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 등 대한민국 대표 남자배우 세 명이 출연하는 태풍급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올여름 무더위를 날려버릴 기세다. 이 영화를 만든 네 번째 ‘놈’ 김지운 감독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궁금하다. 만드는 영화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스타감독 상큼 인터뷰.
하지만 ‘놈놈놈’은 송강호의 것도, 이병헌의 것도, 정우성의 것도 아니다. 이 엄청난 세 남자를 한데 묶은 네 번째 ‘놈’, 김지운(44) 감독의 영화다. 그는 ‘조용한 가족’(1998년)‘반칙왕’(2000년)‘장화, 홍련’(2003년)‘달콤한 인생’(2005년) 등 한결같이 톱클래스 배우들을 출연시켜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이번 영화도 그 뒤를 잇고 있다.
김 감독은 서울예대 연극과를 중퇴하고 서른넷 될 때까지 ‘전업 백수’로 놀다가 일주일 만에 후딱 써낸 시나리오가 공모에 당선돼 덜컥 영화감독이 된 남자다. 그의 영화는 특이한 인생 행보만큼 언제나 예측불허였다.
그런 그의 영화 가운데서도 ‘놈놈놈’은 비슷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성취다. 그 자신도 ‘놈놈놈’이 “한국 영화가 도달 불가능 지점이라고 생각했던 스펙터클에 닿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도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7월1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따져봤다.
사실 이 영화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그림’에 비해 내러티브가 빈약하다는 비판이 적잖게 나오고 있다. 작정하고 툭툭 던진 까칠한 질문에 김 감독은 “이 영화에 이야기는 없다”며 “한국 영화 초유의 시청각적 쾌감을 즐기러 오시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결코 화기애애하진 않았지만, 서로 속내를 확인하려 애썼던 한 시간의 대화를 전한다.
인생 질주하는 남자들
▼ 감독님은 ‘찐한’ 영화 스타일 안에 하고 싶은 얘기덩어리를 슬쩍 감춰놓잖아요? 데뷔작인 코믹잔혹극 ‘조용한 가족’에 대해서도 “인생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 슬픈 현실을 장르 위에 얹었다”고 설명했지요. ‘놈놈놈’에선 그런 진정성이 좀 약해진 것 아닌가요? 그냥, ‘재미 있자고 만든’ 영화인가요?
“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그림이 광활한 대평원을 각기 다른 이유로 미친 듯이 질주하는 남자들의 모습이었어요. 거기에 인생의 어떤 부분을 은유해 담을 수 있을까, 생각했죠.
달밤에 사막에서 도원(정우성)이 나란히 누운 태구(송강호)에게 얘기하잖아요. ‘뭔가를 찾아서 쫓기 시작하면 다른 무언가가 나를 쫓아온다.’ 그런 게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욕망은 끊임없이 사람을 쥐고 흔들죠. 사람을 타락시키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또 사람이 살아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욕망을 좇아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나가죠. 결국 그런 사연들이 치열하게 얽혀요. 미친 듯이 무언가를 쫓고, 또 무언가가 쫓아오고.
추격 ‘신(scene)’에서 그런 지옥도의 느낌을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단, 신나고 경쾌하게. 영화 인물들은 정말 처절한 상황이지만요. 김혜수 씨가 시사회를 보고 나오더니 ‘이 영화 미쳤어요!’ 하더군요.(웃음) 박찬욱 감독도 ‘순수 오락영화에 이렇게 광기가 서린 거 처음 봤다’고 했어요.
단순한 레이싱 액션이었으면 그런 말 안 나왔겠죠. 인생의 처절한 부분들, 욕망을 좇으면 또 뭔가 쫓아오는,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추격 신에서 단순한 액션 이상의 어떤 강렬한 인상이 전해졌으면 해요.”
▼ 그러고 보니 사막에서 쫓고 쫓기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게….
“맞아요. 카오스. 아수라장. 아비규환. 그런 상태에서 어쨌든 계속 살아남으려고, 무언가 성취해내려고 하죠. 영화에서 다들 갖고 싶어하는 보물지도, 이건 사실 ‘로또’ 같은 거잖아요. 종잇조각, 그걸 맹렬하고 집요하게 좇아가죠. 삶의 상승을 위해. 그것이 행복이라 생각하고요. 모티브는 욕망과 집착이에요. 창이(이병헌)가 태구를, 도원이 창이를, 태구가 보물을 좇는 거, 모두 다요.”
