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온 일본유신회 소속 한 의원의 주장을 필두로 고노담화가 일본 내부는 물론 한국, 중국 등 동북아의 중대한 초점이 되고 있다. 일본 내 일부 세력은 1993년 8월 3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를 밝힌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를 공격하면서 “새로운 관방장관 담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고노담화의 당사자인 일본 정부가 이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당시 일을 검증해보고 싶다” “학술적 관점에서 새로운 검토를 거듭할 필요가 있다” 등 기회주의적 대응으로 일관하는가 하면, 급기야 2월 28일 “정부 내에 ‘고노담화 검증팀’을 설치하겠다”고까지 했다. 아베 총리가 “유신회 의원의 발언에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고노담화 재검토론은 역사를 위조해 중대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이나 다름없다. 나는 고노담화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반박하고,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고노담화가 인정한 5가지 사실

첫째, 장기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됐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던 것이 인정된다.
둘째,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설치됐고, 위안소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 등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셋째,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들이 주도했으며 감언(甘言), 강압 등 본인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경우에 따라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기도 했다.
넷째,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 상황하에서 참혹한 것이었다.
다섯째, 전쟁터로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반도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모집·이송·관리 등은 감언·강압에 의한 것 등 대체로 본인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
고노담화는 이 같은 사실들을 인정하며 ‘본 건은 당시 군(軍) 관여하에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에 큰 상처를 주었던 문제다. 정부는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말씀을 전한다’고 표명했다.
고노담화 재검토파가 부정하려는 것은 고노담화가 인정하는 5가지 사실 중 세 번째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부분이다. 이들은 △위안부 강제연행을 입증할 증거가 없고 △위안부 증언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면서 마치 고노담화 전체가 신빙성이 없는 것인 양 공격한다.
먼저 이러한 공격 수법 자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지극히 일방적인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로 동원될 때 본인 의사가 반영됐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여성이 일본군위안소에 들어가면 감금된 채 강제사역을 당했다. 자유 없는 생활을 강요당하며 강제로 병사의 성노리개가 됐다는 사실은 다수의 피해자 증언과 일본군의 공문서 등을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노담화 재검토파는 이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국제사회에서 엄중한 비판을 받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가장 큰 문제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고노담화의 사실 인정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공격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을까.
위안부 첫 실명 증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중대한 정치·외교적 문제로 부상한 것은 1990년이었다. 그해 5월 당시 노태우 한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한국의 여성단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당국의 사죄와 보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이나 관헌의 위안소 관여를 부정하고 위안부 실태조사 또한 거부했다(1990년 6월). 이에 같은 해 10월 한국의 37개 주요 여성단체가 또다시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다음 6개 항목을 요구했다.
1. 일본 정부는 조선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사실을 인정하라.
2. 이 일에 대해 공식 사과하라.
3. 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혀라.
4.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위령비를 건립하라.
5. 생존자와 유족에게 보상하라.
6.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 교육을 통해 이 사실을 전하라.
이듬해인 1991년 8월에는 위안부였던 김학순 씨가 “일본 정부는 정신대(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처음으로 실명으로 증언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김씨를 포함한 전(前) 위안부 3명(후에는 9명)이 “조직적, 강제적으로 끌려가 도망갈 수 없는 전장에서 일본군을 상대했다”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요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일본 국내에서도 시민단체 및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 정부는 1991년 12월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