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녀(織女) 방연옥(66)은 무더운 삼복에 모시를 짠다. 청량한 여름 옷감 모시는 그런 날씨에만 짤 수 있기 때문이다. 모시 고장에서 태어나 어머니 젖을 채 떼기도 전에 모시실을 삼았던 그는 중년 나이에 정식으로 모시 짜기에 도전해 스승 문정옥을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한산모시 짜기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또래 여자애들은 하기 싫어했던 모시 일을 그는 유난히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보다 찜통더위 속에서 땀 흘리며 베 짜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재미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콩가루를 푼 ‘풋닛가루’를 실에 묻히는 ‘매기’ 작업.
뜨거움 속에서 태어나는 시원함, 그것이 바로 모시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청량한 촉감의 모시는 찜통 같은 열기 속에서만 짤 수 있다.
“모시 실은 건조하면 쉬 끊어져 아무리 더워도 바람이 통하지 않게 문을 꼭 닫고 눅눅한 상태에서 짜야 합니다. 예전에는 부엌 한쪽에 땅을 파 움막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서 짰다고 해요. 6월 말 장마 때부터 8월 말 처서 전까지 후텁지근한 날씨가 제일 짜기 좋지요.”
기분 좋은 훈풍이 부는 봄이나 건조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모시 짜기는 여의치 않아진다. 그래서 예부터 “찔레꽃 필 무렵이 모시 짜기 제일 힘들다”고 했다.
“날씨가 건조하면 실이 굳어서 바디(베틀에서 실을 끼우는 장치로 이 바디를 움직여 옷감을 짠다)가 잘 내려가지도 않게 돼요. 그럴 때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 되지요.”
바디 살은 참빗처럼 촘촘한데 그 촘촘한 살 사이로 모시 실(날실)을 두 가닥씩 끼우고 씨실은 북에 넣어 날실과 씨실을 교차해 짜게 된다. 모시 날실은 콩가루 풀을 먹였기 때문에 날씨가 조금만 건조해도 뻑뻑해져서 바디에 달라붙어버리고 실도 잘 끊어진다. 실이 끊어지면 일일이 모시 실로 잇고 다시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풋숌(명주솜실)’으로 이어줘야 한다. 그래도 요즘엔 가습기를 틀어놓고 짤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젖먹이가 모시 일을 하다
방연옥이 모시 일을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젖 먹던 시절’부터다.
“제가 막내여서 여섯 살까지 젖을 먹었는데, 그때 어머니 따라 동네 아낙네가 모여 같이 모시 하는 자리에 갔다가 자연스레 시작하게 된 겁니다.”
모시 베를 짜는 일은 각자 집에서 했지만, 말린 모시풀 줄기를 입으로 째고(길이로 가늘게 찢어 실로 만드는 작업), 그렇게 만든 실을 무릎에다 대고 침을 묻혀 잇는 모시삼기를 충청도 서천군 여인네들은 모여서 함께 했다. 어린 방연옥은 어머니 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다가도 곧잘 어른들 일하는 모양을 흉내 내어 실을 잇곤 했다. 그래서 나중에 방연옥이 뒤늦게 모시 짜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너는 여섯 살 때부터 모시 일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다 큰 아이가 어머니 젖을 찾는다고 어른들에게 곧잘 야단을 맞았지만, 여름이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겨울이면 아낙네들이 호롱불 앞에 모여서 수다를 떨며 모시를 째고 삼던 그 시절은 그에게 아주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계속 그 자리에 끼어서 일을 했어요. 모깃불이 꺼지면 제가 다시 붙이고, 또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하면 같이 웃고…. 참 재미났어요.”
지난해 모시 짜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데에도 이런 공동체 문화 속에서 전승돼온 기술이라는 점이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우리 전통 명절 추석 역시 신라시대 여인네들의 길쌈놀이에서 연유했고, 여러 지방의 길쌈노래도 전해지니 길쌈 전통은 우리네 풍속과 깊이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 속에서 어른들 틈에 끼어 자연스레 익힌 방연옥의 솜씨는 열 살이 되자 실을 매끈하게 이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모시 일을 누구나 다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방연옥과 달리 또래 아이들은 모시 일을 하기 싫어했다.
