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풍운아 롤리가 불지핀 영원한 화두, ‘상상의 外地’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6-01-16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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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에서 미국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미국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이며, 친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사회다. 그저 피상적으로 이해하던 나라, 미국을 바로 알기 위해 미국 문화사의 이정표가 된 현장을 찾아 역사의 이면을 들춰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공식 미국사’의 여백을 발견하는 이 기록은 독자를 살아 숨쉬는 과거 여행으로 안내할 것이다. 미국학 전문가인 서울대 신문수 교수가 가이드를 맡았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네덜란드 삽화가 테오도르 드 브리가 1590년 존 화이트의 그림을 판화로 옮긴 작품, ‘원주민 모녀.’

    대부분의 미국사는 영국인이 신대륙에 건설한 정착지 세 곳에 대한 기술로 시작된다. 1607년 버지니아에 건설된 제임스타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순례자 청교도들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그리고 1630년 존 윈스롭(John Winthrop)을 따라 영국에서 이주해온 청교도들이 보스턴에 개척한 매사추세츠만(灣) 식민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앞서 신대륙에서 식민의 꿈을 펼쳐보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영국의 신대륙 건설은 선구자들의 희생과 좌절,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밑거름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 여명기 역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엘리자베스 조정(朝廷)의 풍운아 월터 롤리(Walter Raleigh)가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섬에 건설하고자 했던 식민지다.

    롤리는 1585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식민 원정대를 로어노크에 보냈다. 그러나 첫 원정대는 가혹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불과 10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두 번째 원정대는 후속 원정대가 당도했을 때 이미 종적이 묘연한 상태였다. 수차례의 수색과 탐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방을 끝내 알 수 없어 역사의 미스터리가 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영국은 바야흐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대서양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함으로써, 유럽의 뒤처진 섬나라에서 해양제국을 꿈꾸는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영국이 대서양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데 신대륙 개척을 향한 롤리의 꿈과 집념이 견인차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려 자신이 버지니아라고 명명한 땅에 ‘롤리시(The City of Raleigh)’를 건설, 자신의 이름도 함께 남기려 했던 롤리의 꿈은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롤리의 식민 사업은 실패했지만, 그의 꿈은 후세에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멋진 신세계’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됐다. 영원한 제국 건설을 향한 그의 비전은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고자 한 존 윈스롭의 희원(希願)에, 다니엘 분의 서부 개척 신화에, 조지프 스미스가 이끈 몰몬교도들의 유타 장정에, 20세기 우주 탐험의 열망에 어른거리고 있다. 그 유산의 직접적 상속자인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은 롤리의 비전과 정신을 기려 1792년, 노스캐롤라이나의 중앙 부근에 주(州)의 새로운 행정수도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롤리’로 명명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始原으로

    롤리의 ‘사라진 식민지’ 신화를 찾아 로어노크섬의 롤리 요새 사적지(Fort Raleigh National Historic Site)를 돌아보려 노스캐롤라이나의 채펄힐을 떠난 것은 2002년 8월 하순 무렵이었다. 인근의 듀크대에서 1년간 연구년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직후였다.

    이곳 사람들은 채펄힐, 더럼, 롤리를 잇는 삼각형의 지역을 흔히 ‘연구 삼각지’라 부른다. 채펄힐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더럼의 듀크대, 롤리의 또 다른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를 주축으로 연구소가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학, 생명공학 분야 연구가 활발한 이 지역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와 더불어 미국에서 고급 연구 인력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미국 최고의 연구 단지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면 엘리자베스 궁정의 진정한 르네상스인이던 롤리 또한 흐뭇해하리라.

