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인이 최초로 신대륙에 정착한 곳인 제임스타운과 윌리엄스버그. 두 식민지 도시의 자립은 초기 이주자들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다. 이들 17세기 이주민과 원주민의 생활상을 오늘 우리도 체험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해낸 덕분이다. 전통을 보존하는 방법에서도 미국의 ‘실용적 현실주의’를 엿볼 수 있다.
가령 같은 계몽주의 정치사상의 소산이면서도 미국의 독립혁명이 프랑스 혁명과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인의 이런 현실주의적 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은 인류 일반의 마땅한 삶의 조건과 타고난 권리를 내세워 혁명을 정당화한 데 반해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들은 이념적인 것보다는 종주국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독립선언서에 새로운 이념이 담겨 있지 않다는 비판이 일자 그 초안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전에 누구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원리나 주장을 찾아내려 하거나 이전에 한번도 이야기된 일이 없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다. 인류 앞에 우리 식민지인들이 가진 상식을 밝혀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밝히고자 했을 따름이다.”
이런 현실주의적 사고는 유적을 보존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인들 또한 역사적 현장이나 유물 보존에 여느 나라 국민 못지않게 열성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현재와 무관한 숭모의 대상으로 찬미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 유적은 복고주의적 호사벽(癖)으로서가 아니라 오늘을 만든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 보존되고 기려진다. 그 점은 사적지나 공원의 안내센터에 비치된 소개 책자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고, 이런 곳에서 아동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안내 책자들은 현학적이거나 전문적인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제퍼슨이 말한 상식과 일상적 교양의 심화를 도모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버지니아주 주도(州都)인 리치먼드를 거쳐 영국인 최초의 정착지 제임스타운과 윌리엄스버그를 둘러본 여행은 미국인의 현실주의적 사고방식을 음미하는 기회였다.
제임스타운, 최초의 정착지
제임스타운은 1607년 영국인들이 여러 차례 실패한 끝에 최초로 정착에 성공한 신대륙이다. 월터 롤리가 로어노크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다 실패한 이후 20년 만의 일이다. 작은 섬에서 성채로 출발한 도시지만 제임스타운은 1698년 주도가 윌리엄스버그로 옮겨갈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초기 정착민 사회의 중심지였다. 주도가 다시 리치먼드로 옮겨진 1780년까지 윌리엄스버그는 제임스타운의 전통을 이어받아 종주국 영국의 상류문화를 도입, 독특한 식민지 문화를 일궈냈다.
체서피크 만(灣)으로 흘러드는 다섯 개의 큰 강줄기 가운데 맨 아래쪽 줄기인 제임스 강. 그 강어귀에서 내륙 쪽으로 약 60마일을 거슬러 오르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제임스 섬이고, 제임스타운은 이 작은 섬의 연안에 세워진 정착지의 이름이다. 콜럼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1607년의 이주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정착지와 그 주변 지형의 이름을 당시의 국왕 제임스 1세에서 따왔다.
오늘날 윌리엄스버그 사적지의 한 부분을 이루는 제임스타운은 윌리엄스버그에서 15마일 북쪽의 요크 강가에 자리잡은 독립혁명 유적지 요크타운에서 시작되는 식민지 사적 공원로(Colonial National Historical Parkway)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 공원로의 서쪽 종점 부근, 제임스타운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제임스타운 정착지(Jamestown Settlement)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방문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근에서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17세기 제임스타운의 생활상을 재현해놓았다. 원래의 정착지 터는 이곳과 구분해 ‘역사적 제임스타운’(Historic Jamestown)이라 한다.
