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작은 공간에 큰 예술 담는 인장 명장 1호 최병훈

“하찮은 도장이라고요? 도장은 그 사람의 인품을 담은 신분증입니다”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입력2012-02-22 17: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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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도장에서 긴 역사와 문화의 본디 모습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사는 최병훈 명장은 여섯 살에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이래 글자와 한평생 살아왔다. 한때 ‘가리방’을 긁으며 생계를 유지했던 그는 집념과 학구열, 그리고 열정으로 인장(印章)을 연구해 평범한 ‘도장장이’에서 마침내 인장 공예 부문 명장 1호가 되었다. 그의 인장 사랑은 아직도 뜨겁게 진행 중이다.
    작은 공간에 큰 예술 담는 인장 명장 1호 최병훈
    우리는 언제 도장을 찍는가? 자신을 증명하거나 서약할 때, 그리고 거래할 때 주로 도장을 찍는다. 그러니까 도장은 ‘신분증명(identity)’과 ‘약속’,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결합하면 ‘믿음’이 된다.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과 거래에서 도장은 붉은 인주 색깔처럼 변치 않는 믿음을 나타낸다. 또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관청일 경우에는 도장이 곧 명령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도장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표지(標識)이니, 분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도장을 어떻게 가벼이 다룰 수 있겠습니까?”

    최병훈(崔炳勳·61) 명장은 “도장 새기는 일은 곧 신분증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다만 주민등록증처럼 똑같은 디자인의 신분증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맞춤 신분증 말이다.

    “작은 공간에 들어가는 네 글자로 그 사람을 표현해야 하는데, 넉 자가 모여 한 문양이 되도록 조화를 이뤄야 해요. 그 도장을 쓸 사람과 대화하며 그 사람에게서 받은 느낌, 그리고 저의 심성을 담아 새겨야 제대로 된 표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랫사람을 시켜 도장을 주문하는 이들을 썩 반기지 않는다. 그 도장을 쓸 주인공을 알지 못한 채로 새기는 것은, 보지도 못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다만 선물하기 위해 주문하는 사람의 정성이 지극할 때는 그도 감복할 때가 있다.



    “한번은 부산에서 할아버지가 오셨어요. 액수는 얼마가 되든지 간에 최고로 좋은 도장을 새겨달라는 겁니다. 누가 쓸 것이냐고 물었더니 백일을 맞는 손자에게 선물할 거라고 하더군요.”

    손자가 평생 지닐 수 있는 소중한 선물로 도장을 주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염두에 두고 그는 나무를 직접 손으로 깎아 정성 들여 다듬어 도장을 새겼다. 그리고 도장을 받아 들고 기뻐하는 할아버지께 말했다.

    “이 도장은 꼭 장롱 깊이 보관했다가 아이가 대학생이 되면 손에 쥐여주라고 아이 어머니에게 전하세요. 미리 주어서 아무 데나 찍으며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 귀하게 보관하고 함부로 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전자체(篆字體)로 도장을 새기는 까닭은

    작은 공간에 큰 예술 담는 인장 명장 1호 최병훈

    작은 공간에 글자를 새겨 아름다운 도형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말초신경과 씨름하는 일이다. 도안부터 수정작업까지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그런데 도장은 왜 알아보기 힘든 전자체로, 그것도 획을 꼬불꼬불 구부려서 읽기 어렵게 파는 걸까.

    “전자체가 제일 오래된 서체이자 새기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갑골문이 있었지만 서체라고 보기는 힘들고 춘추전국 시대 발전한 전서, 특히 진나라 시대의 소전체(小篆體)가 인장에 널리 쓰였어요.”

    하기는 ‘전(篆)’이라는 글자 자체가 새긴다는 뜻이다. 종이가 나오기 전, 글자는 쓰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것이었다. 점토나 돌, 나무, 동물의 뼈, 죽간 등에 칼로 파서 새기거나 전쟁 때는 금속을 때려서 새겼으니 이에 가장 적합한 글자체가 바로 전서다. 진시황이 글자를 통일해 확립한 서체가 바로 소전체로, 인장이나 비석의 큰 글자는 아직도 소전체를 많이 쓴다. 새기는 데 적합할 뿐 아니라 조형미가 있고, 가장 오래된 글자라는 권위도 갖기 때문이다.