    롤리를 벗어나니 어디를 보나 평탄한 초원과 숲이다. 병풍처럼 도로의 양쪽을 에워싼 나무숲 너머로 하늘이 푸르다. 도로변의 나무는 곧게 뻗은 북미의 미송이나 전나무 등 침엽수가 주종을 이룬다. 햇살은 여전히 여름의 열기가 배어 있다. 이렇게 3시간 넘게 달린 후 단조롭던 풍경이 달라진다고 생각한 순간, 홀연 길이 트이면서 긴 다리가 환상처럼 펼쳐진다. 야생동물 보호지대로 유명한 앨리게이터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왼쪽 멀리 앨버멀만(灣) 쪽으로 하얀 파도가 눈부시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이윽고 길은 크로아턴만(灣)을 가로지르는 엘리자베스 데어 다리를 지나 로어노크 섬에 들어서고, 곧바로 섬의 제일 큰 도시 만테오에 이른다. 만테오는 1584년 롤리의 원정대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를 배우고 1585년의 식민자들의 통역 겸 길잡이로 활약한 크로아턴족 추장의 아들로, 그의 이름을 딴 만테오 지역은 오늘날 대서양 연안 유수 휴양지의 하나로 탈바꿈했다.

    안내센터에 들러 안내 책자와 지도를 얻은 다음, 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버지니아가(街)로 들어섰다. 거리 양 옆으로 식당과 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버지니아가를 따라 섬 북쪽으로 20분가량 달리자 오른쪽으로 이내 롤리 요새 사적지가 보인다. 안내센터로 들어가니 마침 16세기 식민자들과 원주민의 삶 이모저모를 담은 짧은 영화를 방영하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면서 4세기를 훌쩍 건너뛰어 팍스 아메리카나 문명의 시원(始原)으로, 아니 정복과 수탈로 얼룩진 역사의 서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험욕과 야망

    월터 롤리가 버지니아 식민지 건설을 구체화한 것은 1584년 무렵이다. 당시 롤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궁정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1581년 아일랜드 먼스터 지방의 식민지 반란 평정에 참가해 이름을 얻은 후 런던으로 돌아와 식민지 운영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진언하면서 여왕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롤리는 뛰어난 언변과 기사도적 행동으로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 날 여왕이 순행 중 진흙땅에 이르러 멈칫거리자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땅에 깔아 여왕이 젖지 않고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는 일화는(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왕에게 바친 페트라르카(이탈리아 문예 부흥기의 시인) 풍(風)의 연시와 더불어, 여왕에 대한 그의 헌신과 열정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훤칠한 미남 총신(寵臣)의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아직 30세도 채 안된 그에게 모직물 독점 수출권과 전국의 주류 판매세를 징수할 수 있는 막대한 이권(利權)을 부여했다. 동시에 런던 근교 템스강변의 넓고 고풍스러운 더럼(Durham)가를 하사했다. 서부 대서양 연안 데번주 출신의 시골뜨기 청년이 하루아침에 런던 제일의 부자가 된 것이다.

    막대한 재산을 거머쥐자 롤리의 타고난 모험욕과 야망이 꿈틀거렸다. 그는 일찍이 뉴펀들랜드에 식민의 꿈을 펼치다 죽은 의붓형 험프리 길버트의 신대륙 식민지 건설 특허권을 자신에게 내달라고 여왕에게 간청했다. 1584년 3월, 엘리자베스 여왕은 롤리의 청대로 그에게 ‘기독교 군주가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모든 이교도의 땅을 식민하고 소유할 권리’를 부여했다. 이 칙허야말로 롤리의 앞날과 영국의 신대륙 진출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주지하듯 영국의 신대륙 진출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 비해 한 세기가량 더뎠다. 영국은 종교개혁의 여파로 인한 사회적 동요와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해외에 관심을 돌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신대륙 교섭사는 헨리 7세의 후원을 얻은 베니스 출신의 존 캐벗이 1497년 북미 해안을 탐험한 것에서 시작된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발을 내디딘 지 불과 5년 뒤니 비교적 빨리 신대륙 원정 대열에 들어선 셈이다. 그렇지만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에 이르기까지 윌리엄 호킨스, 리처드 호어와 같은 몇몇 모험가의 산발적인 원정 활동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진출 시도가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집권과 함께 왕권이 안정되면서 영국은 비로소 해외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1577년에서 1580년까지 3년에 걸친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는 영국 사회에 신세계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드레이크가 귀환한 1580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을 병합해 이베리아 반도,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지중해, 그리고 신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강력한 군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이 방대한 제국 경영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신대륙에서 수탈한 금은(金銀)으로 충당했다. 당시 20만명을 넘어선 스페인의 해외 식민이 원주민을 수탈해 본국으로 보내온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은 신대륙을 환상적인 엘도라도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한편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축적한 부(富)를 재원으로 양성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차 증대하는 신교 세력에 대항해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반면 영국은 스페인 제국 경영의 암적 존재이던 네덜란드 내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하면서 신교 세력의 옹호자로 부상했다. 여기엔 영국 정부에 반기를 들도록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을 끊임없이 선동한 스페인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