빗발이 드문드문 떨어지는 2월의 늦은 오후라 그런지 제임스타운은 찾는 이 없이 적막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안내센터에 들르니, 안내인은 네 명에 불과한 우리 일행을 위해 친절하게도 10분짜리 안내 영화 ‘섬의 목소리’를 보여준다. 영화는 이곳의 역사를 섬의 처지에서 조명했다. 식민지 건설은 인간 편에서는 개척, 문명의 전파, 진보일지 모르지만 섬의 처지에서는 낯선 이방인과 원주민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부른 자연의 훼손이자 수탈의 연속이다.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독립혁명 당시 페트릭 헨리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사자후를 토한 곳이기도 하다.
400여 년 가까운 세월의 풍상을 견뎌온 고색창연한 건물은 허름하면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1607년의 이주자들 또한 이 자리에 돛폭으로 얼기설기 지붕을 이은 천막 교회를 짓고 로버트 헌트 신부의 집전으로 예배를 보았다. 신대륙 최초의 영국 국교회였다.
교회당 앞에는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주역으로 역사에 기록된 존 스미스의 동상이 제임스 강을 굽어보며 당당하게 서 있다. 강폭이 넓은 제임스 강은 도도히 흐른다. 강은 그 옛날에도 이렇듯 도도한 흐름으로 이주자들을 맞았을까. 첫 이주자의 한 사람으로 훗날 지사가 된 조지 퍼시가 “강물의 수심이 6피트가 넘어 강가 바로 가까이에 배를 정박하고 나무에 닻줄을 매었다”고 쓴 걸 보면 제임스 강은 늘 수량이 이렇게 풍부했던 모양이다. 이주자들은 어쩌면 그 도도함에 압도돼 강 이름을 포우하턴에서 제임스로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첫 이주자, 근대 자본주의 첨병
첫 이주자들은 정착지로 로어노크에 이어 다시금 섬을 택했다. 왜일까. 런던의 버지니아 식민회사가 이주자들의 손에 들려보낸 ‘식민지 건설 지침’을 읽어보면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정착지 선정 지침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정착지는 항해 가능한 강 연안, 물산이 풍부한 곳으로 할 것.
● 강은 육지 깊숙이까지 항해 가능하되, 정착지는 강어귀에서 적어도 1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정할 것.
●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강이 여럿일 경우에는 서북항로의 발견에 용이하 도록 서북쪽으로 굽은 강을 택할 것.
● 정착지가 섬이 아니고 육지일 경우 적의 육로 공격시 쉽게 철수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강 연안으로 정할 것. 또한 적이 해로로 공격해올 경우 총을 쏘아 격퇴할 수 있도록 강폭이 너무 넓지 않은 지점을 택할 것.
● 어떤 경우에도 정착지와 강 연안 사이에 원주민이 거주하지 않도록 할 것.
내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기능을 하면서 내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당시 신대륙 경영의 맞수인 스페인 식민자들의 공격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곳. 이런 지정학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곳으로 섬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지침에는 이밖에 인적 자원 운용 방식, 정착지의 구도, 인디언과의 교류시 주의사항 등도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이런 세심함은 새삼 버지니아 식민자들의 성향을 되돌아보게 한다. 신분상으로 그들은 월터 롤리처럼 신대륙 식민사업으로 일확천금을 꿈꾼 귀족과 젠틀맨 계층이 주축을 이뤘다. 그러나 날로 팽창하는 제국 경영의 실무를 맡은 이들의 의식은, 이 치밀한 지침이 말해주듯, 이미 역사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중산계층의 가치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막스 베버가 로빈슨 크루소의 의식에서 발견한 저 ‘내면의 수도사(internal monk)’에 의해 나날의 사고와 행동이 통제되는 근대 자본주의의 첨병, 바로 그 선구자들이었다.
첫 정착자 60% 사망
1606년 12월20일, 첫 이주자 144명이 세 척의 배에 분승해 영국을 떠났다. 선단의 항해 책임은 경험 많은 크리스토퍼 뉴포트가 맡았다. 그는 존 화이트와 함께 로어노크 식민지의 구원 항해에도 참여한 적이 있어 신대륙의 뱃길에 밝았다. 국왕 제임스 1세는 런던의 버지니아 식민회사에 식민사업 특허를 내주며 세 가지를 특히 당부했다. 금을 찾을 것, 아시아로 가는 서북항로를 찾아볼 것, 로어노크에서 사라진 이주자들의 행방을 탐문할 것 등이었다. 로어노크 식민지 건설 실패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식민지 건설 목적은 변화가 없었던 셈이다.