    또 획을 많이 구부려 파는 것을 구첩전(九疊篆)이라고 하는데, 꼭 아홉 번 구부리는 것이 아니라 글자에 따라 횟수를 달리한다. 이는 글자의 간격을 맞추기 위해서다. 획이 단순한 글자는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그 공간을 메우는 것이다. 실제로 인장을 팔 적에 가장 어려운 글자는 획이 단순한 글자라고 한다. 그래서 도장장이들은 복잡한 글자를 더 좋아한다.

    “요즘 분들은 구첩전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요. 특히 한글 인장에는 맞지 않는다고요. 그러나 인문(印文)의 균형미를 위해서라도 한글 전서체나 구첩전을 더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오래된 전통을 포기하는 걸 원치 않는 듯하다. 인장의 세계가 비록 사방 한 치(3.03㎝)를 메우는 ‘방촌(方寸)의 예술’이라고 하나, 그 안에는 유구한 역사와 모든 문화의 시원(始原)이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자가 나오기 전 자신을 상징하는 그림을 새긴 ‘고도형새인(古圖形璽印)’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그림도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다 글자가 나오면서 인장이 되었고, 나중에 인쇄로 이어지죠. 또 떡살이나 다식판, 기와의 수막새 문양, 옷의 금박까지 새기고 찍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가 재현해낸 고도형새인은 말 타고 활 쏘는 사람, 춤추는 사람, 호랑이를 탄 사람 등을 단순하지만 매우 분명하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들이다. 그는 이렇게 고대 문헌과 자료를 뒤져 연구하고 파보면서 인장의 아름다운 세계에 푹 빠져 산다.

    글자와 함께 한 인생

    그가 이렇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고된 현실 탓이 컸다. 그는 젊은 시절을 얘기하며 “어디에도 뿌리내릴 곳 없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첫아들을 낳고 병원비가 없어 아내가 퇴원하지 못했던 일을 회상할 땐 목소리가 잠시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그는 아들 욕심을 낸 아버지의 아홉째 자식으로 늦둥이 막내였다.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방학 때면 고모부의 한문서당에도 다닌 덕에 공부도 잘했다. 아마도 그가 한자를 주로 다루는 인장 명장이 된 데는 일찍이 눈뜬 한문 실력이 큰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어릴 때 한 공부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만 아버지께서 ‘너는 구학문을 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늘 기억에 남습니다.”

    그의 인생이 힘들어지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타계하고서부터다. 졸업식에서 장수면 면장상을 탄 그에게 면장님은 “새로 세운 중학교에 들어오면 학비를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먹고살 길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1963년, 그는 단돈 600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인생이 시작됐다.

    “이발소 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공부하고 싶어서 종로5가 한국서예학원에 들어갔습니다. 월급 1500원을 받고 사환으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글씨 공부를 했어요.”

    한 달 방세가 1800원이 넘었으니 먹고살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서예학원의 베니어 칸막이 너머로 펜글씨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 덕택에 중앙여중·고에 필경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 학교 공문서와 시험문제는 등사해 만들었는데, 이른바 ‘가리방(등사판)’ 글씨를 쓰는 일이 그가 맡은 일이었다.

    “중학교 수학과 영어는 그때 시험문제를 ‘긁으며’ 혼자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과정은 지난해 주부학교를 졸업하면서 마쳤고요.”

    1960년대 말부터 5년간 중앙여중·고에서 일하다 군대에 들어가게 됐는데, 군대에서도 그는 필경사로 활약하며 사령관 표창장을 받았다. 제대 후 금곡고등학교에서 잠시 필경사로 일했지만 곧 인쇄소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윤전기와 복사기가 등장하면서 ‘가리방’ 필경사는 점점 인기 없는 직업이 되어가던 때였다.

