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캔서테인먼트 회사 ‘박피디와 황배우’를 통해 암 인식 개선 활동을 하고 있는 황서윤 씨. 황씨는 우리 사회가 암 생존자의 손을 잡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도균 기자]](https://dimg.donga.com/a/467/0/90/5/ugc/CDB/SHINDONGA/Article/5e/32/7b/fc/5e327bfc0545d2738de6.jpg)
국내 최초 캔서테인먼트 회사 ‘박피디와 황배우’를 통해 암 인식 개선 활동을 하고 있는 황서윤 씨. 황씨는 우리 사회가 암 생존자의 손을 잡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도균 기자]
“복직 초기 비니를 쓰고 다녔다. 그때 한 아이가 장난으로 모자를 벗기려다 깜짝 놀라 ‘선생님 대머리예요?’ 하던 게 기억난다. 나는 ‘아니, 선생님이 암 치료를 받아서 그래. 이제 곧 다시 머리카락이 자랄 거야’ 하고 답했다. 아이들 앞에서 아팠던 걸 숨기지 않으니 오히려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요새는 학생들이 많이 자란 내 머리카락를 보면서 ‘선생님 이제 대머리 아니네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내가 다시 건강을 찾아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말기암 딛고 사회 복귀

암진단 당시 이정훈 씨의 PET-CT 사진과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하던 시절의 이씨.
이씨는 “그래도 생존 확률이 있다”는 한 마디에 희망을 걸었다. 휴직계를 내고 바로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3일 만에 체중이 10kg 줄었다. 독한 약의 영향으로 위에 구멍이 났다. 세수하다 손이 머리 쪽을 스치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빠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치료 효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5개월간 이어진 병원 생활을 끝내고 퇴원했을 때 이씨에게 가장 간절한 건 여행이었다. 그는 처음엔 국내 내륙, 그다음엔 제주도로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다 2017년 1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어서 남미, 유럽까지 80일 동안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씨는 지금 암 진단을 받기 전 몸담았던 바로 그 회사에서 다시 일하며, 청년 암환자 지원 커뮤니티 ‘당신을 또 봅니다(줄임말 또봄)’를 운영하고 있다. 단체 이름에는 ‘당신의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와 ‘아픔을 이겨내고 또다시 봄을 만났다’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한때 ‘암=죽을병’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앞선 두 사례처럼 암이 상당히 진행됐다는 판정을 받고도 건강을 회복해 사회에 복귀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암 추적검사를 하지만, 여느 만성질환자와 다를 바 없이 일상적 삶을 살아간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24일, 암 확진 후 5년 넘게 살고 있는 이른바 ‘암 생존자’ 수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발표했다. 관련 통계를 낸 이래 최초 기록이다.
암 생존자 100만 명 시대
국내 전체 암환자 수는 약 187만 명. 그중 절반 이상(55.7%)이 생존 기간 5년을 넘겼다. 5년은 일반적으로 암이 완치됐다고 판단하는 기준점이다. 이날 정부가 내놓은 암 관련 통계가 하나 더 있다. 2013~17년 사이 암 진단을 받은 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생존율)이 70.4%라는 것이다. 생존율은 암환자와 일반인의 5년 기대생존율 비(比)를 가리키는 용어다. 암환자 10명 중 7명 정도가 진단 후 5년 이상 산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암환자 3명 중 2명은 ‘완치’ 얘기를 듣는 세상이다.국내 암 생존율은 1993~95년 42.9%를 기록한 이후 빠른 속도로 상승 추세다. 2001~2005년 54.1%를 거쳐 이제 70%를 넘겼다. 현재 갑상샘·전립샘·유방암 환자의 생존율은 90%가 넘는다. 여전히 췌장암(12.2%), 담낭 및 기타담도암(28.9%), 폐암(30.2%) 등 상대적으로 치료가 어려운 암이 없지 않지만, 해당 질환자 가운데서도 ‘희망의 증거’는 계속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사회 인식이 의학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 있다. 상당수 암환자는 치료 전후 직장을 잃고, 사회 복귀에도 어려움을 겪는 게 현실이다. 1982년생 황서윤 씨도 그중 한 명이다.
뮤지컬 배우로 일하던 황씨는 2016년 샤워를 하다 가슴에서 멍울을 발견했다. 조직검사 결과 유방암이었다. 1기에서 2기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했다. 림프전이도 없었다. 황씨는 “놀라긴 했지만 세상이 무너질 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잘 치료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술과 방사선 및 호르몬 치료 과정도 견딜 만했다. 치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그는 스페인 산티아고로 여행길에 올랐다. 오랜 세월 마음에 품고 있던 ‘버킷 리스트’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돈이 많이 들까 봐, 다음에 언제든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뤄뒀던 꿈을 이참에 이루자고 생각했다. 현지에서 한 달간 800km를 거뜬히 걸었다. 그리고 전과 다름없는 일상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돌아온 한국에서, 그는 예상 못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암 선고 받고 1년쯤 현장을 떠난 동안 나를 둘러싼 환경이 달라진 거다. 배우는 캐스팅을 받아야 일하는데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 내가 연기를 지도하던 아이들은 그사이 모두 다른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직 젊은데 세상이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 ‘멘탈’이 무너지고 감정이 바닥을 쳤다.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때보다 이때가 훨씬 힘들었다. 남들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싫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탈퇴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바리스타 자격증, 숲해설사 자격증 등을 땄지만 미래가 막막했다.”
암환자라는 자격증

암환자의 삶을 유쾌하게 그린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의 한 장면.
“내가 암 확진을 받은 건 공연 준비로 한창 바쁘던 시기다. 그때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의사한테 ‘공연이 한 달도 안 남았다. 어쩌라는 거냐’고 했었다. 암이 뭔지 잘 몰랐고, 내 몸 아낄 줄도 몰랐다. 이후 치료를 받으면서 내 몸으로 암에 대해 알고 느끼게 됐다. 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그래서 박씨는 치료받는 병원의 신규 유방암 환자를 돕는 멘토, 이른바 ‘핑크메이트’로 활동했다. 좋은 평가를 얻었고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다. 2017년 어느 날, 서울 한 보건소가 운영하는 암환자 자조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