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피의 보복 선언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테러의 심장부인가 민족독립의 횃불인가

  • 글: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4-05-31 1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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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이 또다시 들끓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연이은 자살폭탄 테러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암살사건이 반복되면서 이·팔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대(對)이스라엘 강경투쟁의 한가운데에는 무장단체 하마스가 있다. 하마스는 올 봄 두 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자살폭탄 테러는 열세에 놓인 팔레스타인의 공포전술”이라고 주장하는 하마스는 과연 어떤 단체인가.
    피의 보복 선언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중동은 대폭발로 가는가. 올 봄 하마스 지도자의 잇단 피살은 중동이라는 화약고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3월22일 피살)과 가자지구의 새 지도자 압둘 아지즈 란티시(4월17일 피살)가 이스라엘 헬기가 쏜 미사일에 맞아 숨지자 중동 하늘엔 다시금 먹구름이 덮였다. 이스라엘군의 ‘표적살해’ 전략에 잇달아 지도자를 잃은 하마스는 “1000배의 복수를 하겠다”고 외쳐댔다.

    아리엘 샤론 수상이 주도해온 이스라엘의 강공책과 이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인티파다(봉기)’는 2000년 9월 이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5월5일 현재 사망자는 3898명(팔레스타인 2993명, 이스라엘 905명). 1 대 3.3으로 팔레스타인 쪽 희생자가 3배에 달한다.

    현재 중동에는 정치협상이나 평화협상은 사라지고 군사적 대결구도만 남은 형국이다. “정치는 사라지고 총구만 남았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 주변의 평화협상파는 할 일이 없어졌다. 아라파트의 측근이자 평화협상 대표였던 사에브 에레카트는 ‘뉴욕타임스’에 실린 ‘부시여 내 일자리를 돌려다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부시의 친(親)이스라엘 강공책이 평화협상을 실종시켰다고 비난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하마스 정치위원회를 이끌어온 칼레드 마슈알도 “야신과 란티시의 암살로 중동평화협상은 끝장났다”고 선언했다.

    3년반에 걸친 유혈투쟁에서 하마스는 대(對)이스라엘 투쟁의 중심축으로 확실한 자리매김했다. 지금껏 벌어진 총 104건의 자살폭탄공격 가운데 56건이 하마스가 벌인 일이다. 이 공격으로 300명이 넘는 이스라엘인이 죽었다. 미 국무부는 매해 봄 발표하는 ‘글로벌 테러리즘 유형’ 보고서에서 하마스를 ‘테러단체’라고 낙인 찍었다. 그동안 중동문제에 비교적 동정적 태도를 보여온 유럽연합(EU)도 2003년 하마스를 ‘테러단체’로 규정했다.

    그러나 2002년 현지 취재중 만난 하마스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과 압델 아지즈 란티시는 하마스의 저항은 ‘테러’가 아닌 ‘순교작전’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국가테러와 팔레스타인 강점정책에 맞서는 약자에게 자살폭탄 공격은 유효한 투쟁전술이란 논리다. 그들은 “하마스는 테러리스트 조직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특히 야신은 필자에게 “당신의 나라 한국도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선 저항운동가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느냐?”고 되물었다(‘신동아’ 2004년 5월호 ‘21세기 국제정치 화두 테러리즘’ 참조).



    인티파다 기간에 하마스가 줄기차게 무장투쟁을 벌여온 것과 대조적으로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쪽은 이렇다 할 저항을 벌이지 못했다. 오히려 아라파트는 샤론의 강공책과 압력에 밀려 하마스를 겉치레로나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아라파트의 행동은 팔레스타인 동족에 대한 ‘배신’으로 비쳐졌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눈에 비친 하마스는 부패와 거리가 멀고, 지도자 스스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조직이다. 이에 비해 아라파트는 그렇지 못하다고 여겨졌다. 2001년 12월 PA 보안군이 야신을 체포하려 했을 때 주민 수백 명이 길목을 막아 야신 체포 시도를 꺾은 일은 하마스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어느 정도인가를 잘 보여준 사건이다.