    영국이 스페인과 맞서기 위해서는 펠리페 2세의 보급기지 구실을 하던 신대륙에서 스페인 세력을 제어해야 했다. 스페인 무역선에 대한 노략질은 이런 이유로 묵인됐다. 드레이크를 비롯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영국 항해가나 식민자가 실상 해적이었음에도 영국 왕실이 이들에게 작위를 주어가며 상찬한 데는 이런 정치적·종교적 동기가 깔려 있다.

    영국의 국내 사정 또한 신대륙 진출의 필요성을 야기했다. 1500년 무렵 200만이던 인구가 1600년 초엔 375만으로 급증했다. 게다가 양모 수요가 늘면서 농지를 목초지로 전환한 종획 운동의 여파로 시골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소작농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런던의 인구는 이 시기에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거리에는 거지와 부랑자들이 득실거렸다.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관리하는 일은 지배층의 큰 짐이었다. 그들은 대다수 인구가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상황이 장기화하면 결국 사회적 질서와 기강이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나태함에 대한 경계가 이 시기 영국 문학을 관류하는 중요한 모티프를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의 반영이다.

    마니토워츠족의 환대

    롤리를 존경하고 그의 아일랜드 원정을 찬양하는 시를 쓴 에드먼드 스펜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항상 빈둥거리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합니다”라고 쓴 바 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롤리는 식민의 꿈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식민할 땅을 물색할 정찰대를 신대륙에 보내기로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특허를 받은 뒤 불과 한 달 만인 1584년 4월27일, 그는 자신이 이끌던 신대륙 연구 모임의 회원인 필립 애마더스와 아서 발로를 대장으로 한 정찰대를 신대륙에 보냈다.

    그들은 식민 후보지로 스페인의 식민기지인 플로리다의 세인트어거스틴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도 카리브해에서 본국으로 회항하는 항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을 염두에 뒀다.

    이윽고 노스캐롤라이나의 아우터 뱅크스에 이르러 원정대는 이곳 지형에 주목한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자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를 제공하면서 회항로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 원정대는 부근을 좀더 자세히 답사하기로 하고, 지금의 케이프 해터러스 부근의 좁은 해로를 통해 팸리코만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지금의 해터러스크섬에 상륙한다.

    일행은 울창한 숲에 토끼와 사슴이 뛰노는 풍요로운 광경에 매료됐다. 발로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꽃 냄새로 마치 꽃이 만발한 오묘한 정원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젖었다. 답사 3일째, 이들은 인디언 원주민과 처음 조우한다. 그들은 윈기나 추장이 이끄는 마니토워츠족이었다. 그들은 우호적이었다. 추장의 동생 그란가니에모가 특히 친절해 일행을 자신의 집이 있는 북쪽의 로어노크 섬으로 안내하며 환대했다.

    원정대는 부근을 답사하고 결국 로어노크섬이 정착지를 건설하기에 최적지란 결론을 내렸다. 일행은 감자와 담배를 얻고 원주민을 데리고 오라는 롤리의 당부대로 두 명의 원주민, 만테오와 완체즈를 대동해 9월 중순 영국으로 돌아왔다. 발로의 보고를 들은 롤리가 흡족해한 것은 물론이다.

