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민변이 어떤 단체이기에 개혁성에 관한 한 보증수표처럼 노대통령의 눈에 들어와 있는 것일까. 또 개혁성 외에 민변 출신의 부상을 설명할 있는 또 다른 코드는 없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우선 민변이 어떻게 창립돼 어떤 경로로 발전해왔는지 15년 역사와 그 활약상을 살펴보자. 이와 함께 변호사란 어떤 직업이며, 변호사의 정·관계 진출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새겨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김영삼씨의 후보단일화가 실패하고, 또다시 군인 출신의 노태우 정부가 출현해 민주화를 추구하는 진영에 우울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1988년 5월28일. 경기 포천의 베어스타운에 모인 51명의 변호사들은 전부터 활동해오던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와 청변(청년변호사회)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 민변을 출범시켰다.
정법회가 결성된 것은 5공 말기인 1986년 5월19일로 그 뿌리는 이전부터 활동해오던 인권변호사들에 닿아 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재야 법조계에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이어지면서 정치적 양심수들에 대한 변론을 적극적으로 맡아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하는 인권변호사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의 이병린 변호사를 시작으로 1970년대의 한승헌 변호사를 거쳐 ‘4인방 변호사’로 일컬어지는 이돈명·조준희·황인철·홍성우 변호사 등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그러나 어떤 구심체를 갖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인권변호에 눈을 뜬 젊은층의 2세대 변호사들과 접합되면서 정법회라는 진보적인 변호사 단체가 탄생된 것이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1986년의 구로동맹파업사건이다. 구로공단 지역의 여러 사업장과 학생들이 연대한 이 사건은 노학연대사건이라고도 불렸다. 하나의 사건임에도 공안당국은 재판과정에서의 파란을 우려해 여러 개의 사건으로 나눠 기소했다. 망원동 수재사건 변론 때부터 협력해온 1·2세대 인권변호사들은 이 사건의 변론을 통해 더욱 긴밀히 결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세대 변호사 1명과 2세대 변호사 몇 명이 하나가 돼 한 건의 변론을 맡는 식으로 팀을 짰다. 변론 준비는 2세대가, 법정 변론 투쟁은 1세대 변호사가 맡는 식으로 재판에 임했다. 이때 함께 참여한 1세대 변호사가 홍성우, 이돈명, 조준희, 황인철 씨 등이다. 2세대엔 조영래, 이상수, 서예교, 박원순, 김상철, 김동현 변호사 등이 있었다.
그밖에 정법회 회원으로는 1세대로 강신옥, 고영구, 유현석, 이돈희, 이해진, 조준희, 최영도, 하경철 변호사 등이 있다. 2세대 변호사로는 박용일, 안영도, 유영혁, 하죽봉, 박연철, 박인제, 박찬주, 최병모, 김충진 변호사 등이 정법회에 참여했다. 대표간사는 조준희 변호사였다. 1978년 변호사로 개업해 1981년부터 인권변호사 활동을 해 온 노대통령도 정법회 회원이었다. 민변은 홈페이지(http://minbyun.jinbo.net)에서 “1987년 6월의 민주항쟁 무렵까지 권인숙, 박종철, 김근태씨 등에 대한 고문사건의 폭로와 변론을 담당하는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정법회 활동을 평가하고 있다.
의식화된 변호사들의 합류
그밖에도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말지(보도지침)사건, 이돈명 변호사 구속사건, 이상수·노무현 변호사 구속사건 등이 정법회가 변호를 맡아 활약한 주요 시국사건들이다. 노무현 변호사 구속사건은 1987년 6월의 노동자 대투쟁사건 직후인 같은 해 9월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에서 가두집회를 주도한 혐의(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돈명·이상수 변호사에 이어 정법회 회원으로서 세 번째 구속된 사건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고 변호사들은 당시를 회상한다. 노대통령은 당시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수안보에서 열린 정기총회에 참석하는 등 열의가 높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청변은 정법회보다도 더 젊고 진보적인 변호사들로 모임을 시작, 내규와 발기문 초안을 작성하고 여러 차례 세미나를 여는 등 구체적인 활동을 준비하는 단계까지 와 있었으나 정법회와 통합됨으로써 대외적인 활동을 벌이거나 간판을 내걸지는 못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청변이 발기문 초안에서 자주화·민주화·민족통일의 목표를 한국 사회의 역사적 과제로 내걸고 향후 이의 실현을 위해 법조 부문에 요구되는 임무를 수행할 조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등 변호사단체로서는 드물게 급진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변론 등 변호사들의 활동 자체를 하나의 운동으로, 그것도 민족민주운동의 부문운동으로 인식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학창 시절 유신 말기와 광주항쟁 등을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탐구해온 세대라고 할 수 있는 78학번에서 82학번에 이르는 변호사들이 주축이 됐다. 이양원, 이석태, 조용환, 백승헌, 유남영, 김형태 변호사 등이 청변의 초기 제안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