    “정치는 사라지고 총구만 남았다”

    인티파다 과정에서 하마스의 지지도는 크게 올라갔다. 아라파트의 무기력한 모습에 실망한 민중은 하마스의 강경투쟁에서 희망을 찾았다. 서안지구 정치중심 도시인 라말라의 여론조사기관인 ‘팔레스타인 정책조사연구소’가 야신 피살 직전인 3월 중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주민 1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일대일 면접조사 결과 응답자의 66%가 중동평화협상의 이정표(road map)가 붕괴됐다고 여겼고, 3명 중 2명은 평화협상보다 무장투쟁이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 조사에서 하마스 지지율은 20%로 나타났다. 이는 인티파다가 일어나기 전인 1999년에 비해 곱절이나 높아진 것이다. 이에 비해 아라파트의 직할 정치조직인 파타(Fatah,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율은 40%에서 27%로 크게 떨어졌다. 아라파트 개인에 대한 지지도도 38%에 그쳤다. 여러 정치세력 가운데 아직까지는 파타의 지지도가 가장 높은 편이지만,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는 하마스가 가까운 시일 내에 지지율을 역전시킬 가능성이 크다. 특히 가자지구에서는 하마스 지지도가 27%로 23%에 그친 파타보다 더 높았다.

    또 다른 여론조사기관인 ‘팔레스타인 리서치문화센터’가 지난 4월 하순 5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하마스 지지율은 31%로 나타났다. 이는 27%에 그친 파타 지지율을 앞선 최초의 조사결과이다. 하마스 지도자의 잇단 피살로 분위기가 격앙돼 조사에 영향을 미쳤음을 감안하더라도, 지지율에서 하마스가 파타를 앞선 것은 올 봄부터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하마스 조직을 와해시키려 공들여온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민중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하마스의 끈질긴 생존력을 인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는 하마스 지도부를 잇달아 제거했음에도 하마스가 여전히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모사드 간부는 이스라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마스는 매우 넓고 깊은 조직기반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효과적으로 하마스 지도력을 제거해왔지만, 그것으로 하마스가 끝장난 것은 아니다”며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하마스 지도자를 제거함으로써 하마스의 힘을 약화시킨 것은 틀림없지만, 하마스는 이러한 ‘일시적’ 어려움을 곧 털어낼 것이란 분석이다.

    하마스는 과연 어떤 세력일까. ‘열심’ 또는 ‘열성’이란 뜻의 하마스(Hamas)의 정식 이름은 ‘하라카투 알-무자와마티 알-이슬라미야’이다. 우리 말로 ‘이슬람 저항운동’이란 뜻.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이 란티시를 비롯한 6명의 창립 멤버와 함께 하마스를 조직한 것은 1987년, 팔레스타인인의 1차 인티파다(1987~93)가 벌어진 직후였다.

    하마스의 궁극적 목표는 팔레스타인에 이슬람 신성국가 ‘움마(Umma)’를 세우는 것이다. 하마스의 방향과 저항운동의 대의(大義)를 밝힌 헌장 제11조는 ‘어떤 당파도 팔레스타인 땅을 포기할 권리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제13조는 ‘지하드(jihad, 聖戰)야말로 대이스라엘 투쟁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중동평화를 위한 국제회의는 시간낭비이자 어린애 장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밖에도 하마스 헌장은 코란의 문구를 자주 인용하며 서방국가와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마스는 정치부문과 군사부문으로 구성된 이원적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즈 알-딘 알-카삼’ 여단이라 불리는 군사부문은 대이스라엘 강경투쟁의 행동대이다. 가자지구 현지에서 만난 하마스 지도자 란티시에 따르면 정치위원회 간부들은 이즈 알-딘 알-카삼 여단의 자살폭탄 공격 세부계획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격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위원회의 몫이다.

