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에 네 번이나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사진).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選) 대통령인 그는 임기 내내 대공황과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제왕적(?)인’그가 특히 좋아한 술은 ‘칵테일의 제왕’이라고 하는 마티니였다. 루스벨트는 거의 매일 마티니를 즐겼고, 자신이 바텐더가 돼 직접 마티니를 만들었다. 저녁 각료회의가 있을 때면, 거의 항상 저녁 식사 전에 직접 마티니를 만들어 각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마티니는 영화 007에서 제임스 본드의 “젓지 말고 흔들어서(shaken not stirred)”라는 전설적인 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 미국 뉴욕 하이드파크의 허드슨 밸리 타운에서 부유한 명문가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사라(Sara Delano·1854~1941)는 아들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엄격함을 보이면서 자식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이런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거의 매년 유럽을 드나들면서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 또 승마, 사냥, 조정, 골프 같은 상류사회에 걸맞은 각종 취미 생활을 즐겼다. 그가 항해 기술을 배우자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요트를 사주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이렇게 당시 명문 집안의 관습대로 정해진 학교를 다니지 않고 귀족식 사교육을 받으며 귀공자로 성장해나갔다. 그러다가 14세 때 매사추세츠 소재의 성공회 소속 사립 명문학교인 그로톤 기숙학교(Groton school)에 입학했다. 그는 교장이던 피바디(Endicott Peabody·1857~1944) 목사의 영향으로 기독교 박애사상에 눈을 떴다.
친척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롤 모델
하버드대 재학 시절인 1901년 그의 12촌형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 재임기간 1901~1909)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비록 그의 집안(민주당 지지)과는 정치적 성향은 달랐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강력한 지도력과 개혁 마인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의 정치적 롤 모델이 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하버드대에서 4년간 경제학 공부를 마친 뒤 1904년 컬럼비아 법학 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190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루스벨트는 1905년 3월 당시 여전히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딸이자 그에게도 먼 친척이 되는 두 살 아래의 엘리너(Eleanor Roosevelt·1884~1962)와 결혼했다. 약관의 나이였던 1903년, 백악관에서 열린 새해 만찬회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사랑에 빠졌지만 엘리너를 탐탁지 않게 여긴 어머니 사라의 반대로 한동안 결혼 공식 발표가 미루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그로톤 기숙학교 시절의 옛 스승 피바디가 주례를 선 이 결혼식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릴 때 양친을 잃은 엘리너를 위해 결혼식에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개성 강한 시어머니 사라와 며느리 엘리너의 불편한 관계로 다소 힘든 면도 있었으나 6남매를 낳을 정도로 초기에는 비교적 순탄했다. 그러나 얼마 후 루스벨트가 엘리너의 개인 비서이던 루시(Lucy Mercer·1891~1948)와 혼외정사를 가지면서 결혼생활에 결정적으로 금이 갔다. 그들의 불륜 관계를 알게 된 엘리너는 즉시 이혼을 요구했지만, 어머니 사라는 아들의 정치 역정에 큰 흠이 될 것을 걱정해 이혼에 강력 반대했다. 루스벨트 자신도 엘리너에게 다시는 루시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루스벨트 부부의 한번 깨어진 신뢰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한다. 다만 엘리너는 이 사건 이후에도 야망을 가진 정치가의 아내로서 나름의 내조 역할은 수행한다. 루스벨트와 루시의 관계는 훗날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며, 1945년 루스벨트가 뇌출혈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에 그와 같이 있었던 사람도 루시였다.
먼저 루스벨트의 사회생활부터 살펴보자. 190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루스벨트는 이듬해인 1908년 당시 유명한 월스트리트 회사에 법률 담당으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10년 루스벨트는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민주당 후보로 뉴욕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그의 명성과 집안 배경으로 무난히 당선된다. 이후 당내 파벌 싸움에서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그는 점차 강력한 당내 기반을 확보해나가기 시작한다. 1912년 재선에 성공한 그는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되는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재임기간 1913~1921)을 적극 지지해 그의 당선에 일조한다. 루스벨트는 윌슨의 당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3년 3월 해군차관에 임명되면서 뉴욕 주 상원의원직은 사퇴한다.
