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한쪽 면도 책으로 빼곡하다. 법학서적, 문학서적, 통일·국제 문제 관련 서적이 많았다. 독일어, 영어 원서도 눈에 들어왔다. 누가 보내준 책들이 아니었다. 주인의 손때가 묻어났다.
“내 몸부터 반듯하게 한다”
권 의원은 집에도 그만큼의 책을 쌓아놓고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동네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어버리겠다고 결심했고, 이를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이뤄냈다. 축약본이긴 해도 ‘제인에어’ ‘테스’ ‘쿼바디스’ 같은 문학서를 초등학생 시절 섭렵했다고 한다.
권 의원은 스타일리스트다. 머리는 기름을 발라 반듯하게 ‘올백’으로 빗어 넘겼다.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어울리는 금테 안경이 영리해 보이는 눈매 위로 반짝반짝 빛난다. 스트라이프 와이셔츠에 깔끔한 넥타이 차림이다. 주말, 휴일이면 마흔일곱 나이가 무색하게 진 바지에 감각 있는 재킷 차림으로 당사에 나타날 때가 많다. 당내 남성 의원들 가운데 그의 패션 감각은 수준급으로 꼽힌다.
“너무 부담스러워 보인다”며 헤어스타일을 바꿔보라는 주문도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내젓는다.
“머리카락이 굵다 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뻗쳐서 엉망진창이 된다. 외모가 단정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을 천성적으로 싫어한다. 내 몸부터 반듯하게 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
그의 이력은 그런 외모와 닮아 있다. 그는 모범생이었다. 4남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나 식구들의 귀염을 받으며 컸다.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을 지내다 5·16 군사정변 이후 공직을 떠나 개인 사업을 했다고 한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했다고는 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그는 회고했다.
도서관을 좋아하던 소년 권영세는 1977년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고 1983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잘나가는 공안검사가 됐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인생이다. 어찌 보면 그의 표현대로 “인토네이션(intonation·억양) 없는 삶”일 수도 있다.
“대학에 들어간 뒤 공부가 하기 싫어 한동안 힘들었다. 그때는 정말 공부를 안했다. 대학원에 입학하자 ‘권영세가 어떻게 들어왔느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70년대 말~80년 대 초 유시민, 심재철이 학생운동의 최전선에 있을 때 그는 그런 식으로 태업을 했다. 1989년 수원지검 검사, 1991년 강릉지청 검사, 1993년 독일 파견, 1994년 안기부 파견, 1998년 서울지검 부부장 검사로 이어지는 그의 법조인 이력은 매끈하다. 독일 법무부에 파견근무를 하게 된 것은 동기와 아래 기수를 대상으로 실시한 독일어 시험에서 1등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 내 엘리트 코스로 통하던 안기부 파견 검사도 그의 이력서에서 한 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검찰 이력에서 굴곡은 수원지검 공안검사 시절에 한 차례 있었다. 한 대기업 여성 노조위원장이 긴급체포됐다. 권 검사는 그 여성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 될 사람은 노동운동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다. 구속수사 방침이 떨어졌지만 그는 불구속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노조를 깨고 싶어 했던 대기업의 압력이 거셌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그 여성이 가정을 이루도록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자신의 소신을 관철했다. 이후 그는 원하던 지청으로 발령받지 못했다. 그 지청 관할에 해당 대기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검사가 오면 협조가 안 된다”는 이유를 들며 그 기업이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권 의원의 인생을 바꾼 계기는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었다.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했다. 공안검사는 과거 정권에서 잘나가던 보직이었지만 새 정부의 지향점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봤다. 더욱이 그의 장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청와대 총무수석을 지낸 유도재씨였다. 그는 “삶을 한번 바꿔보자”는 호기를 부렸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로 유학을 다녀온 그는 2002년 8·8 재·보선에 나서 당선됐다.
권 의원은 2004년 8월 국회 정보위에 배정되면서 날개를 달았다. 그는 2005년 오일 게이트로 시작해 국정원 X파일로 이어지는 폭로 정국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권 의원에 따르면…’ ‘권 의원이 입수한…’ 등의 표현이 연일 신문, 방송에 오르내렸다. 그가 권력형 비리의혹에 대해 브리핑하는 장면이 하루 걸러 TV를 탔다. 오죽했으면 최근 손학규 경기지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측 인사가 권 의원에게 아는 체를 하며 “대변인을 하셨지요?”라고 했을까.
‘스타일’이 다른 저격수
그는 명실상부 한나라당의 대표 저격수로 통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대한생명 매각(인수 기업이 자격 없다고 한 금감원 자료), 오일 게이트, 삼성 대선자금, 이동통신사의 로비 문건, 국정원 X파일(휴대전화 도청), 이해찬 총리 골프 파문, 서해유전 탐사 의혹, 국가정보원의 다단계업체 로비 의혹 보고서 등이 꼽힌다.