    안내소의 영사실을 나오니 밖은 햇살이 눈부시다. 햇살은 400년 전에도 이처럼 시간이 정지한 듯한, 그래서 아득한 시원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만큼 찬란했을까? 1년의 태반은 안개로 자욱하고 비가 내리는 축축한 영국 땅에서 온 발로 일행은 이 눈부신 남국의 햇살만으로 에덴동산에 와 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500에이커가 넘는 롤리 요새 사적지는 얼른 봐서는 여느 공원과 다름없다. 안내센터를 중심으로 주차장, 잔디밭, 잘 손질된 나무가 조화를 이루며 고즈넉한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한 문명의 기원지라고 여기기에 그것은 너무나 범속한 모습이다.

    민간 주도의 ‘자립형 식민지’

    몇 걸음 걷지 않아 ‘롤리의 버지니아’라는 큰 안내판이 보인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하사한 특허에 따라 롤리가 애머더스와 발로를 아메리카의 해안으로 보냈고, 두 사람이 그곳의 인디언 만테오와 완체즈를 대동하여 돌아왔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다.

    롤리는 이 무렵 식민 사업이 예상보다 훨씬 방대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는 여왕에게 국가적 사업으로 식민지 건설을 후원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영리한 여왕은 사업이 실패할 경우의 위신 손상과 스페인과의 정면충돌을 우려해 롤리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대신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 식민지 총독으로서의 위상을 높여주고, 여왕 자신을 상기시키는 명칭으로 식민지를 부르도록 허락하고, 자신 소유의 배 한 척을 내주는 선에서 총신을 달랬다.

    롤리는 하는 수 없이 식민 사업에서 남게 될 이익을 분배하는 조건으로 비용을 분담할 투자자를 모집해 일을 추진해 나갔다. 민간 투자자들이 합자한 일종의 주식회사가 식민지 건설의 주체가 되는 이와 같은 방식은 이후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의 모형이 됐다. 제임스타운은 물론 플리머스 식민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도 모두 이런 방식으로 건설된 것이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월터 롤리는 영국 신대륙 건설의 선구자다.

    민간이 주도하는 식민지 건설 방식은 북미의 영국 식민지를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와 구별하는 큰 요인이 됐다. 식민자들은 투자 비용을 건지려고 식민 사업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이는 본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형 식민지의 건설이 촉진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민간인만의 참여로 민주적 방식의 식민지 운영이 가능해져 훗날 민주주의 정치 체제 정립의 초석이 됐다.

    롤리의 1차 식민 원정대는 1585년 4월9일 플리머스를 떠나 역사적인 항해길에 올랐다. 500명으로 구성된 원정대의 항해 책임자는 롤리의 조카인 리처드 그렌빌, 현지 책임자는 아일랜드 원정 경험이 있고 축성 전문가인 랄프 레인이었다. 이밖에 신대륙 연구모임의 중심인물이요, 수학·천문학·연금술·측량·항해술의 권위자인 토머스 해리어트, 현지의 사정을 스케치할 화가 존 화이트, 답사 책임자였던 애머더스와 발로, 그리고 그동안 해리어트에게 영어를 배운 원주민 만테오와 완체즈도 길잡이 겸 통역으로 승선했다. 지휘 체제의 이원화는 원정대의 이원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다.

    원정대의 대다수는 급료를 받는 용병이고, 실제 신대륙 정착 예정자는 전체의 4분의 1이 약간 넘는 108명이었다. 원정대의 1차 목적은 정착지 건설이었지만, 스페인과 갈등이 심화돼 스페인 식민자들의 공격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오가는 중에 스페인 무역선을 약탈하기 위함이었다. 즉 롤리가 건설하려던 식민지는 정착형 식민지에 스페인식의 정복자형 식민지를 가미한 것이었다.

    식량난, 원주민과의 갈등…

    그러나 식민 형식의 혼선은 계속 문제를 야기했고 롤리의 식민 사업이 실패한 궁극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식민 비용의 조기 회수와 일확천금의 욕망은 식민지에서 금과 은처럼 곧바로 돈이 될 수 있는 것만 찾게 했고, 이로 인해 정착을 위한 노력이 소홀해져 결국 식민 사업 전체의 실패로 이어졌다. 금은의 수탈을 주목적으로 하는 스페인식 식민지가 아니라 농산품을 생산하는 자립형 식민지 건설이 신대륙 경영의 근본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훗날 존 스미스에 의해 비로소 확고해진다.