루스벨트의 두 여인, 엘리너와 루시
루스벨트는 이후 7년 남짓 이어진 해군차관 재임 시절, 해군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해군력 증강에 온 힘을 쏟는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인 1917년 독일군의 잠수함 공격이 시작되자 미국 해군을 본격적으로 유럽에 파견할 것을 윌슨에게 건의하기도 했지만 이 제의는 거절당한다. 그러나 이듬해에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해 미국 해군의 전쟁 개입 문제를 구체적으로 상의했다. 이때 훗날 중요한 정치 동반자가 되는 영국의 처칠을 처음 만난다. 루스벨트는 이후 자신이 직접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기를 희망했으나, 전쟁은 그해 11월 독일의 항복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1920년 7월 해군차관 직을 사임한 루스벨트는 그해 말에 열린 제29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오하이오 주지사 콕스(James M. Cox)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 그의 부통령 출마는 당시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를 감안할 때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선거는 결국 상대 후보인 공화당 하딩(Warren G. Harding·1865~1923, 재임기간 1921~1923)의 승리로 끝났다. 루스벨트는 선거 패배 후 재기를 기약하며 일시적으로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런데 1921년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왔다. 그해 7월 캐나다의 캄포벨로 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소아마비 진단을 받아 갑자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당시 그의 병은 발병 나이와 제반 증상으로 보아 소아마비라기보다는 말초신경계에 급성 다발성 신경증상을 일으키는 ‘길란 바레 증후군(Guillan Barre·syndrome)’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현대의학의 분석이다. 정확한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상하기 힘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재기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다른 고통 속에서도 꾸준한 재활 치료를 통해, 비록 평생 휠체어에 의존하는 생활을 했지만 주위의 놀라움 속에 정계로 복귀한다.
192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런 업적을 바탕으로 주지사 재선에 성공한 그는 재임기간(1929~1932) 중 최고의 주지사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마침내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다.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연임 가도
1932년 선거에서 루스벨트의 상대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당시 현직에 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1874~1964, 재임기간 1929~1933)였다. 당시는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 주식시장을 덮친 주식 대폭락(검은 목요일)을 신호탄으로 시작된 대공황의 영향이 미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선거 유세 기간 내내 루스벨트는 후버 진영의 경제 실정(失政)을 신랄하게 공격했고, 결국 57%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정식 취임한 루스벨트는 취임 후 즉시 대공황의 와중에서 허덕이는 미국 경제를 살리고자 ‘뉴딜(New Deal)’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뉴딜 정책은 구제(Relief), 부흥(Recovery), 개혁(Reform)의 이른바 ‘3R 정책’을 슬로건으로 해 그 후 7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진행됐다. 이 기간은 크게 경제 구제와 부흥에 역점을 둔 1기(1933~1934)와 사회개혁을 중시한 2기(1934~1937), 그리고 뉴딜정책이 정체기를 맞자 제2차 세계대전에 대비한 군사비 지출 증가로 경기 회복을 도모한 3기(1937~1939)로 나누어진다. 뉴딜정책으로 1935년 여름부터 경기가 조금씩 상승하자 루스벨트의 인기는 절정에 달한다. 이 여파로 그는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60.8%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대통령 재선 후인 1937년 미국 경기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지만,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1941)하면서 미국 경제도 회복길에 들어선다. 이 때문에 오늘날 뉴딜 정책의 진정한 효과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만일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더라도 뉴딜정책으로 당시 침체된 경제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었을까’하고 반문한다.
한편 루스벨트의 두 번째 임기 당시 국제 정세는 히틀러의 등장으로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다가 기어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이런 가운데 루스벨트는 1940년, 그때까지 미국 정치계의 불문율을 깨고 대통령 3선에 도전한다. 그는 이 선거에서 위기 상황일수록 그와 같이 경륜이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고,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당신들의 자식들을 보내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결국 55%의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루스벨트의 세 번째 임기(1941~1945)는 제2차 세계대전과 궤를 같이했다. 재임 초기에는 여전히 참전 지지 세력과 반전 세력 사이의 갈등이 지속됐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합군에 대한 군수 지원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은 공식적으로 세계대전에 뛰어든다.
