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와 속도의 시대에 30년간 쉼 없이 방송을 해왔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청취자 역시 같은 목소리에 때로 식상할 법도 하련만, 오히려 10대 소녀가 40~50대 주부가 되어서도 그의 목소리에 변함없이 가슴이 설렌다고 하니,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분명 그에게 어떤 카리스마가 있으리라. 비 오는 날 그를 만나러가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서울 여의도동 MBC 사옥 7층 방송실에서 김씨는 구수한 입담을 풀어가며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목소리로 만나는 그는 화끈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이지만, 방송을 진행하는 그의 표정은 매우 담담해 보였다.
부스 안에서 김씨는 아무런 원고도 없이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조정실의 버튼을 작동하고 있는 이종호 기술부차장에게 물었다.
-원고도 없이 혼자서 진행합니까.
“네. 작가가 있지만 거의 혼자서 진행하시죠. 이슈나 주제에 따른 자료, 메모만을 가지고 저렇게 혼자 진행합니다.”
-까다롭거나 깐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이나요? 김기덕 국장은 매우 푸근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라디오에서 듣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김국장과 10년 동안 함께 일했지만 한번도 의견충돌을 일으켜본 적이 없어요.”
-라디오를 통해 보는 DJ 김기덕은 때로 건방지고, 독선적으로 보이는데요.
“정반대입니다.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같지요.”
방송이 끝나자 김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필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라디오 방송 진행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MBC 아나운서로 입사한 후 1년쯤 지났을 때였어요. 당시 라디오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2시의 데이트’ 진행자가 사정이 생겨 진행을 못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타로 나섰는데, 그것이 제 운명을 바꿔버렸죠(웃음).”
4각봉투, 예쁜 엽서, 팩스, 인터넷…
김기덕씨는 대학시절부터 방송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용산고를 나와 동국대 연극영상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시절 학교 방송국 실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직접 쓴 작품인 ‘파도소리’로 전국 대학방송 드라마 경연대회에서 연출상을 받았고, TBC가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계룡산 사이비 종교’를 르포 취재해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졸업 후 MBC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는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면서 DJ의 길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그에게 DJ 외길 인생 30년은 어떤 의미일까.
“제가 잘났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죠. 영리한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찾아 떠나지 않습니까. 저의 DJ 경력 30년이 기네스북에도 오른 모양인데, 자랑할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소극적이라서 다른 길로 못나갔어요. 안주한 거죠.”
1970년대 군사문화에 짓눌린 암울한 현실 속에서 젊은이들은 음악으로 울분을 분출해냈다. 톡 쏘는 듯한 그의 진행에서 시원함을 느끼고, 따뜻한 그의 목소리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도 했다. 아마 이것이 당시 10대와 20대 젊은이의 가슴에 파고들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그 무렵 내로라하는 선배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신인인 김기덕씨가 꾸준히 팬을 확보할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