“이 고장 여자는 누구나 모시 일을 해야 했어요. 하지만 모두 다 그 일을 좋아할 수는 없잖습니까? 특히 아이들은 집에서 하는 모시 일이 힘들고 지겨웠을 겁니다. 저요? 저는 학교에서도 모시가 눈에 어른거릴 정도로 모시 일이 좋았어요.”
그의 집에서도 어머니와 언니가 모시를 했는데, 그는 식전부터 일을 거들다가 학교에 오면 공부는 머리에 안 들어오고 얼른 집에 가서 일을 계속할 생각만 했다. 출생신고가 늦은 바람에 두 살 늦게 들어간 학교 공부는 그에게 좀 ‘시시’했다.
“학교 들어가기 전 한글은 뗐고, 학교 가서는 구구단만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나이가 많아서였는지 공부가 별로 안 어렵더라고요.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이 나가 노는 사이 저는 숙제를 다해놓고, 집에 와서는 모시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공부도 곧잘 하는 데다 모시 일도 잘 도우니 동네 어른들은 모시 일 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나무랄 때면 “막내(그의 별명이 막내였다) 좀 본받아라”라는 말을 했고, 친구들은 그에게 “너 제발 모시 일 좀 그렇게 열심히 하지 마라”고 그를 원망했다. 그런데 어린 막내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모시 일에 매달렸을까.
“모시 많이 하면 부자 되는 줄 알았어요.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어린 소견이었지만요.”
실제로 한산을 포함한 서천군 일대 농가에서 모시 일은 여성에게 가장 큰 부업이었다. 고대부터 베는 화폐를 대신해왔고, 1960년대 서천군 여인들은 곱게 짠 모시를 한산 모시장에 내다팔아 자식을 키워냈다. 지금은 모시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할머니들만 하는 정도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방연옥은 여자 일로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것은 죄다 핑계고, 그는 그저 모시 일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한창 모시 짜기에 몰두하던 시절, 사람들은 동네잔치다 뭐다 하면서 놀러 다녔지만 그는 골방에서 땀을 흘리며 모시 베를 짰다.
“솔직히 노는 것보다 베 짜는 게 더 재미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사람들이 ‘평생 모시 일 하는 게 질리지도 않으냐?’고 묻지만, 힘들 때는 있어도 질리는 마음은 안 들더라고요.”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그 일을 지겨워하면 진정한 장인(匠人)은 될 수 없다. 그와 동년배인 많은 여성이 모시를 솜씨 있게 째고 삼고 짰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모시 일은 서러움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방연옥이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데는 아마 솜씨나 운보다도 일을 좋아하는 그의 본성 덕이 더 컸으리라. 예순 중반인 지금도 일요일까지 이곳 한산모시관에 나와 작업을 하거나 관광객 앞에서 시연하고, 일주일에 사흘 제자들을 가르치며, 집에서는 또 논일과 밭일까지 한다.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흔든다.
“사람에겐 일거리가 꼭 있어야 해요. 그리고 저는 일이 싫지가 않아요.”
그가 일을 좋아하고 자꾸 하게 되는 원동력은 여느 장인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기쁨이다. 씨 뿌리고 가꾸면 열매를 맺는 농사처럼 모시 역시 완성했을 때의 기쁨이 적지 않다.
“어렵게 배운 기술로 힘들게 모시를 짜서 드디어 작품이 나오면, 이게 정말 내가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신기한 기분이 들어요. 제게서 모시를 사간 사람이 입어보고 좋다고 칭찬해줄 때, 그때 제일 보람이 있고요.”