▼ 스스로 ‘먼젓번 연인에게 못해준 것을 다음 연인에게는 잘 해주려고 애쓰는 서투른 남자 같은 영화감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비유하면 ‘달콤한 인생’은 거의 완벽한 연애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그런데 ‘놈놈놈’은 뭐랄까, 육체관계에만 너무 몰입한 연애 같다는 느낌, 헤어지고 나니 남은 것 없이 공허한…. 구경한 사람의 느낌은 그렇습니다. 스스로 어떻게 느끼나요?
“‘달콤한 인생’이 뭔가 계속 감추려고 하는 영화였다면 ‘놈놈놈’은 밖으로 다 끄집어내는 영화예요. 사랑한다는 표현을 못하고 머뭇머뭇 주위를 맴돌다가 자멸하고 황폐해지는 얘기가 아니라, 강렬한 섹스를 통해 진심을 전달하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엄청난 섹스 같은 액션을 보여주는 영화죠.”
스토리라인 논란
▼ 리안의 ‘색, 계’(2007년) 처럼?
“그렇죠. ‘색, 계’의 웨스턴 버전?(웃음) ‘색, 계’도 육체적인 부딪침만이 아니라 감정적, 정신적인 부딪침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거잖아요. 헤어지고 난 다음의 공허함이 있다면, 그게 정신적인 교류를 못한 공허함인지 아니면 있는 걸 다 꺼내고 몰입해 소진한 다음이라서 공허한 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놈놈놈’은 제가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서 진심을 전달하려고 한, 진심과 혼신을 담은 연애 같은 영화입니다.”
▼ 이야기의 흐름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병헌의 내레이션은 약간 썰렁하고, 송강호가 감옥에서 만난 애들은 갑자기 나왔다가 사라지잖아요. 이청아, 엄지원도 좀 뜬금없고요. 엄지원은 자세히 안 보면 그 사람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예요. 왕가위의 ‘동사서독’에서 슬쩍 그림만 나왔던 장만옥을 연상시킵니다. 혹시 크랭크인 때까지 시나리오가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던 것 아닌가요?
“이야기를 완벽하게 만들어서 편집해보니까 2시간 40분 정도가 나왔어요. 처음 기획할 때부터 한국에서 성취하지 못한 어떤 시청각적 성취를 얻겠다는 의도가 컸어요. 마지막 장렬한 추격 신으로 가기 위해 너무 말도 안 되는 전개만 아니면 그냥 오케이하고 바로바로 넘어갔죠.
쉼없이 달려야 하고, 그렇게 달리는 속에서 주제를 파악해야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약간 불균질하고 개연성이 부족하다 싶은 부분이 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한국에서는 다분히 영화를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야기는 영화의 한 요소일 뿐이에요. 이야기 말고도 다른 요소가 많죠. 그런 간극 때문에 불만도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이 영화를 왜 만들려고 했는지는 영화 속에 잘 나와 있다고 생각해요. 흔히 얘기하는 ‘스토리 라인’으로 영화를 만들려던 것이 아니었죠.
지적은 달게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무엇을 보여주려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를 먼저 판단하고 그것을 잘 수행했느냐 또는 그렇지 못했느냐를 평가해주신 다음에 이런저런 것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해주면 좋겠어요. 이야기의 개연성 부족이 영화의 치명적 단점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지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이거 말 되니 안 되니? 말 되니? 그럼 빨리 가자. 달리자’ 그랬어요. 제일 많이 했던 얘기가 “달려. 더 빨리. 더 빨리. 더 힘차게!”였어요. 감독은 영화 어디에 방점을 두는지에 따라 그걸 위해서 다른 부분을 약간 포기하거나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2시간 40분짜리를 상업영화 버전으로 내놓을 자신은 없었고요. 모자란 부분이 없지 않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성취감은 큽니다.”
제작비 170억 투입
▼ 정말 멋진 그림이 잘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 드니까 아쉽다는 거죠. 촬영이 부족해서 편집할 때 원하는 그림이 부족하지 앉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힘을 준 부분에 대해 평가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2% 부족한 부분은 알고 있으니까. 프랑스 칸 영화제 상영 버전(version)은 개연성이 더 떨어져요. 인물들이 ‘퍽, 퍽, 퍽, 퍽’ 막 시원스럽게 들어오는데, 아마 그게 스타일로 받아들여져서 사람들이 더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칸 영화제 버전을 본 사람들은 국내 극장 상영버전이 중간중간에 설명이 들어가니까 전개가 느려졌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건 칸 버전을 본 사람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에요. 처음 본 사람은 너무 정신없이 빠르게 전개된다고 얘기하거든요.
