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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하면 잃고 베풀면 얻는다’ 귓가에 맴도는 개성상인 정신|김우종

‘인색하면 잃고 베풀면 얻는다’ 귓가에 맴도는 개성상인 정신|김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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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개성상인’들이 오직 신용으로 장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용은 내가 얻기 전에 주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외상 거래는 믿음과 믿음의 관계다. 먼저 믿음을 주면 그 다음에 믿음을 얻게 된다. 그것이 개성상인의 성공의 기본이다.
‘인색하면 잃고 베풀면 얻는다’  귓가에 맴도는 개성상인 정신|김우종

신용을 기반으로 거래하는 개성상인의 정신을 보여준 나의 아버지 김재환.

개성의 설성(雪城) 김씨 가문은 고려 때부터 그 고장을 떠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달랐다. 아버지는 어느날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홀연히 떠나서 파란만장한 운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때 얘기를 훗날 6·25전쟁중에 내게 들려주셨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였다. 나는 황해도 연안읍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 돈암동 집으로 올라왔다. 이날 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결혼 초에 겪었던 아주 긴 얘기를 하시더니 마지막으로 내게 잊지 못할 인생의 교훈을 남겨주셨다.

“우종아, 네게 꼭 일러두고 싶은 말이 있다. 너는 대학생이니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 거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나라인지. 그런데 말이다. 만일 억울한 운명의 길을 강요받게 되면 너는 어찌하겠니? 그냥 받아들지는 않겠지? 그렇다. 부당한 운명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냥 따르지 말아라. 팔자타령만 하며 남이 주는 대로 독약 같은 운명까지도 받아먹고 사는 것은 바보다. 운명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어리석은 노예나 소나 말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운명은 네가 변화시키고 선택해라. 힘들더라도 용기를 내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동안 고향에서 일어났던 일을 들려주셨다.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하라



“고향에서는 좌익한테 붙들려서 죽은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함께 붙들려 갔다가도 거기서 도망쳐나와 살아난 사람도 있어. 그 사람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변화시키고 결정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남이 주는 죽음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쉽고 어려움의 문제만은 아니다. 생각의 차이가 운명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꼭 같은 조건에서도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 것인지 알겠지? 그리고 이것은 생사의 문제만이 아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그렇다. 아주 작은 행복의 문제까지도.”

물론 아버지가 당시 내게 해주신 말씀을 정확하게 옮긴 것은 아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비록 표현의 차이는 있더라도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아버지가 해 주신 말씀을 너무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말씀이 그동안 내가 막연히 갖고 있거나 몰래 숨겨두고 있던 생각에 확신을 주고 큰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지만 나를 타이르실 때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논리적이었다. 그래서 회초리를 들지 않으셔도 나는 아버지께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일제는 연백평야의 커다란 ‘남다지’(南大池를 그렇게 불렀다)를 매립해서 논을 만들었는데 그곳에는 물고기가 많은 수로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자주 여기서 고기를 잡았고, 그러다 보면 해가 저물어야 집에 돌아올 때가 많았는데 그러면 어머니는 꼭 회초리를 드셨다.

“요놈아, 내가 몇 번이나 일렀냐? 죽고 싶어서 내 말 안 듣는 거냐? 물귀신이 되고 싶냐?”

내가 너무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회초리로 다스리려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한 말투만으로도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셨다. 소년 시절에는 아버지가 쓴 소설을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읽었다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아버지는 소설보다는 이론적으로 따지고 굴복시키는 재능을 갖고 계셨던 모양이다.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재능을 물려받아 문학평론가가 된 것같다.

중공군 포로에서 탈출하다

그날 밤 돈암동 집에서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말씀은 그 이듬해 내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나의 운명을 바꿔주고 목숨까지 구해주었다.

그해 겨울 입대했던 나는 다음해 5월 강원도 인제 양구지구 중공군 춘계(春季)공세 때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약 5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다수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포로가 된 나는 다음해 여름 전방 고지에서 비가 내리는 캄캄한 밤을 틈타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뛰어내려 소양강 지류로 몸을 던져 남으로 탈출했다.

받아들여서는 안 될 부당한 운명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내 운명을 바꾼 것이다. 만약 아버지의 말씀이 내게 확신과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남들이 거의 모두 그랬듯이 북한에 그대로 남아서 김일성이 강요한 운명대로 잠시 머물다가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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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우종 전 덕성여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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