선단은 영국을 떠난 지 6개월 만인 1607년 5월14일 제임스 섬에 당도했다. 통상의 여정대로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에 들러 대륙의 동안을 타고 북상했으나, 역풍을 만나 지체됐다. 항해 도중 39명이 사망해 일행은 모두 105명으로 줄어 있었다. 뉴포트의 지휘하에 이주자들은 체서피크 만으로 흘러드는 강줄기들을 답사한 뒤 회사의 지침에 가장 적합한 제임스 섬에 정주하기로 작정했다. 바다와 적당히 떨어져 있고, 섬이면서도 육지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늪과 연결돼 있어 육지로 진출하고 방어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후와 환경이 좋고 먹을 것 또한 풍부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결정이 현명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섬 전체가 모래땅이라 식수부터 문제가 되었다. 우물을 파도 소금기 밴 물이 나와 강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날씨가 더워지자 이는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 인근 늪의 극성스러운 모기떼 또한 문제였다. 여름이 오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자 이주자들은 이질과 말라리아에 걸려 무수히 죽어갔다. 식량마저 떨어져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희생자는 더 늘어갔다. 영국으로 돌아갔던 뉴포트가 이듬해 1월 보급품을 싣고 돌아왔을 때 제임스타운에는 첫 정착자의 60% 이상이 사망하고 고작 38명이 살아남아 있었다.
식민지 주역 존 스미스
식민지의 이런 가혹한 환경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내홍의 분란에 휘말린 지휘체제 또한 희생을 가중시킨 요인이었다. 버지니아 식민회사는 중지를 모아 낯선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7인 평위원회가 식민지 운영을 책임지는 집단지도체제를 택했다. 그러나 평위원회 제도는 의견의 불일치로 인한 의사 결정 지연과 위원들간의 파당 형성으로 식민 사업을 파행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조짐은 이미 항해 중에 나타났다. 가령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주역인 존 스미스는 선단이 영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란선동죄로 체포·구금됐다. 항해책임자 뉴포트와 불화가 생긴 때문이었다. 스미스는 제임스 섬에 정착한 지 한 달이 다 돼서야 연금에서 풀려나 평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스미스는 평의원으로 일하면서도 첫 위원장으로 선출된 에드워드 윙필드, 그리고 윙필드를 밀어내고 2대 위원장이 된 존 래드클리프와 잦은 의견 충돌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처럼 식민지 지도층과의 갈등으로 그들로부터 소외됐던 존 스미스가 어떻게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주역으로 역사에 기록됐을까. 제임스타운 정착을 위한 스미스의 노력과 업적은 단연 돋보였다. 그는 정착지 주변 지형을 답사하고 인디언과 협상하고 교역해 식량을 구해오는 임무를 맡았다. 일찍이 네덜란드를 거쳐 헝가리, 터키, 러시아를 편력하면서 기른 담대한 용기와 능란한 임기응변 덕분에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유명한 포카혼타스 일화도 이 책무를 수행하는 중 일어난 일이다. 1607년 12월, 스미스는 식량을 구하러 일행 9명과 함께 치카호미니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인디언의 포로가 됐다. 그는 일행과 더불어 인디언 추장 포우하턴 앞으로 끌려갔다. 포우하턴은 체서피크만 인근 125개 마을에 흩어져 사는 32개 부족으로 구성된 포우하턴 연맹체의 수장인 강력한 군주였다. 그는 스미스를 심문한 뒤 죽이라고 명령했다. 인디언 전사가 돌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순간 포우하턴의 딸 포카혼타스가 달려나와 스미스의 목을 껴안고 그를 살려주기를 간청했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포우하턴은 이를 신의 계시로 여겨 스미스를 그냥 돌려보냈다.