    원정대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다. 도중에 폭풍을 만나 부속선 한 척을 잃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원정대가 로어노크섬에 도착한 것은 8월 초. 식민자들은 곧 랄프 레인의 지휘로 성채를 쌓고 정착을 서둘렀다. 그렌빌은 8월 말 회항길에 올랐다. 섬에 남은 100여 명의 식민자는 식량난을 염려하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원정대는 과학자 해리어트를 중심으로 인근의 자연 환경과 기후 및 지형을 자세히 기록하고 원주민의 생활상도 주의 깊게 살폈다.

    겨울이 닥치자 식량난은 절박한 현실 문제로 다가왔다. 굶주림을 못이긴 식민자들은 원주민 마을에 내려가 식량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식민자들이 부지불식간에 전염시킨 홍역과 천연두로 많은 원주민이 죽자 이들의 분노가 한껏 고조됐다. 마침내 원주민 추장 윈기나는 백인 식민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이웃 부족들과 연합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가까운 인디언의 제보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식민자들은 추장 윈기나에게 회담을 제의하고 이에 응한 윈기나를 만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기습 공격으로 그를 살해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원정대는 가까스로 겨울을 났다. 그러나 기다리는 보급선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렌빌의 보고를 듣고 롤리는 서둘러 보급선을 보내려 했지만 스페인과의 전쟁 기운이 고조돼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6월 초, 뜻밖에도 프란시스 드레이크의 배가 섬에 기항했다. 드레이크는 카리브해의 스페인 세력권 깊숙이 들어가 산토도밍고를 공략하고 이어 플로리다의 스페인 식민지 세인트어거스틴을 침공한 뒤 북상하던 길이었다.

    식민대장 레인은 드레이크에게 배와 식량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원주민들과의 관계도 악화되고 수심이 얕아 해안 접안도 어려운 로어노크를 버리고 체서피크만 쪽으로 식민지를 옮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폭풍우가 몰아쳐 드레이크가 제공한 배가 파손되고 말았다. 레인은 식민지 이전 계획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한다. 레인 일행이 드레이크의 배에 승선해 영국으로 떠난 3일 뒤, 롤리가 보낸 보급선이 로어노크에 도착했다.

    “신대륙 선전은 기만”

    7월에는 다시 400여 명의 식민자를 태운 그렌빌의 후속 보급선이 당도했다. 이들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여겼던 식민자들을 발견할 수 없어서 당황했다. 인근을 수색하다 만난 인디언을 통해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렌빌은 정착촌을 방치할 수 없어 15명의 군인을 로어노크섬에 남겨놓고 회항한다. 롤리의 1차 식민 사업은 이렇게 성과 없이 끝났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롤리가 보낸 식민 원정대의 과학자요 기록자인 토머스 해리어트. 오른쪽은 그가 쓴 책 ‘새로 발견된 버지니아에 대한 사실적 보고서’의 표지.



    영국으로 돌아온 식민대장 레인은 롤리에게 버지니아 현지 사정을 보고했다. 버지니아와 원주민에 대한 그의 시각은 그동안 완전히 바뀌었다. 인디언은 더는 고귀한 야만인이 아니라 간교하고 호전적인 미개인일 뿐이고, 로어노크 또한 천혜의 지상 낙원이 아니라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일 뿐이었다. 레인은 마틴 프로시버가 발견하고자 했던 아시아로 가는 서북항로를 찾든지 양질의 금광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로어노크는 식민할 만한 지역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레인과 함께 돌아온 다른 식민자들 역시 “신대륙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선전은 기만에 불과했다”고 분통을 터뜨렸고, 식민지 건설의 열기는 급속히 식어갔다.