“유명해진다”는 예언대로
그는 초등학교도 채 못 마쳤다. 4학년을 마치고 나자 더는 학교에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어머니와 언니가 책보를 허리에 묶어주며 학교 가라고 등 떠밀어도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야단을 맞아가며 집에 남아 모시 일을 했다. 여자는 학교에 잘 안 보내던 그 시절, 그의 집에서 막내딸을 학교에 보내려고 그토록 애를 쓴 것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해서였기도 하지만 어쩌면 ‘예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날 어머니와 바깥에서 모시를 삼고 있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저를 유심히 보더니 ‘애기가 크면 이름이 나겠다’고 했어요. 어머니와 저는 ‘이름날 일이 뭐가 있나? 달리기를 말하나?’ 하고 의아해했지요. 제가 어릴 때 달리기를 잘했거든요. 어머니는 ‘달리기는 뒷받침할 수도 없는데…’라며 걱정하셨어요.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달리기든 뭐든 이름이 날 테니 두고 보라’고 했습니다.”
그 예언을 한 아주머니가 누구였는지 아직도 모르지만, 예언은 20년도 더 지나 실현되었으니 먼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꽤나 용한 점쟁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까지 여느 집 처자와 마찬가지로 집안일과 모시 일을 거들어온 그에게 유명해지는 것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위로 언니 다섯은 모두 베틀에서 직접 짰는데 저는 모시 째기와 삼기, 날기(날실을 옷감 한 필 분량으로 나누는 일)만 주로 했습니다. 그 다음 과정부터 베틀에서 짜는 과정은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않으셨어요. 힘든 일이니까 딸이 고생할까봐 안 가르쳐주신 거예요.”
그런데 정작 모시 짜기 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직접 모시를 짰던 언니들이 아니라 모시 짜기는 배우지도 못했던 막내였으니, 사람에게 운명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인 스물아홉에 혼례를 치렀다. 시집은 그의 마을 지산에서 바로 고개 한 등만 넘으면 나오는 한산. 서천군 일대는 모두 모시풀을 심고 모시를 생산해내지만 역시 모시의 본고장은 한산이었으니, 이 또한 그의 인생에 예정돼 있었던 모양이다.
한산으로 시집와 문화재 문정옥 선생을 만나다
“당시 한산모시 짜기 중요무형문화재였던 문정옥 선생님이 같은 마을에 살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지만 마을을 오가며 어르신이 마당에서 모시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오다가다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도와드리기도 했지요.”
한산모시 짜기는 1967년 국가가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 14호가 되었는데, 그 첫 기능보유자가 문정옥(84)이었다. 방연옥은 아무런 의도도 하지 않았건만 바로 그 문화재 장인과 인연을 맺게 됐으니, 과연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하루, 문 선생은 그에게 “전수학생으로 붙여줄 터이니, 한번 해볼란가?” 하고 물었다. 그때 방연옥의 나이는 서른여섯. 아이가 셋이었고 막내는 겨우 세 살로, 엄마 손이 한창 필요한 때였다.
“집안일에 어린 것이 있으니 선뜻 마음 내기가 힘들더라고요. 집에 와 남편에게 말하자 ‘문화재 선생님인데 배우는 게 좋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1980년에 전수학생으로 등록해 일주일에 사흘씩 선생님께 배우러 다녔지요.”
어린 막내아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한창 말썽 피울 나이였건만 아들은 ‘심사를 피우지 않고’ 얌전하게 굴어 배우는 일은 순조로웠다. 문정옥 선생은 평소 방연옥이 문 선생 집을 드나들며 구경하면서 모시 일을 도와주는 솜씨를 보고 ‘이 일을 할 만하다’고 생각해 제자로 삼았다고 했는데, 과연 문선생의 판단은 옳았다.
“모시를 째고 삼는 일은 처녀 적에 죽 해온 일이라 어려울 게 없었지만, 풀 먹이는 ‘매기’와 짜기를 정식으로 배우자니 여간 어렵고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왜 제게 이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알겠더군요.”
처녀 시절 내내 어머니와 언니가 매고 짜는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거들어왔는데도 그는 문 선생에게 배우는 동안 야단도 많이 맞고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혼이 나야 정신 차리는 법”이라며 “힘들어도 재미는 있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방연옥이 문 선생 밑에서 배운 지 3년째 되는 해, 문 선생이 고혈압으로 덜컥 쓰러지고 말았다. 문 선생은 몸은 움직이기 힘들어졌지만 정신은 온전해 방연옥은 혼자 연습하면서 궁금한 점은 스승에게 물어가면서 베 짜기를 계속해나갔다. 1986년 이수자가 되었고, 이듬해 전수조교를 거쳐 드디어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를 이어받았고 문 선생은 명예 보유자가 되었다.