이주자들이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스미스가 이처럼 목숨을 걸고 발로 뛰어 구해온 식량 덕분이었다. 이런 공으로 스미스는 1608년 9월, 임기 1년의 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곧바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조치를 취해 식민지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방책을 더욱 공고히 쌓고, 우물을 깊이 파 안전한 식수를 확보하고, 옥수수 재배 면적을 대폭 늘려 식량의 자립도를 높였다.
그는 식민지의 가장 큰 문제점이 일해본 경험이 적은 젠트리 계층 이주자들의 무력함과 나태에 있다고 봤다. 정착지 건설에는 여러 분야의 기술자와 농부가 필요했는데, 첫 이주자의 50% 이상이 젠트리 계층 출신이었다. 이들은 생존에 필요한 실무적인 일은 기피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 찾는 일에 매달리기 일쑤였다. 스미스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모토로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밭을 갈고 사냥에 나서도록 했다.
스미스의 귀환, 제임스타운의 자립
이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존 스미스가 버지니아 식민지의 공식 지도자로 일한 것은 1년도 채 안 된다. 이듬해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는 새로운 특허장에 입각해 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전권을 갖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지사제를 도입, 첫 지사로 토머스 웨스트를 임명했다. 이전과 달라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본의 출자뿐 아니라 노동력의 출자도 허용한 점이었다. 이는 담배 재배가 본격화하면서 긴급했던 노동력 공급수단인 연한계약 노동자(indentured servant)를 고용하는 길을 열었다. 이로 인해 남녀노소 합해 600명 이상이 신대륙 이주를 신청했다.
존 스미스 (John Smith·1580~1631)와 포카혼타스 (Pocahontas·1595~1617) 의 동상 (윌리엄 O. 파트리지 제작, 1922).
그러나 스미스는 자신의 임기가 9월까지이고 게이츠가 도착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사임을 거부했다. 지휘체제를 둘러싼 혼란이 재연됐다. 그러던 어느 날 스미스는 배에서 낮잠을 자다 화약이 폭발해 큰 부상을 당한다. 그러자 위원장직을 더는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해 자리를 내놓고 영국으로 귀환한다. 그후 스미스는 두 번 다시 버지니아 땅을 밟지 못했다. 스미스의 폭약 부상을 두고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이 야기한 살해 음모라는 추측도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스미스가 떠난 후 이주자들은 버지니아 식민사에 ‘기근의 시기’라고 기록된 최악의 겨울을 맞는다. 귀족 출신인 후임자 조지 퍼시는 허세만 부렸을 뿐 별다른 월동(越冬)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겨울을 맞았다. 식량이 바닥나자 그는 30명의 이주자를 포우하턴에게 보내 식량을 얻어오게 했다. 그러나 백인들의 끊임없는 오만한 요구에 화가 난 추장은 이들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두를 살해했다. 인디언의 공격이 두려워 이주자들은 사냥도 나가지 못하고 제임스타운에 갇혀 굶주림에 허덕였다.
이듬해 5월 버뮤다에서 건조한 배를 타고 게이츠 일행이 버지니아에 당도하자 이주자 500여 명 중 440명이 사망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60명이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았다. 제임스타운 또한 거의 폐허가 돼 있었다. 게이츠는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 생존자를 싣고 귀국길에 올랐다. 배가 체서피크 만 입구에 이르렀을 때 전령이 지사 웨스트가 제임스타운에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귀환 명령을 전했다. 이렇게 간발의 차이로 제임스타운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후인들은 ‘버지니아의 번성은 신의 섭리’라고 인용하곤 했다. 이후 제임스타운 식민지는 1612년 존 롤프의 담배 재배 성공으로 자립의 길을 찾으며 비로소 뿌리내리게 된다.