    “당시 인쇄소에는 도장 파는 이와 필경사가 같이 있어서 명함이나 도장, 직인 등을 만들어주었어요. 처음에는 필경사 일만 하다가 차츰 도장 파는 일에 흥미를 느껴 배우게 됐지요. 글씨를 베껴만 쓰다가 도장으로 파보니 색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매번 새로운 것을 창작해내는 기쁨이라고 할까요.”

    그때 몸담았던 창신동의 인쇄소 ‘동양문화사’에서 도장 파던 ‘조씨 아저씨’가 그를 도장의 세계로 이끈 첫 스승인 셈이다. 그러나 배우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더 잘하고 싶은데, 진짜 ‘기술’은 좀처럼 배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도장 파는 일은 보조가 필요 없이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기술을 전수하는 스승 제자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지요.”

    그렇게 답답하던 차에 인장협회 선배들이 모여 마련한 야간 특별교육 과정을 듣게 되었는데, 이때 많이 배웠다고 한다.

    “인장인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초심자에 속하니 석 달 동안 배우면서도 질문 한번 제대로 못하고 수료했어요. 그래도 열다섯 분 강사 각각의 장점을 다 배울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도장포를 개업해 독립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도장을 파고 또 팠다. 그가 이렇게 미친 듯이 일한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셋방살이하며 애 셋을 키우는데,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큰애를 사립학교에 넣었어요. 그러자 둘째도 그 학교 다니겠다고 나서고, 딸인 셋째도 안 보낼 수가 없게 된 거지요.”

    그러다 보니 살림은 쪼들릴 수밖에 없었고, 자존심 강한 그는 평생 빚지고 못 사는 성미라 온 식구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 자신 옷 한 벌 사지 않고, 술도 못 마시니 친구도 만나지 않고 그저 일만 했지만 식구들의 고통은 컸다.

    “어느 정도 돈을 모을 때까지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여겨 그렇게 절약했던 것인데 가족에겐 상처가 되었어요. 그래서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삽니다.”

    이제 자식 셋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건물도 한 채 마련했으니 그의 인생은 완전히 뿌리를 내린 셈이다. 아니, 뿌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꽃까지 피우고 있다. 그 꽃을 피우기까지 그는 장인다운 집념으로 노력과 연구를 거듭해왔고, 그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은 공간에 큰 예술 담는 인장 명장 1호 최병훈

    그는 도장 재료로 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돌 종류는 파기 쉽지만 깨지기 쉽고, 상아는 우리 기후에 맞지 않아 금이 잘 간다. 그러나 나무는 뒤틀려도 멋이 있다.



    노력파, 연구파, 수집광, 정리벽

    작은 공간에 큰 예술 담는 인장 명장 1호 최병훈

    그의 공방이자 ‘놀이터’인 수유동의 ‘최병훈 인장공예연구소.’ 자료와 작품을 정리해둔 이곳에서 그는 한 달에 한두 작품만 주문받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 공부한다.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는 앉아서 도장만 판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한계도 점검해볼 겸 인장업계의 실태도 알아보고자 우선 자신이 일하고 있는 서울 도봉구의 모든 도장포를 직접 찾아가보았다.

    “132개 업소를 모두 탐방했습니다. 대개 복덕방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화투 치다가 손님이 오면 일어나 금방 도장 파주는 식이었어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쓰면서 셋방살이를 못 면하는 실정이었고요. 기능인으로서 기술을 연마할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료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인장협회 도봉구지회장이 되었을 때, 인장에 관한 작은 책자를 만들어 회원들에게 배포한 것도 다 이때 느꼈던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는 또 시내의 ‘잘나간다’는 업소도 100여 곳 방문해보았다.

    “확실히 다르긴 하더군요. 우선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파고, 자신이 판 도장은 일일이 인영(印影)을 찍어 보존해두더군요. 그 인영집을 빌려와서 연구했습니다.”