모시 한 필 째는 데 들어가는 침이 석 되
모시는 다년생 쐐기풀인 모시풀의 줄기를 말려 실로 만든다. 칼슘이 우유의 몇 십 배에다 식이섬유도 많아 살 빼는 데 효과적이라는 모시풀 잎은 차를 내려 마시거나 떡에 넣으면 쑥색이 나온다.
“모시풀은 1년에 세 번 수확합니다. 초수(初收)는 6월 20일경, 이수는 8월 말, 삼수는 10월 초에 합니다. 모시풀은 오래 살지만, 겨울에 조금만 추워도 뿌리가 얼어 죽으니 꼭 양지에 심고 겨울에는 짚으로 잘 덮어줘야 해요.”
차가운 촉감의 모시를 내는 모시풀은 이렇듯 추위에 약하다. 2010년 기와와 초가로 잘 꾸며 문을 연 한산모시관 앞에는 모시밭이 있다. 모시풀 이파리는 녹색이지만 아래쪽은 햇볕이 반사되면 하얗게 보인다. 이 이파리를 모시칼로 훑어내고 줄기의 겉껍질을 벗겨내면 속살이 나오는데, 이 속살이 태모시의 재료가 된다. 이 푸른 속대를 중간중간 서너 번씩 물에 담가가며 볕에 한 열흘 말리면(바래기) 푸른 물이 빠지고 하얀 껍질만 남은 태모시가 된다.
“언젠가 일본에 갔더니 그쪽 모시풀 잎사귀는 위아래가 모두 파래요. 또 우리처럼 바래기를 하지 않고 수확하자마자 줄기를 짓이겨 푸른 물을 빼 즉석에서 하얗게 만들더군요. 그이들은 참 머리가 좋은 것 같아요.”
하얗게 바랜 태모시를 째어 실로 만드는 과정도 그렇다. 일본 모시는 말리는 과정이 없으므로 그냥 손으로 줄기를 쨀 수 있지만, 우리 태모시는 마른 것이기 때문에 물에 미리 담갔다 입으로 침까지 묻혀가며 이와 입술, 혓바닥을 다 동원해 짼다.
“한 필 분량을 째는데 침이 석 되 들어간다는 말이 있어요. 실제로 째보면 저녁때는 배가 몹시 고프답니다.”
그를 따라 째어보니 물에 적신 태모시도 꺼칠꺼칠하기만 하다. 이것을 침으로 녹이면서 입술로 굵기를 가늠해가며 이와 혓바닥을 놀려 째는 과정이 쉽지 않다. 이렇게 ‘입으로’ 실을 만든다는 게 참 신기한데, 얼마나 가늘게 째느냐에 따라 모시의 질이 정해진다. ‘쨈’이 좋아 가늘게 짼 실은 세저(細苧), 중간치는 중저, 이보다 굵게 짼 것은 막저로 분류한다.
“째는 데 침이 많이 들어가니 침이 모자란 할머니들은 가늘게 째기가 힘듭니다. 남자 옷이나 나이 든 사람들 옷은 좀 굵게 째도 괜찮고, 젊은 사람이 입을 세모시를 만들려면 가늘게 째야 하죠.”
다 짼 모시는 모시풀 줄기 길이인 1~2m 사이다. 이 토막 난 모시 올을 길게 이어 실로 만드는 과정이 모시삼기인데, 삼기에도 역시 침이 들어간다. 모시 올을 버팀목(쩐지)에 걸어놓고 두 올씩 가져다 침을 묻혀 맨 허벅지에다 대고 밀어 잇는다.
“일본 모시는 손으로 잇는데 우리보다 일은 더디지만 가늘고 예쁩디다. 그렇지만 우리 모시가 더 매끄럽게 이어지고, 다 짜고 나면 더 뻣뻣하긴 해도 일단 베로 짠 뒤엔 신기하게 더 부드러워져요.”