    무장활동과 더불어 팔레스타인 빈민을 위한 구호사업과 학교, 병원, 직업훈련소 운영도 하마스의 주요 사업이다. 이러한 사회복지사업을 하마스의 대이스라엘 정치군사 투쟁보다 더 중요한 사업이라고 판단하여 하마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하마스 키운 이스라엘

    하마스의 뿌리는 ‘무슬림 형제(Muslim Brotherhood, 이하 MB)’라는 회교운동조직이다. 팔레스타인 MB에 정치색을 입혀 정치 결사(結社)로 조직한 것이 바로 하마스인 것. 그렇다면 MB란 어떠한 조직일까.

    인터넷 자료(www.i-cias.com/e.o/-mus_br_egypt.htm)에 따르면 회교도들 사이에서 ‘알-이크완 알-무슬리문’이라 불리는 MB는 하산 알-바나란 인물이 1928년 이집트에서 조직했다. 이슬람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바탕,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을 위한 회교공동체를 다져나가는 것이 MB의 목표이다. 이후 MB는 이슬람 문명권에서 주요한 사회운동으로 성장해 현재 70여개 나라에서 활동중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강한 정치색 때문에 이집트와 시리아 등 일부 국가에서는 탄압과 견제를 받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에 MB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것은 1942년 이집트 MB 지도자 하산 알-바나에 의해서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다. 텔아비브대학 샤울 마이샬 교수와 헤르뷰대학 에이브라함 셀라 교수가 함께 펴낸 하마스에 관한 연구서, ‘팔레스타인 하마스 : 비전, 폭력, 그리고 공존(2000년판, 미 컬럼비아대 출판부)’에 따르면 1930년대 전반 팔레스타인 사회에 MB의 초기적 형태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하이파 지부를 이끌던 셰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은 유대인들과 당시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던 영국인 관리들을 암살했다. 알-카삼은 이러한 행위를 지하드라 여겼다. 1935년 알-카삼이 영국군과의 총격전에서 피살되자 팔레스타인은 그를 민족적 영웅으로 기렸다(하마스 군사부문이 ‘이즈 알-딘 알-카삼’ 여단이라 불리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1967년 6일전쟁 결과 서안지구와 가자지구가 이스라엘군의 무단통치를 받게 된 이후 팔레스타인 MB의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이다. 고향 애쉬켈론(가자지구 북쪽에 가까운 이스라엘 도시)에서 쫓겨나 가자지구 샤티 난민공동수용소에 머물던 야신은 1968년부터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MB조직을 키워나갔다. 교사 출신의 야신은 1973년 ‘알-무자마 알-이슬라미(이슬람센터)’를 창립, 교육과 빈민구호활동을 본격화했다. 이때 청소년과 여성이 대거 MB 활동의 일꾼으로 참여했다.

    이스라엘 점령당국은 처음에는 야신의 MB를 합법적 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곧 아라파트가 이끄는 정치조직이자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구심점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 맞서 이슬람의 종교적 색채가 강한 야신의 MB를 키움으로써 팔레스타인 사회를 분열시키겠다는 책략을 꾸몄다.

    피의 보복 선언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연이은 이스라엘의 하마스 지도자 암살로 팔레스타인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야신과 란티시의 초상화를 들고 이스라엘 규탄 시위에 나선 한 소녀.

    오사마 빈 라덴을 키운 것도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한 미 중앙정보부(CIA)였다. 동서 냉전시대였던 1980년대 CIA는 빈 라덴에게 무기와 자금을 대주어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려는 소련군에 맞서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하마스를 키운 장본인이 다름아닌 이스라엘이란 사실은 자못 흥미롭다.

