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수교를 맺은 후 프랑스 공사가 수집해 가서 아직 돌려주지 않고 있다.”
“논어에 따르면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게 효(孝)가 아니다. 그러나 금의환향(錦衣還鄕)하지 못하는 것 역시 도리가 아니다.”
타일러 라쉬(Tyler Lasch·27)가 화제의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jtbc)에서 남긴 어록이다. 다른 출연자들이 외모, 위트, 개인기 등을 앞세운다면 타일러의 브랜드는 해박한 지식, 고급 어휘 구사, 논리정연한 말솜씨다. 그의 프로필을 읊자면 이렇다. 미국 명문 시카고대 졸업, 6개 국어 구사, 한국 정부 국비 장학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재학…. 이 ‘엄친아’급 스펙의 미국 청년은 어쩌다 한국에 와서 한국을 공부하게 된 걸까.
‘엄친아’급 스펙
인터뷰 약속은 10월 10일로 잡혔다. 전날인 한글날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어 책을 기증받는 행사를 하는데, 그 준비로 바쁘다고 해서다. 이 행사는 타일러가 창립멤버이자 부회장을 맡은 주한미국인유학생협의회(AISA)가 마련한 것으로, 미국의 한국어 교육기관에 한국어 책을 기증하고 영어나 스페인어 책을 기증받는 국제 도서교환 프로그램 ‘Flybrary’(fly와 library의 합성어)의 일환이다. 목표는 1443권. 한글이 창제된 시점(1443년)과 맞췄다.
좋은 뜻의 행사이기에 기증도 하고 구경도 할 겸 ‘신동아’를 비롯해 책을 한아름 들고 찾아갔다. 이미 수십 명의 여중·고생이 행사 부스를 에워싸고 타일러를 바라보느라 여념 없었다. “일 열심히 하는 것 좀 봐. 역시 모범생이야” “저런 남자 만나야 하는데!” 심지어 “사랑해요, 타일러!”라고 소리치는 여학생도,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수줍게 건네는 여학생도 있었다.
▼ 어제 보니까 가히 연예인급 인기더라고요.
“하하. 연예인은 아니죠. 그냥 방송활동을 하는 대학원생으로 봐주세요. 지금은 교과과정을 끝내고 논문을 쓰고 있어요. 내년 2월 졸업이 목표예요.”
▼ 몇 권이나 모았어요?
“3000권이 넘어요. 아직 뜯어보지도 못한 큰 상자도 12개나 되고요. 직접 못 온다고 택배로 보내주신 분들도 있거든요. 절 구경하던 여학생들도 길 건너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갖고 와서 기부해줬어요.”
이렇게 모은 책들은 미들버리대 몰입한국어교육원, 오클라호마주립대, 플로리다주립대 등 미국 고등교육기관에 전달될 예정이다. 타일러는 “제 고향인 버몬트 주(州) 미들버리대학에 한국어 책을 기증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버몬트 출신의 헐버트 박사를 계기로 구한말에 시작된 한국과 버몬트의 인연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참고서에서 만난 헐버트 박사
호머 헐버트(1863~1949)박사는 1886년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 땅에 들어와 외교자문관으로 고종 황제를 보좌한 인물이다. 1890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집필했고, 1905년 을사늑약 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일본의 부당한 행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 돼 한국에서 서거한 그는 ‘한국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대로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었다.
1950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한국 역사의 중요 인물임에도 헐버트 박사가 역사교과서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5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인이 헐버트 박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