다른 공예품도 그렇지만 모시 만드는 과정 역시 우리 것은 태양과 바람, 사람의 침, 입과 허벅지 등을 사용해 자연의 힘과 인간의 노고가 더 많이 들어간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나중에는 빨수록 더 빛이 고와지고 하얘지며, 내구성이나 시원함은 어떤 섬유에도 댈 게 아니다.
이렇게 삼은 실을 일정한 분량이 되도록 한 덩어리씩 모아 열십자로 묶는다. 이것이 모시 굿이다. 한 필을 짜는 데 모시 굿이 스무 개 필요하다. 씨실로 열 굿, 날실로 열 굿이 들어가는데 북에 들어갈 씨실은 좀 더 고운 올로 골라 꾸리에 감으면 열여덟 내지 스무 꾸리가 된다. 모시 굿까지 완성하면 모시 날기를 해야 한다. 날기는 날실을 계량하는 방법으로, 날실을 몇 올 쓸지 결정하는 일이다(새수 정하기). 정해진 폭 30㎝ 안에 날실이 많이 들어갈수록 고운 모시가 된다. 한산세모시는 9새나 10새인데, 720올에서 800올 사이다. 마당에 젖을대(조슬대)를 세워두고 그 젖을대에 난 구멍 사이로 실을 빼서 양쪽 날틀을 오가며 한 필 길이에 맞추어 날실 올수를 맞춘다.
비단보다 고운 보름새 모시를 이제 못 짜는 이유
첫 수확을 앞둔 모시풀 앞에서. 모시는 시원하지만, 모시풀은 추위에 몹시 약하다.
“개량베틀의 금속바디로는 그 정도가 한계입니다. 보름새를 짜려면 적어도 살이 500개 이상짜리 바디가 있어야 하는데, 무형문화재 바디장이 돌아가신 뒤로 보름새 바디를 구할 수가 없어요. 예전에 쓰던 바디가 굴러다니면 사람들은 그냥 버리거나 태워버렸지요.”
집에서 베를 더는 짜지 않게 되면서 베틀이 사라졌고, 베틀의 부속품인 바디 역시 그렇게 사라져갔다.
“돌아가신 바디장 선생님한테 바디 만드는 법을 배운 후계자가 있긴 한데, 한창 가정을 이끌 나이에 좋은 데 취직도 됐다니까 월급 100만 원에 일만 많은 명예직인 문화재가 되려고 할지 모르겠어요. 본인도 고민하는가봐요.”
새수에 따라 바디에 실을 끼울 때는 바디 살 하나에 두 올을 끼운다. 바디살마다 낀 두 올 실이 나중에 바디째 베틀에 올라가면 잉앗대에 의해 잉아올과 사올로 아래위로 갈라지고, 북에서 나온 씨줄이 그 사이를 오가며 서로 엉겨 직조된다. 세 자루 잉앗대는 예부터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시에 자주 등장하는데, 베틀노래에도 나온다고 한다.
“잉앗대는 삼형제요, 이 내 몸은 홀로 앉아 얼크렁덜크렁….”
그러나 바디에 끼운 날실을 베틀에 끼우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매기(또는 ‘메기’)다. 실이 매끈해지도록 풀을 먹이는 것인데, 짤 때 실이 엉키는 것을 막는 사전처리 작업이다. 바디에 걸린 실을 팽팽히 당기고 아래로는 왕겻불을 피워 말려가면서 날콩가루와 소금을 갠 풋닛가루(풋짓가루)를 바르는 매기작업은 방연옥에게 가장 어려운 과정이다.
“불 조절을 조금만 잘못하거나 날씨가 건조해도 바디는 안 내려가고 이은 부분은 끊어지고, 얼마나 까다로운지 그에 대면 짜기는 일도 아닙니다.”
귀한 옷감, 조선시대 루머까지 나돌아
이렇게 준비된 실로 한 필 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새수에 따라 다르지만 10새는 보름이 걸린다. 수확부터 치면 서너 달이 걸리는 셈이다. 적삼과 치마 한 벌에 남자 윗도리 한 벌이 나오는 모시 한 필의 가격은 고운 세저는 150만 원, 중저는 100만 원, 막저는 그보다 훨씬 싸다.