스미스가 예견한 식민지의 미래
다시 앞의 의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제임스타운의 초창기 기틀을 마련한 공이 지대하긴 하지만, 불과 1년 남짓 지사 노릇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존 스미스가 어떻게 버지니아 식민지 건설의 주역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을까.
그것은 그가 ‘기록자’였기 때문이다. 영국으로 돌아간 뒤 스미스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모두 7권의 책을 남겼는데, 그중 다섯 권이 버지니아에 관한 것이다. 비록 플리머스의 식민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포드나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존 윈스롭처럼 십수년씩 지사를 역임한 실질적 지도자는 아니었으나, 존 스미스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초창기 버지니아 식민사의 가장 권위 있는 기록자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비전 제공자였다.
그는 식민지의 지형과 사정, 인디언 원주민의 생활상, 이주자들과의 관계, 식민의 난관과 그 대안에 관한 길잡이인 동시에 식민지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조타수였다. 스미스는 디즈니 영화 ‘포카혼타스’에서 선원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처럼 대부분의 식민자들이 “영광과, 신과, 금을 찾아(For Glory, God and Gold)” 버지니아로 떠나고자 할 때, 자생적인 농장형 정착지 건설만이 식민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은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는 스미스의 비전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버지니아는 물론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도 스미스의 비전대로 자영 공동체의 길을 걸으며 뿌리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카혼타스 신화의 다양한 해석
식민지의 미래상을 그리는 듯, 제임스 강을 지긋이 응시하며 상념에 잠긴 존 스미스의 동상을 지나 옛 요새 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고학자들은 섬 연안이 강물에 유실돼 강가에 면해 있던 원래 요새 터의 15% 정도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의 강둑은 1907년 제임스타운 정주 300주년을 기해 축성된 것이다. 원래의 요새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로 방책을 세운 삼각 모양이다. 이곳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인디언의 대규모 공격을 받자 첫 이주자들은 서둘러 나무 방책을 세우고 포대를 설치했다. 요새 터는 지금 한창 발굴 중이다. 정주 400주년이 되는 2007년까지 발굴을 계속해 좀더 정확한 당시 생활상을 재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요새 터를 둘러보고 다시 교회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전설의 여인 포카혼타스의 날렵한 청동상이 보인다. 포로가 돼 죽을 운명이던 스미스를 구해준 인디언 공주 포카혼타스. 그녀는 초창기 신대륙 식민사에서 로어노크 식민지의 버지니아 데어와 함께 가장 많이 회자된 여성일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동안 시, 소설, 드라마, 그림, 그리고 최근의 만화영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각색·번안되면서 일종의 국민적 신화가 됐다. 그녀와 더불어 존 스미스 또한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건설한 영웅으로 신화화됐으니, 포카혼타스도 제임스타운과 스미스의 이름을 결부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포카혼타스는 별명이고 본명은 마토아카(Matoaka)이다. 포카혼타스는 알곤킨 인디언어로 ‘말괄량이’라는 뜻. 신화의 골격을 제공한 스미스가 적고 있듯 그녀는 호기심 많고 재기발랄했던 모양이다.
이 신화를 그야말로 신화답게 만든 미스터리는 포카혼타스가 스미스를 구해준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스미스 자신은 “동정심과 불쌍한 마음(compassionate pitiful heart)이 발동하여” 그녀가 몸을 날려 그의 머리를 감싸안아 자신을 구해줬다고 썼다. 포카혼타스 신화가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한 19세기 초에는 구원의 이유보다는 죽음 일보 직전에 불사신처럼 살아난 스미스에 초점이 맞춰졌다. 독립 50주년을 앞두고 고조된 국민주의적 애국정서의 시각에서 포카혼타스의 구원은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미국은 이를 극복하고 욱일승천하는 나라로 발전할 것이라는 신의 계시로 해석됐다.
