 생존철학

한 평생 가치 투자로 일관한 이병철(왼쪽)과 현실을 추종한 정주영.

얼굴 없는 예언자의 등장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자산가치가 반 토막 나고 금융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 금융공황이 오기도 전에 심리적 공황이 먼저 도래한 양상이다. 1997년 외환위기 충격이 아직 뚜렷이 남아 있는 국민에게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10년 전과 다른 것은 이번의 금융위기가 전세계적인 여파를 불러오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전문가에게서 1929년 대공황과 비교하는 소리가 나오고, 그린스펀 전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입에서는 ‘한 세기에 한 번 올까말까 한’이라는 수식어가 오르내린다. 우리는 분명 한 사람의 일생에서 겪기 힘든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다. 하지만 100년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위기라면 인류는 적어도 몇 번을 겪은 셈이다. 주식시장의 역사가 400년에 달함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 또한 그곳에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분명 누군가는 그런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 역사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는 월가에 영혼을 판 수학 천재들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월가는 이미 10년 전에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파산이라는 뼈아픈 경험을 한 바 있다. 이 헤지펀드는 전설적인 채권 트레이더 존 메리웨더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런 숄즈와 함께 만든 것이었다. 적어도 이들의 경력만 보자면 투자자들에게 절대 실패할 수 없을 듯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일반인은 이해하지도 못할 수학 모형을 바탕으로 수익의 신기루를 보여준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결국 이름값에 걸맞은 천문학적 손실을 남긴 채 파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 10년간 이 교훈은 월가에서 전혀 반성의 기회가 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수학 공식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신앙이 지배했지만 결국 거품이었음이 확인됐고 대폭락의 고통을 일반 납세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들 월가의 지배자들이 빠진 오류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첨단 금융기법이 세상을 진보시킬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노벨상이라는 최고 권위와 화려한 이력이 만나 투자자들을 현혹했고 거기에 자신도 속아 넘어갔다. 이런 기술에 대한 맹신이야말로 현재 겪고 있는 금융위기의 주범이다.

하지만 시각을 달리해 보면 주식시장의 역사엔 뚜렷한 두 가지 철학적 계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400년간 진화해온 투자기법의 정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워런 버핏으로 대표되는 가치투자와 제시 리버모어를 시조로 하는 추세추종매매다. 이들은 상승장에서 거대한 수익을 거둔 것으로 주목받지만 대폭락의 시기에 살아남는 법을 몰랐다면 결코 그 명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첨단 금융기법이 아니라 시장과 인생을 일관하는 철학에 있었다.

현자(賢者)에게 배우는 대폭락시대의 생존철학

가치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

월가 승자의 두 가지 생존철학



워런 버핏은 경이적인 수익률만큼이나 인상적인 화법으로 유명하다. 그가 던지는 투자 철학은 미국 사회의 새로운 격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가치투자는 그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레이엄은 ‘투기’라는 이름의 중세 유산을 청산하고 주식시장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하고자 했다. 대공황의 경험을 통해 시장이 비이성적 광기에 전염되면 언제라도 흑사병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수 있음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투자’라는 이름의 백신을 창조하려 했다. 그에게 투자는 이성의 산물이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최대 관심사였다. 그는 바야흐로 주식시장의 근대를 연 데카르트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주가 분석에 활용되는 PER(주가수익비율), PBR(주가순자산비율) 등의 개념이 그의 발명품인데, 이를 통해 투자의 과학은 시작됐다.

그런데 가치에 대한 철학은 그렇게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주식시장의 계몽운동가였다고는 하나 사람들은 여전히 가치투자에서 신앙이나 철학과도 같은 일면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치’라는 개념 자체가 수리적 모델만으로 걸러질 수 없는 것인데다가, 숫자 너머의 세계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철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제 오를지 기약 없는 주식을 오래도록 보유하는 것은 100세가 되도록 아들을 기다린 아브라함의 신앙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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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윤│자유기고가 Kinstinct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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