“처음에는 비싸다고 하시는 분들도 만드는 과정을 보시면 비싸지 않다고 해요. 아토피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 천연섬유요, 모시를 완성하기까지 손길이 4000번이나 들어가는 명품입니다.”
요즘은 할머니들이 만들어온 모시 굿을 사서 방연옥 장인은 날고 매고 짜기만 한다. 모시 굿 가격이 만만치 않아 한 필 분량이 50만 원이다. 한때 우리나라에 중국 모시가 대거 들어와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한산모시는 안전할까?
“한산모시는 오로지 서천군 태모시만 씁니다. 저는 할머니들이 어느 밭의 모시풀로 이 작업을 하시는지 죄다 알고 있으니까요. 저야 중국 태모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지만 중국 모시로 짠 것은 땀에 젖으면 축축 처지고 달라붙는다고 해요. 우리 모시는 좀처럼 살에 붙질 않고, 처지는 대신 위로 말려 올라갑니다.”
땀이 차도 바람 한번 불면 다시 까슬까슬해져 며칠을 입어도 상쾌하고, 아무리 낡은 모시도 깨끗이 빨아 풀해 입으면 날아갈 듯 새뜻하다.
“모시는 빨 때 조리로 건져 올릴 정도로 해진 거라도 말려 풀하면 새것처럼 입을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기워 입어도 괜찮고, 살짝 구겨져도 멋지고.”
모시 날기(날실의 올수 정하기)를 하기 전 한 필 분량의 모시 굿 10뭉치를 이렇게 늘어놓고 각 실의 끄트머리를 젖을대의 구멍 속으로 통과시켜 날기를 한다. 실이 엉키지 않도록 실뭉치 위에 곡식 등을 올려놓는다.
이곳 한산에는 삼국시대 한 노인이 한산의 건지산에 약초 캐러 갔다가 늠름한 약초를 발견했는데 그게 모시풀이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그것은 한산모시가 유명해서 생겨난 전설 같다. 우리나라는 7000~8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 유적지(강원도 오산리 등)에서 이미 실을 잣는 가락바퀴(방추차) 등의 유물이 나왔고,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물레까지 등장하니 길쌈의 역사가 무척 오랜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으로 살펴보아도 우리 방적 역사와 기술은 남다르다. 단군시대부터 누에치기를 가르쳤다고 하며 ‘한서(漢書)’에는 기자가 비단 직조를 가르친 내용이 나온다. 유물로 보면 모시는 베와 더불어 청동기시대부터 짰을 텐데 기록상으로는 변한시대 대마와 저마로 섬세한 옷감을 짰다는 중국 기록이 있고, 신라 경문왕 때에는 당으로 모시를 수출했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미술과 공예가 꽃을 피운 시기다. 직조기술이 매우 정교해 서민부터 왕까지 흰 모시옷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송나라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나오며 생모시로 짠 옷이 유물로도 남아 있다. 모시의 수난은 오히려 조선시대에 시작됐다.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는 사회가 안정되었으므로 자연히 사치가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결국 수요가 공급을 따르지 못할 정도로 모시가 인기를 얻어 세모시와 관련된 폐단이 일자 중종은 모시 생산을 아예 금해버렸다. 또 모시는 벌레가 잘 피지 않으므로 수의 감으로도 인기였는데, 가뜩이나 모자라는 모시의 수요를 더욱 올려놓는 요인이 되어 “모시로 수의를 지으면 후손의 머리가 하얗게 센다”는 말을 일부러 퍼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 기록만 보아도 다양한 모시 생산지가 언급되지만 후기에 이르면 모시 생산지는 ‘저산팔읍(苧産八邑)’ 또는 ‘저포칠처(苧布七處)’로 충청도에 집중돼 있다. 저산팔읍이나 저포칠처로 손꼽히는 고을은 조금씩 다르나 한산과 서천, 비인, 임천, 홍산, 정산은 공통으로 들어간다. 이 고을을 중심으로 오일장이 서고 한때 막강한 보부상단도 조직되었지만 말기에는 서천군 한산만 살아남아 ‘한산 세모시’ 명맥을 이어왔다.
