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평생 가치 투자로 일관한 이병철(왼쪽)과 현실을 추종한 정주영.
현재의 금융위기는 월가에 영혼을 판 수학 천재들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월가는 이미 10년 전에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파산이라는 뼈아픈 경험을 한 바 있다. 이 헤지펀드는 전설적인 채권 트레이더 존 메리웨더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런 숄즈와 함께 만든 것이었다. 적어도 이들의 경력만 보자면 투자자들에게 절대 실패할 수 없을 듯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일반인은 이해하지도 못할 수학 모형을 바탕으로 수익의 신기루를 보여준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결국 이름값에 걸맞은 천문학적 손실을 남긴 채 파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 10년간 이 교훈은 월가에서 전혀 반성의 기회가 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수학 공식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신앙이 지배했지만 결국 거품이었음이 확인됐고 대폭락의 고통을 일반 납세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들 월가의 지배자들이 빠진 오류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첨단 금융기법이 세상을 진보시킬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노벨상이라는 최고 권위와 화려한 이력이 만나 투자자들을 현혹했고 거기에 자신도 속아 넘어갔다. 이런 기술에 대한 맹신이야말로 현재 겪고 있는 금융위기의 주범이다.
하지만 시각을 달리해 보면 주식시장의 역사엔 뚜렷한 두 가지 철학적 계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400년간 진화해온 투자기법의 정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워런 버핏으로 대표되는 가치투자와 제시 리버모어를 시조로 하는 추세추종매매다. 이들은 상승장에서 거대한 수익을 거둔 것으로 주목받지만 대폭락의 시기에 살아남는 법을 몰랐다면 결코 그 명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첨단 금융기법이 아니라 시장과 인생을 일관하는 철학에 있었다.

가치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
워런 버핏은 경이적인 수익률만큼이나 인상적인 화법으로 유명하다. 그가 던지는 투자 철학은 미국 사회의 새로운 격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가치투자는 그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레이엄은 ‘투기’라는 이름의 중세 유산을 청산하고 주식시장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하고자 했다. 대공황의 경험을 통해 시장이 비이성적 광기에 전염되면 언제라도 흑사병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수 있음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투자’라는 이름의 백신을 창조하려 했다. 그에게 투자는 이성의 산물이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최대 관심사였다. 그는 바야흐로 주식시장의 근대를 연 데카르트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주가 분석에 활용되는 PER(주가수익비율), PBR(주가순자산비율) 등의 개념이 그의 발명품인데, 이를 통해 투자의 과학은 시작됐다.
그런데 가치에 대한 철학은 그렇게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주식시장의 계몽운동가였다고는 하나 사람들은 여전히 가치투자에서 신앙이나 철학과도 같은 일면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치’라는 개념 자체가 수리적 모델만으로 걸러질 수 없는 것인데다가, 숫자 너머의 세계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철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제 오를지 기약 없는 주식을 오래도록 보유하는 것은 100세가 되도록 아들을 기다린 아브라함의 신앙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