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 당일 이화장의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서울시에서 지정한 역사 기념물이니 일반에게 공개할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문 앞에서 조 여사에게 연락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 여사가 문밖까지 나와 반가이 맞았다. 이화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조 여사에게 이화장 문이 닫혀 있는 이유를 물었다.
“20년 가까이 문을 열고 살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문화재 방화나 약탈 사건이 많아서 문을 닫고 살아요. 신원을 확인한 뒤에야 들어오게 해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역사의 현장을 공개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조 여사는 인터뷰를 제대로 하려면 우선 이화장을 관람해야 한다며 곳곳을 안내했다.
이화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던 사저(私邸)다. 이 전 대통령 내외는 광복 후 귀국해 1947년 겨울부터 이화장에 머물렀다. 이승만 박사는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화장을 떠났다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다시 돌아와 1960년 4월28일부터 5월29일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생활했다. 이화장은 1982년 12월28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됐다. 건평 230㎡ 규모로 안팎의 본관,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組閣)을 발표했던 조각정(組閣亭), 유족들의 거처인 생활관으로 이뤄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화장 정문 앞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고 한다. 뒤에 대군의 저택은 장생전(長生殿)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 전 대통령이 조각을 발표할 당시에는 그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조 여사는 이화장의 연혁을 간단히 설명한 후 본관으로 안내했다. 본관에는 이 전 대통령 내외의 유물이 진열돼 있다. 이 전 대통령이 쓰던 몽당연필, 스크랩북, 안경집, 모자, 옷을 비롯해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기워 입힌 손자들의 내복, 종이박스로 된 옷장, 부엌의 낡은 찬장과 놋그릇 등 이 전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또한 1919년 6월 세계 각국에 우리의 독립을 통보한 외교문서, 김규식에게 내린 지령문, 이 전 대통령의 활동사진 등 대한민국 건국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역사자료도 가득했다.
대통령의 양자
본관 안내를 마치고 뜰로 나오며 조 여사는 이화장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화장은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고, 근검절약의 교육장이에요. 탈북자들이 이화장에 오면 편안함을 느낀대요. 옛날에 중앙정보부에서 많이 데리고 왔는데, 우리 집에 기운 내의며 고쳐 쓴 냄비 같은 게 많다 보니 자기네들이 살던 처지와 비슷해 친근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50년 전의 모습에서 고향을 느끼는 거죠. 우리 동포 모두가 고향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화장이에요.”
이화장에 대한 조 여사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또 그만큼 안타까움도 크다고 했다.
“이화장은 서울시기념물로 등록돼 있지만 관리비 같은 게 전혀 나오지 않아요. 시어머님 생전에는 시어머님 앞으로 나오는 연금과 제 남편 월급 대부분을 이화장을 보존하고 수리하는 데 써야 했습니다.”
돈보다 나라의 무관심이 더 딱해 보였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만이 무너져 내린 지붕을 보수하라며 돈을 보냈을 뿐이라고 한다.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 이화장을 찾았지만, 영부인 중에는 어느 누구도 찾아온 사람이 없다.
40분 남짓 이화장을 둘러보고 본관 한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풀벌레 소리를 벗한 자연 속에서 조 여사는 지난 세월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아주 바빠요. 남편 비서 일부터 주방장에다 운전기사 노릇까지 해요. 보시다시피 우리 집은 생활범위가 무척 넓지만, 일하는 사람 없이 제가 다 해요. 5월11일에는 주한 외국 대사 부인들을 초청해 이화장을 보여주고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열었어요. 다들 아주 좋아하더군요. 그런 행사 준비도 하고, 봐야 할 책도 많고, 시아버님, 시어머니 기사 나오면 스크랩도 해야 하고…. 외국에서 오시는 손님도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