기계화할 수 없는 직조법, 후계자 키우기에 나서
“저 어릴 때는 모시장이 번창했었는데, 제가 배우던 1970년대는 화학섬유에 좀 밀리는 편이었지요. 요즘은 친환경이 인기니까 다시 수요가 늘어났고요. 그러나 한산모시를 변함없이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진짜 멋쟁이들이지요.”
모시를 다 짜면 ‘마전’이라고 해서 하얗게 만드는 과정이 있는데, 예전에는 수없이 씻어 햇볕에 말리면서 마전을 했지만, 요즘엔 약품으로 처리한다. 때로 분홍빛, 치자빛, 쪽빛으로 천연염색을 하나 곱게 짠 생모시는 표백하지 않은, 은은한 본래 빛깔이 제일 멋지다고 방연옥 장인은 귀띔한다.
“모시옷은 입을 때마다 빨지 않아도 됩니다. 땀내가 잘 안 나니까요. 구겨지면 다리미로 살짝 다려만 줘도 말짱합니다. 빨면 꼭 풀을 먹여 입으세요. 예전에는 풀 먹이기가 번거로웠지만 요즘은 아주 쉬워졌고, 정 안되면 세탁소에 맡기면 됩니다.”
한때 스승 문정옥과 함께 제자를 키웠던 그는 이제 한산모시관에서 지방무형문화재인 나상덕 씨와 함께 제자를 키우고 있다. 그러나 제자 수는 신통치 않다.
“해마다 너댓 명이 배우러 올 뿐입니다. 그나마 지난해는 한 명도 안 오더니 그래도 올해는 다시 너댓 명이 왔어요. 사흘은 제가 가르치고, 사흘은 나 선생님이 가르치고 계시죠.”
문 선생과 그는 현재까지 전수조교 두 명, 이수자 네 명을 키워냈는데 이수자 가운데는 그의 딸도 끼어 있다. 딸은 안양으로 시집갔지만 조만간 그의 곁에 두고 더 많이 가르칠 예정이다. 후계자 키우기 못지않게 그는 작업에 대한 욕심도 많다.
“더 늙어 힘이 없어지면 못할 테니 아직 요만큼이라도 힘 있을 때 열심히 하자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기 모시관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모여드니 작업하기에 썩 좋은 여건은 아니지요.”
관광객이 오면 그는 작업하던 쇠베틀(개량베틀)에서 내려와 나무베틀로 옮겨 앉아 베 짜기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의 곁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가 작업하다가 만 베틀의 실을 만지기도 한다. 건조한 계절엔 잘 끊어지므로 이때 그의 신경은 곤두서게 마련이다.
“제가 모시관에서 쓰는 이 나무베틀은 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마련해준 것이에요. 제 것은 하나는 이곳 모시관 전통 굴(움막) 꾸미는 데 기증했고, 또 하나는 시연하러 이곳저곳 다니면서 자주 해체했다 조립했다 하는 사이 망가졌습니다. 또 문 선생님 댁에 있는 베틀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쓸 수 없게 되고 말았어요.”
나무베틀은 시연용이고 실제 작업은 쇠베틀로 하지만 나무베틀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쇠베틀 금속바디로 짜면 곱절이나 빨리 많이 짤 수 있고, 또 베도 곱게 나오지만 신축성과 내구성은 나무베틀로 짠 것만 못하다고 한다.
“어떤 분들은 모시 짜는 사람이 광목옷 입고 짜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시는 고급옷감인데 모시옷 입고 힘든 일하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일할 때는 비교적 시원하고 편한 무명옷이 최고지요.”
그는 또 오래 입어 해어지고 올이 우는 얼친 모시옷도 수선해서 당당히 입고 다닌다며 부분부분 메운 모시 적삼을 꺼내 보여주었다. 어떤 이는 모시하는 사람이 떨어진 모시를 입고 다닌다고 흉을 보기도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예전에는 부자들도 기워 입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멋있는 것은 새것과 비싼 것, 번쩍이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명품은 낡으면 빈티지가 된다. 조상들은 현대의 속물들과 달리, 빈티지의 멋을 알고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