심혈관질환의 백화점
‘칵테일의 제왕’으로 불리는 마티니.
루스벨트의 4번째 임기는 임박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처리 문제로 긴박하게 진행됐다. 그는 1945년 2월 소련 흑해 연안에 위치한 얄타에 가서 독일 패전 후의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이때 “루스벨트의 병든 모습을 본 처칠의 주치의는 처칠에게 루스벨트는 이미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얄타회담 후 중동지역에서 지역 지도자들과 일련의 회담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온 루스벨트는 얄타회담에 관한 보고를 위해 3월 1일 의회에 출석했는데 그의 지치고 병약한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45년 3월 29일 루스벨트는 조지아 주 웜스프링 소재의 백악관 별장에 가서 유엔 창립회의에 참석할 준비 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12일 오후 그는 갑자기 후두부에 심한 두통을 호소하면서 쓰러진다. 그리고 얼마 후인 오후 3시 35분 사망하고 만다. 사인은 대량의 뇌출혈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던 대중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됐으며 유해는 평소 그의 유언대로 하이드파크에 있는 가족 소유지에 묻혔다. 소원한 관계가 지속됐던 엘리너는 훗날 1962년 사망해 그의 곁에 묻히게 된다.
루스벨트가 죽은 후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5월 7일 유럽을 6년 동안 휩쓴 긴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그의 사후 대통령 3선 출마금지법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원래 미국 초창기 헌법에는 대통령 중임이나 연임에 관한 규정이 없었다. 이 때문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전에도 3선 이상의 중임이 이론적으로 가능했지만,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과 같이 상당한 여건을 갖춘 대통령들도 두 번째 임기 후 스스로 대통령직을 물러나 3선 이상 중임 불가는 일종의 관례가 됐다.
그러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4선이 실현되자 의회는 향후 장기 집권을 통한 대통령 권력의 비대화 가능성을 걱정하게 됐다. 그 결과 1947년 3월 21일 대통령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수정헌법 22조를 통과시켰다. 이 수정헌법은 1951년 2월 27일 정식으로 발효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라고 하면 하반신 마비라는 역경을 뚫고 4선이라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인물로, 그리고 경제 대공황의 암울한 시기에 뉴딜정책을 슬로건으로 미국 경제를 회생시킨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 시행했던 수많은 정책 중에서 술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정책 결정이 하나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33년 3월 루스벨트가 33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미국 사회에는 ‘금주법’이라는 전무후무한 강력한 법이 있었다. 금주법은 16년 전인 1917년, 당시의 종교·사회적 금주운동 분위기와 맞물려 미국 내의 주류 생산 및 판매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18조가 상하원 양원을 통과하면서 시행됐다. 그 후 이 금주법은 많은 부작용에도 루스벨트 취임 때까지 지속돼왔다. 사실 루스벨트 이전의 대통령들도 금주법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폐지를 고려했지만 사회 여론 및 제반 여건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스벨트는 취임 5일 만에 금주법 철폐 검토를 위한 의회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그의 명분은 경제 불황과 함께 유럽에서 대두되고 있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경제 활성화와 세수 확보를 위한 금주법 철폐는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금주법은 그해 12월 5일 미국 내 맥주 판매를 허용하는 수정헌법 12조가 그의 서명으로 정식 발효됨으로써 15년의 수명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금주법 폐지한 애주가