    당시 인장협회장이던 성인수 회장이 갖고 있는 인영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성 회장은 작은아버지가 인장으로서 대를 이은 인장 집안 출신이다. 그래서 실력도 탄탄하고, 좋은 자료도 많았다. 그는 빌려온 인영을 연구하며 그 자신의 인영집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섯 권으로 늘어난 그의 두툼한 인영집을 훑어보니 1980년대 초반 고무인부터 각종 관공서의 관인, 성형외과의 직인, 미장원, 점집의 상호까지 별의별 모양의 도장이 페이지마다 지나간 세월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이 무렵부터 그의 작업 형태도 바뀌었다. 우선 가격부터 배로 올렸다. 다른 도장포에서 플라스틱 도장을 1만 원 받고 팔 때 그는 2만 원을 받았고 대신 많이 생각하고 연구해서 정성 들여 팠다. 그리고 주문을 받기 위해 그가 찾아다니는 대신 손님들이 제발로 찾아오도록 했다.

    “당장 손님들이 다 떨어져나가더군요. 그렇게 반 년이 지나니 다시 하나둘 찾기 시작했어요. 막도장 손님 대신에 제대로 된 도장을 원하는 알짜배기 손님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관공서에서 도장을 단체로 주문할 때도 저에게는 중요한 도장만 맡기더라고요.”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기 시작한 그에게 또 한번 계기가 찾아왔다. 큰아이가 학교에서 환경조사서를 제출하는데 아내가 도장 파는 일 대신 인쇄업으로 써 넣자고 한 것이다. 그는 명함도 취급하고 있었으니 인쇄업이 꼭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자존심은 크게 상했고, 이 일로 부부는 밤새 싸웠다.

    “제가 하는 일이 이 정도밖에 대접받지 못하는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회의가 들어 이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에 조각칼을 치워버리기도 했어요.”

    나중에 아이가 결혼할 때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나를 위해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1980년대 들어 때마침 미술대전에 전각 부문이 생겼고, 그는 이를 목표로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전각에 몰두했다. 전각은 파기 쉬운 돌에 개성을 맘껏 발휘하며 만들 수 있으므로 기술로만 본다면 어려울 게 없었다. 1983년 대한미술전람회에서 상을 타기 시작해 일본동화미술대전 금상, 현대미술대상전 금상, 그리고 옥새 작품으로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재청장상을 받는 등 많은 상과 국무총리 표창장까지 받았다. 아이들과 아예 상 타기 경쟁을 하자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아이들도 아버지가 도장 파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학교에서도 떳떳하게 말하고 도장 주문을 받아오기까지 하고요.”

    아이들이 자라 상 타기 경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그의 노력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인장협회 기술위원장, 국새제작 자문위원, 무형문화재보존협회 이사와 감사 등 감투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자료를 차곡차곡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50년 전 초등학교 졸업식 때 탔던 면장상부터 중앙여중·고에 근무하던 시절의 낡은 신분증, 기능사 자격증, 표창장, 임명장 등 그의 인생이 담긴 크고 작은 편린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았다. 그뿐인가. 그의 작품은 물론이고 이제는 주문자의 손으로 넘어간 완성품의 인영, 그가 고가로 사들인 한정판 자료집과 문헌, 돌멩이와 나무, 상아, 옥 등 인장 재료에다 재현품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전시해둔 그의 공방은 흡사 개인사 박물관 같다. 1999년 그가 ‘전각의 달인’으로서 제2건국위원회의 신지식인으로 선정됐을 때 이런 정리된 자료가 큰 몫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새파란 명장’의 열정에 모두 두 손 들어

    모든 장인이 그렇듯 그도 중요무형문화재가 되길 꿈꿔왔다. 그래서 1984년부터 무형문화재협회에 들어가 미발굴 분야의 전승요원으로 활동해왔다. 아직 인장 부문은 무형문화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6년 명장 제도가 생기자 문화재를 꿈꾸던 많은 동료가 명장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그가 속한 인장 부문은 명장 종목에서 빠져 있었다.