    미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중동문제 전문가 토니 코즈먼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은 아라파트의 PLO를 견제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야신의 ‘무슬림 형제주의’ 조직을 지원했다.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의 전 책임자가 소장으로 있는 이스라엘 대테러연구소(ICT)의 내부 보고서도 그런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ICT 웹사이트에 실린 한 자료는 이스라엘이 야신을 도운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을 때만 해도 팔레스타인 내부에는 종교에 바탕을 둔 사회운동 세력이 약했다. 이스라엘은 아라파트의 PLO를 견제할 목적으로 야신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주었다.’

    야신이 창립한 이슬람센터는 이스라엘의 묵인하에 종교적 선전과 사회사업 등을 펼치며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다와(Dawah)’는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난민과 그 자녀들을 위해 이슬람센터가 세운 사회교육시설과 문화시설이었다. 야신의 조직은 가자에서 서안지구로 그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아랍 산유국들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조는 야신의 큰 후원자였다.

    그러나 야신의 세력을 키워 아라파트에 맞서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사회를 분열시키겠다는 이스라엘의 정책적 계산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 혁명이 일어난 후 이란의 지원을 받아온 헤즈볼라(Hezbollah)가 레바논 남부 이스라엘 접경지대에서 이스라엘군과 무력충돌했다. 이러한 상황은 팔레스타인 회교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야신의 MB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대이슬라엘 저항의식을 꾸준히 심어나갔다.

    급기야 이스라엘 당국은 야신을 위험 인물로 점찍고 1983년 불법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가 2년 후 석방했다. 그러나 야신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구심점으로 부상했다. 야신의 이슬람센터가 1980년대에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라파트의 PLO가 이스라엘의 압박으로 해외로 떠돌았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987년 1차 인티파다가 벌어졌을 때 이스라엘 당국은 야신의 엄청난 조직력에 깜짝 놀랐다.

    1차 인티파다 이후 야신이 하마스를 창립하자, 1988년 여름 이슬라엘군은 야신을 레바논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급기야 1989년 봄 야신은 하마스 대원들 수백 명과 함께 붙잡혔다. 무려 9가지 혐의로 기소된 야신은 무기징역에 15년 유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스라엘 수사기관의 심문 탓에 그는 오른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었다. 15세 때 목을 다쳐 몸이 온전하지 못했던 야신은 옥고를 치르면서 손과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야신이 체포된 후 위기를 맞은 하마스는 고등교육을 받은 30대 후반~40대 초반의 전문인력들로 지도력의 공백을 메웠다. 이들은 야신의 영향을 받으며 청년시절을 보냈고, 이슬람센터의 장학금을 받아 이집트 등 외국에서 유학한 인물들이었다. 지난 4월 피살된 란티시도 이슬람센터의 재정적 지원으로 카이로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인물이다. 1991년 하마스 군사부문 이즈 알-딘 알-카삼 여단을 창설한 주역도 이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이스라엘의 압박을 피해 시리아나 레바논 등지에 머물고 있다.

    야신이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하마스 정치위원회를 이끈 인물은 아부 마르즈크이다. 그는 현재 시리아에 머물고 있는 하마스 정치위원회의 2인자. 마르즈크는 1992년까지 14년 동안 미국 버지니아에 머물면서 미국내 아랍인들을 상대로 팔레스타인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는 강연활동과 하마스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1992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하마스 지도자로 뽑힌 그는 199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붙잡혀 2년 동안 재판 없이 억류되어 있다가 1997년 요르단으로 추방당했다. 1999년 요르단 정부가 하마스 요원에 대한 단속을 벌이면서 다시 시리아로 추방된 그는 지금까지 다마스쿠스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즈크 뒤를 이어 하마스 정치위원회를 이끌어온 칼레드 마슈알의 근거지도 시리아 다마스쿠스이다. 지난 1997년에는 모사드 요원 두 명이 요르단 암만에서 마슈알의 몸에 주사를 놓아 독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사건은 야신이 가자지구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마슈알 독살 사건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이 요르단 당국에 붙잡힌 모사드 요원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야신을 석방한 것이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야신은 이렇게 한 편의 정치드라마 주인공처럼 1997년 가자지구로 돌아왔다.