큰 사건이 터지면 기자들은 그의 방에 자주 전화를 건다. 낙종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의 방에선 사건을 진전시키는 ‘새로운 뉴스’가 계속 생산된다. 언론의 입맛에 딱 맞을 수밖에 없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저격수였다. ‘딥스로트(deep throat·내부 고발자)’가 없다. 대신 ‘폭로 전문가’라는 수식어도 없다. 그의 문제 제기는 깔끔하고 지적인 방식이라는 평이다.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그는 북핵이나 위폐 문제가 터졌을 땐 미국 정부 문서를 열심히 구해 탐독했다.
“정부-공기업 부문의 비리, 시스템의 비리를 감시하고 바로잡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다. 다만 사실이 아닌 것을 터뜨리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의 ‘저격 철학’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각광받은 것은 2005년 4월 오일 게이트 진상조사단장 때였다. 4·30 재·보선을 앞두고 달아오른 오일 게이트는 철도청이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거액을 날린 사건이다. 이 사건이 단순히 정부기관의 한심한 업무 실패가 아니라 ‘게이트’가 되려면 권력층의 개입 정황이 드러나야 했다. 한나라당은 그 고리로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의 개입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권 의원에게 떨어진 임무였다. 설(說)은 파다했지만 뒷받침해줄 어떤 근거도 없었다. 이광재 의원은 “증거를 대보라”고 했다.
권 의원은 철도청의 ‘신규사업 설명회 회의록’을 입수했다. 철도청 왕영용 사업개발본부장이 신광순 당시 철도청 차장 등 철도청 간부들을 상대로 러시아 유전 개발 참여를 설득하면서 “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의 사업참여 제의가 유전개발 사업의 참여 동기”라고 말했음을 의사록이 보여줬다.
그 자체로 ‘클린 히트’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어떤 증거도 한 사건의 전모를 완벽하게 증명해 내지는 못한다. 한두 가지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상대방은 그 점을 파고든다. 증거의 신뢰성을 실추시켜 방어하는 것이다.
의사록에서 ‘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라고 표기된 부분에 대해 이 의원이 당장 반박했다. “나는 산자위 소속”이라며 “황당한 폭로”라고 반격했다. 의사록 작성자가 실수로 잘못 적은 것인지에 대해 관계기관이 더는 확인해주지 않았다.
권 의원은 여기서 오버하지 않았다. 그는 “외교안보위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추측되지만 추후 확인을 통해 밝히겠다”고만 했다. 권 의원은 이후 세세한 사실 확인을 통해 ‘외교안보위=NSC’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근거를 갖춰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언론은 권 의원의 주장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이 러시아 에너지 사업과 관련해 NSC에 보낸 문서를 공개했고, 김세호 전 차관이 13차례 청와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례적으로 상대의 입장을 해명하는 기자회견까지 했다. 열린우리당 서혜석 의원이 법무법인 우현 소속 변호사로서 이 사건과 관련됐다는 점이 권 의원의 폭로과정에서 부각됐다. 그는 기자회견 당시에도 “방증이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지만, 서 의원으로부터 항의를 받자 해명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열린우리당 서혜석 의원을 위해 해명한다.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지만 서 의원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본의 아니게 당하는 것은 분명히 짚어주는 게 도리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이해찬 전 총리 골프 문제에서도 한국교직원공제회가 류원기 회장 소유 회사에 대규모 투자를 한 사실 등 골프 모임 동행자들의 회사와 관련된 각종 의혹들을 가장 먼저 밝혀냈다. 이는 이 전 총리가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그의 보좌관을 지낸 양창호 서울시의원의 얘기다.
“X파일(국가정보원 도청) 사건의 경우 권 의원이 국회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을 지내면서 도청 실태에 대해 상당 부분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청 방법에 대해 권 의원은 이런 방법으로 했을 것이라고 늘 말했는데 이후 국정원의 R2, 카스 도청 방식이 그의 말 그대로였다. 그는 추측해서 충분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창호 시의원에 따르면 권 의원은 한 가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바로 정부측 공식 문서나 답변이다. 즉, 정부측으로부터 시인을 받아내는 과정이다. 논란이 되는 의혹 사안에서 당사자인 정부가 문서로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큼 딱 떨어지는 일은 없다. 재판과정에서 모든 사건을 당사자의 사실 인정과 문서로 증명해야 하는 검사 시절의 경험이 의정활동에도 녹아든 것이라고 한다.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권영세 의원에게는 ‘딥스로트’가 없다. 그는 공식적인 ‘매뉴얼’대로 의정활동을 한다.