    이에 원정대의 과학자요 기록자인 해리어트는 식민지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는 글을 써 사람들의 관심을 되돌려놓겠다는 생각에, 만테오의 도움을 받아 신대륙에 관한 답사기를 집필했다. 그것이 유명한 ‘새로 발견된 버지니아에 대한 사실적 보고서(A Brief and True Report of the New Found Land of Virginia)’다. 신대륙 풍물에 대한 최초의 회화적 묘사라고 할 수 있는 존 화이트의 수채화가 곁들여진 이 책은 네덜란드의 삽화가 테오도르 드 브리가 1590년 화이트의 수채화를 자신의 판화로 대체한 후 4개 국어로 번역 출판하면서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책의 서문에서 해리어트는 식민자 가운데 자신만이 알곤킨 인디언 언어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록이 가장 믿을 만한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신대륙은 부를 챙길 수 있는 기회의 땅이며 그 잠재적 가능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 인디언과의 교역은 쌍방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렌빌이 로어노크 섬에 남겨놓은 15명의 식민자를 위해서도 후속 원정대를 신속하게 보낼 필요가 있었지만, 식민사업의 위험과 비용 문제 때문에 롤리는 한동안 망설였다. 롤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사람은 영국 해양 제국 건설의 견인차였던 리처드 해클루트. 그는 체서피크만 안쪽에 은광(銀鑛)이 있다는 여행자들의 정보를 근거로 정착지를 그곳으로 옮긴다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롤리를 격려했다. 때마침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아일랜드 반군 평정의 공으로 영지를 새로 하사받자 롤리는 곧 후속 원정대 구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식민 사업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져 식민자 모집은 쉽지 않았다. 롤리는 타개책의 하나로 식민자들에게 500에이커의 땅(당시 영국 대부분의 농장은 이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을 제공할 것이라고 광고했다. 그 결과 신대륙으로 이주할 뜻이 보다 확고한 사람이 다수 참여했다.

    마침내 1587년 5월8일, 110명의 2차 원정대가 세 척의 배로 플리머스항을 떠났다. 이 중에는 여자 17명, 어린이 9명도 있었다. 대장은 이전에 스케치 화가로 참여한 존 화이트가 맡았다. 만테오도 다시 원정대에 참가했는데, 롤리는 그를 로어노크 섬을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했다. 이로써 만테오는 영국의 관직을 받은 북미 최초의 원주민이 됐다.

    항해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중간에 식량을 실은 부속선을 잃어버리고 카리브해의 중간 기항지에서 보급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원정대가 로어노크 섬에 도착한 것은 7월22일이었다. 일행은 곧바로 그렌빌이 남겨 둔 15명의 식민자를 찾았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인근을 수색했으나 시체 1구만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화이트는 수색을 포기하고 원래의 식민 예정지인 체서피크만으로 가고자 했으나 항해사가 이를 거부했다. 이미 여름이 지나 북쪽으로 더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할 수 없이 로어노크 섬에 짐을 내리고 서둘러 성채 정비와 숙소 마련에 들어갔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식민자들의 정착 노력은 인디언들과의 크고 작은 충돌을 불렀고, 양측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데어, 식민지에서 출생한 첫 아이

    이런 와중인 8월17일, 화이트의 딸 일리노어 데어가 딸을 순산했다. 식민지에서 출생한 첫 아이였다. 아이는 식민지의 명칭을 따 버지니아 데어로 불렸다. 오늘날 이 지역을 데어 카운티로 부르는 것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첫 영국인, 버지니아 데어를 기리기 위함이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롤리 요새 사적지 내의 노천극장.

    손녀의 출생으로 암울하던 화이트의 마음은 다소 밝아졌으나, 식량난은 점점 심각해졌다. 식민자들은 대장인 화이트에게 영국으로 돌아가서 식량을 마련해 오라고 요구했다.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던 화이트는 결국 딸과 갓 태어난 손녀를 신대륙에 남겨두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국의 국내 사정은 그의 즉각적인 회항을 허용하지 않았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임박하면서 정부가 해외로 나가는 모든 선박의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1588년 봄, 노심초사 끝에 화이트는 정부의 징발을 모면한 두 척의 소형 선박을 찾아내고 롤리의 도움으로 약간의 보급품을 싣고 영국을 출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이트의 배는 마데이라 섬 근처에 이르러 프랑스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화물을 빼앗기고 인명 피해까지 발생해 본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가 다시 버지니아로 출발한 것은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해 승리를 거둔 후 1년 반이 지난 1590년 3월이었다.