이 해석은 곧 ‘낭만적 해석’으로 대치된다. 낭만적 해석의 참조항은 셰익스피어의 ‘폭풍’ 1막 2장.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가 배가 난파되어 섬에 상륙한 퍼디난드를 보고 첫눈에 반해 “나는 세상에 저렇게 고귀한 분을 본 적이 없어요. 혹 신 같은 분이 아닐까” 하고 외치는 대목이다. 곧 포카혼타스는 첫눈에 이방인 존 스미스에 매료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디즈니 만화 영화 ‘포카혼타스’는 이 낭만적 해석의 극단적 예다. 영화에서는 포카혼타스를 혼기(婚期)의 처녀로 설정했으나, 스미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이런 낭만적 로맨스 플롯에 이끌리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인종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 사람들이 내놓은 또 다른 해석은 포카혼타스가 인디언이 아니라 로어노크에서 식민자 일행을 따라 이곳으로 이주해 추장의 양녀가 된 버지니아 데어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라진 식민지’ 신화를 교묘하게 끌어들인 이 해석은 로어노크 식민자들이 체서피크 만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점에 의존하고 있으나, 버지니아 데어가 살아 있었어도 당시 포카혼타스보다 어린 열 살이었고, 남아 있는 포카혼타스의 판각 초상화의 모습이 인디언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수긍하기 어렵다.
근래의 스미스 연구가 필립 바버는 인류학적 시각에서 이 에피소드를 상징적 의식으로 해석한다. 포우하턴은 스미스를 실제로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에 따라 이 재주 많은 이방인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는 의식을 통해 인디언으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양자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다. 스미스도 포카혼타스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 뒤 포우하턴이 자신을 아들로 대했다고 썼다.
인디언의 이런 풍습은 여러 사례에서 확인된다. 가령 서부 개척의 선구자 다니엘 분도 쇼니 인디언족에게 포로로 붙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의 사냥 솜씨를 높이 산 쇼니족 추장이 그를 양자로 삼아 부족의 일원으로 동등하게 대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 경우 포카혼타스는 이 상징적 의식의 소도구일 뿐이므로 스미스와 감정적으로 연루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제임스타운의 흥망
이런 논의와 상관없이 포카혼타스는 로어노크의 만테오, 플리머스 식민지의 스콴토, 마사스 빈야드(Martha’s Vineyard)의 히아쿰스와 더불어 인종적 화합과 상호 호혜적 문화교류를 수범으로 보인 선구자다.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1614년 식민자 중 한 사람인 존 롤프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전에도 제임스타운의 이주자들을 자주 찾았고 그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도왔다. 남편 롤프가 담배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도움 때문이다.
1616년 포카혼타스는 두 살 난 아들과 함께 남편의 나라를 찾았다. 비상한 관심 속에서 그녀는 곧 런던의 명사가 됐다. 많은 사람의 초대를 받았고 자신이 생명을 구해준 스미스도 만났다. 왕궁을 예방해 국왕 제임스 1세를 만나고, 왕비와 함께 벤 존슨의 ‘크리스마스의 가면극’도 관람했다. 문명사회의 분주한 생활이 그녀에겐 벅찼을까. 불행히도 그녀는 이듬해 신대륙으로 돌아오기 직전 병을 얻어 영국에서 사망했다. 22년의 짧은 생애였다.
포카혼타스가 죽은 뒤 신대륙에서 인디언과 백인의 관계는 그녀가 표상하는 상호 공존이 아니라 일방적 복속을 요구한 비극과 살육의 길을 걸었다. 그녀의 삶은 이런 역사의 큰 흐름에서 비껴선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행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한줄기 가냘픈 빛과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스버그 중앙을 동서로 관통해 뻗어있는 글루스터 공작로(폭 100야드로 18세기 신대륙에서 가장 넓은 가로였다).