이렇게 금주법 폐지라는 정책적 결단으로 당시 수많은 애주가와 주류업체는 환호했는데, 사실 루스벨트 자신도 상당한 애주가였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특히 처칠과 스탈린과 함께 세계 정치무대의 ‘빅3’로 여러 차례 회담을 하는 동안 술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여럿 남겼다. 한번은 유명한 술꾼 처칠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그와 보조를 맞추어 술을 즐겼고 회복을 위해 사흘 동안 하루 10시간씩 잤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또 1938년에는 미국을 방문한 영국의 조지 6세(George VI·1895~1952, 재위 1936~1952) 부부를 맞이해 직접 칵테일 셰이커(cocktail shaker)로 만든 술을 대접해 남다른 친선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애주가 루스벨트가 생전에 특히 좋아하던 술이 하나 있다. 흔히 ‘칵테일의 제왕’이라고하는 마티니(Martini)가 바로 그것이다. 루스벨트는 마티니를 매우 사랑해 거의 매일 즐기다시피 했고, 그 자신이 바텐더가 돼 직접 마티니를 만들어 마셨다. 기록에 의하면 저녁 각료 회의가 있을 때면 거의 항상 저녁 식사 전에 루스벨트가 직접 마티니를 만들어 각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처칠, 스탈린과의 정상회담에서도 그가 직접 만든 마티니를 선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그의 각료 중 한 명이었던 잭슨(Robert Jackson·1892~1954)은 루스벨트가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아니어서 보통 저녁 전에 마티니 두 잔 정도를 마시고 그 후에는 소량만 즐겼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보다 주량이 많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루스벨트는 평소 그의 아이들에게 “신사는 술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지만, 주위와 연락할 필요가 없을 때는 많이 마셔도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와 연락할 필요가 없는 상황은 대통령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가 간혹 많은 술을 즐겼다고 해도 이해하기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루스벨트는 비단 마티니뿐만 아니라 바텐더로서의 기질을 발휘하며 다른 칵테일도 직접 만들어 마시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그가 가장 사랑한 술은 마티니였다. 그렇다면 마티니라는 칵테일은 어떤 술일까.
마티니는 진과 드라이 베르무트(dry Vermouth)를 섞고 올리브로 장식한 칵테일을 말한다. 마티니는 그 상큼한 맛과 올리브로 장식된 깔끔하면서도 매혹적인 자태로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마티니는 수많은 영화에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영화 ‘배트맨’의 조커(잭 니콜슨 분)도 마시고(배트맨, 1989년),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도 마신다(아이언맨, 2008년). 일급 킬러 스미스(브래드 피트 분)도 마시고(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2005년), 전직 살인청부업자 지미 툴립(브루스 윌리스 분)도 마신다(나인야드, 2000년).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알코올 중독자 벤(니콜라스 케이지 분)은 두 개의 올리브로 장식된 마티니를 음미하기도 한다(라스베가스를 떠나며, 1995년). 그런가 하면 귀여운 녹색 괴물 슈렉도 마티니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슈렉 포에버, 2010년).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칵테일 마티니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탄생에 관한 설이 여럿 존재한다. 먼저 1911년 미국 뉴욕의 니커보커(Knickerbocker) 호텔의 바에서 수석 바텐더로 근무하던 마티니(Martini di Arma Taggia)가 처음 만들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설에 의하면, 처음에는 오늘날 마티니의 상징과도 같은 올리브 장식이 없었으나 추후에 그 바의 단골들이 칵테일에 넣어 마시게 됐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이 칵테일에 사용되는 베르무트가 이탈리아 회사인 ‘마티니 · 로시(Martini · Rossi)’의 제품이기 때문에 마티니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밖에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마티네스(Martinez)라는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영국군 라이플의 이름인 ‘마티니 · 헨리(Martini · Henry)’에서 비롯됐다는 설 등 실로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이는 그만큼 마티니라는 칵테일이 유명하고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과 베르무트 비율은 3대 1
마티니를 만들 때 사용되는 베르무트는 식물을 첨가한 강화와인을 말한다. 즉 기본 술인 백포도주에다 높은 도수의 브랜디를 첨가해 알코올 농도를 18~19% 정도로 높인 강화와인에다 각종 식물을 첨가해 특유의 향을 강조한 와인이다. 이 때문에 베르무트는 방향성 와인(aromatic wine)으로 불린다. 베르무트에는 크게 드라이 타입과 스위트 타입의 2가지가 있는데, 마티니에는 드라이 베르무트가 사용된다.