그는 한나라당 내 정보통으로서의 이미지를 확실히 굳혀놓았다. 이전의 ‘정보통’과는 좀 다르다. 구중궁궐 속 권력 내부의 은밀한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처럼 풀어놓는 식의 폭로는 안 한다. 흥미는 줄어들지 모른다. 그러나 신뢰는 쌓인다. 정보 입수 경위의 불법성으로 역공을 당하는 일도 없다. 은밀한 거래 대신 공개적으로, 투명한 방식으로 정부측과 상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취재원이 많지는 않다”고 했다. 검사, 안기부 파견 경력에다 국회 정보위원이니 따로 정보 소스가 있을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주변의 일치된 전언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는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 상식적으로 따져보는 것이 정보를 캐내는 노하우”라고 했다. 행정부나 공공기관은 99%의 업무는 정상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1%의 업무에서 외압이나 비리가 개입되기도 한다. 이를 국외자인 의원이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담당 공무원은 “우리 업무를 잘 모르셔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라며 전문성으로 내리누르기 일쑤다. 적어도 공무원과 대등한 수준이 되도록 사전에 해당 업무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떤 자료를 요구해야 하는지 감이 잡힌다고 한다. 권 의원은 보좌진과 함께 공부하면서 진실을 추적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권 의원측은 정부 부처 업무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돈, 즉 해당 부처의 예산집행 흐름을 꿰고 있다고 한다. 부처가 주관하는 모든 회의, 그 회의에서 나온 자료들이 연쇄적으로 수반된다. 정치권, 재계와의 연관 과정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권 의원측은 국회의원이 효율적으로 행정부를 감시하기 위한 ‘매뉴얼’을 갖고 있다는 평이다. 그래서 실적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일정하다.
권 의원은 “어떤 사업에는 수천억~수조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모두 국민이 낸 돈이다. 깨끗하게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앞으로도 철저히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16대 말기, 그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 위원으로 휴대전화 도청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다.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보던 중 복제 휴대전화 얘기가 번쩍 띄었다. 스토커가 복제 휴대전화를 통해 피해자를 감시한다는 내용이었다. 권 의원은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다음 날부터 복제 휴대전화 문제를 파고들었다.
정보통신부에서 복제 휴대전화로 도청이 가능한지를 놓고 실험을 했다는 정보를 듣고 확인을 했다. 정통부는 바로 시인했다. 그는 이후 도청 전반에 상당히 접근할 수 있었다.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이 그의 정보력이 되어준 것이다.
지난해 8월 안기부 X파일 사건이 막 터져나오면서 국회 정보위가 소집됐다. 권 의원은 김승규 국정원장에게 ‘휴대전화 도청’ 문제를 집요하게 따져물었다.
“원장님, 지금 휴대전화 도감청이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권 의원)
“지금은 확인해줄 수 없습니다.”(김 원장)
이 대화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전까지 휴대전화 도감청에 대한 국정원의 일관된 주장은 “휴대전화 도청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였다. “확인해줄 수 없다”는 답변은 도청 사실을 자복(自服)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뒤 국정원은 실제로 휴대전화를 도청한 사실이 있음을 밝혔다. 정국은 휴대전화 도감청 문제로 소용돌이 쳤다. 김 원장의 의외의 답변은, 권 의원이 가진 정보력의 깊이를 국정원측이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권 의원이 남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는 것처럼 브리핑도 잘한다. 세세하게 분석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핵심을 끄집어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보의 수집력뿐만 아니라 가공력도 중요하다.”
“종교인 같은 이미지”
2002년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한 권 의원은 소장파 의원 모임인 ‘미래연대’에 참여했다. 2004년 초 최병렬 대표를 축출하는 쿠데타 와중에 그는 쿠데타 연합세력인 ‘구당모임’의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17대 들어선 소장파 중심 ‘수요모임’의 회원이지만 활동의 중심은 중도 성향인 ‘푸른모임’에 두고 있다. 그는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구성된 서울시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다. 서울시 공천심사위 관계자는 “권 의원 정말 무섭더라. 기준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원칙주의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권영세 의원을 처음 보았을 때 종교인 같은 이미지를 받았다. 원칙에 충실하다. 국민은 일 잘하고 깨끗한 인물을 원하고 있다. 권 의원은 그런 바람을 충족시키고 정치권을 이끌어가는 싱싱한 바람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하피스트인 부인 유지혜씨는 “책 좀 그만 읽고 TV 드라마를 보라”고 말한다. ‘감성적 정치인 권영세’로의 변신을 주문하는 것이다.