오늘날 윌리엄스버그는 북동쪽의 요크타운, 남서쪽의 제임스타운과 더불어 국립공원관리소가 관리하는 식민지 사적 공원의 중심으로, 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명소다.
원래 제임스타운의 외곽 방위를 위해 세워진 윌리엄스버그는 주도가 되기 전 ‘미들 플랜테이션(Middle Plantation)’이라 불렸다. 버지니아 식민지의 행정 중심지로서 윌리엄스버그는 18세기 신대륙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도시로 번성을 구가했다. 그러나 주도가 리치먼드로 옮겨간 1780년 이후 윌리엄스버그는 줄곧 퇴락의 길을 걸었다.
‘역사의 窓’ 윌리엄스버그의 재건
윌리엄스버그를 오늘의 명소로 만든 주역은 이곳 브루턴 감리교회 목사이던 굿윈과 석유 재벌 록펠러 2세다. 1920년대 초, 굿윈이 브루턴 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 윌리엄스버그는 낡고 허물어져가는 건물 속에 잠자는 영락한 도시였다. 나라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역사의 창(窓)’으로서 윌리엄스버그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굿윈은 록펠러에게 자신의 뜻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굿윈과 함께 윌리엄스버그를 돌아본 록펠러는 1926년, 윌리엄스버그의 재건비로 거금 5000만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굿윈은 2년 동안 비밀리에 약 1마일에 걸친 윌리엄스버그의 중심가 글루스터 공작로의 땅을 사들였다. 준비 작업을 끝낸 1928년 굿윈은 주민 회의를 소집해 윌리엄스버그 재건 계획을 공표했다. 주민들의 전폭적인 찬동을 얻어 곧 재건위원회가 구성됐고, 복구사업은 이 위원회의 주도 아래 진행됐다.
재건은 특정한 역사적 유적이나 기념물의 재건이 아닌, 18세기의 윌리엄스버그의 생활 문화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건축가, 고고학자, 역사가의 참여와 협력 속에 무려 60여 년간 진행된 복구작업은 기획자인 굿윈과 록펠러가 사망한 뒤에도 이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그 결과 88채의 당시 건물이 새롭게 수리되고, 뒤에 들어선 600여 채의 건물이 헐렸으며, 엄격한 문헌 고증을 통해 공공건물은 물론 술집, 약국, 음식점을 포함한 500여 채의 건물이 18세기 모습 그대로 다시 세워졌다.
윌리엄스버그의 시간을 18세기로 되돌려놓은 이 방대한 사업은 여러모로 미국적인 특색을 드러낸다.
첫째는 재건의 내용과 방법에 나타난 민주적 정신이다. 윌리엄스버그 재건사업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웅대하게 세우는 귀족적이고 심미적인 취향의 유혹을 거부하고 일반 대중의 일상적 삶이 살아 숨쉬는 지역문화를 되살리고자 했으며, 공적 사업인데도 관(官)을 배제한 채 민간이 자율적으로 진행됐다.
둘째, 그 결과 윌리엄스버그는 학문보다 교양이, 예술보다 일상적 삶이 중시되는 미국 유적 문화의 본보기가 됐다. 미국 사회의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자연사 박물관이나 생활문화 박물관은 이런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셋째, 윌리엄스버그 재건은 미국적 자선사업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준다. 학교, 도서관, 미술관과 같은 지역사회를 위한 미국 공공기관의 대다수는 록펠러와 같은 기업가들의 기부에 힘입어 세워졌다. 스탠퍼드, 코넬, 밴더빌트, 시카고와 같은 명문 사립대학은 물론 헌팅턴, 뉴베리와 같은 도서관, 유명한 폴 게티 미술관, 카네기 홀 등은 모두 기업가의 공익정신의 발로로 세워진 것이다.