마티니를 만들 때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은 보통 3대 1에서 시작해 마시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베르무트 양을 줄여나갈 수 있다. 최근에는 갈수록 베르무트 양을 줄여 최대한 드라이한 마티니를 마시는 게 유행이다. 이는 베르무트가 첨가된 복합미를 유지한 상태에서 되도록 진의 순수한 맛을 즐겨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너무 드라이한 마티니를 주장하다 보면 칵테일이지만 거의 칵테일이 아닌 상태로, 마치 진에 아주 미미한 베르무트 향이 가미된 것과 같은 술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엑스트라 드라이 마티니 애호가들은 이야말로 진정으로 만들기 어려운 마티니의 최고급 경지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엑스트라 드라이 마티니에 대한 이야기들은 애주가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대문호 헤밍웨이의 소설 ‘강을 건너서 숲속으로(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 1950)’에서는 주인공이 드라이 마티니를 주문하면서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을 15대 1로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헤밍웨이가 아니고서는 표현하기 힘든, 엑스트라 드라이 마티니에 대한 식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루스벨트가 직접 제조한 마티니는 주위로부터 그렇게 호평을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는 바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엑스트라 드라이 마티니에 대한 대중의 선호를 고려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즉 그의 자녀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티니에 너무 많은 베르무트를 섞은 것이다. 그가 제조한 마티니는 베르무트가 잔뜩 들어 있는 잔에 진을 조금 넣은 정도였기 때문에, 비록 알코올 도수가 강하지 않은 측면은 있지만 마티니 특유의 맛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오늘날 ‘루스벨트 마티니(FDR‘s Martini)’라는 이름으로 진과 베르무트를 2대 1로 혼합하는 베르무트의 비율이 높은 마티니 레시피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바텐더로서 루스벨트는 이밖에도 간혹 ‘압상트(Absinthe·아니스 열매향이 강하면서 녹색요정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의 독주) 두세 방울을 마티니에 섞는 실험적인(?) 시도까지 했는데, 이 칵테일은 주위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칵테일 역사를 볼 때 정작 마티니를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진과 베르무트를 섞은 고전적 마티니가 아니라 진 대신 보드카를 사용한 보드카 마티니(Vodka Martini)였다.
“젓지 말고 흔들어서(shaken not stirred)”
이 보드카 마티니는 유명한 영화 시리즈 007을 통해 세상에 본격적으로 소개됐는데, 여기에는 제임스 본드의 전설적인 대사 ‘젓지 말고 흔들어서(shaken not stirred)’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잔에서 젓지 않고 셰이커로 흔들어 만든 이 유명한 마티니는 테렌스 영 감독이 만든 007시리즈 제1탄인 ‘살인번호 (Dr No, 1962)’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시리즈물에 계속 등장해 그 매력을 자랑하고 있다. 007의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이 이 대사를 만들어낸 것은, 단순히 저어서 만드는 것은 마티니의 진정한 맛을 떨어뜨린다고 그 자신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1999년 BMJ(British Medical Journal)라는 권위 있는 학술잡지에 흥미 있는 논문 하나가 실렸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웨스턴 온타리오대의 생화학과 연구진이 흔들어 만든 마티니와 저어 만든 마티니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한 것이다. 그들은 항산화효과를 척도로 삼았는데, 저어서 만든 마티니에서 산화물인 과산화수소(peroxide)가 0.157% 발견된 것에 비해 흔들어 만든 마티니에는 약 절반인 0.072%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다시 말하면, 흔들어 만든 마티니는 맛뿐만 아니라 건강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었다.
오늘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임스 본드, 프랭크 시내트라 등과 함께 마티니를 빛낸 명사 명단에 단골로 이름을 올리는 인물이 됐다.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통령 4선에 성공한 제왕적(?) 대통령으로서 수많은 전설을 남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 술만큼 어울리는 술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