    칼레드 마슈알은 지금도 이스라엘의 표적사살 대상이다. 란티시 피살 이후 이스라엘은 다마스쿠스에 머물고 있는 마슈알마저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마슈알은 모사드의 암살공작을 피해 끊임없이 주거지를 옮겨다니고 전화번호도 자주 바꾸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도 시리아와 레바논 정부에 양국내에서 활동중인 팔레스타인 ‘테러분자’들을 단속하라고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대해 시리아와 시리아의 영향권에 놓인 레바논 정부는 그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이스라엘 점령정책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점령이 계속되는 한 이들을 단속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하지만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강공수를 목격한 탓일까. 시리아와 레바논은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입장으로 선회했다. 시리아가 2003년 자국 내에서 활동하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다마스쿠스 사무실을 폐쇄한 것도 미국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레바논 정부도 이스라엘의 군사적 행동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선에서 이스라엘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왔다. 부시 행정부는 미 의회를 움직여 2003년 12월 시리아와 레바논 특별법을 각각 제정, 양국에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반이스라엘 활동을 제재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중이다.

    현재 남부 레바논에서 적극적으로 반이스라엘 활동을 하는 세력은 헤즈볼라 게릴라뿐이다. ‘신의 당’이라는 뜻을 지닌 헤즈볼라는 1982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에 맞서 창립된 시아파 이슬람 무장조직이다. 지난 1983년 레바논 내전 당시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됐던 미 해병대 막사를 자살폭탄 차량으로 공격, 미군 병사 241명을 죽인 바 있다. 헤즈볼라와 하마스는 이스라엘이란 공동의 적에 맞서는 우군 관계이지만, 이스라엘의 주장과는 달리 직접적인 연계는 없다.

    하마스 지도부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야세르 아라파트와 경쟁관계에 있다. 하마스의 이념적 노선을 규정한 ‘하마스 헌장’은 이슬람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세속적 성격의 파타를 비롯해 아라파트 세력권 아래 놓인 PLO의 존재를 부인하진 않는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PLO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정치이념에서 하마스는 PLO와 노선이 다를 뿐이다. 1987년 창립 이래 하마스는 PLO 조직의 일원으로 가입했으나 1993년 오슬로평화협정 체결에 반대하며 PLO에서 탈퇴했다. 당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아닌, 부분적 자치를 약속하는 평화협정에 반대한다”며 아라파트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라파트는 오슬로평화협정 체결 뒤 1994년 팔레스타인으로 금의환향했다. 이후 아라파트는 하마스 지도급 인사들을 포함해 하마스 요원 수백 명을 붙잡아 가두었다. 정치적 라이벌 세력을 쓸어버리겠다는 계산에서였다. 하마스는 오슬로평화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1996년 선거에도 불참, 결과적으로 아라파트 친위세력이 자치정부와 의회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로 하마스가 선거를 보이콧한 것은 전략적 실수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하마스는 아라파트의 타협적인 노선을 비판하면서 대이스라엘 강경투쟁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이익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구가 아니라, 여러 기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슬로협정에 따른 선거에는 불참했지만, 하마스는 지역사회에서 치러지는 각종 선거에는 활발하게 참여했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이나 대학 간부를 뽑는 선거에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하마스 성향의 후보를 당선시켰다.

    2000년 9월말 인티파다가 일어나면서 하마스와 아라파트는 대이스라엘 무장투쟁 공동전선을 폈다. 이를 계기로 하마스 안에서는 PLO 조직 속으로 들어가자는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올해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수상이 가자지구에서 철수할 뜻을 비치면서 더욱 진전되고 있다. 아라파트도 하마스가 자신의 지도력 안으로 들어오길 희망한다. 아라파트는 최근 독일 시사주간지 ‘포커스’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는 처음부터 PLO 안에 있었다(그러니까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하마스는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이념적으로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하마스가 알 카에다와 거리를 두어왔다는 점은 미 CIA나 이스라엘 모사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반이스라엘, 반미라는 운동의 기본전략에서 하마스와 알 카에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전략적 측면에서 하마스는 반미보다는 반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또한 알 카에다와 공동전선을 펼치지도 않았다. 이것이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강공책 속에서도 9·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폭풍을 직접 맞지 않은 주요 배경이다. 하마스는 1972년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뮌헨올림픽선수촌을 급습,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죽인 사건과 같은 외국에서의 테러행위도 벌이지 않았다.