미국적 특색의 결합
복원된 173에이커 규모의 ‘식민지 시대 윌리엄스버그(Colonial Williams-burg)’엔 일반 자동차의 출입은 금지돼 있지만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나는 그냥 걷기로 하고 안내센터를 나섰다. 꾸불꾸불한 연결 통로를 따라 10분쯤 걸으니 왼편에 로벗슨 풍차 제분소가 보인다. 제분소에 못미처 오른편 길로 들어서니 주황색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지사 관저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영국 국왕이 임명한 지사가 본국 정부를 대표해 식민지 행정을 관장했고, 독립혁명 기간에 패트릭 헨리와 토머스 제퍼슨이 자치 주지사로서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지사 관저는 버지니아 의회 건물, 혁명기에 정치 집회 장소로 애용된 ‘롤리 여관(Raleigh Tavern)’과 더불어 1930년대에 가장 먼저 복원된 건물이다.
제임스타운 이주자들이 1639년에 세운 영국 국교회 건물 (현재의 것은 1907년 정주 300주년을 기념하여 개축한 것이다).
이곳을 구경하는 한국인은 어쩌면 용인민속촌을 떠올리리라. 약삭빠른 장삿속으로 만들어진 우리 민속촌이 상업주의에 얼룩져 역사의 향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임을 새삼 상기한다. 이곳이라고 어찌 장삿속의 유혹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 식민지인의 일상적 삶의 일부로 표출될 뿐, 과거로 되돌아간 고즈넉한 환상을 깨뜨릴 정도로 노골적이지는 않다.
미국의 저력, 문화전통
글루스터 공작가의 동쪽 끝은 버지니아 의회 건물이 장식하고 있다. 이곳은 1765년 패트릭 헨리가 인지세법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대표 없이는 과세(課稅)도 없다”고 사자후를 토하던 곳이요,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절규하던 독립혁명의 진앙지다. H자 모양의 이층 건물 구조는 식민지 버지니아 의회가 일종의 양원제로 운영된 사실을 보여준다. 주민 대표자로 구성되는 대의원회(House of Burgess·하원)가 왼편 날개 건물을, 국왕이 임명하는 12명의 종신직 의원으로 구성되는 평의원회(Council·상원)가 오른편 날개를 사용했다.
시원스레 뚫린 중앙대로의 서쪽 끝, 의회를 마주보고 있는 건물들이 바로 유서 깊은 윌리엄과 메리 대학이다. 학문과 정치의 중심지가 윌리엄스버그를 동서에서 감싸고 있는 셈이다. 1693년 국왕 윌리엄으로부터 칙허를 얻어 설립된 윌리엄과 메리 대학은 뉴잉글랜드의 하버드에 이어 신대륙에 두 번째로 세워진 고등교육기관이다. 제퍼슨, 먼로, 타일러 대통령과 건국 초에 국무장관과 대법관을 지낸 존 마셜 등은 이 대학이 길러낸 걸출한 졸업생이다.
단아한 건물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캠퍼스의 중심 건물은 렌 빌딩이다. 당시 영국의 저명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의 자문을 받아 가장 먼저 세워진 이 건물을 중심으로 대학이 발전·확장됐다. 하버드 대학이 원래 2세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설립된 것과 마찬가지로 윌리엄과 메리 대학도 신대륙에 영국 국교회를 신장시킬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학을 중심으로 한 고전 과목이 교육과정의 주축을 이뤘고, 학생 수도 18세기 동안에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독립혁명 무렵 윌리엄스버그의 인구가 2000명이었고 그중 절반이 흑인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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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기 위해 ‘식민지 시대의 윌리엄스버그’를 나와 오늘의 윌리엄스버그로 들어섰다. 상주인구 1만2000명이라는 오늘의 윌리엄스버그 거리에 서니 관광지답게 호텔과 음식점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러나 건물의 양식이나 규모로만 보면 복원된 식민지 시대의 윌리엄스버그와 현재의 윌리엄스버그는 별 차이가 없다. 30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삶의 양태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면면히 지켜져 내려오는 강력한 문화전통이 오늘의 미국을 만든 저력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