    “기능사 1급 소지자로서 명장 신청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데, 왜 인장은 빠져 있느냐고 따졌더니 인장은 산업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제가 받은 기능사 자격증은 무엇이냐고, 왜 똑같이 발행해놓고 이제 와 빼놓느냐고 자격증을 내동댕이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명장 제도를 주관하는 노동부는 꿈쩍도 안했다. 인장 부문이 명장 종목에 들어가기까지 그는 10년 이상 항의를 계속했다. 드디어 1999년 노동부 장관은 명장협회장에게 전화해 외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었다.

    “일본은 기능사 자격증이 있는 분야는 모두 명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애초 97종목이었던 명장 분야는 2000년 167개 직종 전체로 확대되었습니다. 미용사는 물론이고 세탁 부문까지 명장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그는 물론 당장 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탈락하고 말았다. 인장 선배 두 명과 대학교수 한 명으로 구성된 심사에서 고배를 마신 것이다. 그는 당시 다니고 있던 명지대 산업대학원 전통공예학과 세미나에서 “명장 심사에 그 분야 사람을 두 명이나 심사위원으로 두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발표를 했고, 이듬해 명장 심사는 명장 주무부서인 노동부 관리공단 간부와 인장인, 그리고 학자로 구성됐다. 마지막 면접 심사에서 공단 측 사람이 “인장도 명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 분야를 창설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싸워왔는지 아느냐?”고 되물었고, “명장이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연이은 질문에는 “죽을 때까지 도전한다”고 맞받았다. 그의 강한 어법 때문인지, 심사위원들은 예외적으로 그의 공방으로 실사까지 나왔다.

    “도장은 주문 제작이라 장인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전시회 열기도 힘든 분야입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까지 불러 제가 진짜로 도장 새기는 일을 해서 아이들을 다 공부시켰는지 확인하더군요.”

    그의 공방을 둘러본 심사위원들은 결국 “인장에 대한 당신의 열정을 알게 됐다”며 인정했고, 그는 당당히 인장 명장 1호가 되었다. 마흔에 명장이 되자 원로 인장인들이 ‘새파란 명장’이라고 무시하다가 그의 공방을 한번 와서 보면 모두 두 손 들고 만다. 잘 정리된 연구 자료와 작품은 아무도 트집을 잡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장 정감 가는 재료는 역시 나무

    명장이 된 뒤로 그는 인장을 더욱 깊이 연구했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명장이 된 자신이 갚아야 할 마땅한 보답이라고 믿어서다.

    “인장은 많이 보고[多見], 많이 연습하고[多習], 많이 훈련해야[多練] 합니다. 그래서 책도 보고 재료 연구도 하고, 옛 문헌에 나온 작품을 직접 파보면서 공부합니다.”

    심지어 최근 영화 포스터나 행사 포스터의 제자(題字)까지 파보는 그는 목재소에서 받아온 자투리 가구목재에 글자를 새기는 서각도 시도하면서 여러 가지 서체를 연구해왔다. 또 중국과 대만, 일본 등지를 다니며 자료를 모으는 한편, 전각으로 펴낸 옛 중국 그림교본에 나온 사군자를 돌기둥 네 면에 차례로 새겨보았다. 그렇게 해서 찍어낸 작품은 원본보다 한결 고아하고 멋지다. 명장 전시회에 나온 이 작품을 본 한 프랑스인이 600만 원에 사겠다고 나섰으나 최 명장은 거절했다. 언젠가 마련할 인장박물관에 보존해두고 싶어서다.