    그러나 로어노크의 정착지에서 식민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착지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인근을 수색하던 중 화이트는 해안 근처의 나무에 새겨진 ‘CRO’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이어서 그는 정착지 입구에서 다시 ‘CROATOAN’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둥을 찾아냈다.

    식민자들이 한때 우호적이던 크로아턴족 마을로 이주했다고 확신한 화이트는 크로아턴족 마을이 있는 섬으로 배를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불운이 그를 좌절시켰다. 하늘에 먹구름이 일며 폭풍이 몰아친 것. 본격적인 폭풍철을 염려한 항해사는 카리브해로 회항할 것을 고집했다. 크로아턴섬에 들어가자는 화이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카리브해에 이르러 또다시 폭풍을 만나 배가 훼손되자 선원들도 영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스페인의 추가 공격을 우려해 자국 선박의 해외 출항을 금지했다. 게다가 그의 후원자인 롤리는 젊은 에섹스 백작의 등장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잃고 말았다. 버지니아에 원정대를 더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 화이트는 결국 실의 속에 런던을 떠났다.

    화이트는 크리스토퍼 뉴포트가 이끄는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 제 1진이 체서피크만을 향해 출항한 1606년, 아일랜드 코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딸과 손녀를 포함한 버지니아 식민자들이 신대륙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성채? 야금 실험실?

    ‘롤리의 버지니아’ 안내판을 지나 트레일을 계속 따라가니 옛 모습대로 복원한 롤리 요새가 보인다. 그런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새는 안쪽에서 재면 20여m도 채 되지 않는 초라한 규모의 토성이었기 때문이다. 스펜서가 ‘대양의 목자(Shepherd of the Ocean)’라고 부른 엘리자베스 조정 세력가의 야심찬 꿈이 서린 곳이 이렇게 왜소할 수 있단 말인가. 100여 명의 식민자가 자체 방위를 위해 축성한 성채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1941년 요새지가 국립공원관리소로 이관된 뒤, 옛 성터 자리에서 발굴된 16세기 식민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을 근거로 이곳이 요새 터임을 확인했다. 이후 1950년에 남아 있던 해자(垓字)를 파내고 그 흙으로 해자를 따라 안쪽으로 성벽을 쌓아나간 결과,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요새라고 안내서는 설명한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미국의 고고학자들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그후 몇 차례 더 발굴 작업을 한 것으로 돼 있다.

    1993년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 노엘 흄이 그간의 발굴 성과를 종합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 주목을 끌었다. 흄에 따르면 이곳은 랄프 레인이 지휘한 1585년의 식민자들이나 1587년 존 화이트가 이끈 ‘사라진 식민지’의 주인공들이 방어용으로 축성한 성채가 아니라, 레인의 원정대와 함께 온 야금(冶金) 전문가 조아킴 갠스가 해리어트와 더불어 인근에서 모아온 광석 샘플을 검사한 야금 실험실이라는 것이다.

    흄은 이곳에서 발굴된 석제 플라스크와 주발의 형상이 1537년 한스 홀바인이 독일인 연금술사를 풍자해 그린 목판화 속 유리그릇이나 주발과 흡사한 점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흄은 이 성채가 아마 식민자들이 본채와 떨어진 곳에 설치된 이 야금 실험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거나, 16세기 이주자들과는 무관하게 18세기에 발발한 크고 작은 전쟁 때 로어노크 섬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어쨌든 16세기의 식민자들이 축성했다는 요새 터를 찾는 일도, 요새 터의 실체 규명도, ‘사라진 식민지’의 행방도 모두 미스터리다. 기실 역사의 기원이란 이렇게 불가해한 미스터리로 휩싸여 있어야 제격일지 모른다.