    해외성금이 주요 자금원

    하마스 지도자 란티시는 2002년 5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9·11테러 직후 하마스의 저항이 미국에서 벌어진 일과 혼동될 것을 우려해 당분간 투쟁을 멈춘다”고 밝혔다. 하마스의 전략적 공격목표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9·11 이후 이슬람계 자선기관들의 모금이 하마스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있다.

    하마스는 지금껏 사우디를 비롯한 이슬람권 국가들, 유럽, 그리고 미국의 지지자들과 자선기관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다. 수만 명에 이르는 해외 지지자들이 각자 수입의 2.5%를 쪼개 보내오는 성금도 하마스의 주요한 자금줄이다.

    한편 하마스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음양으로 지원을 받아왔다. 후세인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인티파다를 지원했는데,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가족을 잃은 가정에 1만달러,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해 순교자를 배출한 가정에 2만5000달러의 수표를 건넸다. 이 정도의 돈은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회에선 엄청난 액수다. 2000년 9월 후세인이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에 보낸 ‘격려금’은 무려 3500만달러에 이른다. 필자는 현지 취재중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후세인 초상화를 들고 거리로 나선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이렇듯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후세인은 고마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지난 4월 중순, 하마스는 대이스라엘 투쟁자금을 모금했다. 하루 동안 가자지구에 있는 26개 회교사원에서 현금, 금반지 등 100만달러어치가 모였다. 이를 두고 두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하나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자금줄을 옥죄어 하마스가 자금난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마스의 대중적 지지도를 과시하기 위한 일회성 캠페인이라는 해석이다.

    하마스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중동전문가들 사이에선 하마스의 내일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지도자의 잇단 피살로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란 분석과 더욱 강성해질 것이란 분석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하마스가 새로운 지도체계 아래 대이스라엘 투쟁을 격화시킬 것이란 전망이 더 우세하다.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사회경제 공동체에 뿌리내린 강력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대이스라엘 투쟁을 강화해나갈 것이라는 것. 이들은 하마스의 침체는 일시적이며 야신과 란티시의 장례식에서 나타난 민중의 열렬한 지지가 말해주듯 하마스 조직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물론 정반대의 전망도 있다. 지도자가 잇달아 피살되면서 하마스 내부 분위기가 가라앉아 침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란 분석이다. 하마스가 너무 약해져 이스라엘에 대한 효과적인 반격을 가하지 못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3월 야신이 피살된 뒤 새 지도자로 뽑힌 란티시가 입으로는 복수를 외치면서도 이렇다할 보복에 성공하지 못한 채 제 몸 숨기기 급급하다 피살됐다는 점이 ‘하마스 침체설’의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대규모 테러공격 벌어질 것”

    이스라엘 극우파들은 “하마스 세력이 강해지면 이스라엘에 득이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들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사회의 주도권을 잡을 경우 지금까지의 평화협상을 깰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럴 경우 이스라엘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논리를 내세워 팔레스타인을 계속 무단(武斷) 통치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계산이다.

    하마스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높은 지지율은 하마스가 줄기차게 벌여온 투쟁에서 비롯된다. 지도자들의 피살로 흔들렸던 지도부를 재정비한 하마스가 대이스라엘 공격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스스로 존립 기반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군 당국도 하마스가 곧 대규모 살상을 낳을 ‘테러공격’을 벌일 것으로 내다보고 비상경계 근무중이다. 중동의 긴장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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