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사람들은 더 이상의 살육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외족의 침략을 막아내려면 통일은 반드시 이룩해야 할 과제였다.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평화적 환경이 조성돼야만 무거운 세금이 줄어들고 징용과 징병 부담도 가벼워질 것이라 믿었다. 내정의 부패와 부조리에 맞서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과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려는 개혁 시도 또한 통일 여론을 은근히 부추겼다.
전국시대 말엽 진(秦)을 제외한 6국에는 ‘가문타령’만 하면서 특권 세습에 안주하려는 기생(寄生)적 권위주의 집단과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고난의 생활을 영위하던 노예계층이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부패로 말미암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예계층은 근로의욕을 상실했으며 군대의 사기도 형편없이 추락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달랐다. 노예라 할지라도 황무지를 개간해 생산력을 늘렸거나 싸움터에서 공을 세우면 즉각 신분이 승격됐다. 그중에는 귀족에 가까운 영전을 보장받거나 장교 또는 관리로 등용되는 이도 있었으며 징용 면제와 같은 특전이 내려지기도 했다. 진나라에서 전 국민적으로 ‘자각적 적극성’이 팽배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전국시대 말엽 각국의 상황은 달랐지만 이래저래 팽창한 통일 여론은 대항할 수 없는 천하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맹자(孟子)도 그런 기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그는 ‘피 보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통일의 주인공 되기를 바란다(不嗜殺人者能一之…, 孟子, 梁惠王 上篇)’는 견해를 밝혔다. 종국에 통일의 업적을 달성한 진나라는 개혁을 거치면서 강한 국가가 됐으나 인자한 나라는 아니었다. 반면 진을 제외한 6국의 왕조와 특권층은 개혁에는 관심도 없고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기득권 유지와 세력 확대에만 매달렸다.
그후 통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자 진의 각개격파 전략이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진을 제외한 6국 중 5개국이 연합·단결했거나, 혹은 초(楚) 한 나라만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렸어도 전세의 귀추를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당시 전국 7웅(七雄)의 병력을 대비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진(秦) : 정규보병 100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위(魏) : 정규보병 30만~36만, 후근부대 10만, 전차 600량, 기마병 6000.조(趙) : 정규보병 수십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한(韓) : 정규보병 약 30만.제(齊) : 정규보병 수십만 내지 대략 100만.초(楚) : 정규보병 100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연(燕) : 정규보병 수십만, 전차 700량, 기마병 6000.(楊寬, 戰國史 p.440, 中國歷代軍事戰略 上篇 p.104)
난세의 궁지에 몰려 절망스럽고 답답했던 보통사람들은 현 상태를 탈피할 변화, 즉 돌파구를 절실히 원했다. 그들은 그것이 곧 통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통일 자체를 열망했을 뿐 정작 그것이 ‘어떤 통일이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만약 통일이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지 않고, 천하대란 대신 태평성세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모처럼의 통일이 새로운 난세의 시작이라면?’ 이러한 고민은 하지 못했다. 결국 진의 천하통일은 불과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