    흄의 가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초창기 식민자들이 엘도라도의 환상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새삼 일깨운다. 롤리도 신세계의 개척은 “금과 찬사와 영광을” 얻고자 함이라고 쓴 바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임을 잃은 후 롤리에게 그것은 또한 “욕망을 시험하고 절연된 사랑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1595년 롤리의 기아나 원정은 전적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되찾으려는 몸부림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그의 원정은 쓸모없는 금덩이 원광(原鑛) 몇 조각을 얻어온 정도의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1597년 롤리는 그렇게 원하던 여왕의 신임을 다시 얻어 궁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1599년 사라진 식민자들의 행방을 찾도록 원정대를 세 차례에 걸쳐 로어노크에 보냈다. 그러나 원정대는 폭풍 때문에 모두 해안에 상륙도 못해보고 돌아왔다. 1602년에 보낸 원정대도 체서피크만에서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아무 소득 없이 복귀했다.

    신화로 남은 역사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망과 함께 롤리의 정치적 운명은 급전직하의 내리막길이었다. 제임스 1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국가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사형 집행이 유예된 상태로 13년을 런던탑에서 보냈다. 1617년 제임스 1세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롤리는 다시금 기아나 원정 카드를 꺼내 국왕을 설득했다. 왕은 스페인 군대를 공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원정을 허락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롤리는 전 재산을 털어서 원정대를 준비해 1617년 3월 기아나로 떠났다.

    그러나 이 원정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의 원정대는 오리노코강 깊숙이 내륙을 거슬러 올라가긴 했으나, 금광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작은 강줄기의 입구에서 스페인군의 치열한 공격을 받고 왕명을 어기고 반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롤리는 외아들 와트를 잃었다. 무수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원정을 계속할 수 없게 된 롤리는 처절한 심정으로 죽음이 기다리는 영국에 돌아왔다. 스페인의 요구에 따라 제임스 1세는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삶을 ‘열정의 유희’라고 정의했던 이 영국의 풍운아는 끝내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이 서린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최후를 맞았다. 1618년 10월29일, 그의 나이 66세였다.

    미국인에게 ‘사라진 식민지’는 이제 역사라기보다는 하나의 신화다. 식민자들의 행방과 운명에 관한 무수한 설명과 추측으로 이 신화는 엮여 있다. 보급선을 기다리다 지쳐 남아 있던 작은 배를 타고 회항길에 올랐다가 모두 익사했다는 설,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몰살당했다는 설, 전염병이 돌아 모두 사망했다는 설, 폭풍이 갑자기 불어닥쳐 피하지 못하고 모두 휩쓸려 죽었다는 설, 체서피크만으로 이주해 살다가 그곳 포우하턴 추장에게 몰살당했다는 설, 혹은 크로아턴족에 의탁해 그곳 사회에 동화하여 살았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최근에 또 하나의 가설이 제기돼 관심을 끈다. 1998년 윌리엄앤드메리대 및 아칸소 주립대의 기상학자들은 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해 그 무렵이 지난 800년 동안 가장 혹심한 가뭄이 지속된 시기임을 밝혀내고, 그들이 가뭄으로 인해 결국 굶어죽었을 것이란 추정을 내놓았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꿈

    사적지의 바닷가 쪽에 세워진 노천극장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사라진 식민지’라는 제목의 연극을 상연한다. 1937년 로어노크 식민지 건설 3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퓰리처상 수상작가 폴 그린에게 위촉해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연극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몇 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거르지 않고 이 해변극장에서 상연됐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申文秀
    ● 1952년 출생
    ●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그 시원의 이야기 주인공이 미국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커다란 패러독스다. 그러나 이 부재와 상실은 미국인에게 이상향을 추구하는 영원한 꿈의 상징이 됐다. 어딘가 먼 ‘상상의 외지(a world elsewhere)’로 떠나 새로운 삶을 찾는 시도가 미국 문학의 핵심적 모티프를 이루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롤리의 사라진 식민지는 이처럼 ‘언덕 위의 도시’ 건설이 결코 완료될 수 없는 영원한 미완의 사업임을 부단히 일깨우면서 오늘날에도 미국인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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