칸 버전에서 태구가 계속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한국 버전에서는 세 사람의 밸런스가 훨씬 좋아졌어요. 그래서 마지막 대결이 감정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도 얻었고요. 관계에 초점이 모아지기 때문에 한국 관객을 위한 버전으로는 지금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 결말을 칸 버전처럼 열어놓았다면 어땠을까요.
“세 사람이 다 죽은 것처럼 묘사한 거요?”
7월7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김지운 감독(왼쪽 첫 번째)과 출연 배우들.
“그게… 멋있죠(웃음). 하지만 제작비가 170억원이나 든 영화를 그렇게 끝내기에는 부담이 있어요.”
▼ 한국 관객은 설명이 확실한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해피 엔딩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칸 버전은 순수한 쾌감에 극단적으로 치중했지만 한국 버전에는 아이러니를 많이 넣고 싶었어요. 스포일러(spoiler·영화 줄거리나 주요 장면을 미리 알려줘 흥미를 떨어뜨리는 사람) 같아서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태구는 마지막에 어찌하다 보니 독립군이 해야 할 좋은 일을 해내죠. 지겹게 쫓아다녔던 창이는 태구에게 보석을 줍니다. 그렇게 뒤죽박죽 인생유전이 돌출되는, 삶의 아이러니를 그리고 싶었어요. 한국 버전이 더 오리지널 시나리오대로 만든 거예요.
제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이러니입니다. ‘조용한 가족’에서 ‘학생은 고독이 뭔지 아느냐’고 물으니까 ‘고독’을 듣지 않은 채 ‘학생’이란 단어만 듣고 ‘나 학생 아닌데요’라고 대꾸하잖아요.
마찬가지로 ‘반칙왕’에서도 송강호가 장진영한테 ‘링에 섰을 때 비로소 해방감과 힘을 얻었다’며 마음에 담아둔 말을 막 하고 있을 때 장진영이 날아간 꽃을 집으러 갔다 와서 ‘뭐라 그러셨어요’ 되묻죠. ‘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도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얘기고요. 나의 진심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해서 어긋나는, 균열하는, 파멸하는 관계와 자아. 이런 것. 자신한테 진실한 순간이 남한테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안타까움, 부질없음.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이 많아요.”
스타일리시한 오락 영화
▼ 해외 로케이션에 대한 한국영화 징크스 얘기도 나옵니다. 제작사 관계자가 “‘놈놈놈’의 성패가 대작영화 판도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흥행은 잘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시사회 보고 나온 한국 감독들이 한 마디씩 했는데 대개 반응이 ‘싸게 찍었다’였어요. 영화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아마 놀랄 지점이 많이 있을 거예요. 그들의 진심 어린 얘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반 헬싱’이나 ‘스파이더 맨’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최첨단 장비로 보여줘야 할 장면을 ‘놈놈놈’에선 전부 아날로그적 방법으로 했어요. 외국 전문가들이 보고 놀란 점도 그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대단히 획기적이고 파워풀하다고 받아들인 것 같아요.
이런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연출하면서 이 정도의 제작비만 썼다는 걸 듣고 한국 감독들은 물론이고 외국 전문가들도 대단히 흥분하면서 ‘엄청난 작업을 했다’고 평해줬어요.”
▼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 삽입된 제작진 스틸 컷은 그런 ‘과정의 노력’을 보여주려 한 건가요?
“스태프와 배우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의 표현이었어요. 이 영화는 제가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스태프와 배우가 다 감독 같은 마음을 갖고 이뤄낸 성과이고 성취이기 때문에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정말 커요. 그걸 전달하고 싶었어요. 다들 자기 영화처럼 만들면서 헌신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예요. 이렇게 광기 어린 오락영화가 나온 건 스태프와 배우 여러분의 열정과 광기 덕분입니다.”
▼ 음악이 정말 좋습니다.
“‘놈놈놈’은 굉장히 스타일리시한 오락영화예요. 음악이 있고 없고 볼륨이 올라가고 떨어지는 것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요, 느낌이. 밥 포시 감독의 ‘올 댓 재즈’(1979년)는 화려한 안무와 음악이 전부인 영화죠. 진득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 영화가 아니에요. 그래도 칸 황금종려상을 받았어요.
제가 그런 정도까지 이미지나 음향 수준을 끌어올리지는 못했겠지만, 왜 이렇게 감독이 미친 듯이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 주제를 얻어가는 방법을 추구했을까 하는 얘기가 풍성하게 나오면 좋겠어요. 지극히 순수한 영화적 요소들로 만들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놈놈놈’을 좀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