    재료 연구도 본격적으로 했다. 비싼 돌을 사들이는가 하면 목재를 소금물에 끓였다가 말리고 깎고 다듬으며 여러 나무의 결을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해나갔다. 옥과 상아, 돌, 나무 등 많은 인장 재료 가운데 그가 가장 아끼는 재료는 단연 나무다. 먹감나무와 박달나무, 앵두나무, 대나무와 돌배나무 뿌리 등을 많이 쓰는데, 특히 ‘도장나무’라 불릴 정도로 널리 써온 화양목(황양목, 회양목이라고도 한다)은 쓸수록 정감이 가는 재료라고 한다.

    “워낙 천천히 자라는 나무라 나이테가 촘촘합니다. 그래서 단단하면서도 결이 거칠지 않아 파기도 좋지요. 호두 기름을 바르고, 오래 써서 손때 묻은 화양목 도장은 손에 착 붙어요. 그런데 이 나무를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어요. 워낙 소비를 많이 한 데다 잘 자라지 않거든요.”

    울퉁불퉁한 대나무뿌리는 소금물에 삶고 말리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가볍고 매력이 있다. 청담 스님이 직접 만들어 썼다는 표주박 역시 특이하고 멋스러운 재료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도장으로 만들면 복이 든다고 하여 인기가 있는데 벼락으로 갈라져 생긴 천연 무늬가 특징이다. 삼성그룹 계열사 일을 하는 쪽에서 이건희 회장 부부의 도장을 주문한 적이 있는데,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도장을 찾아가는 날, 조사를 받던 이 회장이 풀려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후보였던 시절, 누군가 김 전 대통령의 도장을 주문했는데 어느 날 몇 시에 파달라는 조건을 달더군요.”

    김대중 후보도 결국 대통령이 되었고, 몇몇 정치인도 그에게 도장을 주문해 덕을 톡톡히 보았지만 그는 본래 ‘복도장’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시중에는 복도장이라며 똑같이 찍어낸 멋없는 도장을 고가에 팔고 있지만, 그는 쓰는 이의 마음과 인품에 잘 어울리는 도장이야말로 복도장이라고 생각한다. 재질 역시 마찬가지다. 비싼 재료가 좋은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게 좋은 재질이라고. 그래서 그가 최고로 꼽는 도장은 나무가 생긴 모양을 그대로 살린 편안한 도장이다.

    “예전에는 신분에 따라 도장 재질이 다 정해져 있었고, 공적인 기관에서 쓰는 관인일 경우에는 크기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경국대전’에 보면, 인장과 관련된 법칙이 쉰 개가 넘어요. 인장도 종류에 따라 나라 것이면 ‘새(璽)’또는 ‘보(寶)’라고 했고, 장군용은 보통 ‘장(章)’, 신하인 경우는 ‘신(信)’, 일반인 도장은 ‘인(印)’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시황이 화씨의 옥으로 국새를 새기면서 나라의 표지인 국새를 옥새라고 부르게됐는데,‘그렇다고 모든 국새를 옥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고 금속으로 만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 국새는 진시황 이전에는 ‘녑(金·#54650;)’이라 했고, 당나라 시대에는 ‘새(璽, ‘사’라고 읽기도 한다)’의 어감이 안 좋다 하여 ‘보(寶)’라고 바꿔 불렀다. 그래서 우리나라 궁중에서 쓰던 인장들을 ‘어보’라고 한다. 어보에는 관리를 임명할 때 쓰는 어보, 외교 문서에 쓰는 어보, 서적 반포에 쓰던 어보, 왕세자가 쓰던 어보 등 여러 종류가 있고, 각기 이름도 달랐다.

    “중국과의 외교 문서에만 쓰는 어보는 중국에서 직접 내려주었고, 일본이 우리나라와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 쓸 것은 우리가 만들어 보냈는데, 고종 시대 어보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받은 어보보다 우리가 일본에 내린 어보가 더 크고, 우리 국내용 어보는 제일 크게 제작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가 재현해놓은 어보를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이처럼 인장은 국가가 사용할 경우 매우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새를 만들 때 원형은 인장이 화양목에 새기지만, 이를 금이나 은·동 등 합금으로 주물 제작하므로 불을 관리하는 화로장, 금속장, 주물장, 광을 내는 마광장까지 여러 장인이 모여 만들었어요. 고종 때 궁중에서 사용하던 어보 11종을 새로 만드는 데 동원된 인원이 무려 157명입니다.”

    그러므로 몇 해 전 한 전각인이 오합금으로 국새를 만드는 ‘600년의 비법’을 가졌다며 나섰던 국새사건은 실정을 알고 보면 애당초 무리였음을 알 수 있다.

    위조하기 힘든 인감 제도 버리는 것은 잘못

    컴퓨터 도장에 이어 인감마저 사라지게 된 오늘날 그는 인장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인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우리 문화라고 믿지만 인감제 폐지에 대해서는 큰 우려를 나타냈다.

    “서명은 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마련이라 위조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본인서명 확인서를 마련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번에 통과된 법에 따르면 이 업무를 국가가 민간에 위탁할 수도 있게 돼 있더군요. 그러면 민간업체에서 지문인식기를 도입하거나, 일반인은 서명확인서가 잘못 발행될 경우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문으로 확인하는 것은 인권 차원에서도 기분 나쁜 일이지만, 지문은 최신 인쇄 장비인 수지제판기를 사용하면 30분 만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어요. 비용도 3000원이 채 안 들고요.”

    인감증명법은 그동안 서른 차례 이상 개정을 거듭하며 이제는 고칠 것 다 고쳐서 가장 합리적이고 도용 가능성 낮은 단계로 정착했는데, 외국에서도 부러워하는 안전한 인감제도를 폐지하고 번거롭고 혼란을 불러일으킬 서명제를 굳이 도입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수결은 관인과 함께 확인 차원에서만 썼습니다. 그것도 위조가 많아져서 나중에는 수결 자체를 도장으로 파서 사용했고요. 지금도 회사에서는 기안자는 도장을, 확인자는 서명을 하지 않습니까?”

    그가 생각하는 도장의 의미는 무척이나 무겁다. 도장은 모든 일이 결정됐고, 완성됐고, 끝났음을 의미하고 또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효력은 종종 5년이나 10년이 지난 뒤에 나타나기 쉽다. 도장 찍을 일이 없는 게 가장 좋지만, 정 찍어야 한다면 “돈을 빌릴 때는 서명을 하고 꾸어줄 때는 도장을 찍으라”고 충고한다.

    “도장이 서명에 비해 딱딱하고 개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오산이지만, 개성을 마음껏 표출하고 싶다면 전각을 즐기면 됩니다. 알파벳은 옆으로 이어 쓰는 글자이므로 서명이 멋지지만 한자나 한글처럼 조합된 글자는 인장이나 전각이 제격이지요.”

    한편 그는 전각하는 이는 예술가로, 인장을 새기는 이는 한갓 용인(用人)으로 치부하는 편견에도 제동을 건다. 관인을 포함한 인장은 전문가인 장인들이 맡지만, 전각은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자유롭게 멋을 부릴 수 있는 인장예술의 한 분야라는 것이다. 도장이 점점 사라지는 오늘날 대세는 전각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요즘 인장을 전문 직업으로 삼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사람들에게는 이제 전각을 가르치고 있는걸요.”

    그는 옛 선비들이 사용한 전각작품을 모아놓은 ‘고금인장’이라는 책을 내보이며, 그 속에 수록된 조선 선비들의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가짐에 반했다고 한다.

    “중국 전각은 아름다우면서도 여유 있고, 일본 전각은 섬세하며 관인은 매우 강합니다. 그런데 조선 선비들의 전각은 깨어진 나무나 돌 조각 모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넉넉함,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다만 자기 멋에 이끌려 새긴 소탈한 작품들입니다. 초가집에서 숨김없이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2년 전 가게를 접고 자신의 건물 2층에 ‘최병훈 인장공예연구소’를 마련해 주말이면 지인들과 붓글씨 쓰고 전각을 하며 ‘노는’ 그가 향하고 있는 곳도 옛 선비들의 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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